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문안교회 성전사 |
‘자연 속 내 집’ 판교신도시 단독주택 후회 없이 고르는 법은?
도시생활의 편리함과 전원생활의 쾌적함 동시에 누릴 수 있어 매력적
도심 속 자연, 그 안에 갤러리 같은 내 집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누구나 한번쯤 꿈 꿔보는 그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바로 판교신도시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판교신도시에는 답답한 아파트를 벗어나 쾌적한 자연 속에 맞춤형 주택을 지을 수 있는 주거전용 단독주택 용지가 약 1,300여 필지 공급되어 있다. 강남까지 20분 거리로 서울과 가깝고 금토산, 청계산, 운중천 등 아름다운 자연과도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쇼핑, 치안, 보안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 살기 좋은 단독주택으로서의 희소성을 높이고 있다. 판교신도시는 무엇보다 땅값이 저렴하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주거전용 평균 땅값은 3.3㎡당 900~1,200만원, 231㎡(70평)당 6~8억 정도로, 고급 단독 주택으로 지어도 아파트 값보다 훨씬 저렴하다. 연면적 198㎡(60평) 정도 건축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평당 건축비(고급형) 600만원으로 하면 3억 6천 만원, 총비용이 약 10억~11억 정도로 아파트보다 훨씬 좋은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는 것. 판교신도시에서 최상의 단독택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일조권, 개방감, 정숙성, 땅 모양 등 지구단위 계획을 꼼꼼히 살핀 후에 토지를 선택해야 한다. 좋은 택지를 고르는 방법을 소개하면 ▶ 일조권이 좋은 남향필지를 고를 것 ▶ 개방감이 뛰어난 공원이나 녹지, 하천에 접한 곳을 고를 것 ▶ 남북으로 긴 필지 보다는 동서로 폭이 넓은 필지를 고를 것 ▶ 이열필지보다는 일열필지를 고를 것 ▶ 중간필지보다는 코너필지를 고를 것 ▶ 큰 도로변은(4차선 이상) 피하고 안쪽필지를 고를 것(단지내도로는 2차선(8m)이므로 소음에 지장이 없음) ▶ 평지보다는 경사지를 고를 것 등이다. 학교, 병원, 대형마트 등의 기반시설이 근처에 있어 생활면에서는 도시에서와 똑같이 편리하지만, 자연이 가까이 있어 전원생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판교신도시는 주택의 외관 및 인테리어, 공간배치를 본인 스스로 할 수 있어 나만의 개성 있는 주거공간을 만든다는 매력 덕분에 앞으로도 계속 호황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택지매매문의: 031-8016-8249
언더우드 목사와 성도들이 믿음으로 세운 ‘한옥성전’ 새문안교회 1차 성전건축
글 윤호기 새문안교회 집사
어떤 이는 안경을 전당포에 잡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여러 달 봉급의 20%를 바쳤으며 부인들은 삯바느질을 해서 헌금을 마련하였다. 또 기포드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직접 노역을 담당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런 교인들의 순수한 믿음과 열정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느 날 목재 값 20원을 지불해야 했을 때 낯선 사람이 나타나 20원을 헌금하였고, 전염병조차도 건축비 장만에 도움이 되었다. 장마철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언더우드 목사와 교인들이 환자 치료와 사망자 수습에 적극 힘쓰게 되었고, 이에 감동한 조정에서 많은 돈을 하사하자 모두들 건축헌금으로 바쳤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건물을 완공하고 1895년 말 성탄절 직전에 감격적인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이 예배당은 일자형 12칸 한옥으로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가운데 휘장을 쳤다. 