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명상을 하다 문득 天上에선 듯 쟁쟁하게 울려오는 새소리를 들었다 가는귀먹은 늙은 하느님, 쿨쿨 코골며 새벽 단잠을 즐기는 젊은 것들이야 듣건 말건 청정한 새벽 숲속을 울리는 소쩍새, 뻐꾸기, 찌르레기 구슬픈 울음 소리……그 사이로 가끔씩 웬, 맑은 은방울 굴리는 새소리도 들렸다 (저 새소리가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藥이……?) 오, 그렇다면 올빼미 박쥐 굼벵이 등 어둠 속에서 퍼드덕거리며 꿈틀대는 진귀한 神樂들을 어렵사리 구해다 먹고도 肝에 달라붙은 암덩어리를 어쩌지 못해 싸리 가지처럼 빼빼 말라 죽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왜, 저 은방울 굴리는 목소리로 차라리 그대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드득 날아다오, 말해주지 못하고 새벽마다 징징 지렁이 울음 소릴 흉내내고 있는 걸까 아아, 그러나 나는 저 아시시의 聖者처럼 지상의 병든 새들을 불러 드넓은 가슴에 품어 안지 못해도 내 얇은 귓바퀴에 소리의 화살이 되어 정겹게 날아드는 황홀한 새소리에 취해 어둡고 음울한 지렁이 울음 소리를 잠시 거둔 이 청정한 새벽 숲속
신성한 숲 / 고진하
저녁놀을 공양 받고 있는 너에게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지. 엄마 젖을 빠는 아이처럼 너는 전신의 빨대로 완숙된 포도주를 빨기에 여념이 없었지. 다복솔과 아카시아, 철쭉과 자작나무, 시끄러운 지저귐을 멈춘 채 한껏 몸을 낮추는 새들, 그들 틈에 나도 끼어 그 극진한 공양을 받으며 발그레 취기에 젖어들었지. 잠시 후 보랏빛 어둠이 내리자, 너와 내가 받아먹은 놀과 어둠이 비빔밥처럼 안에서 비벼져 이름지을 수 없는, 그윽한 뭔가가 되었지. 이걸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 (시인은 이름짓는 자가 아니던가?) 위대한 밤의 동공인 부엉이와 별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나 혹 새겨졌을지 모를 그 이름을.
말뚝 / 고진하
삽십 년 만에 만난 배불뚝이 동창생 녀석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예나 이제나 고향 우시장(牛市場)에 박힌 말뚝처럼 비쩍 마른 건 여전하구나!"
평생 내 삶을 괴어온 내 안에 살아 계신 이가 불쑥 나서며 이렇게 날 변호하는 것이었다.
"비쩍 마른 말뚝임엔 틀림없으나 하늘과 땅을 잇는 말뚝이라네!"
쥐코밥상 / 고진하
홀로 되어 자식 같은 천둥지기 논 몇 다랑이 붙여먹고 사는 홍천댁 저녁 이슥토록 비바람에 날린 못자리의 비닐 씌워주고 돌아와 식은 밥 한 덩이 산나물 무침 한 접시 쥐코밥상에 올려놓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흙물 든 두 손 비비며.
모기 / 고진하
손등이 벌겋게 부풀도록 문 모기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이 구석 저 구석을 뒤지다 제풀에 지쳐 컴퓨터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늘, 오전 내내 죽치고 앉아 사이버 세상과 접속은 하였으나 화끈한 접촉은, 곰곰 따져보니, 모기가 처음이로구나.
밤이슬 몇 방울 스민 씨앗으로 사막의 삶을 연명한다는 쥐캥거루가 떠오르는 팍팍하고 메마른 나날들 벌써 구십 년대 초반 무렵의 얘기인데 절판된 내 첫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으로 앵앵거리는 모기를 후려쳐 잡았다는 차창룡의 유머러스한 시가 왜 아물아물 떠오르는 것이냐.
화끈하게 내려치는 시인의 잽싼 손동작과 시집 표지에 더럽게 들러붙었을 핏자국을 잠시 떠올려보다가 아까 보려고 켜둔 액정화면에 떠 있는 오늘의 뉴스; 미군 헬리콥터가 투하한 우라늄탄에 사망한 이라크인들 시신을 공동묘지로 변한 축구장으로 운구하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도 몰래 깊은 숨을 몰아쉰다.
삐쭘, 문 열어놔도 나갈 기미는 보이질 않고 다시 나타나 앵앵거리는 놈, 안보이는 놈을 어찌 잡으랴 니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간다. 뿔테 돋보기 하나 사러!
문주란 / 고진하
뜨락에 핀 꽃들을 보며 훤한 대낮부터 곡차 한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두들 벌게진 눈길로 길쭉길쭉한 푸른 잎새들 사이에서 말 자지 같은 긴
꽃대를 하늘로 쑥 뽑아 올린 문주란을 감상하고 있는데, 훌떡 머리 벗겨진
중늙은이 居士가 문주란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이년 저년 집적거리지
말고 문주란처럼 좆대를 하늘에다 꽂아, 하늘에다 말이야! 대머리 거사의 일갈 때문일까. 문주란이 놓여 있는 뜨락 위의 하늘이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쨍쨍해 보였다.
*** 고진하 시인은 사제라서 그런지 시창작의 대부분을 일상의
성화(聖化)나 인간 내면의 신성 탐구에 바치고 있다.
일상의 성화란 밥 먹고 노동하고 섹스하고 이웃과 사귐을 갖는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신성의 임재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결국 성속일여(聖俗一如)라거나 "누구도 일상을
통과하지 않고는 신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인간 내면의 신성 탐구란 동학에서의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한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인데, 이는 신의 외모라기보다 신의 속성을 받고 태어났음을
말한다. 신의 여러 속성 중 하나만 들면 창조성으로, 실제로
인간은 신으로부터 만물의 이름을 짓는 자의 허락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일관된 종교적 상상력을 통하여 성과 속의 통합 균형을
추구하고, 신성과 육체의 소통 화해를 꿈꾸며, 초월의지와
현실감각 사이의 접점을 찾는 화목제(和睦祭)의 시인 고진하.
그의「신성한 숲」에서 시적화자인 나는 "완숙된 포도주"와
같은 저녁놀을 공양 받고 있는 숲에 들어가 그 숲과 그 숲 속의
나무와 꽃과 새와 함께 나도 힘껏 노을을 빤 탓에, 마치 술을
마신 것처럼 "발그레 취기에 젖"는다.
그리고 나와 숲과 노을과 곧이어 찾아드는 보랏빛 어둠은
이윽고 비빔밥처럼 하나로 비벼져, "이름지을 수 없는,
그윽한 뭔가가" 되었는데, "위대한 밤의 동공인 부엉이와
별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나/ 혹 새겨졌을지 모를
그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묻는 시다.
아마도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이라고나 불려질 것 같은
그 이름을 그대는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뜨락에 핀 꽃들을 보며 훤한 대낮부터 곡차 한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두들 벌게진 눈길로 길쭉길쭉한
푸른 잎새들 사이에서 말 자지 같은 긴 꽃대를 하늘로
쑥 뽑아 올린 문주란을 감상하고 있는데, 훌떡 머리 벗겨진
중늙은이 거사(居士)가 문주란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이년 저년 집적거리지 말고 문주란처럼 좆대를 하늘에다
꽂아, 하늘에다 말이야!/ 대머리 거사의 일갈 때문일까.
문주란이 놓여 있는 뜨락 위의 하늘이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쨍쨍해 보였다."
일상의 성화나 인간 내면의 신성 탐구를 더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칫 음담패설과도 같은 산문시「문주란」이다.
시인은 이 시를 써놓고 1년이나 망설인 끝에 발표했다고
한다. 왜 망설였을까.
결국 성과 속, 신성과 육체, 초월과 현실이란 게 깨달음의
눈 속에서는 서로 화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시인 바, 너무도 투명하도록 아름답지 않은가.
/ 고재종 시인
악양시편 1 / 고진하
스물거리는 안개가 악양 들판의 고요를 하늘로 밀어 올리는 새벽 , 그 고요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들판을 바라보니 들판 또한 나를 바라보네. (오, 들판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다니 !) 반 뼘쯤 자란 논보리도 초록초록 눈을 떠 나를 바라보네. 논보리밭 사잇길 말뚝에 매인 흑염소 두 마리도 고개를 갸웃대며 낯선 나를 바라보네.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어린 뿔로 들이받을 듯 달려들기에 뿔 없는 나도 손가락뿔 세워 저를 받는 시늉을 하며 흥에 겨워 한참을 노는데, 어디서 갑자기 불어온 돌개바람에 보리밭이 흔들리고 냇가의 억새가 흔들리고
어린 흑염소 뿔이 흔들리고 흑염소와 놀던 나도 휘청, 흔들리네 문득 중심을 잃은 황홀에 몸 비비다 다시 눈을 들어 들판을 바라보네. 오늘 같은 날은, 악양 들판이 일으키는 초록 지진에 흔들리다 파묻혀도 좋겠네.
