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초 비구니 도량 대한불교 보문종 총본사 보문동 보문사(1/2)
@보문동 보문사(普門寺)는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 3가 168번지에 자리한 세계에서 유일한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보문종 총본산이다. 1115년(고려 예종 10년) 담진국사(曇眞國師)가 창건되었다고 하는 데, 이것은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가 1962년 지은 『퇴경전서(退耕全書)』의 「보문사일신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 전하며, 예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하는 비구니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보문사 입구에 세워진 이 당우는 1층에는 호지문(護持門)이란 편액이, 2층에 보문사(普門寺)란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일반사찰의 경우로 비교하자면 일주문과 천왕문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보문사는 또한 「탑골승방」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한양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에도 승방(僧房)으로 기록되어 있듯 오랜 전통성을 지닌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으로 창건 당시에는 조그만 암자로, 탑골에 있었으므로 <탑골승방>이라 불렸다. 탑골이란 이름은 현재 동대문구에 속한 탑동(塔洞), 탑동골(塔洞―)로 불리었던 옛 지역명으로 지금의 동대문구 신설동・보문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인데, 비구니도량 미타사의 탑이 있는 데서 마을 이름이 탑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문사는 미타사와 담벼락 하나로 접해있다. (본방 <미타사> 참조). 승방(僧坊)은 승려들이 불상을 모셔 놓고 불도를 닦으며 교의를 펴는 곳으로 탑골승방은 비구니가 운영하는 가람이었기에 주로 왕을 여의거나, 노(老) 상궁이나 후궁들의 기도처로 이용되었다. (이는 2017년에 보문사의 극락보전을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청 건륭 12년(조선 영조 23년, 1747) 처음 중건되었고, 이후 도광 4년(순조 24년, 1824)과 동치 4년(고종 2년, 1865)에 더 중수되었음이 적혀 있다. 아울러 동치 4년 상량문의 경우는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4대 탑골승방이 있었는데 옥수동 두못고개 승방 미타사, 석관동돌곶이 승방 연화사, 숭인동 새절 청룡사, 보문동 미타사가 바로 4대 탑골승방이다. 위치적으로 보아 보문사는 현재 담벼락 하나로 미타사와 인접해 있어 옛적에는 미타사와 함께 탑골승방으로 불린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보문동 보문사는 원래는 조계종 산하의 소속 사찰이었으나 1972년 독립하여 보문종(普門宗)을 창종하고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 되었다. 담진국사가 창건한 이후 현재의 보문사 창건까지 그 중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당우(堂宇)로는 1692년에 묘청스님이 대웅전을 중건을 시작으로, 1826년에 수봉법총(秀峰法聰) 스님이 만세루를 신축하였고, 1827년에 정운(正雲) 스님이 좌우 승당(현재의 묘승전과 심우당)을 건축하였고, 1842년에는 금훈(錦勳) 스님이 좌우 승당을 중수하였으며, 1928년에는 보문종 초대 종정예하(宗正猊下) 설월당 긍탄(雪月堂 亘坦)이 주석하여 대규모 불사를 이뤘다. 해방 이후에는 보문종 초대 총무원장 보암당 은영(寶庵堂 恩榮) 스님이 주석하면서 30여 년 동안 대규모 불사를 주도하였는데, 60년대에 삼성각, 선불장, 산령각, 범종각을 비롯하여 70년대에 극락전, 보광전, 호지문, 시왕전과 함께 경주 석굴암을 재현한 보문사 석굴암과 오대산 월정사 8각 9층 석탑을 재현한 보문사 9층 탑 등을 조성해 현재의 대가람을 일구었다. 현재의 전각들은 은영 스님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보문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담진(曇眞) 선사는 고려 문종·예종 때 활동했던 선종 승려로, 본명은 혜조(慧照), 성은 신씨(申氏). 자는 자정(子正). 담진(曇眞)은 그의 법명이며 시호는 혜소(慧昭)이다. 출생연대와 사망연대는 미상이다. (칠장사의 혜소 스님과는 다른 분이다.) 혜조 스님은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난원(爛圓)의 제자가 되었다. 1068년(문종 22) 대선장(大選場)에 응시하여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고, 난원이 입적한 뒤 의천(義天)의 법맥을 이었다. 1107년(예종 2) 예종의 왕사(王師)가 되었고, 1114년 국사가 되었으며, 1116년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한 왕에게 설법을 하기도 했다. 화엄학(華嚴學)의 대가로서 일승법(一乘法)을 선양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천태종을 창립해 선종 불교가 위기에 몰리게 되자 사굴산문(闍堀山門)을 이끌고 가지산문(迦智山門)의 학일(學一)과 더불어 선종 부흥에 노력하신 분이다. 그의 탑비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반야사지(般若寺址)에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가 현존하고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렵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창종 내력을 살펴보면, 1115년(예종 10) 담진(曇眞) 선사가 창건하여 수련 도량으로 계승되어 내려오다가 1972년 4월 20일 비구니 이긍탄(李亘坦) 스님이 조계종에서 탈퇴하고 새로 창종한 비구니종단이다.(1972년 7월 6일 문화공보부에 등록하였다.)
