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조심의 뜻으로 전해져오는 언총言塚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만나고는 캬- 무릎을 쳤지. 얼마 전 한 평론집 서문에서 만난 시총詩塚은 왜 그리 내 가슴을 먹먹하게 짓눌렀던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백암 정의번의 무덤. 백암공은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적에게 포위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려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훗날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그 아비가 아들의 옷과 갓을 들고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하여 빈소를 마련하고, 생전에 뜻을 나누던 지우知友들의 애사哀詞를 모아 관에 담아온 게 시총의 연유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기룡산 기슭 십만 평 영일 정씨 문중 묘역. 장방형 묘역에 돌올하게 솟은 80여 기의 무덤들이 거대한 책 속의 무슨무슨 글자들만 같다. 시총을 찾아가 비문을 손으로 짚어가며 찬찬히 읽고는 엎드려 절한다. 무덤 속에 있을 여러 편의 시와 공을 추모하며 봉분을 둘러보는데, 홀연 나비 두 마리 무덤을 열고 푸르륵 날아오른다. 나비 허공으로 날아간 궤적에 일순간 펼쳐진 문장을 나는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고 태산보다 크나니, 육신이 없어져도 마음은 남아 시공을 초월하여 통한다.> 무덤 속 백암공과 지우들이 남긴 시들도 나비처럼 날아올라 하늘의 별로 빛나는가. 어둠이 깔리니 열사흘 달빛 아래 하늘의 별과 땅 위 시총의 상응이 무한정 좋다. 시공을 건너는 저 시들은 비바람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겠다. 무덤 속 하얀 언어들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꾸 내게로 건너온다.
*정진규 시인의 시집 『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2009)에서 언총言塚을, 그리고 박현수 교수의 평론집 『황금책갈피』(예옥,2006)에서 시총詩塚을 만나 이 시를 쓸 수 있었다.
<시작노트>
사월의 봄숲에서 만나는 연두에서 명록, 암록에 이르는 다양한 빛깔들의 나무들이 꽃만큼이나 곱다. 아니 그 이상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사람들 모두, 저마다 꽃이다. 사람이 꽃이고 별이다.
이종암
1965년 경북 청도 매전에서 출생하였고,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포항 대동고등학교 교사로 31년간 근무하다가 명예퇴직을 하고 자유인이 되었다. 1993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2000년 시집 『물이 살다 간 자리』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는 『물이 살다 간 자리』 외 『저, 쉼표들』 『몸꽃』 『꽃과 별과 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