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류열풍 사랑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ㆍ한국역사바로알기 고구려인 제왕 이정기[제나라]
배달국인 추천 0 조회 665 10.11.19 11:32 댓글 42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0.11.19 13:12

    장보고는 백제 유민 출신이 아니라 신라땅에 있는 섬(유인도) 중에 하나인 청해진(지금의 완도)에서 자라난 인물 입니다. 어떤 계기로 당나라에 가게 된거죠. 그후로 당나라 신라방 에서 자라고 생활 하다가 출세 하기 시작 해서 유명인이 된겁니다

  • 작성자 10.11.19 13:55

    지다이님의 글中

    제나라의 구성원들이 고구려유민이라고 하시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제나라의 구성원들은 백제유민들입니다. 당시 고구려유민 20여만 명은 내주와 영주에 집결했다가 안휘성과 강서성, 사천성, 감숙성 등의 내륙 오지로 가게 됩니다. 이들이 보장왕과 함께 다시 요동에 모이게 되지만 각곳에 흩어져 있던 20만명이 모두 왔을리는 만무하고 또 보장왕이 말갈과 함께 저항을 도모하다 다시 하남도, 농우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지요. 즉 당시 안동도호부에는 고구려의 구심점이 될 만한 세력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요동반도 이서지역에 강제 이주되어 살던 고구려 유민들도 대조영과 함께 발해 건국에 참여해 안동도호부에

  • 10.11.19 20:49

    제나라 구성원이 고구려유민이 아니라 백제 유민 이라고 배달국민 님은 말 하는데요. 제나라는 고구려 유민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 스패셜에서도 방영된적 있습니다. 발해가 건국 된 후에 몇십년 지나서 이정기가 등장 한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작성자 10.11.19 15:05

    단천님/ 지다이님의 말씀입니다.

  • 10.11.19 20:51

    지다이님의 말 이라고 하는데 전 약간 다른데요 제가 기역력 부족으로 자세한 설명은 힘들어서 못하겠고, 역사스페셜에서 말한것으로 대신 하려 합니다

  • 10.11.19 21:43

    배달국인님은 지다이님의 댓글을 인용한건데 뭐가 다르다는건지요?

  • 작성자 10.11.21 23:37

    단천님// 5426번 지다이님의 댓글이 올라와서 자료를올린것입니다. 확인해보시죠.

  • 작성자 10.11.19 13:56

    지다이님의 글中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발해가 건국된 마당에 그 옆에 고구려유민들이 있는 안동도호부를 둔 다는 것은 화근을 붙여두는 겪인데 당나라에서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요. 이정기의 고종사촌이자 평로절도사로 임명되었던 후희일이 안사의 난이 계속되는 와중에 평로군 2만 명을 이끌고 산동반도로 남하할때 쯤엔 안동도호부에 고구려유민이 거의 없었습니다. 즉, 이정기 일가는 고구려 유민이지만 그의 건국 기반은 고구려유민이 아닌 산동반도에 있던 백제유민들입니다.

  • 10.11.19 20:52

    제나라는 옛 고구려 지역인 안동 도호부 지역이 아니고 지금 중국 지역 지도에 한반도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이 있습니다 산동 반도 라고 들은것 같은데 그곳과 가까운 지역으로 역사 스패셜에도 소개 되었지요

  • 작성자 10.11.19 15:03

    지다이님//

    지다이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요서를 중심으로 활동한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백제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문을 보더라도 백제는 멸망하고 약 150년 가까이 백제라는 이름을 잇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요.
    님의 말씀은 이해하겠는데요, 왜 고구려 유민들이 백제인들로 둔갑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님의 말씀이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이 백제유민들로 둔갑이 되는군요.(장보고 포함) 님과 제가 차이를 보이는 내용이 동영상 15분정도에서 35분 사이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꼭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 작성자 10.11.19 14:57

    물론 역사스페셜이나, 한국사, 다큐등등이 다 맞는것은 아니지만 이정기의 대해서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 10.11.19 16:43