악양 시편 2 / 고진하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낙원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청학동으로 통하는 고개 중턱, 계단식 다락논에 자라는 푸르르게 출렁이는 보리밭을 만났다. 그 푸름에 온통 물들고 싶어 발에 베고 온 신발마저 훌렁 벗어던졌다. 그 푸름을 담아 가고 싶은 욕심에 맨발로 보리밭으로 들어가 포즈를 이리저리 잡는데, 보리밭 골에 은신해 있던 짐승 한 마리가 놀라서 후닥닥- 달아났다. 아, 고라니 ! 가슴까지 차오르는 계단식 보리밭을 성큼성큼 뛰어오른 고라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낙원으로 사라졌다 나는 낙원 저 아래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 고진하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깨진 항아리 조각 같은 달이 터진 상처에서 비쳐 나오는 붉게 엉킨 피를 물고 지상에 이별을 고하고 있다 짧은 이별 뒤엔 곧 漆桶 속 어둠이 뚜껑을 열어 검은 새들을 풀풀 날리고, 한밤 내 검은 새들이 텅 빈 골짜기를 배회하며 목젖 없는 아이가 질러대는 시끄러운 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지저귐을 토해 낸다 왜 새들은 이 밤 칠통 속 둥지로 돌아와 주둥이를 박고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삐끔히 열린 밤의 들창에서 새어나오는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고통스런 지저귐, 혹은 누군가 거칠게 코고는 소리 어쩌면 지금 악몽으로 뒤척이는 그들은 긴 코를 땅에 박은 鼻行類*가 되어 꿈마저 저당잡힌 꿈길 위에 무서운 절망의 외발자국을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짜기 도처 악취 풍기는 폐수와 썩지 않는 쓰레기 더미 위로 무성하게 피어난 인공 독버섯이 뒤덮인 땅에 식식거리는 두 마리 황소를 앞세워 분노의 쟁기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그들은 지금 품안으로 날아드는 검은 새들과 함께 쑥넝쿨만 우거진 조상들의 무덤 속 죽음의 磁力에 이끌려 숯처럼 깨끗한 죽음을 연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나는 모른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머니의 聖所 / 고진하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 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 어머니가 하얀 행주를 빨고 또 빨아 반짝반짝 닦아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 눈 밝은 햇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님도 와 제 모습 비춰보는걸, 뒷산 솔숲의 청살모 다람쥐도 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 하늘을 말아쥐고 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저렇게 내려다보는걸, 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 남사스럽제...)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배풀 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연탄을 갈며 / 고진하
무쇠 난로의 연탄을 갈던 열아홉 청년은 어디로 가고
쉰내 나는 쉰다섯의 중년이 연탄을 갈고 있나,
도대체 어디로 갔나, 황당한 물음은 잠시 접어두고
연탄 구멍을 찬찬히 헤아려본다. 어라, 옛날엔 십구공탄이었는데,
다시 헤아려보아도
이십오공탄 하여간 여전히 팔팔한 청춘이다.
내 나이 이십오공일 때,
그 팔팔한 청춘일 때 어디서 뭘 하고 놀았던가, 이런 구멍마다
이글이글 연정의 불꽃을 피워 올렸었던가.
때론 과열로, 과부화로 불끈거리는 욕망의 집을 다 태워먹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제 구멍은 점점 많아지고, 오백년 묵은 느티나무 밑둥치에
파인 구멍처럼 구멍도 점점 넓어져
찬바람만 숭숭 드나드는데, 오십오공, 오 오십오공에도,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까, 없는 청춘을 불사를 수 있을까.
나는 난로에서 빼낸 재를 들고 집 앞 공터로 간다.
겨우내 버린 연탄재 해골 더미처럼 수북하다 이십오공도,
오십오공도, 그 팔팔했던 청춘의 기억도 이 공동묘지에 들면
모두 공(空)! 나는 삼가 두 손을 모은다. 합장(合掌)!
겨울 우화 / 고진하
바람 그칠 날 없는 천둥산 기슭 홀쭉한 배때기에 들바람이나 잔뜩 부풀려 양철집, 삐그덕거리는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아내는 밑빠진 가계부 쓰기에 여념이 없다
말이 그럴 듯해 목사관(牧師館), 배고픈 쥐들이 대낮부터 낡은 양철 지붕을 갉아대는지 톱 연주 소리가 그럴듯한 울림으로 방안에 그득하다
가까이서 마주친 적은 없지만 오랜 고행(苦行)으로 터럭과 이빨만 무성히 자란 은수자(隱修者)들일까?
빨간 볼펜을 끼운 채 접혀진 가계부를 저만치 밀쳐 놓고 좌선하듯 멍하니 빛바랜 장미꽃 무늬 벽에 눈길을 던지고 있는 아내의 입에서, 쥐약을 꼭 놓아야겠어요! 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 전에, 나는
문득 배때기에 부풀린 들바람을 시원하게 토해내며 사나운 한 마리 들고양이가 된다 순간, 괜히 장미꽃잎이나 갉으며 면벽하던 인쥐 한 마리도 까르르 웃어 넘어지고
굴뚝의 정신 / 고진하
저 나지막한 함석집, 저녁밥을 짓는지 포르스름한 연기를 굳게 피워올리며 하늘과 내통(內通)하는 굴뚝을 보고 내심 반가웠다 거미줄과 그을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창틀에 올망졸망 매달린 함석집 아이들이 부르는 피리 소리, 그 단음(單音)의 구슬픈 피리 소리도 곧장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울어도 울어도 천진한 동심(童心)은 목이 쉬지 않고 저처럼 쉽게 하늘과 연통(連通)하는구나!
아 아직 멀었다 나는 저 우뚝한 굴뚝의 정신에 닿으려면! 괄게 지핀 욕망의 불 아궁이 속으로 지지지 타들어가는, 본래 내 것 아닌 살, 하얀 뼈들 지지지 다 타고 난 하얀 재마저 쏟아버리지 못하고 다만 무심천변(無心川邊)에 우두커니 서서 저녁밥 짓는 포르스름한 연기 피어오르는 저 우뚝한 굴뚝을 바라만 보고 있는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 / 고진하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 숲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이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冠)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오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오, 그렇다면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피와 살과 푸들푸들 떨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들여진 행복에 더 이상 소금 뿌리지 않아도 될 것인가. 때때로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서 상한 죽지를 퍼덕이며 날아 내리는 풋내 나는 주검들마저 완벽하게 포장하는 그의, 그의 도제(徒弟)로 입문하기만 하면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꽃뱀 화석 / 고진하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그런데, 오늘, 숲으로 막 꺾어들기 직전 구불구불한 길 위에 꽃무늬 살가죽이 툭, 터진 꽃뱀 한 마리 길게 늘어붙어 있다. (오늘은 꽃뱀부터 읽어야겠군!) 짝 깔린 등과 꼬리에는 타이어 문양(文樣), 불꽃같은 혓바닥이 쬐끔 밀려나와 있는 머리는 해 뜨는 동쪽을 베고 누워 있다. 뭘 보려는 것일까, 차마 다 감지 못한 까만 실눈을 보여주고 있는 꽃뱀. 온몸을 땅에 찰싹 붙이고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녀 대지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 거라고 믿어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神으로 숭배했단다. 눈먼 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 사신(蛇神), 사신이여, 이제 그대가 갈 곳은 그대의 어미 대지 밖에 없겠다. 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 숲 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 여한도 없겠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부서진 사체는 화석처럼 굳어지며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산책, 오늘 내가 읽은 산이라는 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소지(燒紙)로 화한 셈이다. 햇살에 인화되어 피어오르는 소지 속으로, 뱀눈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대관령 수도원 / 고진하
그곳에 당도하려면 빽빽히 우거진 소나무숲을 더듬어야 한다 물론 서늘한 계류의 물소리를 거슬러가도 된다 그곳에는 수도사도 없고 염주 돌리는 손도 없다 최신식 나무 보일러를 돌리기 위해 처마끝에 쌓아놓은 장작과 도끼날을 받아 허리 잘록 팬 모탕이 경건에 이르는 고통을 웅변할 뿐이다 언젠가 그곳 관리인의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다 나보다 몇십 배나 큰 고로쇠나무를 쳐다보며 고로쇠나무의 눈물 같은 수액을 받아먹던 날을 떠올리면 내 목숨이 그곳의 나무들과 구름과 바위와 물소리에 연이어져 있음을 섬뜩하니 깨닫곤 한다 그곳에는 저 스스로 택한 가난이 있고 생명의 진액이 있다 누구나 그 진액을 받아먹고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아랫마을 어흘리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운 실비단 안개에 붙잡혀 하산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성산(聖山)이다 모탕과 고로쇠나무와 그곳을 휩싸는 실비단 안개에 자기의 혼(魂)을 내맡길 수만 있다면
그곳에 가다가 파릇파릇한 소나무숲에서 실종될 용기를 가질 수만 있다면!
