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국민조선역사(國民朝鮮歷史)에는 우리의 다른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이름 하나가 있다.
최남선은 그를 중국내 광대한 지역을 총괄했던 고구려 유민이라고 일러준다.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후손. 이정기는 어떻게 중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수 있었을까? 천이백년전 중원대륙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정기(李正己)는 732년 중국에서 출생해 781년에 사망한, 신라가 삼국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를 통합한 뒤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같은 한국 사서(史書)보다 중국의 기록에 더 많이 등장한다.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구(冊府元龜), 문헌통고(文獻通考)... 모두가 8세기 중원대륙을 지배했던 당(唐)나라 때의 문헌들이다. 이 기록들은 모두 이정기란 인물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고구려 출신으로 평로치청절도사라는 관직을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 문헌에서는 당나라의 지방관리였던 이정기가 자신의 지역에서 징수한 세금을 당나라 중앙정부에 내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지방관리가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하나의 독립된 형태의 국가를 다스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정기(李正己) 번진(藩鎭)세력의 중심지역인 중국 청주(淸州)시는 당나라의 번성했던 도시 중 하나다. 청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수 있는 청주박물관에서 이정기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사람으로 산동성 일대를 다스렸으며 그의 통치로 백성들은 편안하고 나라는 번성했다.'
바로 당대(唐代) 청주의 대표적 인물은 이정기였던 것이다.
샤망차이 청주박물관 부관장 "당나라 시대에 이정기가 통치하던 청주는 경제적으로 큰 전성기를 누렸다."
그렇다면 당시 이정기의 행적을 알려줄 유적은 없는 것일까. 현재 청주시 박물관이 있는 자리가 예전 청주성 자리다.지금도 박물관 주변엔 옛 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벽돌로 쌓아올렸다. 이건 명나라 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벽돌만으로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벽 안쪽으로 토성의 흔적을 발견했다.
샤망차이 부관장 "이 성벽은 옛 청주 성벽이다. 밖에서 보이는 벽돌은 명나라 때, 안에 있는 성벽은 당나라 때의 것. 이정기가 통치할 때 보수한 성이다."
후대 사람들이 성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벽돌을 사용했지만 당나라 때는 토성이었다. 이 성의 주변엔 적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해자가 아직도 남아있다. 성의 흔적은 청주시 박물관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외곽지역에도 남아있다. 성벽의 맨 윗부분은 말을 달릴수 있을 정도로 넓다. 외곽 성터 주변 밭이 있는 자리는 예전에 강이 흘렀다고 한다. 해자가 여기까지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현재 남은 유적을 토대로 정리해보면 옛 청주성은 주변에 해자가 있는 토성으로 그 길이가 최소한 13km나 됐다. 성의 높이는 대략 20m, 가장 윗부분의 넓이는 6m. 웬만한 공격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거대한 성이었다.
청주시지의 기록에 의하면 이정기의 군대는 병력 10만명에 달했고 그 주위의 번진세력이 그를 몹시 두려워 했다고 한다.
왕샤이즈 산동성 사회과학원장 "이정기는 중국내 번진 가운데 가장 큰 세력으로 막강한 군사력으로 치청 15개주를 점령했고 작전구사와 전투능력이 뛰어나 당나라 관군 및 타 번진들과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당시 청주를 거점으로 한 이정기의 치청군[枝城郡] 면적은 산동성(山東省)과 안휘성(安徽省) 강소성(江蘇省) 일대까지 포함하고 있어 신라의 영토보다 넓었다. 인구수 또한 540만명에 달했다. 당시 중국내의 번진세력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정기의 공식 지위는 평로치청절도사(平路枝城節度使). 그러나 문헌에는 그가 관직과 군사력, 행정과 세금을 독자적으로 운영했다고 전한다. 당(唐) 조정에서조차 그를 제압할 힘이 없어 벼슬만 높여주어 달래주었다는 것이다.
