|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27,1-5.15-29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15 레베카는 자기가 집에 가지고 있던 큰아들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매끈한 목둘레에 입힌 다음,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가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20 그래서 이사악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찾을 수가 있었더냐?” 하고 묻자, 그가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이사악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까이 가자, 이사악이 그를 만져 보고 말하였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23 그는 야곱의 손에 그의 형 에사우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러자 이사악이 말하였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너에게 축복해 주겠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져다 드리니 그가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니 그가 마셨다.
26 그런 다음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28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마태 9,15)
이는 단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곧 새로운 시대의 단식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단식과 신약의 단식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무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
(요한 3,29)
그리고 신랑인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태 9,16-17)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이 말은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 안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먹든 굶든>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오늘 요한의 제자들은 왜 주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지 주님께 묻습니다.
왜 단식하라고 하지 않으셨는지 따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단식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식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결론으로 말하면 단식을 하든 하지 않든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단식할 수도 있고, 사랑으로 단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단식하지 말고 식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는 식음을 전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만 단식 여부를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먹을 때도 사랑 때문에 먹고 사랑이 발생하게 하며, 굶을 때도 사랑 때문에 굶고 사랑이 발생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저를 자랑하는 뜻에서 하는 얘기가 아닌데, 전과 비교하여 저는 단식과 식사 문제에서 자유스러워졌고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전에는 일생을 거의 매일 단식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를 생각하며, 먹더라도 물이나 재를 타서 음식을 먹은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며, 물조차도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지 않은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며, 먹어도 굶어도 괴로웠고, 먹어도 굶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이제는 거의 단식하지 못하지만, 그로 인해 그리 괴롭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영적인 나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랑의 자유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먹고 사랑으로 먹으며 사랑하기에 단식하고 사랑으로 단식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예를 들면 달걀의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봉사자들 가운데 종종 달걀을 삶아 가져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에 같으면 받고도 까먹거나 사랑 없이 먹었는데 요즘은 달걀을 먹지 않고 사랑을 먹습니다.
그리고 달걀을 주신 분의 사랑을 만납니다.
단식도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는 먹는 것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단식도 사랑 때문에 하고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가 꼭 오리라고 믿고 희망합니다.
여러분에게도.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미래지향적인 삶>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과거는 좋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미 지난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소중한 이 순간을 감사하게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공명하며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고행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낡은 형태는 새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새 시대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살 일입니다.
우리는 새 시대에 새 사람입니다.
세상을 다르지 않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수(下手)에게는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겠지만 고수(高手)에게는 삶이 온통 호기심 천국입니다>
가끔 피정객들을 위한 요리를 하면서, 정말 기분 좋을 때가 있습니다.
피정 오신 분들께서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입니다.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고 정말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할 때입니다.
차린 음식을 잘 먹어주는 것도 큰 사랑의 실천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반대로 숱한 고민을 하면서 정성껏 식단을 짜고, 허리 휘도록 움직여서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차려놓았는데, 깨작깨작 먹는다든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젓가락으로 뒤적뒤적 거린다면, 음식을 준비한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육화 강생은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해 준비한 산해진미로 가득한 풍성한 잔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구약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약시대는 한 마디로 잔치의 순간입니다.
축제와 환희의 기간입니다.
이토록 흥겨운 순간, 보속과 단식, 눈물과 통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흥겹게 춤추며 잔치를 즐길 일입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복음에서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다, 언젠가 그럴 때가 올 것이니, 그때 가서 단식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잔치를 즐기고 축제를 만끽하라는데 즐길 구석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뭘 즐기라는 거냐?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은 즐길거리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하수(下手)에게는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겠지만 고수(高手)에게는 삶이 온통 호기심 천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자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더 큰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분별력의 지혜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어제 7월7일 오전은 격월로 있는 서울 수녀원 월피정중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매일 수도원 미사에 참석하는 자매가 자기 차로 미사 즉시 수녀원에 태워다 주니 얼마나 고맙던지요.
마침 하우스 오이밭에 잘 생긴 오이가 있어 새벽에 둘을 따 두었다가 하나는 자매에게 드리고 하나는 수녀원 전례 담당 수녀에게 드리니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오전 내내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드리며 한분한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살며 성찰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한없이 자비롭고 너그러워야 하겠다는 다짐을 많이 했습니다.
보속으로는 모두에게 오늘 강론 묵상과 더불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한 하루를 살라 했습니다.
끊임없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마태복음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제 읽은 자비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자비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를 하느님과 닮도록 만듦으로써 자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자아, 그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 준다.
자비는 우리의 이기심에 대한 가장 완전한 적수이다.
이기심의 거칠음에 반대해서 자비는 우리를 민감하고 사려 깊게 만든다.
그 옹졸함에 대해 자비는 그 넓이와 친절함으로 대체한다.
그 조급함에 대해 자비는 그 평온함과 항구함으로 대체한다.”
(정념과 덕 43쪽)
새삼 자비야말로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창세기 이야기가 흥미진진합니다.
사라도 아브라함도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어 이사악과 레베카가 등장합니다.
이사악은 큰 아들 에사우 편이었던 듯 싶고, 레베카는 작은 아들 야곱 편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와 작은 아들 야곱이 공모하여 눈이 어둔 이사악으로부터 에사우가 받을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 참으로 교활하고 기민하여 순박한 이사악과 에사우가 감쪽같이 속임당하는 모습이 참 어처구니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유로운 섭리가 상상을 초월하여 이해 불가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요!
그대로 우리에게는 믿음의 시험試驗, 믿음의 시련試鍊이 됩니다.