라일락 / 고진하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사마귀 / 고진하
푸른 들판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성스런 신전, 치렁치렁 긴 베일을 늘어뜨린 무당이나 사제처럼 연한 녹색의 얇은 명주와 같은 날개를 펼쳐 들고 기도하듯 하늘을 향해 다소곳이 앞발을 모아 곧추세우고 있는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염주알을 굴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염주알을 굴리듯 상하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살의(殺意)를 감춘 두 눈알, 오늘의 제물은 메뚜기 두 마리와 십자왕거미 한 마리, 또는 형형색색의 나비 몇 마리쯤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득 제단 앞에 꿇어 엎딘 경건한 수도자의 기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날치를 잡는 작살처럼 날랜, 혹은 거대한 원목을 끌어당겨 씹어버리는 원형의 톱 같은 두 개의 톱니발 사이에 꽉 끼워진 제물들은 톱밥처럼 부서져 그녀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성찬으로 올려진다 그녀의 신성(神性)은 먹이를 얻기 위한 덫, 신성불가침의 불칼을 두른 저 울타리 속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다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알주머니에서 나와 같이 살아온 동족마저 살해하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바글대는 흉물스런 새끼들이 담긴 알주머니를 토해 놓는 생산의 여신(女神), 괴이한 마성(魔性), 삐딱하게 보는 것이 익숙한 사팔뜨기들에게 일명 기도버마재비*라고도 불리어지는
*사마귀과(螳螂科)에 속하는 이 곤충은 라틴어 학명으로
기도버마재비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聖化 / 고진하
어스름이 깔리는 저물녘 누렁이는 제 집 앞의 마른 땅바닥을 주둥이와 앞발로 공들여 파고 있었다 뭐하러 저리도 열심히 땅을 팔까, 궁금해 멀찌감치서 가만히 지켜 보니, 길쭉한 제 주둥이가 파묻힐 만큼 땅을 판 뒤 낮에 던져준 소뼈다귀를, 먹다가 남은 뼈다귀 두 조각을 땅속에 밀어넣고 곁의 흙을 다시 긁어 덮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쯤 배가 고프면 소복한 봉분을 헐고 거기 저장해 둔 뼈다귀를 꺼내 먹겠지 전에도 그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래, 네 놈이 배가 불러도 배터지는 줄 모르고 아귀아귀 먹어대는 인간들보다 낫구나 성스러움의 聖자도 모르는 놈이지만 인간이 먹다 버린 뼈다귀조차 저렇게 聖化하고 있구나! 허허, 그 놈!
성스런 바느질 / 고진하
비탈진 관동양묘원,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 검게 그을은 늙은 아낙네들이 두더지처럼 납죽 엎디어 있다. 겨우 10cm 될까말까 한 어린 자작나무 묘목을 촘촘히 심고 있는 저 갈퀴손들은, 말하자면, 지금 뻥 구멍 뚫린 지구를 꿰매고 있는 것이다. 흰머릿수건을 벗어 쏟아지는 구슬땀을 훔치며 바늘 대신 쪽삽으로, 한 땀 한 땀 지구의 뚫린 구멍을 푸르게푸르게 누비고 있는!
미완의 불상 / 고진하
읍내 나가는 길가에 뿌연 돌가루 날리는 석재공장이 있었다. 어느날, 석재공장 뒤꼍을 돌아가는데
버려진 폐석더미 속에 한쪽 귀 한쪽 팔 떨어진 앉은뱅이 부처가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 반가웠다 그 돌덩이는 불구(不具)인 날 쏙 빼닮아 있었던 것이었다
얼음수도원 1 / 고진하
- 피정(避靜) 일기
지난밤 꿈에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을 보았다.
얼음벽돌로 세워진 얼음수도원.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얼음십자가상과 얼음성모상 앞에서 성체 조배를 바치고 찬미가를 불렀다.
하얀 콧김과 하얀 입김이 날리며 수도사들의 긴 머리칼과 눈썹과 수염에 고드름이 맺히게 했다.
저녁미사 시간, 수도사들이 바치는 비나리의 뜨거운 숨결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얼음집을 다 녹였다. 얼음수도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도사들도 사라졌다.
잠을 깨고 난 뒤, 온종일 사라져버린 얼음수도원을 묵상했다.
무념무상의 설원(雪原)에 들 수 있었다
얼음수도원 2 / 고진하
- 피정일기
두꺼운 방한복을 뒤집어쓰고 스키를 질질 끌며 그곳에 가도 내가 머물 영혼의 의자는 없겠다.
잔디 한 뿌리 자랄 수 없는 빙원이니 내 죄의식과 불안을 자라나게 할 고해소도 없겠다.
고해소가 있다 한들 그곳을 찾아가다가 입이 얼어붙어 죄를 고백할 수도 없겠다.
무슨 경전이라곤 쓰여진 적이 없는 곳, 죄도 은총도 서식할 수 없는 곳, 신의 지문(指紋)이라면 얼음계곡에 묻힌 오랜 물고기의 뼈다귀들뿐이겠다.
광막한 얼음황무지, 지옥의 국기를 꽂기 위해 찾아오는 탐험가들만 잠시 머물다 떠날 뿐이다.
오늘도 난 스키를 지치며 그곳에 다녀왔다. 없는 영혼의 의자를 그곳에 마련해 두고 왔다. 상징이다.
즈므 마을 1 / 고진하
푸른 이정표 선명한 즈므 마을, 그곳으로 가는 산자락은 가파르다 화전을 일궜음직한 산자락엔 하얀 찔레꽃 머위넝쿨 우거지고 저물녘이면, 어스름들이 모여들어 아늑한 풀섶둥지에 맨발의 새들을 불러 모은다 즈므 마을,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성소(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 나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발에서 신발을 벗는다 벌써 얄팍한 상혼(商魂)들이 스쳐간 팻말이 더딘 내 발걸음을 가로막아도 울타리 없는 밤하늘에 뜬 ?빛 몇 점 지팡이 삼아, 꼬불꼬불한 산모롱이를 돈다 지인이라곤 없는 마을, 송이버섯 같은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가물거리는 불빛만이 날 반겨준다 저 사소한 반김에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지나온 산모롱이 쪽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저 나직한 소리의 중심에, 말뚝 몇 개 박아 보자, 이 가출(家出)의 하룻밤!
* 즈므 마을
'저무는 마을'에서 유래된, 강릉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즈므 마을 2 / 고진하
산비알에 핀 홍단풍 노을을 등에 지고 귀가하는 늙은 농부
집앞에 노을을 한 짐 부려놓고 어둑발 먼저 들어 등목을 하는 계류에 나와 발을 담근다
퉁퉁 부은 발등 위로 찰랑찰랑 떠오르는 별들 늙은 농부의 발은 누가 씻어주나 별들이 씻어주나
저 쇠가죽 같은 발에 엎드려 쪽쪽 입맞추는 별빛!
지게게 / 고진하
잿빛 뻘밭을 잰걸음으로 달리는 귀여운 지게게를 본 적 있니? 조개 껍데기든 나뭇조각이든 제 몸을 감출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등에 지고 잰걸음으로 달리는! 오늘은 몽산포 부근 뻘밭을 발갛게 물들이는 수십만 평 노을을 등에 지고 (가벼움의 극치를 보여주듯) 재게재게 달리다 물방울 뽀글뽀글 솟는 뻘구멍 속으로 쏙! (暗電!) …본 적 있니?
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 고진하
윙윙거리는 소리가 좀 이상해 보일러통이 있는 뒤껸으로 돌아가다 일러통 옆, 진득한 거미줄에 걸려 있는 흰줄표범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더듬이와 몸통은 거미에게 파먹혔는지 보이지 않고 찢긴 날개 끝 희고 붉은 표범가죽 무늬가 선명한 두 날개만 흔들흔들.
가여운 생각에 손끝으로 사뿐히 두 날개를 집어올렸더니 거미줄 쳐진 나무 기둥에는 깨알같이 잔뜩 쓸어놓은 노란 알들.
갑자기 난 숙연해진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푸른 햇살 아래 밀어내놓은 신생(新生)의 꿈들!
새가 된 꽃, 박주가리 / 고진하
어떤 이가 새가 된 꽃이라며,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씨를 가져다주었다 귀한 선물이라 두 손으로 받아 계란 껍질보다 두꺼운 껍질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놀라웠다 나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의 새가 되고 싶은 꿈이 고이 포개어져 있었다 그건 문자 그대로, 꿈이었다 바람이 휙 불면 날아가 버릴 꿈의 씨앗이 깃털의 가벼움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꿈이 아닌, 꿈의 씨앗도 아닌 박주가리의 생(生), 어떤 생이 저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 어느 별의 토기에 새겨진 환한 빛살무늬의 빛살이 저보다 환할 수 있을까 몇 며칠 나는 그 날개 달린 씨앗을 품에 넣고 다니며 어루고 또 어루어 보지만 그 가볍고 환한 빛살에 눈이 부셔, 안으로 안으로 자꾸 무너지고 있었다
월식 / 고진하
뭉쳐진 진흙덩어리, 오늘 네가 물방울 맺힌 욕실 거울 속에서 본 것이다. 십 수 년 전의 환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 아니다.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 진흙 가면. 그걸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퍽 대견스럽다. 하지만. 여름 나무가 푸른 잎사귀에 둘러싸여 있듯 그걸 미리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은 너의 한계, 너의 슬픔.
오래 전. 너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 개기월식은 지금도 진행 중. 드물지만 현명한 이는 그래서 매일 죽는다. 그리고 안다. 죽어야 어둠 속에서 연인의 달콤한 입술이 열린다는 것을.
욕실 거울에 비친 한 그루 藏禮木. 이름과 형상이야 어떻든, 너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무 아래서 너는 질척이는 욕망과 소음의 때를 밀고 고요한 쉼을 얻는다.