세금이 적고 법령이 안정됐던 8세기 청주. 이정기라는 강력한 통치자의 보호 아래 관직과 형벌까지 공평하게 집행되던 그때, 청주는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청주를 중심으로 한 이정기의 관할지역은 주변 15개주에 달했다. 동쪽으로는 황해연안의 등주(藤州)에서 체주(締州)까지, 서쪽으로 보면 위로는 황하 유역의 북주(北州), 그리고 아래로는 운하를 통해 중국 전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 서주(西州)까지 그 세력이 뻗쳤다. 단순히 영토만 넓은 것이 아니었다. 이 산동성 일대는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농업과 상업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더욱이 비록 공식적으로는 당나라의 지방관리인 절도사였지만 그가 다스린 영토는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관리를 위임받은 땅이 아니다. 이정기가 군사력으로 전투를 통해 확보한 영토인 것이다.
이정기가 절도사가 된 것이 765년. 668년에 고구려가 패망한지 1백여년이 흐른 후이다. 이미 1백여년에 망해버린 나라의 후손이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구당서에 의하면 이정기는 지금의 중국 조양(朝陽)시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조양시는 중국 동북지역의 중심도시로 영주(永州)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기록을 검토해보면 이정기가 태어난 것은 732년. 당시는 당황(唐皇) 현종(玄宗)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였다. 668년 당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됨으로 대제국 고구려는 멸망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재건을 두려워한 당나라는 2만8천호에 달하는 고구려인을 중국 각지로 강제이주시키기 시작한다. 고구려 유민들은 장안으로 운주로 혹은 발해로 흩어졌다. 그때, 중국으로 끌려온 유민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곳, 그곳이 바로 영주, 지금의 조양이었다.
동가오 조양시 북탑문물관리소장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시단족 무허족 고구려 민족 등이 영주와 영주 근처에서 살았다."
조양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 가문에서 태어난 이정기는 군인의 길을 걷는다. 768년 서른 셋이 되던 해. 그는 사촌형 후희일을 절도사로 옹립하는 일을 주도한다. 한마디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이 당나라 군대 안에서 어떻게 이처럼 세력을 키워갈수 있었을까.
왕샤이즈 원장 "당나라의 징병방법은 다른 왕조와 다르다. 소수민족을 군관이나 군사로 모집했는데, 고구려인을 포함한 기타 다른민족 사람들에게 지방을 다스리게 했다. 변방지역 한족(漢族) 병사는 3분의 2를 넘을 수 없었다. 평로군의 경우 3분의 1이 고구려인이었다."
당시 영주, 즉 조양은 당나라의 동북지역 군사 요충지였다. 42m에 달하는 이 거대한 탑은 중원 왕조가 이 지역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게 해준다. 8세기 당나라 최대의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도 바로 이곳 조양을 본거지로 활동했다. 안록산은 이곳의 절도사가 된 뒤 그 세력을 키워 755년 대대적인 당나라 공격에 나선다. 그때 이정기의 나이 23세. 당나라 평로군의 군인이었다.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안록산의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평로군의 군사 2만명은 이정기의 지휘 아래 발해만을 건너 등주로 향한다. 그때 그의 군사 중 대부분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이정기의 군대는 산동성 일대에서 안록산의 군대와 여러차례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 무렵 당나라 조정에서는 안록산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서 변방 각지에서 병사를 모집한다. 이때 합류한 진압군 중에서 가장 뛰어난 군대가 위구르족으로 구성된 회홀의 부대였다. 이정기는 군대의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회홀과 대련을 벌여 이기게 되는데, 이는 진압군의 병사들이 모두 이정기를 따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력을 장악한 이정기는 후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의 자리에 오른다.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이정기는 765년, 평로 치청절도사라는 이름으로 중원대륙의 역사에 등장한다. 이것은 중원 대륙 속의 고구려 왕국, 이정기왕국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리게 된 이정기가 반기(反旗)를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해 절도사 이외에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壓渤海新羅兩藩使)와 요동군왕(遼東君王)의 작위를 내린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이 바로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라는 관직이다. 이것은 당나라 조정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발해, 신라와의 외교업무를 이정기에게 맡겼다는 뜻이다. 이 직책을 통해 이정기는 자신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는 전기를 마련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최단거리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도시 등주... 중국으로 가는 국가간 공식 사신단은 물론,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가 바로 등주다. 이정기가 이 등주 일대를 장악한 것은 765년. 그것은 곧 중국의 외교업무와 무역을 장악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20여년간
기록에 따르면 발해와 신라의 사신단이 활발하게 중국을 오고 갔다. 일년에 두세 차례씩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업무를 모두 이정기가 관장한 것이다.
