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녀 가운데는 거액의 재산가가 의외로 많았던 듯하다. 궁녀에게도 직급에 따라 일정한 급료가 지급되었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데다가, 의식주는 무료로 제공되었고 매인 신분이라 밖에 돌아다니며 돈 쓸 일도 없었다. 따라서 조금만 신경을 쓰면 축재(蓄財)가 얼마든지 가능했으니 부자 궁녀가 많았던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史書에 이름이 오른 궁녀는 큰 죄를 지어 처벌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부자 궁녀 얘기는 양반가의 문집이나 한성부 기록에 극히 일부만 남아있다.
수완이 좋은 궁녀는 시전 상인 가운데 단골을 정해놓고 급료로 받은 미곡 등을 모아두었다가 내다 팔기도 했으며, 일부는 비과세로 궁에 납품되는 진기한 물품을 싸게 사들였다가 궐 밖에 가지고 나가 비싼 값에 되팔기도 했다. 그 돈으로 한양에 집도 사놓고 4대문 밖에 논밭을 장만해놓기도 했다. 이렇게 수십 년을 모으면 거액의 재산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조선왕조실록 여기저기에도 ‘궁녀들이 궐 밖에 사사로이 집도 사고 재산을 관리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우려가 자주 등장한다.
참고로 『속대전』※에 수록되어 있는 궁녀들의 월급은 다음과 같다. 궁녀들에게는 일반관료들에게 지급되는 쌀과 콩 외에 특이하게 북어가 지급되었는데, 3가지 품목을 금액으로 환산해보면 제조상궁의 월급이 정3품 대사헌 등의 월급과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료 궁녀
정1품 쌀 38두 콩 20두
정2품 쌀 30두 콩 20두
정3품 쌀 20두 콩 17두 제조상궁 쌀 25두 5승 콩 5두 북어 110마리
정4품 쌀 17두 콩 13두 부제조상궁 쌀 19두 5승 콩 5두 북어 90마리
정5품 쌀 16두 콩 10두 상궁 1 쌀 16두 5승 콩 5두 북어 80마리
정6품 쌀 16두 콩 10두 상궁 2 쌀 13두 5승 콩 5두 북어 70마리
정7품 쌀 13두 콩 6두 상궁 3 쌀 10두 5승 콩 5두 북어 60마리
정8품 쌀 12두 콩 5두 나인 1 쌀 7두 5승 콩 5두 북어 50마리
정9품 쌀 10두 콩 5두 나인 2 쌀 5두 5승 콩 5두 북어 25마리
나인 3 쌀 4두 콩 1두 북어 15마리
※ 『속대전』 ; 영조 때 『경국대전』을 대거 보완하여 편찬한 조선 후기의 대법전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청와대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궁녀들도 나사가 풀려서 퇴폐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 『정조실록』 재위 2년 윤6월 신미條에는 이러한 세태를 한탄하는 정조의 말씀이 수록되어 있다.
<명색이 궁녀인 자들이 기생을 끼고 풍악을 즐긴다. 게다가 액정서※의 관노들과 궁의 종들을 데리고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벌건 대낮에 음란한 짓까지 벌이고 있다. 더욱 괘씸한 일은 재상들이 경치 좋은 곳에 지어놓은 정자나 별장에서도 그런 짓을 일삼고 있다. 실정이 이처럼 추잡한데도 사헌부나 포청에서는 오히려 궁녀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들조차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에게 끽 소리도 못한 박근혜 정권의 세태와 빼다 꼽은 얘기다. 어쨌거나 기생을 부르고 배를 빌렸다는 궁녀들의 문란한 행위로 보아 행락에 상당한 재물을 탕진한 듯하다.
※ 액정서 ; 이조(吏曹)의 산하기관으로 왕실의 전문직 및 잡직 업무를 총괄했다.
지난 2009년, 장기간에 걸쳐 옛 한성부의 기록을 조사해오던 서울시청 소속 한 공무원이 궁녀들의 재산 정도를 밝혀줄 귀한 사료(史料)를 발굴했다. 인조-효종-현종 대에 걸쳐 궁녀를 지낸 박씨라는 자와 관련된 문서였다. 궁녀 박씨는 직접 계약서를 작성하여 부동산을 사들인 뒤 한성부를 찾아와 공증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는 다음과 같다.
<상궁 박씨
삼가 소지(所志.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첨부한 계약서를 살펴보시고 다른 사례에 비추어 입안(立案. 공증서)을 발급해주시기 바랍니다.
인조 26년(1648) 5년 6월>
신청을 접수한 한성부에서는 그해 11월 10일, 담당자의 서명 날인이 된 공증서를 발부해주었다.
공증신청서에 첨부된 매매계약서 사본의 내용은 놀라웠다. 박씨가 인조 25년에 사들인 부동산의 규모가 매우 컸던 것이다. 돌곶(乭串. 현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 일대) 소재 여러 필지의 대지(臺地) 및 전답 5200여 평, 종암(현 지하철 6호선 종암역 일대) 소재 여러 필지의 대지 및 전답 9000여 평 등이었다. 6월에 신청한 공증이 11월에야 완료된 것은 한성부에서 각 필지의 매도자와, 매도자마다 2명씩의 증인을 일일이 불러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매도자와 증인들도 모두 한성부가 작성한 문서에 서명하고 수결(手決)을 놓게 하여 뒤탈이 없도록 조치했다. 필지별 면적이 ‘반나절 갈이’, ‘하루 반나절 갈이’ 등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도 이채롭다. 상궁 박씨가 이 많은 전답을 직접 경작 또는 관리했을 리는 없을 터, 누군가에게 소작을 주어 해마다 거둬들인 도조(賭租)도 만만찮았으리라.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현종 2년(1661) 5월 7일, 상궁 박씨는 다시 수천 평의 전답을 사들여 호조(戶曹)에 등록했다. 이때는 ‘大福’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노(戶奴. 남자 종. 훗날 마름)가 박씨를 대리하여 종암 일대의 땅을 사들여 한성부에 등록했다. 대복이라는 종은 궁녀 박씨의 집사(執事) 자격으로 재산을 관리하면서 일가를 꾸려 부유하게 살았을 터.
상궁 박씨가 두 번째로 전답을 사들인 19년 뒤인 숙종 6년(1680) 1월 20일, 박씨의 재산과 관련된 한성부 기록이 다시 등장했다. 박상간이라는 자가 방시진이라는 자에게 상궁 박씨의 모든 재산을 처분한 내용이다. 박상간은 매도자인 본인과 소유자인 상궁 박씨의 관계를 ‘양조모’라고 기록했다. 상궁 박씨가 박상간을 양손(養孫)으로 들여 전 재산을 물려줬다는 뜻이다. 상궁 박씨는 숨을 거두기 전에 대대로 자신의 제사를 지내달라는 당부도 했을 터인데, 박상간이라는 문디자슥은 제사고 깨목디고 서둘러 재산을 처분한 흔적이 역력하다. 상궁 박씨가 총액 210냥의 정은자※를 주고 산 땅을 값이 헐썩 올랐을 19년 뒤에 정은자 90냥이라는 헐값에 팔아치웠으니 말이다. 허망한지고.
※ 정은자(正銀子) ; 호조(戶曹)에서 공인한 순은(純銀) 화폐
첫댓글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가네.
그때도 그런 요지경이 있었구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