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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광개토태왕비의 왜.
392년 대방백제가 고구려에게 패배하자 요서백제의 유민뿐만 아니라 대방백제로부터도 유민이 발생하여 백제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총괄해야할 진사왕은 국정에 무관심하였다. 당연히 반란이 일어날 상황이었고 결국 아신왕이 진사왕을 살해하고 백제왕으로 등극하였다. 이 반란을 도운 것이 바로 요서백제의 유민들이었을 것이다. 아신왕의 첫 번째 국정과제는 유민문제의 해결이었다. 아신왕은 두 분국으로부터 발생한 유민을 본국과 마한, 가야, 왜의 분국으로 분산 수용했고, 자신의 정변을 도왔으며 중원의 선진문화를 경험한 요서백제의 지도층을 각 분국의 요직에 기용하였을 것이다.
이런 백제의 상황을 광개토태왕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광개토태왕에게는 요서백제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있었다. 바로 고구려를 멸망직전으로 몰고 갔으며 전연에 무릎 꿇게 했던 사건, 즉 모용황의 침공 때 요서백제인이 주축으로 참전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요서백제의 모여니는 조모와 증조모를 사로잡아 전연으로 끌고 간 원흉인 것이다. 이런 그들이 백제를 건국하였고, 조부인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의 등극에 즈음하여서는 삼한으로 몰려들어 마침내 모든 백제의 분국에서 요직을 차지하였으니 마치 삼한을 지배했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왜(倭)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하였다.
위에 인용한 광개토태왕비에 언급된 왜가 바로 요서백제인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당시 일본열도의 왜가 한반도로 대규모 군사를 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가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열도의 왜가 태왕비의 왜가 될 수 없다. 혹자는 모용황에게 멸망한 부여가 남하하여 백제, 가야, 왜를 장악했다는 가설 하에 부여를 왜로 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모용황에게 멸망한 부여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왜를 해상제국을 건설했던 요서백제인으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저자는 ‘요서백제인=여울가=왜’라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가설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 396년 광개토태왕에게 백잔의 수도가 함락당했고, 잔주는 항복하였다.
6년(396년), 왕이 친히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했다.....잔(殘-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맞서 싸우니 왕위(王威)로 크게 노했다.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선두부대(刺)를 보내 그 성에 육박하자 (잔병殘兵이) 소굴로 되돌아갔고 곧 그 성을 포위했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졌으므로,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며 왕에게 무릎을 꿇었고,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태왕은 그 후에 순종한 정성을 들어 미혹하여 저지른 지난 허물을 용서했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殘主)의 아우와 대신(大臣) 10인을 거느리고 군을 돌려 수도로 돌아왔다.
비문에 의하면 백잔(百殘)은 분명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백잔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왜는 이후 8년에 걸쳐 고구려와 전쟁을 계속 하고 있다. 본국이 항복한 상황에서 잔여 세력만으로 장기간에 걸쳐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혹시 백잔이 본국 백제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백잔은 분명 고구려에 58성 700촌을 잃었다. 엄청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설혹 이 사건이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할 지라도 58성을 잃은 패배의 후유증은 분명히 보여야만 한다. 그러나 사서 상에는 백제에게 어떤 후유증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가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또 광개토태왕은 잔주(殘主)의 아우와 대신(大臣) 10인을 볼모로 끌고 갔다. 그런데 백제는 1년 뒤인 397년 왜에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백잔을 제압하기 위한 더 좋은 볼모 태자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왕의 아우 대신 태자를 볼모로 삼아야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은 태자가 아닌 왕의 아우를 볼모로 끌고 갔다. 이는 태자 전지가 백잔에 없었거나 백잔의 태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지가 백잔 밖으로 피신한 상황이었다면 고구려는 백잔에게 태자를 찾아 볼모로 제공하도록 강요하였을 것이고 이를 거부하였다면 분명히 왕을 살해하였을 것이다. 장수왕때 문주가 도망가자 개로왕을 살해했던 것과 동일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은 왕의 아우를 볼모로 삼았다. 심각한 패전에도 불구하고 백제에는 후유증이 없고, 태자 전지가 아닌 왕의 아우가 볼모로 끌려갔다. 이는 비문의 백잔(百殘)이 백제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러면 광개토태왕은 도대체 어디를 공격한 것일까?
광개토태왕비는 남에게 그 치적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사가들은 백제를 폄하한 말이 백잔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문에 광개토태왕의 자랑스러운 치적인 백제정복을 굳이 백잔으로 표현할 이유는 없다. 백잔에서 끌려온 한예를 광개토태왕릉의 수묘인으로 삼았고 이미 고구려의 백성이 되었는데 굳이 이들의 조국을 치욕적인 말로 표현하여 자극할 필요는 없다. 그럼 백잔의 정체는 무엇인가? 삼국지 위지 진한전에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초가 있다.