국가간의 공식외교가 활발해지자 일반인들의 왕래 또한 크게 늘었다. 등주 주변 각 도시에는 신라인들의 마을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정기가 다스리고 난 뒤 20년 후에 이곳을 여행한 일본 승려 엔닌[圓仁]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그 신라인 마을의 존재를 말해준다.
더욱이 이정기가 다스린 영토 안에서 당시 귀하기로 소문난 발해의 명마가 해마다 끊이지 않고 거래됐다. 외교업무를 맡았던 이정기가 이를 통해 대외무역까지 장악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이정기의 세력은 이제 중원 대륙을 벗어나 발해와 신라,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8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은 이정기였던 것이다.
이정기의 독립왕국은 국제교역뿐 아니라 자체생산력으로도 큰 부를 획득했다. 이정기가 다스리던 산동성 일대는 곡물생산량이 당나라 전체 생산량의 10%이상을 차지하는 중국내 가장 비옥한 영토였다. 더욱이 중국 동쪽 해안가를 따라 거대한 염전이 조성돼있었다. 이 염전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내려오는 중국내 최대 규모다. 당시 소금은 황금에 비유될 정도로 귀한 특산물이었다. 따라서 당나라 전체 소금생산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이정기는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가게 된다.
이정기 독립왕국의 생산력은 전 지역에 걸쳐 고르게 분포돼있다. 밀주 체주에선 소금이 생산되고 해주와 연주 기주 등지엔 철과 동이 풍부했다. 이곳의 생산량에 따라 당나라 전체의 물자 공급이 좌지우지 될 정도였다. 체주 복주등에서는 당나라 전체 생산량의 30%가 넘는 비단이 생산됐다. 당나라의 주요물산을 이정기가 장악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779년부터 이정기가 관장하던 당나라의 대외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먼저 신라가 당나라에 보내는 공식사절의 수가 줄어들었다. 35년동안 총7번 왕래했다면 외교관계가 거의 단절됐음을 의미한다. 양국간의 특별한 마찰이 없었다는 점을 놓고보면 이건 분명 이정기가 당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정기가 서서히 당나라 조정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내륙 5개주를 추가로 점령하고 중원대륙의 외교와 무역을 독점하던 이정기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운주(運州)로 근거지를 옮기고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한다.
이정기 독립왕국의 두번째 수도, 운주. 그 위치를 놓고 볼 때 운주는 지금의 동평현 부근이다. 동평현은 황하강을 끼고 있는 중국 내륙의 도시다. 그러나 시내 중심부에선 옛 성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지진으로 성이 파괴됐고 물에 잠겼다고 한다. 마을 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 동평호. 이 호수속에 옛 운주성이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779년 청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그는 왜 이 황하강변으로 수도를 옮겼을까. 그가 이곳에서 하려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동평주지에 따르면 운주성이 호수 속에 가라앉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의 일이었다. 갑작스런 황하의 범람이 그 이유였다. 황하 유역의 도시들은 이렇듯 항상 범람의 위험에 노출돼있다. 그런데도 이정기는 왜 이곳을 선택했던 것일까.
이정기의 영토 안에서 보면 운주는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지만 당나라 수도와는 직선거리로 200km로 아주 가까와진다. 이정기의 목표는 당나라 수도였던 것이다.
지배선 단국대학 교수 "이정기는 당나라에 절도사의 관직을 받았지만 당나라 조정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당나라에 대항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구당서(舊唐書) 이보신전(李保信傳)에 보면 보신과 정기는 두 황제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정기는 중원대륙 전체를 통치하는 천자(天子)가 될 꿈을 가지고 당나라를 공격하려는 의사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이정기(李正己)가 운주로 근거지를 옮기자 당황한 당나라 조정은 변주에 성을 쌓고 벙어태세에 들어갔다. 이정기는 제음 일대에서 10만 대군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당의 입장에서 보면 이정기는 황제가 임명한 지방관리인 절도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 이정기는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이정기 세력과 당나라 간의 전쟁은 피할수 없는 대결이었다. 이정기는 성덕절도사 임명과정에 개입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을 절도사에 임명하라고 당나라에 요구한다. 이것은 당나라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정기 세력과의 결전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당나라 조정에서는 전군에 옹교와 와구를 반드시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당시 이정기의 중심 활동무대는 운주와 조주. 하지만 용교와 와구는 그보다 훨씬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당나라 때 용교로 불리던 곳은 지금의 숙주시 부근이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북부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숙주(蘇州)는 남부의 식량과 물산이 집결하던 도시다. 이정기가 활동하던 무렵, 당나라 최고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곳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그때 백거이가 그린 용교별업도 속에 당시 모습이 담겨있다. 시내 한복판으로 강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져 있다. 배들이 연이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이 강은 상당히 크고, 수심도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운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용교는 이 강으로 인해 번성했던 도시였던 것이다. 지금은 수백년에 걸친 토사의 유립으로 강이 사라져버렸지만, 대운하가 개통된 이후 중국 남부의 식량을 북부에 제공하는데 가장 중요한 운반수단으로 이용된 이곳은 수(隨) 당(唐) 시대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었다.
