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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28,10-22ㄱ
그 무렵
10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11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5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17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19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의 본이름은 루즈였다.
20 그런 다음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21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22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 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무한 은총을 무상으로 주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치유를 가로채는 짓이 병원과 의사에게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기를 가로채는 짓이 기 치료사에게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옆집으로 가는 전기를 내가 몰래 끌어다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 아이를 살리러 주님께서 가시는데 그 길의 중간에서 주님의 기를 가로챈 여인의 행위는 치유 가로채기이고, 이런 행위는 병원과 의사에게는 어림없고 기 치료사에게도 어림없습니다.
한량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얘기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한량이 있고 힘도 한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량(限量)이란 양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고, 인간이 유한하다고 함은 이처럼 양의 한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한이란 한계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 곧 한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에 한계가 없고 은총에 한계가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여인의 행위는 죽은 소녀에게 가야 할 주님의 사랑이나 은총을 가로챈 것이 아니고, 누구나 끌어다 쓸 수 있는 무한 전기선에서 전기를 조금 끌어다 쓰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런 경우 끌어다 쓰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고 현명함이며, 끌어다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음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여인처럼 하지 못할까요?
어떤 사람이 여인처럼 현명하지 못할까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한량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한량없다는 것은 알지만 하느님께서 그것을 무상으로 주실 거라는 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한 은총을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은 선물이나 협력이 필요하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이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굴하지 않는 믿음, 창피함도 이겨내는 믿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은 구원의 보증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실 수 있지만 준비된 마음 안에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간수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는 영적인 치유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있어 그 바탕이 됩니다.
저는 기도를 청하는 분에게 가능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의 역사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안수를 받는 사람과 공명을 이룰 수 있으며, 저의 간절한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를 청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안수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을 체험하게 합니다.
안수하는 사제와 받는 이의 마음이 통하게 될 때 놀라운 하느님의 역사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백혈병으로 고통을 겪던 학생, 혀암으로 시련에 봉착한 자매, 위암 수술을 마친 자매,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는 형제, 난소암으로 불안해하는 자매, 가슴 깊이 미움의 응어리를 가진 사람, 용서와 화해를 원하면서도 아무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 상처를 덧내고 있는 분, 남모르는 아픔을 겪는 모든 분에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해 주시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 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 굳이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으로 경탄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비웃을 것이며 구경거리로 삼고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굳건한 믿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를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주고, 세례명을 불러주고, 손을 잡아 주는 가운데 사랑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치유면 치유, 소생이면 소생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예수님 공생활의 절정기가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회당장의 딸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완전 절명한 그녀를 소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묵상하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치유사화, 소생사화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궁극적인 가르침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권능으로 소생된 회당장의 딸은 물론 생명과 젊음과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인지는 모르지만 남아있는 생애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3~40년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또다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생이 무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소생보다는 영원한 주님 나라에서의 영생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근원적 결핍과 모남과 나약함으로 인해 틈만 나면 여기저기 상처입고 영혼의 피를 흘리던 저였습니다.
피투성이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혈루증 여인처럼 솔직하고 용기 있게 주님께 매달리지 못하는 제가 더 심각한 중증의 환자였습니다.
어떻게서든 혈루증 여인처럼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옷자락 술에 내 손길만 닿으면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간절한 믿음을 지니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어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육신은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로, 허깨비처럼, 좀비처럼 흐느적 흐느적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숨만 겨우 쉬고 있지,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삶을 마지못해 연명해왔습니다.
다시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손길에 온전히 의탁함을 통해, 그분께서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고, 나를 온전히 차지하게 하시게 되도록 청해야겠습니다.
내 안에서 나는 점점 사라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더 커지시는, 그래서 잠시라도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를 완전히 비워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생명의 주님’이라는 말은 인간의 목숨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만 하시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즉 멸망을(영원한 죽음과 소멸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생명을 받기를 거부해서 잃게 됩니다.
얻으려고 하면 얻을 수 있는데도 노력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은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이제 곧 소녀를 살리겠다고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긴 잠’일 뿐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라자로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요한 11,11-15)
라자로의 경우에는, 그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머무르신 다음에(요한 11,6), 즉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 그에게 가셨습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딸이 죽은 다음에 예수님에게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왔고,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르 5,22-23; 루카 8,41-42).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 때문에 멈추게 되었고, 그 사이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마르 5,35; 루카 8,49).
