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유혜영 시인
안락만을 추구하는 뇌의 바깥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나의 조용한 육신은 중노동입니다
정지된 활동사진처럼 다음 장면을 위해 화면 밖에서 끝없이 움직입니다
당신들의 눈동자 속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안락을 불어넣습니다
안락의 조건이 내게 풍부했기에 식물성이 무한 리필입니다
그러나 비싼 병원비 앞에서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번번이 실격입니다
마음이 먼저일까요 이기거나 지거나가 아닌 아주 작은 통증도 허락되지 않는 무감각의 육신 속에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지옥을 살고 있어요
그리운 방문객을 바라보며 잠시 안락했다면 그건 사고입니다
고통의 무게와 절망의 크기를 가늠하는 그 눈빛 앞에서 나의 안락은 가면 같은 실제입니다
끝없는 자책으로 중독되는 안락
잦은 사고와 불행이 나를 더욱 성실하게 합니다
나는 죽음도 불사합니다
안락의 안락에 의한 안락을 위해서라면...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1월호 발표
유혜영 시인
2001년 「미네르바」등단.
시집 『치마, 비폭력을 꿈꾸다』
『잘라내기는 또 어디선가에서 붙여넣기를 하고』 외
제2회 박종화 문학상 수상
아르코 문학 창작기금 수혜
아르코 나눔 우수도서 선정
세종 우수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