보문종은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대애도니(大愛道尼:Mah?praj?pati)를 종조(宗祖)로, 진나라의 정검니(淨檢尼)를 전법조(傳法祖)로, 신라 때의 비구니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1972년 7월 종단의 초대 종정에 설월당 긍탄 스님이 취임하였고 총무원장에 보암당 은영 스님이 취임하였다. 본사는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이다. 이 종단은 석가불의 근본 구제이념과 관음보살의 구세(救世) 사상에 따른 복지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본존불(本尊佛)은 석가불·관세음보살이며, 근본 경전은 《관음경(觀音經)》인데,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승경전(大乘經典)도 중요시한다. 종단기구로는 종무의 집행기관인 총무원, 감사기관인 규정원(糾正院), 의결기구인 심의회 등이 있으며, 주요 행사는 불교의 일반적인 축절 외에 음력 매월 18일의 지장회(地藏會)와 24일의 관음회(觀音會) 등이 있다. (석굴암 올라가는 길에) @보문종 종조(宗祖) 대애도(大愛道) 비구니 불교 교단에 있어서 최초의 비구니는 대애도(大愛道) 비구니다. 대애도(大愛道) 비구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반왕의 왕자로 태어난 이후 이레 만에 생모 마야부인이 돌아가시자 싯달타를 키워준 이모(姨母)이자 양모(養母)였던 마하프라자파티(Mahaprajapati)가 출가한 후 불린 이름이다. 구담미(瞿曇彌 Gautami)라고도 불리는 데 이는 석가족 종족임을 상징한 말이다.
그녀의 출가 내력을 보면, 고대 인도의 오랜 풍습에서는 여성의 출가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부처님 당시 불교 교단도 초기에는 같은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구담미는 부처님께 세 번 출가를 간청드렸으나 거절당하였는데 아난존자가 부처님에게 부처님이 태어난 후 7주일 만에 마야부인이 돌아가시고 이모인 구담미가 친자식처럼 부처님을 키워준 지난 일을 상기시키면서 구담미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간청을 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 에 전하는 데 역자는 미상이다. @보문종 전법조(傳法祖) 정검니(淨撿尼) 비구니 진(晋)나라 최초의 비구니로 진(晋)나라 낙양(洛陽) 죽림사(竹林寺)를 창건한 비구니다. <비구니전>에 따르면 점검의 본래 성은 중(仲)씨이고 이름은 영의(令儀)로 팽성(彭城) 사람이다. 아버지 탄(誕)은 무위(武威) 태수를 지냈다. 점검니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일찍이 과부가 되어 집안이 가난하였다. 늘 귀족의 자녀들에게 거문고와 글을 가르쳤으며, 불법을 들으면 믿고 즐거워하여 받들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 뒤 사문 법시(法始)를 만나 불경의 도리에 통달하였다. 진 승평(升平) 원년(357) 2월 8일에 낙양에 외국 사문 담마갈다(曇摩羯多)를 청하여 계단(戒壇)을 세우자 그 계단에서 큰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공식적으로 진나라의 첫 비구니가 되었다. 승평(升平, 357~361) 말년에 이르러 허공에 붉은 기운을 보고 임종이 임했음을 예감하였는데 한 여인이 손에 다섯 빛깔의 꽃을 들고 허공에서 내려오자 정검니는 이를 보고 기뻐하면서 무리에게 “뒷일을 잘 부탁한다. 나는 이제 떠나노라.” 하고 여인의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하고서 허공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때 정검니 비구니의 나이는 70세였다고 한다. (비구니전/정검니편) (석굴암) @보문종 중흥조 신라 법류니(法流尼) 비구에 대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 어떤 비구니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라불교를 보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계기가 되었으며, 천경림(天鏡林)에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를 지어 544년에 완성하면서 진흥왕은 백성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551년에는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를 관장하는 대도유나(大都維那)와 비구니를 관장하는 도유나랑(都維那娘)을 두어 교단을 통솔하게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의 비구니가 아닌가 추측해 본다. @보문사는 고려 중기인 1115년에 담진국사가 창건한 후, 1692년 대웅전을 중건하고 1827년 좌우 승당을 세웠다. 1945년 이후 30여 년 동안 불사를 벌이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석굴암·호지문(護持門)·선불장(選佛場)· 보광전(普光殿)·산령각(山靈閣)·석굴암노전(石窟庵爐殿)·삼성각(三聖閣)· 별당·요사채 그리고 한의원과 특별양로원이 있는 시자원(施慈園) 등이 있다. 