달 없는 밤.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목차
작가의 말 _19
1 왜 신이 아닌 척 하느냐? 불멸의 신성, 참자아를 찾아서
해에 씻긴 지구의 혼들 _19 자간너트 사원에서 _23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_29 당신은 브라흐만의 집 _32 왜 신이 아닌 척 하느냐 _38
2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만물의 뿌리, 유일신 브라흐만
타고르가 명상하던 숲을 찾아서 _47 당신은 붓다의 제자인가 _51 릭샤왈라 카틱과 함께 _55 거꾸로 선 나무 _59 존재·지성·무한 _62 모름을 머금은 아이처럼 _67
3 내 안에 있는 신성의 불꽃 소중한 참자아, 아트만
나마스카! _73 값없는 것이 귀하다 _77 숨, 감각의 주인 _79 불멸의 신비 _82 내 영혼은 창조되던 날만큼 젊다 _88
4 이름 붙일 수 없는 큰 물건이 되라 범아일여(梵我一如),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
소 숭배는 현재진행형? _97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을 배우다 _105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 _108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_111 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라 _113
5 나는 춤추는 평화의 시바 세상은 덧없는 환영(MAYA)인가
신에게 미친 음유시인들 _119 노래하는 노래새 _123 마야의 세상에서 _127 땅에 날개가 닿지 않는 새처럼 _130 나뭇잎 접시에 황홀한 음악을 담아 _135
6 꿈을 깨고 신의 사원에 들라 죽음으로부터 불멸로
어머니 갠지스 강가에서 _143 죽음의 왕 야마의 가르침 _148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_152 불멸의 대양으로 인도하는 돛 _155
7 내버림의 지혜를 가지라 금욕이 주는 황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_167 금욕의 황홀을 즐겨라 _173 울면서 온 생을 웃으면서 떠나고 싶은가 _177 어둠의 성자, 마더 테레사 _181
8 신의 지혜라는 불로 얽매임을 태우라 해탈의 행복
알몸의 사두 _189 불의 정화의식 _193 허탈에서 해탈로 가는 여정 _197 신의 지혜라는 불로 모든 얽매임을 태우라 _202
9 신을 팝니다! 종교의 세속화를 경계함
비슈누, 가네샤, 칼리 팝니다 _207 신에게 값을 매기지 말라 _214 거룩한 삶에 대한 공경 _218 가장 위대한 구절 _222
10 백 년 가을을 살아라 윤회에 마침표 찍기
랄반 호수에서 _227 빨래하는 불가촉천민들 _231 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나는 길 _238 업(業)의 씨 없는 존재 _242 암베드카르와 마하트마 간디 _246
11 태양과 만물 사이에는 사이가 없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태양사원을 찾아서 _255 수리아에 점화된 생명의 원리 _264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_267 자비보다 무심이 낫다 _272
12 모든 굴레로부터 마음을 해방하라 내 영혼의 광휘를 일깨우는 요가
영성의 꿀을 채집하는 수행자 _279 나는 누구인가? _282 물질적 자아, 불멸의 자아 _285 마음의 요정을 다스리는 기술 _289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_294
틈틈이 인도 순례, 우파니샤드 입문서 내기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 있다’는 스승 만나 ‘비상’
강원도 원주에서 치악산 기슭으로 올라가다보면 ‘살구꽃 언덕’이
나온다. 행구동이다.
고진하(56) 목사가 사는 곳은 치악산 계곡과 맞닿은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고, 봄꽃 잔치가 한창인 2층집이다.
표정만이 아니라 삶터도 인간의 영혼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다운 집이요, 그다운 풍경이다. 그는 개신교 목사이면서도 목사만은 아니다.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하고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등 5권의
시집을 낸 영성 시인이자 숭실대 문예창작과와 모교 감신대에서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 뿐 아니라 틈나는대로 인도를 여행하는 순례자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부터 인도를 오가던 그가 최근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비채 펴냄)을
내놓았다.
영성시인다운 감각과 적절한 비유들이 곁들여진 이 순례기는
일반 대중들이 우파니샤드에 다가서기에 가장 적절한 책으로
손꼽을만하다. 우파니샤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전해주는 최고의 영적 지혜서다.
우파니샤드는 ‘가까이’(우파)+‘아래로’(니)+‘앉는다’ (샤드)의 합성어
로,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는 내 생의 위안이자
죽음에 이르기까지 위안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늘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예이츠, 막스 뮐러, 데이비드 흄
등 서양의 위대한 작가와 철학자들이 앞 다투어 <우파니샤드>를
연구하고 번역했다.
딸이 반려자로 데려온 무슬림 청년에 “한눈에 반해” 저자가 목사임에도 그는 ‘신(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당시 그의 절친한 친구조차 “인도에 미쳤군. 이젠 기독교의
울타리도 벗어나 훨훨 날아가려는 모양이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친구의 말처럼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도에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실은 그는 원할 때는 무엇에나 미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제도 종교의 좁은 틀로 가둘 수 없는 그의 영혼은 감신대 재학
시절 변선환 교수와 만나면서부터 비상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변선환은 동서신학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면서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성’
을 부인했다는 누명을 받고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 학장직,
교수직, 신자직까지 박탈당한 그의 스승이었다.
고 목사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 ‘종교 간의 경계를 넘어 광활한
영성의 바다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유영하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고 변선환 선생님께 바칩니다’라고 썼다. 스승에게 고백한 대로 그는 강원도 영월의 촌사람답게 강릉 사천
제일교회에서 8년, 이곳 치악산에서 9년째 살고 인도까지 오가며
자유롭게 유영했다. 그의 자유로움은 그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아내 권기화씨는 히말라야 요가를 해 깨어있으면서도 고요
하며 멋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요가수행자다.
또 권씨가 요가를 배우던 인도 리시케시로 따라나섰던 딸은
3년 전 타고르가 세운 인도의 산티니케탄의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조각공부를 하러갔다. 그 딸이 유학중 일생의 반려자감으로 택한
남자친구는 이란에서 온 무슬림 화가였다.
인도 여행중 바라나시로 딸이 데려온 무슬림 청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청년은 자신은 수피라고 했다.
무슬림 중에도 수피는 다른 종교를 거부하지 않으며 신성과 영성을
추구한다. 그 수피 청년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안은 듯한
눈빛의 예수 그림을 그에게 바쳤다.
치악산 그의 집 거실엔 무슬림 청년이 그린 예수 그림이 있다. 고 목사는 인도의 수많은 사원과 거리에서, 바람처럼 떠도는
음유시인인 바울들과 탁발 수행자들과 만나면서 점차 고요한
내면 속으로 들어갔다.
안내자는 물론 그가 가슴으로 안았던 우파니샤드였다.
마침내 “그대 안에 다 있는데, 왜 바깥 풍경만 기웃거리느냐?”
는 내면의 음성을 느낀다.
그러면서 시인답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보물은 네 안에 있는데, 왜 바깥에서 보물을 찾으려 그토록 애썼는가. 왜 나지도 죽지도 않는 네 존재의 항아리에 담긴 영원한 생명의 황금빛 보물을 캐내려 하지 않았는가. 눈만 뜨면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윤회의 고리를 보면서도 왜 환의 술에 취해 네 자신의 참된 자아로 깨어나지 못하는가….
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로 고 목사는 그런 물음에 대해 “네가 그것이다”, 즉 “네가 곧 아트만
(참자아)”이라는 자각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강이 끝내
하나의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내가 의탁해온 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가 어디인지를!
나는 <우파니샤드>를 읽으며 영성의 광활한 바다에 진입하는
희열을 맛보았고, 내가 믿어온 하느님이 바로 내 존재의 심연에
닻을 내리고 계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진리를 통해 천주교신자이면서 동학의
생명사상가였던 장일순 선생을 생전에 만났던 것보다 더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게 됐고, 마침내 자신의
참모습을 자각하게 됐다. 그는 기독교에 큰 광명을 비춰준 영성가로 어거스틴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꼽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원죄론만으로는 동양세계와 대화하기 어렵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지하의 광맥을 통해 기독교 영성이
동양의 종교들과 회통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우파니샤드를 경험한 뒤 성경에도 표현이 다른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7장이다. ‘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길어낼수록 더욱 더 풍성한 영성의 샘물은 우파니샤드를 통해
나왔다.
우파니샤드 중의 우파니샤드라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태양신 수리아를 ‘생명의 원리’(진리·다르마)로 본다고 한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원리가 최초로 태양에 점화되었다
는 것이다. 고 목사는 내가 내 안에 참자아가 있다는 것을 자각
한다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간,
즉 신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나온 책 한 장이 밝고 맑게 빛난다.
변변한 교회와 신자 하나 없지만 그래도 더욱 더 그러면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이란 무엇일까.
<바가바드 기타>를 주석한 비노바 바베는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을 ‘욕망 없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은 ‘나는 저 어둠을 살라버릴 거야.
어두운 지상에 빛을 비춰 새들을 지저귀게 하고, 꽃을 피어나게
하고,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도록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그저 하늘에 떠올라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출 뿐이다. 우리는 태양이 활동한다고 말하지만,
태양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캄캄한 어둠을 몰아내고, 지상에 빛을 비춰 만물을
자라게 하고,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태양을 두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말한다면, 태양은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빛은 나의 본성일 뿐이네. 꽃이나 새를 보게. 향기를 내뿜는 것이
이 꽃의 본성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새의 본성이듯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게 나의 본성일세. 나는 내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네. 나에겐 내 존재 자체가 빛일 뿐이네. 그렇다. 빛을 비추는 건 태양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도 행위 뒤의 결과를 생각한다.
은행에 예치한 돈이 있으면 돌아올 이자를 계산하듯이,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열매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고 남을 도울 때도 돌아올 보상을
계산한다.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다.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은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크리슈나는 이처럼 행위의 순수성을 상실한 오늘의 아르주나들에게
충고한다.
행위의 결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말라. 언제나 만족해하며 철저하게 독립적이 되라. 그러면 비록 이 행위의 한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대는 행위하지 않는 사람이다.