樂浪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진한사람은 阿이고 낙랑에 남은 사람은 阿殘이라고 표현하였다는 이 말을 백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방에서 건국한 후 온조부여를 차지하여 이를 본국으로 삼았으므로 온조백제가 백제이고 대방에 남은 자들이 분국인 대방백제를 만들었으므로 백잔이 되는 것이다. 비문 14년(404년) 기록에 ‘왜(倭)가 불궤(不軌)하여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왜가 대방계를 침입한 것은 광개토태왕이 396년에 점령한 백잔의 땅 즉 대방백제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백잔은 백제의 비칭이 아니라 바로 대방백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396년에 대방백제는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해상제국 백제는 또다시 대방백제를 잃었고 유민들은 모두 가까운 온조백제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396년 모용수의 사망을 계기로 후연이 급속히 무너지자 그동안 귀국을 주저하던 요서의 유민들도 또 다시 귀국을 시작했다. 아신왕은 몰려드는 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마한과 가야의 분국이 상당수의 유민을 수용했지만 이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에 아신왕은 새로 제국에 편입된 왜로 유민들을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모두에서 태자 전지가 볼모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두 사서에 동일한 기록이 존재하므로 이는 사실일 것이다. 태자 전지가 열도의 왜에 볼모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열도의 왜가 해상제국 백제에 편입된 것은 근초고왕 때인 366년 무렵으로 불과 30년이 경과했을 뿐이다. 따라서 열도의 왜는 다른 분국들과는 다르게 유민들을 자신들의 동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만의 유민, 그것도 자신들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고, 여울가의 가장 오랜 근거지인 요서와 대방백제의 유민들을 수용할 경우 이들이 열도의 왜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제 발로 몰려드는 훌륭한 인적자원을 거부하고 해상제국 백제에서 이탈하는 것은 너무 큰 손해이다. 따라서 열도의 왜는 유민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백제에게 믿을만한 안전장치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백제는 이에 응했고, 또, 효율적인 유민관리를 위해 모두가 따를만한 인물 즉, 태자 전지를 열도로 보냈을 것이다.
몰려든 유민들이 열도의 왜로 출발할 곳은 바로 가야. 399년 무렵 가야 일대에는 유민들이 넘쳐났을 것이고, 이들은 백제를 배신하고 고구려에 붙은 신라를 공격하였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 399년의 기록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을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라는 신라 사신의 말은 바로 이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00년 광개토태왕이 다시 5만 군사를 출전시켜 가야 분국마저 평정하였다. 왜 분국으로 이주하려던 계획마저 차단된 것이다.일본서기에 궁월군(弓月君)이 120현의 인부(人夫)를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의 방해로 인해 2년간 귀국하지 못했다는 기록은 이 당시 백제유민의 exodus를 표현한 것이다. 이제 해상제국 백제에게는 본국 온조백제와 마한분국그리고 아직 군사를 동원하기에는 미숙한 열도의 왜만이 남았다. 그러나 유민들의 이주는 아직 완결하지 못했다. 백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을 것이다. 404년 왜가 고구려의 대방계를 침입한 것이다. 왜, 즉 해상제국 백제는 대방백제를 탈환하기 위하여 남은 전력을 총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이 전쟁마저 광개토태왕의 친정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간동안 백제는 유민을 열도의 왜로 무사히 이주시킬 수 있었다. 이후 백제는 가야분국을 되찾아 대가야를 탄생시켰고, 열도의 왜를 급속히 성장시키는 등 세력을 다시 확장하였으나 제국 내에서의 온조백제의 위상은 추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해 영화를 누렸던 4세기와는 다르게 적국 고구려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어 전쟁의 위협에 직면하였고, 무역로에서도 종착점이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5세기 중, 후반 온조백제와 열도의 왜백제(왜5왕) 사이에 주도권을 두고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 것이 추락한 온조백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이때부터 벌어진 역사에 대해서는 김운회 교수의 ‘새로 쓰는 한일 고대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론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왜는 해상제국 백제를 의미하며, 백잔은 백제가 아니라 대방백제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기록된 역사는 역사 전체가 아니고 거대한 역사중 화석으로 남은 흔적일뿐이죠.
그걸 끼워 맞추어봐야 절대로 전부가 나올수가없습니다.
지금 현제의 무언가를 가장합리적인 표현을 뽑아 적고 그걸 누군가에게 읽게하고 그리게한다면 정확도가 알마나 나올까요.
별로 그리 정확하지 않을겁니다 하물며..
역사이야기 읽다보면 진짜 허무 명랑한 추리많습니다.
근거가 잇고 정확하단걸 추려도 정확성을 보장 못하는대 하물며.,..
보통하는 잘못이 지금의 세테를 기준으로 그당시를 추정하거나 자기 생각에 역사를 끼워 맞추는거죠.
이러니 이럴것이다? 전혀 ... 해서는 않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시 사학자들께서 쓰신 요서백제에 대한 논문들을 읽어 보셨는지요? 니르바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역사논문들은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하고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부분은 사서의 기록과 비교하여 잘못되었으니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다--라는 식으로 서로의 역사 지식과 관점을 공유하였으면합니다. 머리말에도 언급하였듯이 비난은 사양합니다.
[왜(倭)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하였다.]
==>제 생각에 이때의 왜는 일본왜가 아니고 한반도 남쪽에 존재해 있었던 한국왜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리보면 한국왜가 바다를 건넜다는 海는 每의 탁본 오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해석하는 신묘년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왜(倭)가 신묘년 이래로 매번 [每] 물결을 [波] 건너와 [渡], 백잔 [왜]는 □□(倭破)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