용교의 운하를 지키는 일은 곧 운하를 통해 들어오는 남부의 거대한 식량과 물산을 지키는 일이다. 당나라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제음 벌판에 주둔해있던 이정기의 군대는 강을 따라 남하해 먼저 서주의 운하를 공격했다. 서주 또한 장안의 식량수송선이 오가는 운하가 있는 지역이다. 빠르게 서주를 장악한 이정기의 군대는 그 여세를 몰아 용교 부근에 집결해 들어갔다. 옹교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이정기의 군대와 이를 막으려는 당나라 군사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정기의 군대는 당나라 군사들을 격퇴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물길, 즉 서주와 용교의 운하를 점령한다. 그리고 당나라 장안과 낙양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식량과 물자가 공급되지 않는 경제 대공황 상태가 벌어진 것이다. 물가는 뛰었고, 당나라 조정은 식량을 구하려는 백성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당나라 최대의 위기였다.
왕 샤이즈 원장 "당 운하는 생명선이다. 북부와 남부를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운하를 통해 남부의 물산이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쉬저우[徐州]에 도착했다. 이 운하는 당나라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으로 전쟁의 승패는 판가름이 난 듯했다. 운하를 손에 넣은 이정기에겐 대대적인 장안 공격만이 남았을 뿐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군벌이 중원대륙 전체를 장악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막바지 전투가 한창이던 781년 여름,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이정기가 갑자기 병사(病死)한 것이다. 병명은 악성종양. 평로치청절도사로 중원대륙에 모습을 나타낸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이정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용교의 운하를 되찾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782년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이끄는 군대는 용교, 와구를 재탈환했고, 운하는 이정기왕국의 손에 들어간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국을 통치하게 된 이납(李納)은 전쟁을 마감한뒤 국호를 제(濟)라 칭하고 문무백관을 임명, 온전한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샤밍차이 부관장 "이납이 세운 제국(濟國)는 법률과 군대, 행정기관과 정치구조를 갖추고 세금을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으며 안정된 나라를 추구했다."
중원대륙 안에 세워진 한민족(韓民族) 고구려 유민들의 독립왕국. 이납의 대에 이르러 더욱 강성해진 이정기왕국과 당나라간에는 피할 수 없는 또 한번의 전투가 남아있었다.
비록 이정기는 죽었지만 당황(唐皇) 덕종(德宗)과의 대결이 끝난 뒤 이정기의 왕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지속된다.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나라 이름을 제(濟)라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 자리는 이정기의 손자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로 세습되어 간다.
이정기왕국은 중국내 물산이 풍부한 경제의 핵심지역을 모두 손에 넣었고, 운하를 장악함으로써 중국 경제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더욱이 바다를 통해 발해와 신라, 멀리 일본까지, 외교와 무역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이정기왕국은 8세기말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력적인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819년. 당황(唐皇) 헌종(憲宗)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내지 못한 이정기의 왕국은 55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만다.
전쟁이 끝난 뒤 당나라는 군인만 1200명을 몰살시킬 정도로 잔인한 보복조치를 내렸고, 주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분산이주시켰다. 한민족(韓民族) 출신 유민들의 집단행동을 원천적으로 막아보겠다는 의도였다. 이정기에 관한 역사 기록들은 여기까지 기록한 뒤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 이정기의 왕국은 이대로 끝난 것일까.