표현만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데, 전후 상황을 보면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원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마태 8,5-13) 굳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즉 말씀만으로 회당장의 딸을 바로 고쳐 주실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라자로의 경우에는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게 라자로의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믿음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해석됩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당신이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계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인데, 사실 이 이야기도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사실상 죽은 것과 같은, 또는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
(루카 8,43)
그 여자의 병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여자는 완전히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라도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르 3,10).
분명히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직접 간청하지 않고 몰래 옷을 만진 것은 그 병의 특성 때문에, 즉 수치심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 직접 간청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 미신이 되어버립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믿음이 기적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더욱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찾으라 -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이다”>
“항상 깨어 있으시오.”(마태 25,13)
왜관 수도원에서 내일 7월11일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는 김치삼 알렉산델 수사의 상본 성구입니다.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걱정하지 마라.”(이사 41,10)
역시 내일 7월11일 왜관 수도원에서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는 고건상 멜키올 신부의 상본 성구입니다.
1973년 첫 서원 후 반세기 50년 동안 한결같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면서 수도원에서 정주해온 두 분 수도자의 삶이 참 위대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두분의 응답의 노력이 함께 이뤄온 놀라운 성취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제가 참 좋아하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구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시편 118,1)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시편 89,2ㄱ)
하루하루 하느님만을 찾으며 50년 동안 평범한 일상에 충실해온 두 분 수도자입니다.
위 수도자는 저보다 두 살 위이지만 저는 1986년 첫 서원을 했으니 수도연륜으로는 13년 선배입니다.
당시 저는 교대 재학중 입대하여 군 복무중이었고 저는 1974-1981년까지 8년동안 교편생활하다 1982년 입회했으니 하느님의 부르심은 이처럼 참 다양하고 신비롭습니다.
늦은 나이에 출발했기에 남보도 2배는 충실히 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절박하게 살아왔고 지금 이렇게 강론을 쓰고 있습니다.
참 중요하고 힘든 것이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한 삶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옛 사막교부의 금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절박한, 절실한 갈망이, 열정이 있을 때, 때가 되면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어제의 각별했던 만남에 감사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열망이 있기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일입니다.
1998년부터 그러니까 25년 동안 한결같이 제 시집과 강론을 정리하여 복사 제본해다 준 자매인데, 대학 강의중 3월초 과로로 인한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재활병원에 입원중 만5개월만에 처음 외출하여 수도원 오전 10시 주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 미사에 참석했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특별한 반가움에 외출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나눴고 다시 재활병원에 귀원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간절한 열망, 절박한 마음에 눈만 열리면 언제 어디서 제 때에 찾아와 만나 주시는 주님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아, 문득 의술醫術이 인술仁術임을 보여준 치과의사 형제의 감동적 일화가 생각납니다.
연초록 풀잎에 맺힌 투명한 빗방울이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진과 함께 보내준 카톡메시지입니다.
“주일이지만 보호자분의 간절한 요청으로 아는 수녀님과 함께 뇌졸중으로 와상중인 35세 청년의 치아 검진을 위해 봉천동에 갑니다.
... 빗속을 뚫고 가서 만난 봉천동 청년은 참 해맑았습니다.
헌신적인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져서 그 짧은 검진과 간단한 잇몸 처치의 시간이 제겐 더 큰 은총이었습니다.
... 투명한 빗방울처럼 제 영혼이 맑아지는 밤이길 기도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만남에 치유의 구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간절한 열망이 있을 때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the sacred place)’가 됩니다.
오늘 형 에사우의 보복을 피해 도주중인 야곱의 심정은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간절히 하느님을 찾았을 것이며 꿈중에 주님을 만나 확약을 받습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고, 너를 다시 이땅으로 데려 오겠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자 소스라치게 놀라 고백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베개를 가져다 기념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작명합니다.
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주님과 만남의 추억은 늘 평생 야곱의 뇌리에 생생했을 것입니다.
