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80년대보다 훨씬 풍부한 문화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확실히 우리들의 대화 속에서 영화, 연극, 대중 가요, 시, 소설 등 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이젠 식상해 버린 "정치적 소재"보다는 더 자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물론, 이렇게 풍부해진 문화적 토양 속에서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는 진보적 노력, 혹은 영역 확보 경쟁 또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화에 대한 각종 세미나와 비판적인 문화 잡지에 대한 폭발적 인기, 그리고 지성의 산실이라고 하는 대학의 학과 단위의 신문에서부터 대학 신문에 이르기까지 꼭 빠지지 않는 영화평, 그리고 녹두 거리의 그 많은 비디오 방들이 이런 사실을 대변한다.
이제 더 이상 대중문화와 고급 문화 사이의 한계선을 설정하기가 힘이 들며,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런 시도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바야흐로 우리들은 문화의 홍수 시대를 넘어서 문화 공해(?)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우리 나라 연극판의 풍토를 생각할 때 더욱 더 극명해진다. 연극은 원래 고급 문화/고급 예술의 하나로 규정되었었고, 영화와 대중가요 등의 대중 문화와는 변별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었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 연극은 대중 문화라고 통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단순히 장르의 파괴/혹은 경계선 허물기라는 포스트 모던적 시대 조류의 영향 때문인가? 아니면, 연극 자체의 내적 결함에 대한 관객들의 냉혹한 평가 절하 - 물론 그렇다면 우리 나라 관객들은 아직도 고급 문화/대중문화의 이분법적 분류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 때문인가?
연극이 대중문화 - 여기서 말하는 대중 문화는, 일반인의 시각에는 아직도 속물 문화로 이해된다 - 통칭되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모두 작용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시대는 포스트 모던 시대이다. 권력을 행하는 주체/중심이 사라지고, 상대적인 진리가 판을 치고 권력 분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장르의 파괴가 일어나고, 그 어느 것도 타자에 대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있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엄밀한 의미의 경계선이란 없다. 이런 경향은 한 시대의 산물인 연극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작금에 일어나는 연극의 대중문화화 현상을 포스트 모던적인 시류라는 틀만으로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보다 나은 인식소(episteme)이나 세계관, 혹은 새로운 파라다임의 정립을 위한 중간 단계라고 보여지는데, 우리 연극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하향적 평준화 - 우리들의 대중 문화는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여전히' 속물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 라고 밖에 볼 수 없고, 우리 연극계가 대중 문화와의 인기 경쟁을 하면서 그것의 속물 근성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리 연극계의 하향적 평준화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극은 대중 예술이며, 공연 예술이다. 우리들이 공연 예술이라고 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공연자와 관객, 그리고 공연 장소와 공연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공연 예술의 성패는 - 어떤 관점에서 성패를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 성실하게 준비한 공연자와 적절한 공연 장소, 그리고 내실 있는 공연과 확보된 관객의 수를 가지고 판단한다. 이 네 가지 요소들 중 어느 한 요소가 배제되어도 그 공연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연극은 하향적 평준화의 길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다. 처음 5초안에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텔레비전 채널이 돌아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가는 영화관과 비디오 방의 홍수 속에서, 또 이곳 저곳 늘어가는 노래방과 단란 주점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 관객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우리 연극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외설 시비에 적절하게 편승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경제 논리에 익숙해져 갔다. 지난해 "미란다"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자성의 소리를 들었다. 각종 매스컴들은 예술의 표현의 자유와 한계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예술의 바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예술인들의 자성의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아졌는가? 문화의 작용과 반작용에 대한 심각한 고려 없이 연극인들은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장사되는 연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관객들은 여전히 말초적 자극을 찾아 부초처럼 헤맨다. 이런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여 대중 매체들은 반사 이익 - 우리 현실은 외설을 고발한다는 명목 하에서 외설을 공론화하고 있지 않는가? - 이 있을 화제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한다.
