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에서 만난 사람
먼동이 틀 무렵이면 늘 영일만의 북부해변을 거닐었다. 사람들이 거의 없어 호젓하기 그지없었다.
한번은 해가 한 발은 실히 솟은 뒤에 나갔다. 저만치에 한 묘령의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발끝에 파도가 닿겠지 싶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일부러 그녀의 등 뒤로 스쳐갔다. 그녀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곁에는 시집으로 보이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해풍에 날리는 산발한 적발이라니 이국정취가 담탕히 흐르고,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께로부터 처진 듯 조붓한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곡선은 청초하다기보다는 난숙했고, 옷차림이 간결해서 훨씬 관능적이었다. 우는 사연이 알고 싶었지만 말 걸기가 뭐해서 그냥 스쳐갔다. 되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니 여전히 울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해녀 노릇을 해서 중풍에 걸린 어머니와 중학에 다니는 남동생을 부양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본래 제주도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고, 어머니는 해녀로 일하다가 잠수병이 심해져서 물질을 할 수가 없게 되자 남매를 거느리고 무작정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거제에 잠깐 살다가 포항으로 온 지는 오래 되었다.
아침마다 해변에서 만났다. 그녀는 늘 시집을 들고 다녔다. 자주 시를 읊었다. 어쩌다 그녀가 나오지 않는 날이면 틀림없이 그녀의 신변에 무슨 변고가 생긴 거다. 어머니가 입원을 해서 급전이 필요하다면서…, 동생이 사고를 쳐서 합의금을 내어야 한다면서…, 등등 숨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그때마다 그녀가 갖고 다니는 시집이 미웠다.
꽉 조이는 고무 옷을 입고 무거운 납을 허리에 차고 손에는 도구를 들고 더러는 20미터 바다 밑까지도 물질을 했다는 그의 어머니. 어머니를 따라 열 두 살 때부터 물질을 배웠는데, 어머니가 전복 같은 걸 따다가 바다위로 풀쑥 솟아올라 참던 숨을 ‘호이’ 하고 내뿜고는 다시 바다 속으로 사라지면은 돌던 물결은 슬며시 합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늘 애태우며 울었다는 그녀. “바닥에서 수면으로 올라올 때 자칫 정신 줄을 놓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죽어요. ‘호이’하고 내뿜는 숨비소리를 사람들은 휘파람 소리라고 하지만 저승길 왔다갔다하는 판에 누가 휘파람을 부나요?” 측은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속아도 좋다는 심정으로 그때마다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었다. 그러나 빌린 돈을 한 번도 갚는 법이 없었다. 본데없이 자랐구나 싶다가도, 애먼 시집이 밉다가도, 물질을 해서 얼마나 버는지는 모르지만 세 식구 먹고 사느라 오죽하면 이러겠나 싶었다. 새카만 고무 옷을 입고 꽁무니 높이 들고 대번에 물로 들어가서 오리처럼 의연히 잔물결을 희롱했을 그녀의 슬프고 아름다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해변을 걸으며 내 옆구리에 자신의 팔을 걸고는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유치환의 시를 읊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두 해가 갔다. 그녀는 연락을 뚝 끊었다. 연락이 끊어진 지 몇 달 뒤였다. 발신자 주소가 없는 쪽지 같은 편지 한통이 왔다.
죽지 못해 빤한 수작으로 사기를 쳤습니다.
번히 알면서도 속아 주는 당신을 더는 대할 면목이 없어 연락을 끊었습니다.
무릎 꿇고 용서를 빕니다.
북부해변에 왔다. 하도 오래 되어 손가락 꼽다가 만다. 그녀 또한 쭈그렁이가 되었겠지. 간결한 옷차림 속에서 꿈틀거리던 그 관능, 나는 두 눈을 꼭 감곤 했었지.
바다가 어둑해졌다. 수평선 저 멀리 어화(漁火)가 깜박인다. 저 배에 누가 탔을까? 지금도 처녀 해녀가 있을까? 파도 소리가 차차 신음소리로 들린다. ‘해를 맞이하다’라는 영일만이란 그 이름처럼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몸을 풀게 될, 해를 잉태한 만삭의 바다가 산통의 아픔을 모룰 리 없다. 신산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의 모습이 저러할까? 그 모습에 문득 그녀를 포개어 본다. 정말이지 그녀도 그랬었다면 좋겠다.
휘파람 같은 그 소리, ‘호이’하고 숨비소리를 입속으로 흉내내어보기도 하고 그녀의 애송시를 읊기도 하며 더 가까이 바다로 다가간다. 영일만 저 멀리 밥 배를 타고 날이 새도록 표표히 떠돌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