운하를 통해 중국의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서주. 당나라 남부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만큼 서주의 박물관에는 당대 유물이 보관, 전시돼있다. 유물들 중 대부분은 당의 강성한 힘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한때 이곳 운하를 점령하고 서주를 통치했던 이정기왕국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다.
서주박물관에 보관돼있는 이 지역의 역사기록들 중에서 낯선 이름을 발견할수 있다. 장보고(張保皐)이다.
장보고의 이름이 이 서주에 남아있는 것은 그가 당시 무령군의 군중소장으로 이사도의 세력을 토벌하던 당나라 연합군에 소속돼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정기왕국과 장보고는 어떤 관계였을까. 현재 장보고에 관한 기록은 이정기왕국이 패망한 직후부터 10년간 공백상태로 남아있다. 그가 다시 역사속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828년 청해진(淸海鎭)에서였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최대 국제무역 조직을 이끌었던 그는 어떻게 10년만에 이런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 될 수 있었을까.
김문경 전남대학 조교수 "당나라 군대에 복무할 때에 익힌 지식과 주변의 신라인이나 고구려 유민들로부터 들은 정보를 통해 장사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것으로 정치 외교기반 잡았다."
장보고의 국제 무역을 가능케 했던 것은 중국 산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들로 알려져있다. 그 신라인들은 이미 7세기이전부터 당나라에 들어와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모여 살았다. 때로는 배고픔에 때로는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이기지 못하고 당나라행 배를 탔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운하 주변에 모여 살게 되면서 장보고 무역의 핵심조직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당시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중국여행을 했던 엔닌일기[圓仁日記]에 따르면 밀주에 신라인 마을이 있었다. 등주에도 신라관과 발해관이 있다고 전한다. 밀주와 등주라면 그건 바로 이정기의 영토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나라 때 신라인 마을이 있었던 지역 중에서 절반이상이 이정기의 영토안에 속한다. 이정기왕국에는 신라인들도 대거 살고 있었고,그들이 다시 장보고의 국제무역을 이끌었던 것이다.
김문경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오랜시간 두고 생긴 거주지로서 치청번진이 지배하던 당시 그 시절에는 고구려 유민 뿐 아니라 백제 유민과 신라 사람들,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산동성 일대에 많이 살고 있었다. 운하를 통한 신라인 거주지가 그걸 말해준다. 이정기 세력과 장보고와 모두 연결된다."
이정기 왕국이 패망하고 난 뒤 중국 동해안 산동성 일대의 한민족 출신 유민들은 장보고의 이름 아래 다시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군사력이 아닌 경제력으로 다시금 중국내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정기 일가가 만든 중국내 55년의 역사는 바로 고구려사(高句麗史)의 연장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곧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강한 군사력과 깨끗한 통치, 그리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당나라에 대항하며 당시 중원대륙에서 활동한 어떤 민족, 어떤 세력보다도 우수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중원대륙을 호령했던 이정기.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장보고는 백제 유민 출신이 아니라 신라땅에 있는 섬(유인도) 중에 하나인 청해진(지금의 완도)에서 자라난 인물 입니다. 어떤 계기로 당나라에 가게 된거죠. 그후로 당나라 신라방 에서 자라고 생활 하다가 출세 하기 시작 해서 유명인이 된겁니다
지다이님의 글中
제나라의 구성원들이 고구려유민이라고 하시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제나라의 구성원들은 백제유민들입니다. 당시 고구려유민 20여만 명은 내주와 영주에 집결했다가 안휘성과 강서성, 사천성, 감숙성 등의 내륙 오지로 가게 됩니다. 이들이 보장왕과 함께 다시 요동에 모이게 되지만 각곳에 흩어져 있던 20만명이 모두 왔을리는 만무하고 또 보장왕이 말갈과 함께 저항을 도모하다 다시 하남도, 농우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지요. 즉 당시 안동도호부에는 고구려의 구심점이 될 만한 세력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요동반도 이서지역에 강제 이주되어 살던 고구려 유민들도 대조영과 함께 발해 건국에 참여해 안동도호부에
제나라 구성원이 고구려유민이 아니라 백제 유민 이라고 배달국민 님은 말 하는데요. 제나라는 고구려 유민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 스패셜에서도 방영된적 있습니다. 발해가 건국 된 후에 몇십년 지나서 이정기가 등장 한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단천님/ 지다이님의 말씀입니다.