보문사는 인근 청룡사와 더불어 조선 왕실의 후궁과 상궁들이 말년을 의지하던 곳으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화가 여럿 전하며, 보물 제1164-2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 권4~권7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 3점(대웅전 영산회상도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8호, 대웅전 신중도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9호, 지장보살도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을 간직하고 있다. 보문사 석굴암은 1970년 8월에 착공하여 23개월 동안 진행하였으며, 본존인 석가모니불은 15톤 화강암 원석에 조각하였고, 높이는 3.38m이다. 내부와 입구에는 불(佛), 보살(菩薩), 천(天), 십대제자, 금강역사가 자리하고 있어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우주질서가 정연하게 펼쳐지고 있는 법화만다라(法華曼茶羅)의 구도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것은 경주 석굴암을 따랐으나, 단지, 경주 석굴암의 전실에 있는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이곳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석굴암은 은영 스님이 그 분야의 권위자를 모아 준공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각과 설계를 하였고, 공사비만 1억을 들여 1972년 부처님 오신 날에 착공하였으며 3년 6개월의 역사 끝에 점안식을 했다. 경주 석굴암과 똑같은 규모로 만들었으나, 구성면에서 볼 때 경주 석굴암은 정면이 1문인 데 비하여 이곳은 3문이며, 실내 벽을 이중으로 만들고 실내 천장으로 공기가 유통되게 하였다. (이 장엄한 석굴암을 조성함에 있어서 경향신문 1981년 10월 9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주 석굴암을 그대로 본뜬 모형 석굴암을 사찰 안에 다시 짓느라 당시 조흥은행은 물론 신도나 일반인들로부터 10억 원이나 되는 빚을 졌고, 빚 독촉을 감당하지 못한 주지 은영과 종무 계월, 행자 공순 등 세 비구니가 음독자살 하였다는 가슴 아픈 이런 기억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佛心을 향한 숭고한 세분의 고귀한 죽음을 늦게나마 애도하는 마음을 전하다.) 산령각이다. 일반 사찰에서는 삼성각과 같다. 독성, 산신, 칠성을 모신 전각이다. 독성. 오후 빛이 반사되어 좀 그렇다. 보문사 9층 사리석탑은 1979년에 조성되었다. 탑에는 자운율사가 스리랑카 승왕에게서 전해 모셔진 부처님의 치아정골사리(齒牙頂骨舍利)가 봉안되어 있으며, 하부에는 각 방의 사천왕과 팔부신장이 부처님 진신사리와 불법을 호지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보문사는 특기할 만한 오래된 문화재는 없으나 석굴암 앞의 높은 단 위에 세워진 위의 팔각구층석탑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팔각구층석탑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조약돌로 담벼락을 이쁘게 장식했다. 보문사 장독대. 사찰규모에 비해 조금 초라하다. @선불장(選佛場) 선불장은 선불도량(選佛道場) 또는 선불당(選佛堂)이라고도 한다. 승려들은 부처나 조사가 되기 위하여 좌선 등의 수행을 하는데, 이러한 수행 자체를 ‘선불(選佛)’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불교사에서는 선불장을 크게 2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승과고시의 과장을 지칭하는 경우이고, 둘은 한국 사찰의 승당(僧堂), 혹은 선방(禪房)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승당은 승려들이 거처하는 공간인 요사와 구분되는 수행 공간인데, 한국 사찰의 승당에는 지금도 선불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곳이 많다. 선불장 이외에도 승당에는 수선당(修禪堂), 심검당(尋劒堂) 등의 다양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모두 승당은 바로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본방 <선불장> 참조) @극락전 문이 닫혀있어 법당 안을 볼 수 없었다. 경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특별한 행사나 기연이 있을 때만 개방한다고 한다. 나도 번거로움을 싫어서 극락전 참배는 포기했다. ~제2부에서는 전각 위주로 포스팅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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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_()_
잠시 들려 잘 보고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