절박하게 하느님을 찾을 때, 바로 거기에 하느님은 찾아 오시고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회당장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창세기의 야곱처럼 양상은 달라도 주님을 찾는 갈망은 하늘에 닿았기에 마침내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당시 곤경중에 있던 분이 둘 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갈망과 열망의 사람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던 둘뿐이었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쫓아내신 뒤에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그 사이 예수님은 자기 옷자락에 손을 댄 여자의 간절한 열망의 믿음을 알아채린후 즉시 치유의 구원을 선언합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 주님과 만남의 일화인지요!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주님을 찾으십시오.
간절한 열망의 믿음이 있을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됩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여기가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입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
(2티모 1,1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6월 16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에서는 ‘사제성화의 날’이 있었습니다.
저는 해외에 나와 있기에 최근 4년간 참석을 못하였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은 제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002년 사세성화의 날입니다.
당시 저는 경기지역에서 사목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사목체험’을 발표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경험도 일천하고, 사제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고사했습니다.
신부님은 강사료라는 당근과 선배의 권위라는 채찍으로 제게 다시 권하였습니다.
저는 당근에 마음도 끌리고, 선배의 권유도 무시할 수 없어서 발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문에서 읽었던 글로 발표를 시작하였습니다.
‘춘잠도사사방진(春蠶到死絲方盡) 납촉성회루시건(蠟燭成灰淚始乾), 미득선수실( 未得先愁失) 당환기작비(當歡己作悲),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저의 말에 마음을 조금씩 열어갈 때 저는 제가 생각하는 사목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목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만이 아니다. 사목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목이란 습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3년간 있었던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벌써 21년 전의 추억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듯이 저의 발표는 교구청에 있는 신부님들께도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목국장 신부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제갈공명도 아닌데 교구청에서 저를 찾아왔다니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국장 신부님은 교구 사목국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저는 겨울에는 30일 피정을 하고, 여름에는 성지순례를 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국장신부님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저는 2002년 10월 1일부터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본당에서 강론만 하던 제게 교육담당 사제의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보통 2시간 강의를 준비해야 하고, 18개 지구에서 실시하는 교육의 강사를 섭외해야 했습니다.
한 두 번은 모르지만 18번을 강의하려고 하는 강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의에도 경험이 생기면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성격이라 2년 전에 강의를 부탁하면 대부분 강의 부탁을 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사목국에서 3년을 지내고 캐나다로 이냐시오 영성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사제성화의 날 우연히 찾아온 발표의 기회가 저의 사제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3년 사제성화의 날에 교구장님은 사제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직접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교구장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교구장님은 이 시대의 사제에게 필요한 것은 ‘영성’이며 영성은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 전담 사제를 더욱 늘려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쇄신 기도 피정, 성체조배 피정, 이냐시오 피정, 향심기도 피정, 예수마음 기도 피정’ 중에 하나는 3년에 한 번씩 꼭 신청하라고 하였습니다.
피정을 통해서 다양한 교회의 영성을 체험한다면 사제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영향으로 사제성소가 감소하고 있는데 교구에서는 사제성소를 늘려가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제성소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제들이 영성으로 무장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제들이 헌신한다면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사제성소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만큼 신앙생활의 성장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교구장님은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유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의 사제들이 교구장님의 사목지침을 잘 따른다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이런 회사는 잘 운영될까요? 아니면 망할 것 같습니까?
CEO의 계획을 직원들이 믿고 따르는 회사, 부하 직원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회사, 직원들은 CEO의 계획을 잘 숙지해서 그 계획을 더 발전시키는 회사.
아마 잘 운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면 어떨까요?
직원들이 CEO의 계획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CEO 본인도 직원을 무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이런 회사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쫄딱 망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하느님의 계획과 여러분의 계획을 비교하면 어떤 계획이 나을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계획이 훌륭하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느님의 계획을 잘 숙지해서 더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계획만을 내세우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청해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청하고 또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물 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물속에 빠지고 맙니다.
이 상황(자기)을 보게 되면서 물속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많은 성인성녀께서는 이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떤가요?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회당장이 찾아와 예수님께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그 상황만을 보고 있었다면 아마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이 자고 있을 뿐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소녀의 손을 잡아 살려줍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장의 집을 갈 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치유의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 역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 계획이 아닌,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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