지다이님의 말 이라고 하는데 전 약간 다른데요 제가 기역력 부족으로 자세한 설명은 힘들어서 못하겠고, 역사스페셜에서 말한것으로 대신 하려 합니다
배달국인님은 지다이님의 댓글을 인용한건데 뭐가 다르다는건지요?
단천님// 5426번 지다이님의 댓글이 올라와서 자료를올린것입니다. 확인해보시죠.
지다이님의 글中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발해가 건국된 마당에 그 옆에 고구려유민들이 있는 안동도호부를 둔 다는 것은 화근을 붙여두는 겪인데 당나라에서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요. 이정기의 고종사촌이자 평로절도사로 임명되었던 후희일이 안사의 난이 계속되는 와중에 평로군 2만 명을 이끌고 산동반도로 남하할때 쯤엔 안동도호부에 고구려유민이 거의 없었습니다. 즉, 이정기 일가는 고구려 유민이지만 그의 건국 기반은 고구려유민이 아닌 산동반도에 있던 백제유민들입니다.
제나라는 옛 고구려 지역인 안동 도호부 지역이 아니고 지금 중국 지역 지도에 한반도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이 있습니다 산동 반도 라고 들은것 같은데 그곳과 가까운 지역으로 역사 스패셜에도 소개 되었지요
지다이님//
지다이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요서를 중심으로 활동한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백제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문을 보더라도 백제는 멸망하고 약 150년 가까이 백제라는 이름을 잇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요.
님의 말씀은 이해하겠는데요, 왜 고구려 유민들이 백제인들로 둔갑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님의 말씀이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이 백제유민들로 둔갑이 되는군요.(장보고 포함) 님과 제가 차이를 보이는 내용이 동영상 15분정도에서 35분 사이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꼭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물론 역사스페셜이나, 한국사, 다큐등등이 다 맞는것은 아니지만 이정기의 대해서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배달국인님 말씀에 동감... 어느 순간부터 고구려 유민이 백제유민으로 둔갑되는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함에도 그러한 설명이 없네요.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당나라는 고구려인들을 영주지방 즉 평로군 소재지로 대거 옮겼죠. 이들이 바로 이정기의 무력기반입니다. 이정기는 이 평로군 출신 고구려유민들을 이끌고 산동반도로 건너간거죠 이정기의 기반을 백제유민이라 하셨는데 이정기의 건국기반은 백제유민이 아닌 고구려유민입니다. 그렇기에 구당서, 신당서는 이정기를 고구려인이라 기록하고 있죠
지다이님 글 중에서 뭔가 앞뒤가 안맞는게 있네요. 분명 지다이님은 이정기 일가의 기반이 백제유민(재당신라인)이라 했고, 장보고가 백제유민이라 했죠. 그런데 만약 이정기 일가의 기반이 백제유민이라면, 그리고 장보고가 백제유민이라면 어째서 장보고는 이정기 왕국을 공격했을까요? 제의 마지막 왕 이사도를 토벌할 때 분명히 장보고가 소속된 무령군이 제나라 공략에 동원되었죠. 이는 뭔가 앞뒤가 안맞네요. 같은 재당신라인이 같은 재당신라인을 공격한다라? 오히려 제나라는 고구려계이고, 그런 고구려인에 반발한 재당신라인이 당나라를 도와 제를 멸망시켰다고 보는게 더 설득력 있는거 같네요
호루스님// 그렇네요... 지다이님 말씀처럼 장보고가 백제인 또는 백제인의 후예라고 한다면 제나라 마지막 왕인 이사도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또 제나라와 대진국,발해와의 교류관계도 많았었다는것은 제나라는 고구려계"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보입니다.
지다이님은 장보고가 재당신라인 출신인데, 사실 재당신라인은 곧 백제유민이다 그렇기에 장보고는 백제 유민의 후예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제기한 사람이 김성호씨로 알고있습니다.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그런 주장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분은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는 책을 쓴 분이죠. 이분의 주장이 일면 그럴듯해보이고 솔깃해 보이지만, 장보고가 재당신라인의 후예라는 사료가 없는바 이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 싶습니다.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普)나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에는 장보고의 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절강성 소흥사람으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다. 장보고의 고손(高孫)에 해당하는 장정필(張貞弼)은 고려초기에 안동의 호족이 된다."