    배달국인님 말씀에 동감... 어느 순간부터 고구려 유민이 백제유민으로 둔갑되는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함에도 그러한 설명이 없네요.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당나라는 고구려인들을 영주지방 즉 평로군 소재지로 대거 옮겼죠. 이들이 바로 이정기의 무력기반입니다. 이정기는 이 평로군 출신 고구려유민들을 이끌고 산동반도로 건너간거죠 이정기의 기반을 백제유민이라 하셨는데 이정기의 건국기반은 백제유민이 아닌 고구려유민입니다. 그렇기에 구당서, 신당서는 이정기를 고구려인이라 기록하고 있죠

  • 10.11.19 16:55

    지다이님 글 중에서 뭔가 앞뒤가 안맞는게 있네요. 분명 지다이님은 이정기 일가의 기반이 백제유민(재당신라인)이라 했고, 장보고가 백제유민이라 했죠. 그런데 만약 이정기 일가의 기반이 백제유민이라면, 그리고 장보고가 백제유민이라면 어째서 장보고는 이정기 왕국을 공격했을까요? 제의 마지막 왕 이사도를 토벌할 때 분명히 장보고가 소속된 무령군이 제나라 공략에 동원되었죠. 이는 뭔가 앞뒤가 안맞네요. 같은 재당신라인이 같은 재당신라인을 공격한다라? 오히려 제나라는 고구려계이고, 그런 고구려인에 반발한 재당신라인이 당나라를 도와 제를 멸망시켰다고 보는게 더 설득력 있는거 같네요

  • 작성자 10.11.19 17:08

    호루스님// 그렇네요... 지다이님 말씀처럼 장보고가 백제인 또는 백제인의 후예라고 한다면 제나라 마지막 왕인 이사도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또 제나라와 대진국,발해와의 교류관계도 많았었다는것은 제나라는 고구려계"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보입니다.

  • 10.11.19 16:40

    지다이님은 장보고가 재당신라인 출신인데, 사실 재당신라인은 곧 백제유민이다 그렇기에 장보고는 백제 유민의 후예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제기한 사람이 김성호씨로 알고있습니다.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그런 주장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분은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는 책을 쓴 분이죠. 이분의 주장이 일면 그럴듯해보이고 솔깃해 보이지만, 장보고가 재당신라인의 후예라는 사료가 없는바 이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 싶습니다.

  • 10.11.19 16:37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普)나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에는 장보고의 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절강성 소흥사람으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다. 장보고의 고손(高孫)에 해당하는 장정필(張貞弼)은 고려초기에 안동의 호족이 된다."


  • 10.11.19 16:43

    이정기에 관한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 10.11.19 17:07

    별말씀을...^^

  • 10.11.19 20:54

    제가 알기에 이사도는 고구려 출신 이고 장보고는 신라 출신 입니다

  • 10.11.19 20:57

    물론 『자치통감』에 "웅진도독부를 건안고성으로 옮겼다. 앞서 서주 연주에다 사민하였던 백제의 호구는 건안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당서』에 "백제의 땅은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나누어졌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건안성으로 옮긴 백제유민들이 있던 지역이 발해에 의해 차지되었다는 암시입니다. 즉 구당서의 기록은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영토가 신라, 건안성으로 옮겨진 백제유민들의 터전이 발해에 의해 먹혔다는 기록이라 볼 수 있죠. 일례로 발해 2대 임금 무왕 때 요서지방에 있던 마도산까지 원정을 가고, 3대 문왕은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요동지방을 발해의 영역으로 굳힙니다.

  • 10.11.19 20:59

    이에 따르면 백제유민들이 살던 건안성은 이미 발해에 의해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지다이님은 이정기의 기반이 백제유민이라 하셨습니다.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구당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이미 백제유민은 발해에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더군다나 요동~요서지방에 살던 고구려인이 발해 건국과정에서 발해에 흡수되었다고 하셨지만, 그 곳에 살던 고구려 유민 전부가 발해 건국에 참여한 것은 아니겠지요. 분명 낙오되어 남아있는 고구려인들도 있었을 겁니다.

