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d><p>▲ 길리성 집안시에 있는 광<font color="#860001"><b>개토</b></font>왕비.</td>
</tr></table>
<p>압록강 이북 만주지역에는 수많은 고구려ㆍ발해 유적들이 산재(散在)해 있다. 현재 중국 정부의 접근 제한조치로 가 볼 수 없는 곳도
있지만 접근 가능한 곳도 적지 않다. </p>
<p>◆고구려 유적 </p>
<p>고구려 705년, 그동안 고구려는 크게 세 번 수도를 옮긴다. 홀본성(BC 37∼AD 3년, 40년간), 국내성(3∼427년, 424년간), 평양(427∼668년, 241년간). 압록강 남쪽 평양이 행정의 중심지였던 기간은 241년인데 비해 압록강 북쪽은 464년간이나 고구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압록강 북쪽에는 지금도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남아있다. </p>
<p>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운 고구려의 첫 수도(首都)는 졸본이다. 그러나
광<font color="#860001"><b>개토</b></font>태왕비를 연구한 결과 졸본은 ‘홀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요령성 환인(桓仁)현에 있는 이곳은 40년 동안만 수도였지만 초기 유적들이 잘 남아있다. </p>
<p>오녀산성은 해발 820m의 산꼭대기에 100m가 넘는 절벽으로 이뤄져
적이 쳐들어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이 산꼭대기에서 1996년부터 3년간 발굴할 때 궁궐터, 곡식 창고터, 병영터들이 나타나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성 동쪽에는 성벽이 아직도 잘
남아 있는데 특히 옹성의 초기 형태인 어긋문, 성가퀴, 성가퀴 안 돌구덩이, 들여쌓기 등은 고구려의 성 쌓는 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p>
<p>환인지역에는 수많은 고구려 무덤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컸던 것이 고려묘자촌의 무덤떼인데 댐을 만들면서 완전히 수몰(水沒)되어
버렸다. 높은 곳에 몇 기가 남아 있는데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렵다.
아주 오래된 상고성자는 초기의 무덤떼인데 문화대혁명 때 거의 파괴되어 버리고 지금은 4∼5기만 남아있다. 이 지역의 유일한 벽화무덤인 장군무덤은 환인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혼강(고구려 비류수)가 낮은 산 위에 있다. 424년간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集安)시 압록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가장 오랫동안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만큼 고구려의 유적도 많다. </p>
<p>첫번째 꼽을 수 있는 것이 광<font color="#860001"><b>개토</b></font>태왕비이다. 국내성이나 집안이라는 지명은 모르지만 ‘광<font color="#860001"><b>개토</b></font>태왕비’(비문에 ‘태왕’이라고 하였다)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광<font color="#860001"><b>개토</b></font>태왕비는 고구려의 유적을 대표하는 대명사이다.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다는 중국,
그 중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 광<font color="#860001"><b>개토</b></font>태왕비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다. 6m 39㎝라는 높이 말고도 1775자라는 엄청난 내용이 비석의 진가를 말해준다. 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보여주는 1775자는 당시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위대한 바위책인 것이다. </p>
<p>집안에 가서 국내성을 찾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취원빈관이라는 호텔에 들었다면 이미 국내성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나머지 호텔들도 모두 걸어서 10분 안에 국내성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잘 남은
국내성 성벽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필자가 1990년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3m 이상 남아있던 북벽도 이제는 마치 아파트 화단처럼 초라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p>
<p>고구려 수도의 특징은 평화시 사용하는 궁전이 있는 평지성과 전쟁이 일어나면 들어가 싸우는 산성이 세트로 건설된다는 것이다. 국내성의 산성은 바로 환도산성이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북으로 5㎞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산 위에 돌로 쌓은 성벽들이 아주 잘 남아 있다. 현재 발굴 중이라 성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p>
<td><p>▲ 요령성 환인현에 남아 있는 오녀산성 동문 옹성 외벽,이곳이 고구려 첫 수도임이 밝혀졌다.</td>
</tr></table>
<p>압록강 이북에는 필자가 확인한 것만 해도 130개가 넘는 산성들이 있다. 바로 이 산성들이 백만이 넘는 수나라 군대를 무찔렀던 고구려의
전략적 파워다. 고구려 천리장성 궤적에 아직도 잘 남아 있는 고구려
신성(고이산성), 백암성(등탑 연주성), 안시성(해성 영성자산성), 건안성(개현 고려성산성), 비사성(금주 대흑산산성), 석성(보란점시 위패산성), 오골성(봉성시 봉황산성) 같은 산성들이 옛 고구려의 영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산 속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는 성벽들이 많다. </p>
<p>◆ 발해 유적 </p>
<p>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동쪽으로 와 동모산에
성을 쌓고 698년 진국(震國)을 세웠다고 했는데 그 동모산을 지금의
길림성 돈화(敦化)시에 있는 성자산산성으로 보고 있다. 이곳이 발해의 수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육정산 발해 무덤떼를 들 수 있다. 돈화시에서 남쪽으로 5㎞ 지점에 자리잡은 육정산에는 80기 남짓한 발해 무덤들이 모여 있다. 발해 3대 왕인 문왕의 딸 정혜공주의 무덤 속에서 비석이 나옴으로써 이곳이 발해 초기의 왕실 귀족의 무덤떼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p>
<p>발해 전 시기의 대부분(755∼784년, 795∼926년)을 수도로 삼았던 곳이 상경 용천부가 있었던 흑룡강성 영안현이다. 상경성은 내성과 외성 그리고 궁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의 둘레가 1만6296m로 대단히 큰 성이다. 내성 안에는 5개의 궁성이 있었고 외성 안에는 당시
도시 주민들이 살던 집과 절간, 장마당 같은 것이 서 있던 바둑판 같은 도시계획선이 있었다. 외성 안팎에 10개 남짓 절터가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2개는 성 밖에 있다. 지금도 석등탑, 사리함 대석불 같은 것은 아주 잘 보존되고 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