이정기에 관한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제가 알기에 이사도는 고구려 출신 이고 장보고는 신라 출신 입니다
물론 『자치통감』에 "웅진도독부를 건안고성으로 옮겼다. 앞서 서주 연주에다 사민하였던 백제의 호구는 건안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당서』에 "백제의 땅은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나누어졌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건안성으로 옮긴 백제유민들이 있던 지역이 발해에 의해 차지되었다는 암시입니다. 즉 구당서의 기록은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영토가 신라, 건안성으로 옮겨진 백제유민들의 터전이 발해에 의해 먹혔다는 기록이라 볼 수 있죠. 일례로 발해 2대 임금 무왕 때 요서지방에 있던 마도산까지 원정을 가고, 3대 문왕은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요동지방을 발해의 영역으로 굳힙니다.
이에 따르면 백제유민들이 살던 건안성은 이미 발해에 의해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지다이님은 이정기의 기반이 백제유민이라 하셨습니다.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구당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이미 백제유민은 발해에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더군다나 요동~요서지방에 살던 고구려인이 발해 건국과정에서 발해에 흡수되었다고 하셨지만, 그 곳에 살던 고구려 유민 전부가 발해 건국에 참여한 것은 아니겠지요. 분명 낙오되어 남아있는 고구려인들도 있었을 겁니다.
구당서에는 이정기에 대해 "이정기는 고구려인"이라 기록을 남깁니다. 만약 그가 백제인이라면 백제인이라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함에도 고구려인이라 남아있죠. 이 말은 요서지방에 백제인 뿐 아니라 고구려인들이 살고있다는 강력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정기가 평로군을 이끌고 치청지역을 공략할 때 데리고 간 병력 상당수도 고구려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건안에 있던 백제인들은 이미 발해에 흡수되었으니 말이죠
더욱이 이정기가 고구려인이기 때문에 그의 강력한 기반은 같은 고구려인이라 보는게 타당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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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 집단의 주축이 백제유민이라 칩시다. 님은 장보고도 백제유민의 후예라 했죠. 그럼 백제유민인 장보고가 같은 백제유민의 나라 제를 치는건 설명이 되는지요? 게다가 산동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이정기 집단이 백제유민 집단이라 보는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데요.
장보고도 연원장씨보감이라든지 삼국사기, 번천문집 등을 참고로 볼 때 그는 재당신라인이라기 보다는 신라인으로 보는게 합당합니다만... 장보고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도 장보고=재당신라인설에 어이없어 하더군요.
전쟁을 각오하며 산동으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 산동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후희일이 관할하던 평로군은 안록산의 난 때 반란의 본거지였고, 범양의 이회선, 북방의 해족이 사방에서 압박하는 상황에서 당 조정의 지원을 받기 곤란했기 때문에 보다 쉽게 당 조정의 지원을 받고자 산동으로 이동한 겁니다. 백제 유민 집단이기 때문에 옮겨갔다는 건 말이 안되고요. 요서지방에 고구려인들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이정기의 출신에 대해 고구려인이라 말한게 바로 이정기 일가가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된 집단이기 때문이 아닌지? 이정기에 대해 연구한 지배선 교수님, 정병준 교수님의 논문을 보면 고구려 유민과의 연관성이 높다 나오지 백제유민과의 연관성이 높다는 말은 제가 본 바 없습니다. 일단 백제유민 집단이라면 사료상에 백제유민임을 암시하는 문구가 나타나야 하는데 자치통감, 구당서, 신당서에는 그런 문구가 없지 않나요? 게다가 백제유민 집단이 세운 나라가 제나라면, 백제 유민들이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당을 도와 멸망시켰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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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백제유민
제나라=백제유민 주축
이라 하시는데.... 819년 이사도의 제나라 토멸전에 참여한 군대 중 무령군이 있지요. 무령군의 군중소장은 아시다시피 장보고이고요. 무령군은 지금의 강소성으로 여기에도 신라방이 있었죠. 님의 논리라면 여기 신라방도 사실상 백제유민들의 거치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만약 제나라가 백제 유민이 주축이 되었다면, 어째서 무령군에 살던 백제유민들과 장보고는 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산동=백제의 터전, 이정기가 산동으로 간건 그들 집단이 백제유민이기 때문이라 하셨는데... 일단 백제의 대륙진출설은 하나의 설입니다. 물론 저는 이를 긍정하고 있지만, 백제의 대륙진출이 설일 수 밖에 없는건 바로 유물, 유적이 발굴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지다이님은 산동은 백제의 영토였으니 이정기 집단은 백제유민이라 하시는데... 그 역시 100% 정확한 사실도 진실도 아닌 설 아닌지요?. 님은 이 설을 마치 진실인양 포장하고, 이를 간과한 지배선 교수님을 질타(?)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위덕왕이 동청주자사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백제가 차지했다... 뭐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만... 고대 중원왕조의 책봉수수를 보면 허직을 제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일례로 고구려 장수태왕은 남제로부터 영주평주 이주 자사란 책봉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거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제수한 걸 보면 허직이라 볼 수 있지 않나요? 제가 아는 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형의 말을 빌리자면 책봉수여는 굳이 영토점거와 상관이 없는거라 하더군요.