  • 13.10.14 06:17

    구당서에는 이정기에 대해 "이정기는 고구려인"이라 기록을 남깁니다. 만약 그가 백제인이라면 백제인이라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함에도 고구려인이라 남아있죠. 이 말은 요서지방에 백제인 뿐 아니라 고구려인들이 살고있다는 강력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정기가 평로군을 이끌고 치청지역을 공략할 때 데리고 간 병력 상당수도 고구려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건안에 있던 백제인들은 이미 발해에 흡수되었으니 말이죠
    더욱이 이정기가 고구려인이기 때문에 그의 강력한 기반은 같은 고구려인이라 보는게 타당할 듯 싶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0.11.20 01:05

    이정기 집단의 주축이 백제유민이라 칩시다. 님은 장보고도 백제유민의 후예라 했죠. 그럼 백제유민인 장보고가 같은 백제유민의 나라 제를 치는건 설명이 되는지요? 게다가 산동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이정기 집단이 백제유민 집단이라 보는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데요.

    장보고도 연원장씨보감이라든지 삼국사기, 번천문집 등을 참고로 볼 때 그는 재당신라인이라기 보다는 신라인으로 보는게 합당합니다만... 장보고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도 장보고=재당신라인설에 어이없어 하더군요.

  • 10.11.20 01:12

    전쟁을 각오하며 산동으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 산동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후희일이 관할하던 평로군은 안록산의 난 때 반란의 본거지였고, 범양의 이회선, 북방의 해족이 사방에서 압박하는 상황에서 당 조정의 지원을 받기 곤란했기 때문에 보다 쉽게 당 조정의 지원을 받고자 산동으로 이동한 겁니다. 백제 유민 집단이기 때문에 옮겨갔다는 건 말이 안되고요. 요서지방에 고구려인들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 10.11.20 01:17

    이정기의 출신에 대해 고구려인이라 말한게 바로 이정기 일가가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된 집단이기 때문이 아닌지? 이정기에 대해 연구한 지배선 교수님, 정병준 교수님의 논문을 보면 고구려 유민과의 연관성이 높다 나오지 백제유민과의 연관성이 높다는 말은 제가 본 바 없습니다. 일단 백제유민 집단이라면 사료상에 백제유민임을 암시하는 문구가 나타나야 하는데 자치통감, 구당서, 신당서에는 그런 문구가 없지 않나요? 게다가 백제유민 집단이 세운 나라가 제나라면, 백제 유민들이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당을 도와 멸망시켰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출하게 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0.11.20 02:06

    장보고=백제유민
    제나라=백제유민 주축

    이라 하시는데.... 819년 이사도의 제나라 토멸전에 참여한 군대 중 무령군이 있지요. 무령군의 군중소장은 아시다시피 장보고이고요. 무령군은 지금의 강소성으로 여기에도 신라방이 있었죠. 님의 논리라면 여기 신라방도 사실상 백제유민들의 거치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만약 제나라가 백제 유민이 주축이 되었다면, 어째서 무령군에 살던 백제유민들과 장보고는 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 10.11.20 02:16

    산동=백제의 터전, 이정기가 산동으로 간건 그들 집단이 백제유민이기 때문이라 하셨는데... 일단 백제의 대륙진출설은 하나의 설입니다. 물론 저는 이를 긍정하고 있지만, 백제의 대륙진출이 설일 수 밖에 없는건 바로 유물, 유적이 발굴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지다이님은 산동은 백제의 영토였으니 이정기 집단은 백제유민이라 하시는데... 그 역시 100% 정확한 사실도 진실도 아닌 설 아닌지요?. 님은 이 설을 마치 진실인양 포장하고, 이를 간과한 지배선 교수님을 질타(?)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 10.11.20 02:32

    위덕왕이 동청주자사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백제가 차지했다... 뭐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만... 고대 중원왕조의 책봉수수를 보면 허직을 제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일례로 고구려 장수태왕은 남제로부터 영주평주 이주 자사란 책봉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거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제수한 걸 보면 허직이라 볼 수 있지 않나요? 제가 아는 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형의 말을 빌리자면 책봉수여는 굳이 영토점거와 상관이 없는거라 하더군요.