조선인이 드린 건축 헌금은 모두 500원이었다. [새문안교회 70년사와 새문안교회 100년사 중 관련부분 재구성] ※<새문안>지는 새 성전 건축의 순조로운 기획과 진행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계의 교회> 연재를 시작한다. 세계의 교회 건축소개에 앞서 새문안교회 예배당의 변천 모습 사진자료와 설명을 게재한다. 필자는 전문 건축가들로 구성된다. ◆한 칸을 8자 평방으로 보면 건축면적은 약 70㎡(21평)이며 100명~150명 정도 수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 1가정 월평균 수입은 8원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새문안
로마네스크 양식의 장안명물, 벽돌예배당 새문안교회 2차 성전건축
글 윤호기 새문안교회 집사
교회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1904년에 다시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말까지 일본 돈으로 460원을 모으는 한편, 부지 구입에 적극 나선 끝에 1907년에 현 위치인 염정동 야주개(밤 비치는 고개라는 뜻)에 교회 터를 장만하고 본격적인 건축에 돌입했다. 그러나 기금은 턱없이 모자랐고 언더우드 목사는 신병치료 차 미국에 있던 기간(1906~1908) 중에도 모금을 계속하여 건축비를 충당했다. 이리하여 언더우드 입국 25년만인 1910년 5월 22일 어린이 주일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예배당을 완공하고 입당하였으며 1주일 후인 5월 29일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헌당식에는 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정동감리교회 최병헌 목사, YMCA 월남 이상재 선생, 저다인 감리교 선교사, 영국성서공회의 버시, 장로교 최초 목사 중 한 사람인 한석진 목사가 각각 한 순서씩 맡아 주었다. 새문안의 첫 찬양대도 이 때 예배당 준공과 더불어 조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배재 80년사). 캐나다 건축가 고든(Henry B. Gorden, 1855~1951)이 설계하고 중국인 해리 장이 시공한 이 예배당은 가로·세로 각각 18m인 정방형 평면(필자추정)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붉은벽돌 영식쌓기 공법의 조적식 구조로 건축하였고 내부엔 강단 쪽을 제외하고 삼면에 발코니석이 있었다. 연면적/약490㎡(약150평), 수용인원/약700명(이상 필자 추산) [새문안교회 70년사와 새문안교회 100년사 중 관련부분 재구성] ※<새문안>지는 새 성전 건축의 순조로운 기획과 진행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계의 교회> 연재를 시작한다. 세계의 교회 건축소개에 앞서 새문안교회 예배당의 변천 모습 사진자료와 설명을 게재한다. 필자는 전문 건축가들로 구성된다. 출처: 새문안
해방의 기쁨으로 숙원을 해결한 종탑예배당 새문안교회 3차 성전건축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 당시 차재명 담임목사와 교인들은 많은 재정적 어려움 속에 교회창립 50주년인 1937년 준공을 목표로 예배당 신축을 추진하였었다. 1936년에는 건축공사비 중 40%를 원한경 장로가 섭외하는 가운데 기독교계 원로 윤치호의 거액헌금, 교인들의 성미와 헌금의 답지, 일본 소재 건축설계사무소에 계획설계 의뢰, 이듬해 건축가 보리스의 내방 등으로 이어졌으나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9년 후, 해방되고 8개월 만인 1946년 4월.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새문안교회 당회는 중요한 일을 결의했다. “…교우 일동이 다년간 희망해 온 바 당회가 증축하기로 가결하고…” 김영주 담임목사는 이 숙원사업 해결에 적극 나섰다. 1주일간의 부흥회에도 일부 교인들이 재정부족을 이유로 반대하자 “이미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매 일을 끝내어 주실 이도 하나님이시다”고 설득하고 교인들과 새벽제단을 쌓으며 독려하였다. 더구나 열혈 청년 홍미현이 무명지를 끊어 ‘성전건축이 최우선 사명’임을 호소하자 분위기는 무르익어 어떤 교우는 집을 저당 잡히고 홍용원 장로는 거액을 흔쾌히 헌금하였다. 