이정기의 출신에 현혹되어, 평로군의 대다수가 백제유민을 간과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영주지방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수가 발해 건국에 참여했지만, 그 곳에 살던 고구려인들이 모두 증발하지는 않았겠죠. 그렇기에 고구려인 이정기가 존재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가 고구려인이라는 건 중요합니다. 그가 평로군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건 평로군 대다수가 고구려인이었기에 가능했죠. 평로군이 백제인이라면 이정기가 아무리 날고기어도 그들을 사로잡았을 수 있었을까요? 평로군이 고구려인 출신이라는 점은 지배선 교수가 밝힌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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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제 이정기가 장강, 회수 유역을 지배했다고 했나요? 제가 하지도 않은 말을 마치 했다는 식으로 단정지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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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에 김문경 교수님이 언급하신 대로 산동에는 백제유민들만 있는게 아니었죠. 백제인, 신라인, 고구려인, 당나라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데 마치 님은 산동=백제유민지역이라 단정지으며 말하고, 제나라가 백제유민이 주축이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전 그 점을 꼬집은 겁니다. 과연 이 지역에 백제유민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도대체가 제나라가 백제유민의 나라라 볼 건덕지도, 근거도 없는데 마치 님은 이걸 자신있게 주장하고, 이정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지배선 교수의 연구결과를 무시하지 않나요?
제나라에 어찌 백제유민 뿐이겠습니까? 지다이님은 평로치청의 성격을 백제유민에 치중하여 백제계로 보고 있지만, 구당서, 신당서에 그 지도자인 이정기 일가가 고구려인이라 기록한 만큼 당연히 고구려계 국가로 보아야 하지 않나요? 이게 저와 님의 차이인 듯...
p.s.산동으로 갔기 때문에 평로군은 백제유민이다 전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군요. 논리적 근거가 빈약하고, 너무 성급한 단정인 듯....
오랜시간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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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유민이 요서지역에서 이동한 평로군의 일원 => 자치통감의 기록을 들어 주장하는지요? 하지만 자치통감에는 백제유민들을 고구려 건안성으로 옮겼다고 나와 있죠. 그리고 그 건안성은 발해가 접수합니다. 백제유민들은 당연히 발해에 흡수되었겠죠.
그리고 요서지방에는 상당수의 고구려인이 남아 있었을텐데요. 그리고 그런 고구려인이 주축이 된 평로군이 산동반도로 가 그 곳에 살던 신라인, 백제인, 고구려인을 아울러 독자세력을 구축했다고 보시는게 타당할텐데요
그 건안고성에 대해 요동의 건안성이라 보는 견해도 있고, 요서의 건안고성, 복건성의 건안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요. 일단 전 건안고성을 요동의 건안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웅진도독부가 발해에 먹혔다는 기록은 없지요. 전 구당서의 백제땅을 발해말갈과 신라가 나누어 가졌다는 걸 기록을 보고 그렇게 해석한 겁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요동의 건안성을 웅진도독부가 거처를 옮긴 곳이라 보고 있죠.) 이렇게 해석하는 분이 저 말고도 몇 몇 계십니다.
놀러간 사이에 댓글이...헐~^^
시간이 늦어서 내일 읽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