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요셉 신부
2021년 나해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마태오 9,1-8
하느님을 모독하는 법: ‘다’ 주실 수 없다고 말할 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보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얘야!”는 영어로 하면 ‘Son’, 곧 “아들아!”라고 부르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이시면서 아버지로서 자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는 오류가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언가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고 그 사람이 되시어 행하시는 모든 권한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그를 치유하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권한을 예수님만이 아니라 교회도 행사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고 사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하면 거의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처럼 나무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신성까지 ‘다’ 주시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9살 아이가 피아노 음악이 나오는 영화를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친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바로 ‘영재발굴단’에 나왔던 배용준이란 아이입니다.
힘든 가정형편에도 엄마가 팔지 않고 둔 낡은 피아노는 용준이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에게 정식적인 피아노 교육을 할 재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살짝 ‘입양’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의 능력을 펼쳐줄 능력이 되지 않는 것에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음악 시디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와서 듣고 그대로 따라치는 연습을 합니다.
장난감도 옷도 새것을 사 준 적이 없고 다 주워다 씻고 빨아서 아이를 키우는 형편입니다.
아이는 천재인데 엄마는 아이를 뒷받침해 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입양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에게는 아이에게 생명도 주고 싶지만 자기 생명이 아니라면 아들을 다른 부모가 키우게 하고 싶은
마음마저 있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입니다.
물론 아이는 펄쩍 뛰면서 그러면 자기 죽어버릴 것이라 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 목숨과 같습니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피아노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준이는 피아노를 치기 싫어합니다.
피아노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가고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위해 칩니다.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1년 뒤 엄마는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픈 엄마를 위해 죽도록 하기 싫은 피아노를 칩니다.
엄마는 아프다가도 용준이 음악 소리만 들으면 통증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용준이는 피아노를 멈출 수 없습니다.
엄마는 자신이 없으면 용준이를 누가 돌봐주느냐며 걱정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용준이 미래만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용준이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이제 밥도 차리고 빨래도 하며 가정 살림을 돕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태어나, 저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용준이었습니다.”
용준이는 말합니다.
“엄마는 ‘심장’이에요. 심장이 없으면 죽으니깐.”
용준이는 콩쿠르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으로 대상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남기고 떠납니다.
용준이는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습니다.
그러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에 다시 피아노를 칩니다.
예원학교 2학년으로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준 데는 용준이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며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김지선 선생님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결국, 엄마의 바람대로 엄마는 떠나고 더 능력 있는 분이 용준이를 맡아 키워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목숨으로 아이를 그렇게 봉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다른 집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을 때 아이가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요?
그러나 엄마가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닌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용준이는 엄마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엄마 자신을 원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 줄 수 있고 자신이 주지 못하는 것까지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 되어 아이를 입양시키려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 생명까지도 다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면 다른 것도 찾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께 “그분은 이러저러한 것은 주실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신교는 교회에 하느님께서 주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물론 살과 피를 주시는 성체성사도 포기했습니다. 인간에게 그 정도까지 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도 사랑하면 자신의 능력 이상을 주고 싶어 하는데, 사랑 자체이신 분이 어떻게 어떤 것은 주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그분의 심장입니다. 심장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신성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신성을 받아 우리가 본성상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 무슨 신성모독이 되겠습니까?
예전에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복사 아이들에게 집에 들어가며 떡볶이 사서 먹으라고 만 원짜리 몇 개를 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그 돈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이 사 주고 저에게 다시 가져다주라고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준 돈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을까요? 저는 그 정도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것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 모자라 아마 더 주실 수 있는 것이 있으셨다면 그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도 포기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 또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고 찬미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사랑합니다 나의예수님
알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저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라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가지도 포도나무 아닌가?
그럼 우리도 하느림과 같아야 하는게 아닌가를 늘 생각했습니다.
신부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주님의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도나무의 줄기만보고는 머루줄기인지 다래덩굴인지 모를수 있습니다.
가지가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비로서 가지역활을 제대로 하는것이고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세상은 가지에 달린 포도를 보고
포도나무를 평가 할 테니까요.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