자금 부족으로 공사를 한때 중단하기도 했으나 1947년 9월부터 특별건축위원으로 합세한 김규식, 서병호, 원한경의 물심양면 지원에 힘입어 재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48년 봄에 준공하고 4월에는 제34회 장로교 총회를 초치하였으며 1949년 7월에 감격적인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붉은벽돌 영식쌓기 공법으로 세운 절충식 고딕양식의 조적조 건물로서, 설계한 건축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가로 18m, 세로 25.5m(1: √2 비례)이고 좌우측에 각각 계단탑을 만들어 본당 출입을 하였으며 오른쪽 계단탑에 종을 설치하고 왼쪽 계단탑 상부에는 첨탑을 세웠다. 전문가의 자료조사와 당시 교인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신축했음에 틀림이 없는 이 예배당은 1957년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옥외에서 본당으로 직접 진출입하는 계단을 추가하는 등 건축가 김중업(근대건축 3대 거장인 르 꼬르뷔제의 제자)의 설계로 리모델링 하였다. 용도/1층-사무실 및 유치원, 2층-예배실, 건축면적/약460㎡, 연면적/약985㎡(약300평), 예배실 수용인원/약750명(이상 필자추산) [새문안교회 70년사 및 일부 사료로 재구성] ※<새문안>지는 새 성전 건축의 순조로운 기획과 진행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계의 교회> 연재를 하고 있다. 세계의 교회 건축소개에 앞서 새문안교회 예배당의 변천 모습 사진자료와 설명을 게재한다. 필자는 전문 건축가들로 구성된다.
철근콘크리트로 안전을 확보한 모더니즘의 현 예배당 새문안교회 4차 성전건축
교육관(현 언더우드 기념관) 건축을 한창 추진하던 1966년 10월, 예배공간 부족으로 고심하던 당회는 본당신축을 결정하였다. 강관으로 받친 벽돌예배당 지붕의 안전이 문제가 되어 증축이 아닌 신축을 택한 것이다. 벽돌예배당 리모델링, 교육관 건축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던 강신명 담임목사는 유학파 건축가 3인을 지명하여 ①연합성 ②성경적 상징성 ③한국적 상징성 ④파이프오르간 설치 가능이란 4가지 지침을 주고 설계경선을 실시하였다. 르 꼬르뷔제의 제자 김중업은 포기했고 하버드 출신 민학운동가 조자용이 한옥의 이미지를 살린 반면, MIT 출신인 황손 이구(李玖)는 페이(I.M.Pei)의 제자답게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단순미를 표현하여 당회와 교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24개 십자 기중으로 24장로를 표현하였고 최소의 채광으로 카타콤을 상징하였으며, 전면 창에는 전통 아(亞)자 창을 현대식으로 재구성하였고 내부 벽돌벽의 요철시공으로 음향적 고려도 하였다. 전교인이 건축헌금을 작정한 가운데 커다란 돼지저금통을 통째로 바친 양동찬 어린이의 일이 기폭제가 되어 유학중인 교인들까지 헌금에 동참하였다. 공사는 1971년 9월 기공예배 후 1972년 2월 철거공사를 시작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1972년 11월 26일 눈이 내리는 추수감사주일에 입당예배를 드렸고 1973년 부활주일에 감격적인 헌당예배를 드려(CBS 중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사기간에는 교육관 4층에서 3부제로 예배를 드렸는데, 2부 청년·대학생예배 창설로 청년성가대(현 한기림)가 탄생하였다. 유학파 당회원들의 반대로 1500석이 1000석으로 줄었다는 일화도 있는 현 예배당은 자모실과 당회실, 기도실이 있고 향후 냉방설비까지 할 수 있도록 고려한, 당시로서는 꽤 앞선 시설이었다. 철근 콘크리트 모멘트골조로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2,575㎡(약 780평)이며 1987년과 2002년, 2차례에 걸쳐 리모델링하여 사용 중이다. [‘새문안교회 100년사’와 임급주 장로의 증언 등으로 재구성] ※<새문안>지는 새 성전 건축의 순조로운 기획과 진행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계의 교회> 연재를 하고 있다. 세계의 교회 건축소개에 앞서 새문안교회 예배당의 변천 모습 사진자료와 설명을 게재한다. 필자는 전문 건축가들로 구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