  • 10.11.20 02:35

    이정기의 출신에 현혹되어, 평로군의 대다수가 백제유민을 간과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영주지방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수가 발해 건국에 참여했지만, 그 곳에 살던 고구려인들이 모두 증발하지는 않았겠죠. 그렇기에 고구려인 이정기가 존재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가 고구려인이라는 건 중요합니다. 그가 평로군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건 평로군 대다수가 고구려인이었기에 가능했죠. 평로군이 백제인이라면 이정기가 아무리 날고기어도 그들을 사로잡았을 수 있었을까요? 평로군이 고구려인 출신이라는 점은 지배선 교수가 밝힌바 있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0.11.20 02:55

    제가 언제 이정기가 장강, 회수 유역을 지배했다고 했나요? 제가 하지도 않은 말을 마치 했다는 식으로 단정지으시네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0.11.20 03:01

    윗 글에 김문경 교수님이 언급하신 대로 산동에는 백제유민들만 있는게 아니었죠. 백제인, 신라인, 고구려인, 당나라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데 마치 님은 산동=백제유민지역이라 단정지으며 말하고, 제나라가 백제유민이 주축이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전 그 점을 꼬집은 겁니다. 과연 이 지역에 백제유민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도대체가 제나라가 백제유민의 나라라 볼 건덕지도, 근거도 없는데 마치 님은 이걸 자신있게 주장하고, 이정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지배선 교수의 연구결과를 무시하지 않나요?

  • 10.11.20 03:12

    제나라에 어찌 백제유민 뿐이겠습니까? 지다이님은 평로치청의 성격을 백제유민에 치중하여 백제계로 보고 있지만, 구당서, 신당서에 그 지도자인 이정기 일가가 고구려인이라 기록한 만큼 당연히 고구려계 국가로 보아야 하지 않나요? 이게 저와 님의 차이인 듯...

    p.s.산동으로 갔기 때문에 평로군은 백제유민이다 전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군요. 논리적 근거가 빈약하고, 너무 성급한 단정인 듯....

  • 10.11.20 03:19

    오랜시간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0.11.20 03:03

    백제유민이 요서지역에서 이동한 평로군의 일원 => 자치통감의 기록을 들어 주장하는지요? 하지만 자치통감에는 백제유민들을 고구려 건안성으로 옮겼다고 나와 있죠. 그리고 그 건안성은 발해가 접수합니다. 백제유민들은 당연히 발해에 흡수되었겠죠.

    그리고 요서지방에는 상당수의 고구려인이 남아 있었을텐데요. 그리고 그런 고구려인이 주축이 된 평로군이 산동반도로 가 그 곳에 살던 신라인, 백제인, 고구려인을 아울러 독자세력을 구축했다고 보시는게 타당할텐데요

  • 10.11.20 03:18

    그 건안고성에 대해 요동의 건안성이라 보는 견해도 있고, 요서의 건안고성, 복건성의 건안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요. 일단 전 건안고성을 요동의 건안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웅진도독부가 발해에 먹혔다는 기록은 없지요. 전 구당서의 백제땅을 발해말갈과 신라가 나누어 가졌다는 걸 기록을 보고 그렇게 해석한 겁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요동의 건안성을 웅진도독부가 거처를 옮긴 곳이라 보고 있죠.) 이렇게 해석하는 분이 저 말고도 몇 몇 계십니다.

  • 작성자 10.11.21 23:39

    놀러간 사이에 댓글이...헐~^^

    시간이 늦어서 내일 읽어볼께요.^^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