새벽 명상을 하다 문득 天上에선 듯 쟁쟁하게 울려오는 새소리를 들었다 가는귀먹은 늙은 하느님, 쿨쿨 코골며 새벽 단잠을 즐기는 젊은 것들이야 듣건 말건 청정한 새벽 숲속을 울리는 소쩍새, 뻐꾸기, 찌르레기 구슬픈 울음 소리……그 사이로 가끔씩 웬, 맑은 은방울 굴리는 새소리도 들렸다 (저 새소리가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藥이……?) 오, 그렇다면 올빼미 박쥐 굼벵이 등 어둠 속에서 퍼드덕거리며 꿈틀대는 진귀한 神樂들을 어렵사리 구해다 먹고도 肝에 달라붙은 암덩어리를 어쩌지 못해 싸리 가지처럼 빼빼 말라 죽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왜, 저 은방울 굴리는 목소리로 차라리 그대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드득 날아다오, 말해주지 못하고 새벽마다 징징 지렁이 울음 소릴 흉내내고 있는 걸까 아아, 그러나 나는 저 아시시의 聖者처럼 지상의 병든 새들을 불러 드넓은 가슴에 품어 안지 못해도 내 얇은 귓바퀴에 소리의 화살이 되어 정겹게 날아드는 황홀한 새소리에 취해 어둡고 음울한 지렁이 울음 소리를 잠시 거둔 이 청정한 새벽 숲속
신성한 숲 / 고진하
저녁놀을 공양 받고 있는 너에게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지. 엄마 젖을 빠는 아이처럼 너는 전신의 빨대로 완숙된 포도주를 빨기에 여념이 없었지. 다복솔과 아카시아, 철쭉과 자작나무, 시끄러운 지저귐을 멈춘 채 한껏 몸을 낮추는 새들, 그들 틈에 나도 끼어 그 극진한 공양을 받으며 발그레 취기에 젖어들었지. 잠시 후 보랏빛 어둠이 내리자, 너와 내가 받아먹은 놀과 어둠이 비빔밥처럼 안에서 비벼져 이름지을 수 없는, 그윽한 뭔가가 되었지. 이걸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 (시인은 이름짓는 자가 아니던가?) 위대한 밤의 동공인 부엉이와 별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나 혹 새겨졌을지 모를 그 이름을.
말뚝 / 고진하
삽십 년 만에 만난 배불뚝이 동창생 녀석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예나 이제나 고향 우시장(牛市場)에 박힌 말뚝처럼 비쩍 마른 건 여전하구나!"
평생 내 삶을 괴어온 내 안에 살아 계신 이가 불쑥 나서며 이렇게 날 변호하는 것이었다.
"비쩍 마른 말뚝임엔 틀림없으나 하늘과 땅을 잇는 말뚝이라네!"
쥐코밥상 / 고진하
홀로 되어 자식 같은 천둥지기 논 몇 다랑이 붙여먹고 사는 홍천댁 저녁 이슥토록 비바람에 날린 못자리의 비닐 씌워주고 돌아와 식은 밥 한 덩이 산나물 무침 한 접시 쥐코밥상에 올려놓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흙물 든 두 손 비비며.
모기 / 고진하
손등이 벌겋게 부풀도록 문 모기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이 구석 저 구석을 뒤지다 제풀에 지쳐 컴퓨터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늘, 오전 내내 죽치고 앉아 사이버 세상과 접속은 하였으나 화끈한 접촉은, 곰곰 따져보니, 모기가 처음이로구나.
밤이슬 몇 방울 스민 씨앗으로 사막의 삶을 연명한다는 쥐캥거루가 떠오르는 팍팍하고 메마른 나날들 벌써 구십 년대 초반 무렵의 얘기인데 절판된 내 첫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으로 앵앵거리는 모기를 후려쳐 잡았다는 차창룡의 유머러스한 시가 왜 아물아물 떠오르는 것이냐.
화끈하게 내려치는 시인의 잽싼 손동작과 시집 표지에 더럽게 들러붙었을 핏자국을 잠시 떠올려보다가 아까 보려고 켜둔 액정화면에 떠 있는 오늘의 뉴스; 미군 헬리콥터가 투하한 우라늄탄에 사망한 이라크인들 시신을 공동묘지로 변한 축구장으로 운구하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도 몰래 깊은 숨을 몰아쉰다.
삐쭘, 문 열어놔도 나갈 기미는 보이질 않고 다시 나타나 앵앵거리는 놈, 안보이는 놈을 어찌 잡으랴 니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간다. 뿔테 돋보기 하나 사러!
문주란 / 고진하
뜨락에 핀 꽃들을 보며 훤한 대낮부터 곡차 한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두들 벌게진 눈길로 길쭉길쭉한 푸른 잎새들 사이에서 말 자지 같은 긴
꽃대를 하늘로 쑥 뽑아 올린 문주란을 감상하고 있는데, 훌떡 머리 벗겨진
중늙은이 居士가 문주란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이년 저년 집적거리지
말고 문주란처럼 좆대를 하늘에다 꽂아, 하늘에다 말이야! 대머리 거사의 일갈 때문일까. 문주란이 놓여 있는 뜨락 위의 하늘이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쨍쨍해 보였다.
*** 고진하 시인은 사제라서 그런지 시창작의 대부분을 일상의
성화(聖化)나 인간 내면의 신성 탐구에 바치고 있다.
일상의 성화란 밥 먹고 노동하고 섹스하고 이웃과 사귐을 갖는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신성의 임재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결국 성속일여(聖俗一如)라거나 "누구도 일상을
통과하지 않고는 신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인간 내면의 신성 탐구란 동학에서의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한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인데, 이는 신의 외모라기보다 신의 속성을 받고 태어났음을
말한다. 신의 여러 속성 중 하나만 들면 창조성으로, 실제로
인간은 신으로부터 만물의 이름을 짓는 자의 허락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일관된 종교적 상상력을 통하여 성과 속의 통합 균형을
추구하고, 신성과 육체의 소통 화해를 꿈꾸며, 초월의지와
현실감각 사이의 접점을 찾는 화목제(和睦祭)의 시인 고진하.
그의「신성한 숲」에서 시적화자인 나는 "완숙된 포도주"와
같은 저녁놀을 공양 받고 있는 숲에 들어가 그 숲과 그 숲 속의
나무와 꽃과 새와 함께 나도 힘껏 노을을 빤 탓에, 마치 술을
마신 것처럼 "발그레 취기에 젖"는다.
그리고 나와 숲과 노을과 곧이어 찾아드는 보랏빛 어둠은
이윽고 비빔밥처럼 하나로 비벼져, "이름지을 수 없는,
그윽한 뭔가가" 되었는데, "위대한 밤의 동공인 부엉이와
별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나/ 혹 새겨졌을지 모를
그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묻는 시다.
아마도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이라고나 불려질 것 같은
그 이름을 그대는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뜨락에 핀 꽃들을 보며 훤한 대낮부터 곡차 한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두들 벌게진 눈길로 길쭉길쭉한
푸른 잎새들 사이에서 말 자지 같은 긴 꽃대를 하늘로
쑥 뽑아 올린 문주란을 감상하고 있는데, 훌떡 머리 벗겨진
중늙은이 거사(居士)가 문주란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이년 저년 집적거리지 말고 문주란처럼 좆대를 하늘에다
꽂아, 하늘에다 말이야!/ 대머리 거사의 일갈 때문일까.
문주란이 놓여 있는 뜨락 위의 하늘이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쨍쨍해 보였다."
일상의 성화나 인간 내면의 신성 탐구를 더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칫 음담패설과도 같은 산문시「문주란」이다.
시인은 이 시를 써놓고 1년이나 망설인 끝에 발표했다고
한다. 왜 망설였을까.
결국 성과 속, 신성과 육체, 초월과 현실이란 게 깨달음의
눈 속에서는 서로 화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시인 바, 너무도 투명하도록 아름답지 않은가.
/ 고재종 시인
악양시편 1 / 고진하
스물거리는 안개가 악양 들판의 고요를 하늘로 밀어 올리는 새벽 , 그 고요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들판을 바라보니 들판 또한 나를 바라보네. (오, 들판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다니 !) 반 뼘쯤 자란 논보리도 초록초록 눈을 떠 나를 바라보네. 논보리밭 사잇길 말뚝에 매인 흑염소 두 마리도 고개를 갸웃대며 낯선 나를 바라보네.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어린 뿔로 들이받을 듯 달려들기에 뿔 없는 나도 손가락뿔 세워 저를 받는 시늉을 하며 흥에 겨워 한참을 노는데, 어디서 갑자기 불어온 돌개바람에 보리밭이 흔들리고 냇가의 억새가 흔들리고
어린 흑염소 뿔이 흔들리고 흑염소와 놀던 나도 휘청, 흔들리네 문득 중심을 잃은 황홀에 몸 비비다 다시 눈을 들어 들판을 바라보네. 오늘 같은 날은, 악양 들판이 일으키는 초록 지진에 흔들리다 파묻혀도 좋겠네.