끝까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믿음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겸손과 의탁의 믿음이 절실합니다.
이후 주인공은 에사우가 아닌 야곱이니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런 죄과로 인한 야곱의 인생이 참 파란만장하나 야곱은 참 치열하고 적극적으로 타개해갑니다.
최선을 다한 삶이요 충분히 보속하고도 남는 삶이었습니다.
제가 호감을 갖는 것은 야곱보다는 오히려 에사우입니다.
예전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만 에사우의 동생 야곱에 대한 처신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동생에 대한 에사우의 처신이 참 관대하고 너그럽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야곱의 치열한. 항구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위험한 순간들을 피하게 해 주셨고 마침내 형제간의 해피엔딩의 감동적인 만남을 이뤄주십니다.
한참후 창세기 33장에 나타납니다.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
“아닙니다.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이 선물을 제 손에서 받아 주십시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자, 일어나 가자.
내가 앞장서마.”
(창세 33,9-12)
얼마나 자비롭고 너그러운 에사우의 모습인지요!
동생 야곱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하다고 고백하니 에사우가 얼마나 존엄한 품위를 잘 유지해왔는지 그대로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인간 품위를 지켜낸 에사우가 내심 미안하기도 하고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야곱의 운명이, 에사우의 운명이 다 다르듯 결코 비교하여 질투할 것도 없이 각자 고유의 모습에 충실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자기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와 사랑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편협한 시야의 옹졸한 요한의 제자들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자비가 절대적 가치라면 단식은 상대적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자비로 구원받지 단식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단식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는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한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주님과 함께 있는 혼인잔치 같은 축제인생의 때에는 삶을 즐기고, 신랑을 빼앗길 그 날에 단식해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어 발상의 전환을,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누구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누구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자비가 지혜입니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이 바로 새 부대입니다.
늘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새 부대가 바로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수록 늘 새 포도주를 담아낼 수 있는 자비롭과 너그러운 새 부대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래야 노년에 꼰대라는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미사은총이 주님을 닮아 날마다 새 포도주에 새 부대의 삶을, 자비롭고 너그러운 삶을 살게 합니다.
예전 1997년 3월에 써놓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날로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날로 자비로워지고 너그러워지는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늘 밝은 날, 푸른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번뇌’라고도 하고, ‘유혹’이라고도 합니다.
잘 되던 드라이어가 고장 났습니다.
기계를 보면 겁부터 나는 체질이라 고민이 깊었습니다.
이참에 새 드라이어를 사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전자제품 수리점을 찾아서 전화를 했습니다.
친절한 기사분이 방문하여 드라이어를 고쳐 주었습니다.
원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시간을 측정하는 타이머의 고장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따뜻한 바람을 불게 하는 송풍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사분이 두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드라이어는 좀처럼 고장이 나지 않으니 고칠 수 있으면 고쳐서 사용하라’는 기사분의 말도 고마웠습니다.
사무실 컴퓨터에 인터넷 연결이 잘 안되어서 전원을 끄고 다시 켜 보았습니다.
보통은 이 정도에서 해결이 되는데 이번에는 안 되었습니다.
인터넷 연결선을 살펴보니 거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연결이 되니 눈이 먼 사람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답답함이 사라졌습니다.
성서를 보면 기가 막힌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그만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에, 더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보곤 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했던 욥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시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시련을 모두 견디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가고,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또 들었습니다.
이사악은 관례와 전통에 따라서 큰 아들인 에사우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기로 했습니다.
에사우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엄마인 레베카는 둘째 아들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남편인 이사악을 속였습니다.
이사악은 둘째인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습니다.
형 에사우는 먼 훗날 형을 찾아온 야곱을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수학과 과학은 법칙과 계산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 있지만 인간의 역사와 신앙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남을 도왔던 사람들이 고통과 시련을 당하기기도 합니다.
남을 속이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편하게, 부유하게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버리고,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더욱더 하느님께 의지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십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사랑 덩어리입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움 덩어리입니다.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축복 덩어리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새 포도주입니다.
믿음의 마음이 새 포도주입니다.
희망의 마음이 새 포도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술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이 있는 영국의 화가 ‘뱅크시’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작품을 만들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특히 예술의 권위에 대한 공격, 그리고 예술품을 제대로 감상하지 않는 이들을 향한 대담한 퍼포먼스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2013년, 그는 길거리에서 재미난 실험을 했습니다.
가판대를 세운 뒤 한 노인을 판매원으로 두고, 자신의 서명이 담긴 원작들을 한 장에 60달러로 내놓은 것입니다.
이 작품들은 실제로 수만 달러에 팔릴 그림이었습니다.
이를 60달러라는 헐값에 내놓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루 종일 몇 장이나 팔렸을까요?
완판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겨우 8점만 팔렸습니다.
예술을 즐기는 관객의 허영심을 꼬집은 실험이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또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으면서 돈으로만 그 가치를 사려고만 한다는 것이었지요.
예술에서만 그러겠냐는 의심이 생깁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허영심은 대단합니다.
주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기부, 주일미사 참석만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는 식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은 이렇게 열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며 허영심을 드러냅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요?
이런 우리의 허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는 그런 허영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변화가 필요합니다.
남들처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잘살고 있다는 착각이 아니라, 나만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현실감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가 열리고 신랑이 잔칫상에 함께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시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 것처럼, 또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 것처럼,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여신 주님을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새롭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계속 과거에 매여있었기에, 예수님을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과거라는 허영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 없이는 결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우리 역시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