악양 시편 2 / 고진하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낙원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청학동으로 통하는 고개 중턱, 계단식 다락논에 자라는 푸르르게 출렁이는 보리밭을 만났다. 그 푸름에 온통 물들고 싶어 발에 베고 온 신발마저 훌렁 벗어던졌다. 그 푸름을 담아 가고 싶은 욕심에 맨발로 보리밭으로 들어가 포즈를 이리저리 잡는데, 보리밭 골에 은신해 있던 짐승 한 마리가 놀라서 후닥닥- 달아났다. 아, 고라니 ! 가슴까지 차오르는 계단식 보리밭을 성큼성큼 뛰어오른 고라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낙원으로 사라졌다 나는 낙원 저 아래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 고진하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깨진 항아리 조각 같은 달이 터진 상처에서 비쳐 나오는 붉게 엉킨 피를 물고 지상에 이별을 고하고 있다 짧은 이별 뒤엔 곧 漆桶 속 어둠이 뚜껑을 열어 검은 새들을 풀풀 날리고, 한밤 내 검은 새들이 텅 빈 골짜기를 배회하며 목젖 없는 아이가 질러대는 시끄러운 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지저귐을 토해 낸다 왜 새들은 이 밤 칠통 속 둥지로 돌아와 주둥이를 박고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삐끔히 열린 밤의 들창에서 새어나오는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고통스런 지저귐, 혹은 누군가 거칠게 코고는 소리 어쩌면 지금 악몽으로 뒤척이는 그들은 긴 코를 땅에 박은 鼻行類*가 되어 꿈마저 저당잡힌 꿈길 위에 무서운 절망의 외발자국을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짜기 도처 악취 풍기는 폐수와 썩지 않는 쓰레기 더미 위로 무성하게 피어난 인공 독버섯이 뒤덮인 땅에 식식거리는 두 마리 황소를 앞세워 분노의 쟁기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그들은 지금 품안으로 날아드는 검은 새들과 함께 쑥넝쿨만 우거진 조상들의 무덤 속 죽음의 磁力에 이끌려 숯처럼 깨끗한 죽음을 연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나는 모른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머니의 聖所 / 고진하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 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 어머니가 하얀 행주를 빨고 또 빨아 반짝반짝 닦아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 눈 밝은 햇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님도 와 제 모습 비춰보는걸, 뒷산 솔숲의 청살모 다람쥐도 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 하늘을 말아쥐고 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저렇게 내려다보는걸, 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 남사스럽제...)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배풀 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연탄을 갈며 / 고진하
무쇠 난로의 연탄을 갈던 열아홉 청년은 어디로 가고
쉰내 나는 쉰다섯의 중년이 연탄을 갈고 있나,
도대체 어디로 갔나, 황당한 물음은 잠시 접어두고
연탄 구멍을 찬찬히 헤아려본다. 어라, 옛날엔 십구공탄이었는데,
다시 헤아려보아도
이십오공탄 하여간 여전히 팔팔한 청춘이다.
내 나이 이십오공일 때,
그 팔팔한 청춘일 때 어디서 뭘 하고 놀았던가, 이런 구멍마다
이글이글 연정의 불꽃을 피워 올렸었던가.
때론 과열로, 과부화로 불끈거리는 욕망의 집을 다 태워먹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제 구멍은 점점 많아지고, 오백년 묵은 느티나무 밑둥치에
파인 구멍처럼 구멍도 점점 넓어져
찬바람만 숭숭 드나드는데, 오십오공, 오 오십오공에도,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까, 없는 청춘을 불사를 수 있을까.
나는 난로에서 빼낸 재를 들고 집 앞 공터로 간다.
겨우내 버린 연탄재 해골 더미처럼 수북하다 이십오공도,
오십오공도, 그 팔팔했던 청춘의 기억도 이 공동묘지에 들면
모두 공(空)! 나는 삼가 두 손을 모은다. 합장(合掌)!
겨울 우화 / 고진하
바람 그칠 날 없는 천둥산 기슭 홀쭉한 배때기에 들바람이나 잔뜩 부풀려 양철집, 삐그덕거리는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아내는 밑빠진 가계부 쓰기에 여념이 없다
말이 그럴 듯해 목사관(牧師館), 배고픈 쥐들이 대낮부터 낡은 양철 지붕을 갉아대는지 톱 연주 소리가 그럴듯한 울림으로 방안에 그득하다
가까이서 마주친 적은 없지만 오랜 고행(苦行)으로 터럭과 이빨만 무성히 자란 은수자(隱修者)들일까?
빨간 볼펜을 끼운 채 접혀진 가계부를 저만치 밀쳐 놓고 좌선하듯 멍하니 빛바랜 장미꽃 무늬 벽에 눈길을 던지고 있는 아내의 입에서, 쥐약을 꼭 놓아야겠어요! 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 전에, 나는
문득 배때기에 부풀린 들바람을 시원하게 토해내며 사나운 한 마리 들고양이가 된다 순간, 괜히 장미꽃잎이나 갉으며 면벽하던 인쥐 한 마리도 까르르 웃어 넘어지고
굴뚝의 정신 / 고진하
저 나지막한 함석집, 저녁밥을 짓는지 포르스름한 연기를 굳게 피워올리며 하늘과 내통(內通)하는 굴뚝을 보고 내심 반가웠다 거미줄과 그을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창틀에 올망졸망 매달린 함석집 아이들이 부르는 피리 소리, 그 단음(單音)의 구슬픈 피리 소리도 곧장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울어도 울어도 천진한 동심(童心)은 목이 쉬지 않고 저처럼 쉽게 하늘과 연통(連通)하는구나!
아 아직 멀었다 나는 저 우뚝한 굴뚝의 정신에 닿으려면! 괄게 지핀 욕망의 불 아궁이 속으로 지지지 타들어가는, 본래 내 것 아닌 살, 하얀 뼈들 지지지 다 타고 난 하얀 재마저 쏟아버리지 못하고 다만 무심천변(無心川邊)에 우두커니 서서 저녁밥 짓는 포르스름한 연기 피어오르는 저 우뚝한 굴뚝을 바라만 보고 있는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 / 고진하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 숲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이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冠)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오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오, 그렇다면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피와 살과 푸들푸들 떨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들여진 행복에 더 이상 소금 뿌리지 않아도 될 것인가. 때때로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서 상한 죽지를 퍼덕이며 날아 내리는 풋내 나는 주검들마저 완벽하게 포장하는 그의, 그의 도제(徒弟)로 입문하기만 하면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꽃뱀 화석 / 고진하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그런데, 오늘, 숲으로 막 꺾어들기 직전 구불구불한 길 위에 꽃무늬 살가죽이 툭, 터진 꽃뱀 한 마리 길게 늘어붙어 있다. (오늘은 꽃뱀부터 읽어야겠군!) 짝 깔린 등과 꼬리에는 타이어 문양(文樣), 불꽃같은 혓바닥이 쬐끔 밀려나와 있는 머리는 해 뜨는 동쪽을 베고 누워 있다. 뭘 보려는 것일까, 차마 다 감지 못한 까만 실눈을 보여주고 있는 꽃뱀. 온몸을 땅에 찰싹 붙이고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녀 대지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 거라고 믿어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神으로 숭배했단다. 눈먼 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 사신(蛇神), 사신이여, 이제 그대가 갈 곳은 그대의 어미 대지 밖에 없겠다. 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 숲 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 여한도 없겠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부서진 사체는 화석처럼 굳어지며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산책, 오늘 내가 읽은 산이라는 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소지(燒紙)로 화한 셈이다. 햇살에 인화되어 피어오르는 소지 속으로, 뱀눈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대관령 수도원 / 고진하
그곳에 당도하려면 빽빽히 우거진 소나무숲을 더듬어야 한다 물론 서늘한 계류의 물소리를 거슬러가도 된다 그곳에는 수도사도 없고 염주 돌리는 손도 없다 최신식 나무 보일러를 돌리기 위해 처마끝에 쌓아놓은 장작과 도끼날을 받아 허리 잘록 팬 모탕이 경건에 이르는 고통을 웅변할 뿐이다 언젠가 그곳 관리인의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다 나보다 몇십 배나 큰 고로쇠나무를 쳐다보며 고로쇠나무의 눈물 같은 수액을 받아먹던 날을 떠올리면 내 목숨이 그곳의 나무들과 구름과 바위와 물소리에 연이어져 있음을 섬뜩하니 깨닫곤 한다 그곳에는 저 스스로 택한 가난이 있고 생명의 진액이 있다 누구나 그 진액을 받아먹고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아랫마을 어흘리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운 실비단 안개에 붙잡혀 하산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성산(聖山)이다 모탕과 고로쇠나무와 그곳을 휩싸는 실비단 안개에 자기의 혼(魂)을 내맡길 수만 있다면
그곳에 가다가 파릇파릇한 소나무숲에서 실종될 용기를 가질 수만 있다면!
라일락 / 고진하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사마귀 / 고진하
푸른 들판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성스런 신전, 치렁치렁 긴 베일을 늘어뜨린 무당이나 사제처럼 연한 녹색의 얇은 명주와 같은 날개를 펼쳐 들고 기도하듯 하늘을 향해 다소곳이 앞발을 모아 곧추세우고 있는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염주알을 굴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염주알을 굴리듯 상하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살의(殺意)를 감춘 두 눈알, 오늘의 제물은 메뚜기 두 마리와 십자왕거미 한 마리, 또는 형형색색의 나비 몇 마리쯤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득 제단 앞에 꿇어 엎딘 경건한 수도자의 기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날치를 잡는 작살처럼 날랜, 혹은 거대한 원목을 끌어당겨 씹어버리는 원형의 톱 같은 두 개의 톱니발 사이에 꽉 끼워진 제물들은 톱밥처럼 부서져 그녀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성찬으로 올려진다 그녀의 신성(神性)은 먹이를 얻기 위한 덫, 신성불가침의 불칼을 두른 저 울타리 속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다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알주머니에서 나와 같이 살아온 동족마저 살해하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바글대는 흉물스런 새끼들이 담긴 알주머니를 토해 놓는 생산의 여신(女神), 괴이한 마성(魔性), 삐딱하게 보는 것이 익숙한 사팔뜨기들에게 일명 기도버마재비*라고도 불리어지는
*사마귀과(螳螂科)에 속하는 이 곤충은 라틴어 학명으로
기도버마재비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聖化 / 고진하
어스름이 깔리는 저물녘 누렁이는 제 집 앞의 마른 땅바닥을 주둥이와 앞발로 공들여 파고 있었다 뭐하러 저리도 열심히 땅을 팔까, 궁금해 멀찌감치서 가만히 지켜 보니, 길쭉한 제 주둥이가 파묻힐 만큼 땅을 판 뒤 낮에 던져준 소뼈다귀를, 먹다가 남은 뼈다귀 두 조각을 땅속에 밀어넣고 곁의 흙을 다시 긁어 덮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쯤 배가 고프면 소복한 봉분을 헐고 거기 저장해 둔 뼈다귀를 꺼내 먹겠지 전에도 그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래, 네 놈이 배가 불러도 배터지는 줄 모르고 아귀아귀 먹어대는 인간들보다 낫구나 성스러움의 聖자도 모르는 놈이지만 인간이 먹다 버린 뼈다귀조차 저렇게 聖化하고 있구나! 허허, 그 놈!
성스런 바느질 / 고진하
비탈진 관동양묘원,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 검게 그을은 늙은 아낙네들이 두더지처럼 납죽 엎디어 있다. 겨우 10cm 될까말까 한 어린 자작나무 묘목을 촘촘히 심고 있는 저 갈퀴손들은, 말하자면, 지금 뻥 구멍 뚫린 지구를 꿰매고 있는 것이다. 흰머릿수건을 벗어 쏟아지는 구슬땀을 훔치며 바늘 대신 쪽삽으로, 한 땀 한 땀 지구의 뚫린 구멍을 푸르게푸르게 누비고 있는!
미완의 불상 / 고진하
읍내 나가는 길가에 뿌연 돌가루 날리는 석재공장이 있었다. 어느날, 석재공장 뒤꼍을 돌아가는데
버려진 폐석더미 속에 한쪽 귀 한쪽 팔 떨어진 앉은뱅이 부처가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 반가웠다 그 돌덩이는 불구(不具)인 날 쏙 빼닮아 있었던 것이었다
얼음수도원 1 / 고진하
- 피정(避靜) 일기
지난밤 꿈에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을 보았다.
얼음벽돌로 세워진 얼음수도원.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얼음십자가상과 얼음성모상 앞에서 성체 조배를 바치고 찬미가를 불렀다.
하얀 콧김과 하얀 입김이 날리며 수도사들의 긴 머리칼과 눈썹과 수염에 고드름이 맺히게 했다.
저녁미사 시간, 수도사들이 바치는 비나리의 뜨거운 숨결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얼음집을 다 녹였다. 얼음수도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도사들도 사라졌다.
잠을 깨고 난 뒤, 온종일 사라져버린 얼음수도원을 묵상했다.
무념무상의 설원(雪原)에 들 수 있었다
얼음수도원 2 / 고진하
- 피정일기
두꺼운 방한복을 뒤집어쓰고 스키를 질질 끌며 그곳에 가도 내가 머물 영혼의 의자는 없겠다.
잔디 한 뿌리 자랄 수 없는 빙원이니 내 죄의식과 불안을 자라나게 할 고해소도 없겠다.
고해소가 있다 한들 그곳을 찾아가다가 입이 얼어붙어 죄를 고백할 수도 없겠다.
무슨 경전이라곤 쓰여진 적이 없는 곳, 죄도 은총도 서식할 수 없는 곳, 신의 지문(指紋)이라면 얼음계곡에 묻힌 오랜 물고기의 뼈다귀들뿐이겠다.
광막한 얼음황무지, 지옥의 국기를 꽂기 위해 찾아오는 탐험가들만 잠시 머물다 떠날 뿐이다.
오늘도 난 스키를 지치며 그곳에 다녀왔다. 없는 영혼의 의자를 그곳에 마련해 두고 왔다. 상징이다.
즈므 마을 1 / 고진하
푸른 이정표 선명한 즈므 마을, 그곳으로 가는 산자락은 가파르다 화전을 일궜음직한 산자락엔 하얀 찔레꽃 머위넝쿨 우거지고 저물녘이면, 어스름들이 모여들어 아늑한 풀섶둥지에 맨발의 새들을 불러 모은다 즈므 마을,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성소(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 나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발에서 신발을 벗는다 벌써 얄팍한 상혼(商魂)들이 스쳐간 팻말이 더딘 내 발걸음을 가로막아도 울타리 없는 밤하늘에 뜬 ?빛 몇 점 지팡이 삼아, 꼬불꼬불한 산모롱이를 돈다 지인이라곤 없는 마을, 송이버섯 같은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가물거리는 불빛만이 날 반겨준다 저 사소한 반김에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지나온 산모롱이 쪽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저 나직한 소리의 중심에, 말뚝 몇 개 박아 보자, 이 가출(家出)의 하룻밤!
* 즈므 마을
'저무는 마을'에서 유래된, 강릉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즈므 마을 2 / 고진하
산비알에 핀 홍단풍 노을을 등에 지고 귀가하는 늙은 농부
집앞에 노을을 한 짐 부려놓고 어둑발 먼저 들어 등목을 하는 계류에 나와 발을 담근다
퉁퉁 부은 발등 위로 찰랑찰랑 떠오르는 별들 늙은 농부의 발은 누가 씻어주나 별들이 씻어주나
저 쇠가죽 같은 발에 엎드려 쪽쪽 입맞추는 별빛!
지게게 / 고진하
잿빛 뻘밭을 잰걸음으로 달리는 귀여운 지게게를 본 적 있니? 조개 껍데기든 나뭇조각이든 제 몸을 감출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등에 지고 잰걸음으로 달리는! 오늘은 몽산포 부근 뻘밭을 발갛게 물들이는 수십만 평 노을을 등에 지고 (가벼움의 극치를 보여주듯) 재게재게 달리다 물방울 뽀글뽀글 솟는 뻘구멍 속으로 쏙! (暗電!) …본 적 있니?
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 고진하
윙윙거리는 소리가 좀 이상해 보일러통이 있는 뒤껸으로 돌아가다 일러통 옆, 진득한 거미줄에 걸려 있는 흰줄표범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더듬이와 몸통은 거미에게 파먹혔는지 보이지 않고 찢긴 날개 끝 희고 붉은 표범가죽 무늬가 선명한 두 날개만 흔들흔들.
가여운 생각에 손끝으로 사뿐히 두 날개를 집어올렸더니 거미줄 쳐진 나무 기둥에는 깨알같이 잔뜩 쓸어놓은 노란 알들.
갑자기 난 숙연해진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푸른 햇살 아래 밀어내놓은 신생(新生)의 꿈들!
새가 된 꽃, 박주가리 / 고진하
어떤 이가 새가 된 꽃이라며,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씨를 가져다주었다 귀한 선물이라 두 손으로 받아 계란 껍질보다 두꺼운 껍질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놀라웠다 나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의 새가 되고 싶은 꿈이 고이 포개어져 있었다 그건 문자 그대로, 꿈이었다 바람이 휙 불면 날아가 버릴 꿈의 씨앗이 깃털의 가벼움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꿈이 아닌, 꿈의 씨앗도 아닌 박주가리의 생(生), 어떤 생이 저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 어느 별의 토기에 새겨진 환한 빛살무늬의 빛살이 저보다 환할 수 있을까 몇 며칠 나는 그 날개 달린 씨앗을 품에 넣고 다니며 어루고 또 어루어 보지만 그 가볍고 환한 빛살에 눈이 부셔, 안으로 안으로 자꾸 무너지고 있었다
월식 / 고진하
뭉쳐진 진흙덩어리, 오늘 네가 물방울 맺힌 욕실 거울 속에서 본 것이다. 십 수 년 전의 환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 아니다.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 진흙 가면. 그걸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퍽 대견스럽다. 하지만. 여름 나무가 푸른 잎사귀에 둘러싸여 있듯 그걸 미리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은 너의 한계, 너의 슬픔.
오래 전. 너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 개기월식은 지금도 진행 중. 드물지만 현명한 이는 그래서 매일 죽는다. 그리고 안다. 죽어야 어둠 속에서 연인의 달콤한 입술이 열린다는 것을.
욕실 거울에 비친 한 그루 藏禮木. 이름과 형상이야 어떻든, 너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무 아래서 너는 질척이는 욕망과 소음의 때를 밀고 고요한 쉼을 얻는다.
달 없는 밤.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목차
작가의 말 _19
1 왜 신이 아닌 척 하느냐? 불멸의 신성, 참자아를 찾아서
해에 씻긴 지구의 혼들 _19 자간너트 사원에서 _23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_29 당신은 브라흐만의 집 _32 왜 신이 아닌 척 하느냐 _38
2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만물의 뿌리, 유일신 브라흐만
타고르가 명상하던 숲을 찾아서 _47 당신은 붓다의 제자인가 _51 릭샤왈라 카틱과 함께 _55 거꾸로 선 나무 _59 존재·지성·무한 _62 모름을 머금은 아이처럼 _67
3 내 안에 있는 신성의 불꽃 소중한 참자아, 아트만
나마스카! _73 값없는 것이 귀하다 _77 숨, 감각의 주인 _79 불멸의 신비 _82 내 영혼은 창조되던 날만큼 젊다 _88
4 이름 붙일 수 없는 큰 물건이 되라 범아일여(梵我一如),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
소 숭배는 현재진행형? _97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을 배우다 _105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 _108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_111 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라 _113
5 나는 춤추는 평화의 시바 세상은 덧없는 환영(MAYA)인가
신에게 미친 음유시인들 _119 노래하는 노래새 _123 마야의 세상에서 _127 땅에 날개가 닿지 않는 새처럼 _130 나뭇잎 접시에 황홀한 음악을 담아 _135
6 꿈을 깨고 신의 사원에 들라 죽음으로부터 불멸로
어머니 갠지스 강가에서 _143 죽음의 왕 야마의 가르침 _148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_152 불멸의 대양으로 인도하는 돛 _155
7 내버림의 지혜를 가지라 금욕이 주는 황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_167 금욕의 황홀을 즐겨라 _173 울면서 온 생을 웃으면서 떠나고 싶은가 _177 어둠의 성자, 마더 테레사 _181
8 신의 지혜라는 불로 얽매임을 태우라 해탈의 행복
알몸의 사두 _189 불의 정화의식 _193 허탈에서 해탈로 가는 여정 _197 신의 지혜라는 불로 모든 얽매임을 태우라 _202
9 신을 팝니다! 종교의 세속화를 경계함
비슈누, 가네샤, 칼리 팝니다 _207 신에게 값을 매기지 말라 _214 거룩한 삶에 대한 공경 _218 가장 위대한 구절 _222
10 백 년 가을을 살아라 윤회에 마침표 찍기
랄반 호수에서 _227 빨래하는 불가촉천민들 _231 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나는 길 _238 업(業)의 씨 없는 존재 _242 암베드카르와 마하트마 간디 _246
11 태양과 만물 사이에는 사이가 없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태양사원을 찾아서 _255 수리아에 점화된 생명의 원리 _264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_267 자비보다 무심이 낫다 _272
12 모든 굴레로부터 마음을 해방하라 내 영혼의 광휘를 일깨우는 요가
영성의 꿀을 채집하는 수행자 _279 나는 누구인가? _282 물질적 자아, 불멸의 자아 _285 마음의 요정을 다스리는 기술 _289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_294
틈틈이 인도 순례, 우파니샤드 입문서 내기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 있다’는 스승 만나 ‘비상’
강원도 원주에서 치악산 기슭으로 올라가다보면 ‘살구꽃 언덕’이
나온다. 행구동이다.
고진하(56) 목사가 사는 곳은 치악산 계곡과 맞닿은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고, 봄꽃 잔치가 한창인 2층집이다.
표정만이 아니라 삶터도 인간의 영혼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다운 집이요, 그다운 풍경이다. 그는 개신교 목사이면서도 목사만은 아니다.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하고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등 5권의
시집을 낸 영성 시인이자 숭실대 문예창작과와 모교 감신대에서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 뿐 아니라 틈나는대로 인도를 여행하는 순례자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부터 인도를 오가던 그가 최근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비채 펴냄)을
내놓았다.
영성시인다운 감각과 적절한 비유들이 곁들여진 이 순례기는
일반 대중들이 우파니샤드에 다가서기에 가장 적절한 책으로
손꼽을만하다. 우파니샤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전해주는 최고의 영적 지혜서다.
우파니샤드는 ‘가까이’(우파)+‘아래로’(니)+‘앉는다’ (샤드)의 합성어
로,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는 내 생의 위안이자
죽음에 이르기까지 위안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늘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예이츠, 막스 뮐러, 데이비드 흄
등 서양의 위대한 작가와 철학자들이 앞 다투어 <우파니샤드>를
연구하고 번역했다.
딸이 반려자로 데려온 무슬림 청년에 “한눈에 반해” 저자가 목사임에도 그는 ‘신(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당시 그의 절친한 친구조차 “인도에 미쳤군. 이젠 기독교의
울타리도 벗어나 훨훨 날아가려는 모양이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친구의 말처럼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도에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실은 그는 원할 때는 무엇에나 미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제도 종교의 좁은 틀로 가둘 수 없는 그의 영혼은 감신대 재학
시절 변선환 교수와 만나면서부터 비상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변선환은 동서신학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면서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성’
을 부인했다는 누명을 받고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 학장직,
교수직, 신자직까지 박탈당한 그의 스승이었다.
고 목사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 ‘종교 간의 경계를 넘어 광활한
영성의 바다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유영하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고 변선환 선생님께 바칩니다’라고 썼다. 스승에게 고백한 대로 그는 강원도 영월의 촌사람답게 강릉 사천
제일교회에서 8년, 이곳 치악산에서 9년째 살고 인도까지 오가며
자유롭게 유영했다. 그의 자유로움은 그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아내 권기화씨는 히말라야 요가를 해 깨어있으면서도 고요
하며 멋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요가수행자다.
또 권씨가 요가를 배우던 인도 리시케시로 따라나섰던 딸은
3년 전 타고르가 세운 인도의 산티니케탄의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조각공부를 하러갔다. 그 딸이 유학중 일생의 반려자감으로 택한
남자친구는 이란에서 온 무슬림 화가였다.
인도 여행중 바라나시로 딸이 데려온 무슬림 청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청년은 자신은 수피라고 했다.
무슬림 중에도 수피는 다른 종교를 거부하지 않으며 신성과 영성을
추구한다. 그 수피 청년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안은 듯한
눈빛의 예수 그림을 그에게 바쳤다.
치악산 그의 집 거실엔 무슬림 청년이 그린 예수 그림이 있다. 고 목사는 인도의 수많은 사원과 거리에서, 바람처럼 떠도는
음유시인인 바울들과 탁발 수행자들과 만나면서 점차 고요한
내면 속으로 들어갔다.
안내자는 물론 그가 가슴으로 안았던 우파니샤드였다.
마침내 “그대 안에 다 있는데, 왜 바깥 풍경만 기웃거리느냐?”
는 내면의 음성을 느낀다.
그러면서 시인답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보물은 네 안에 있는데, 왜 바깥에서 보물을 찾으려 그토록 애썼는가. 왜 나지도 죽지도 않는 네 존재의 항아리에 담긴 영원한 생명의 황금빛 보물을 캐내려 하지 않았는가. 눈만 뜨면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윤회의 고리를 보면서도 왜 환의 술에 취해 네 자신의 참된 자아로 깨어나지 못하는가….
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로 고 목사는 그런 물음에 대해 “네가 그것이다”, 즉 “네가 곧 아트만
(참자아)”이라는 자각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강이 끝내
하나의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내가 의탁해온 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가 어디인지를!
나는 <우파니샤드>를 읽으며 영성의 광활한 바다에 진입하는
희열을 맛보았고, 내가 믿어온 하느님이 바로 내 존재의 심연에
닻을 내리고 계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진리를 통해 천주교신자이면서 동학의
생명사상가였던 장일순 선생을 생전에 만났던 것보다 더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게 됐고, 마침내 자신의
참모습을 자각하게 됐다. 그는 기독교에 큰 광명을 비춰준 영성가로 어거스틴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꼽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원죄론만으로는 동양세계와 대화하기 어렵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지하의 광맥을 통해 기독교 영성이
동양의 종교들과 회통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우파니샤드를 경험한 뒤 성경에도 표현이 다른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7장이다. ‘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길어낼수록 더욱 더 풍성한 영성의 샘물은 우파니샤드를 통해
나왔다.
우파니샤드 중의 우파니샤드라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태양신 수리아를 ‘생명의 원리’(진리·다르마)로 본다고 한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원리가 최초로 태양에 점화되었다
는 것이다. 고 목사는 내가 내 안에 참자아가 있다는 것을 자각
한다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간,
즉 신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나온 책 한 장이 밝고 맑게 빛난다.
변변한 교회와 신자 하나 없지만 그래도 더욱 더 그러면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이란 무엇일까.
<바가바드 기타>를 주석한 비노바 바베는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을 ‘욕망 없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은 ‘나는 저 어둠을 살라버릴 거야.
어두운 지상에 빛을 비춰 새들을 지저귀게 하고, 꽃을 피어나게
하고,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도록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그저 하늘에 떠올라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출 뿐이다. 우리는 태양이 활동한다고 말하지만,
태양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캄캄한 어둠을 몰아내고, 지상에 빛을 비춰 만물을
자라게 하고,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태양을 두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말한다면, 태양은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빛은 나의 본성일 뿐이네. 꽃이나 새를 보게. 향기를 내뿜는 것이
이 꽃의 본성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새의 본성이듯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게 나의 본성일세. 나는 내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네. 나에겐 내 존재 자체가 빛일 뿐이네. 그렇다. 빛을 비추는 건 태양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도 행위 뒤의 결과를 생각한다.
은행에 예치한 돈이 있으면 돌아올 이자를 계산하듯이,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열매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고 남을 도울 때도 돌아올 보상을
계산한다.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다.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은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크리슈나는 이처럼 행위의 순수성을 상실한 오늘의 아르주나들에게
충고한다.
행위의 결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말라. 언제나 만족해하며 철저하게 독립적이 되라. 그러면 비록 이 행위의 한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대는 행위하지 않는 사람이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