이런 우리들의 연극 현실은 뜻 있는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 물론 우리들이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며, 굳이 마르크스의 논의를 빌지 않더라도 연극도 일종의 상품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잘 팔리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잘 팔린다고 해서 모든 상품이 다 품위 있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상품이 잘 팔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가 있다. 품질이 다른 제품보다 좋은 경우도 있고, 가격이 다른 제품보다 저렴한 경우도 있다. 또 독과점 품목이어서 다른 대체 상품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구매자의 입장에서 어떤 제품을 선호할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값싸고 품질이 좋은 제품일 것이다. 만약 두 가지 조건이 모두 흡족하지 않다면 - 사람이 처한 삶의 질에 대한 관점과 경제적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 일반적으로 조금은 고가여도 품질이 좋은 제품을 선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한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연극이 품질이 좋은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상품의 도자기는 좋은 재료를 사용할 뿐 아니라, 디자인이 미려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만으로 극상품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만드는 사람의 혼이 깃들이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 연극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상품이 아니다. 고도의 품질을 가진 예술품이다. 우리 연극을 고도의 품질을 가진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상품의 자료인 대본이 좋아야 한다. 정선된 대본이야말로 극상품 연극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그 속에는 삶에 대한 진실이 있어야 하고, 철학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런 요소가 대본 속에 충일 하고,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면 "미란다"에서와 같은 옷 벗고 입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좋은 연극을 만드는데 가장 우선해야 할 작업이 좋은 대본을 발굴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좋은 대본을 발굴하려면 우리들은 세 가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것들은 재능 있는 극작가와 양식 있는 비평가의 양성, 그리고 지적 소유권에 대한 적절한 배려이다. 우리 연극을 위해 - 물론 다른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 이 세 가지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재능 있는 극작가의 양성은 우리 연극의 자원을 풍성하고 윤택하게 할 것이고, 양식 있는 비평가의 양성은 재능 있는 극작가의 작품을 발굴하고, 그것을 정전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뿐 아니라, 대중들의 문화적 시야를 넓고 올바르게 교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때 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돈과 연관된다. 재능 있는 극작가도, 양식 있는 비평가도 그에 합당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면 다작과 시류에 편승하는 아류작이나 아부작을 내거나, 절필하고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재정적인 것이 뒷받침이 되지 아니하는 현실 속에서 예술 혼과 장인 정신만을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연극인들 스스로가 지적 소유권에 대한 적절한 배려와 관심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가 동료들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존중할 수 없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성경도 말하지 않는가!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연극 대본과 더불어 유능한 연출가가 필요하다. 연출가의 할 일은 주어진 자료를 가지고 잘 디자인하고 광택을 내어 고객이 현혹시킬 만한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출가는 관객들보다 먼저 대본을 선정, 분석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장인 정신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그것을 무대 위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대본의 다음 단계는 양식 있는 연출가의 양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연극계에서는 이 점에 있어서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한 극단적인 예를 우리들은 "미란다" 무단 정지 이후에 있었던 조그만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연극 "미란다"를 제작하고, 연출했던 사람이 공연을 무단 정지하면서 인터뷰한 내용 - 이 연극을 보려 온 사람들은 연극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니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요지의 말 -은 연극에 대한 기본 자질조차 의심케 하는 일이었다. 이런 예술이란 이름 하에 속물 근성을 보이는 사이비 연극 연출가들은 이제 이 땅에서 발붙여 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기본적인 양식과 윤리가 있기 때문이며, 특히 문화 상품은 "즐거움 뿐 아니라 도덕 의식"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연출가의 자질 문제와 곁들어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공부하는 연기자, 연출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있었던 한일 연극인 교류와 한국 여성 연극인회에서 주최한 세미나에 참여했던 한 분의 이야기는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 예이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판을 벌여 놓았는데, 행사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 분은 "대충 2천명 가까운 연극인이 유동하는 거리의 한가운데에서 진행된 행사에 평균 20~30명도 참여하기 힘들다는 건 전반적으로 관객이 외면하고 있는 연극 무대의 현실과 관계가 없지 않으리라 봅니다."라고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런 평가가 제대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분의 말은 우리들에게 한가지 사실은 암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공부하는데 인색한 연기자, 연출가들이 판을 치는 연극계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된 극을 만들겠는가!
양식 있는 연출가와 좋은 배우와 더불어 연극의 성패를 좌우하는 한 요소는 심미안을 가진 관객이다. 심미안을 가진 관객의 존재야말로 우리 연극을 보다 역량 있는 연극으로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어떤 상품을 고를 때 그 상품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가장 좋은 상품을 살 수 있듯이 연극을 볼 때도 예술적 심미안을 가진 사람만이 좋은 연극을 가려 낼 수 있고, 그것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심미안을 가진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연극은 발전하게 된다. 그들의 눈은 사이비 연극을 판별해 낼 것이고,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 그들의 눈은 양식 있는 연출가와 배우를 찾아 낼 것이고, 그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관객이 없는 연극은 살아 남을 수 없기에 양식 있는 관객이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의 극예술은 발전하게 되어 있다.
양식 있는 관객들은 또한 사이비 언론을 발붙일 곳이 없게 한다. 문화에 대해 문외한인 돌팔이 기자들의 연극 안내, 혹은 연극 평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문화에 관한 돌팔이 기사의 한 예를 어느 신문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떤 신문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개관(78년)이래 최초로 `벗는 뮤지컬'이 무대에 올려져 공연 문화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주연 여배우의 극중 전라 연기로 화제를 모을 작품은 사상 최초의 한-러합작 록 뮤지컬 `유논과 아보스' (11~20일 세종 문화 회관 대강당). 이 작품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콘치타 역에 더블캐스팅된 `러시아 최고의 여배우' 올가 카보(26)와 `시립가무단의 꽃' 함수연(25)은 극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약혼자 레자노프 백작과의 정사 장면에서 4분 동안 전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뮤지컬에 출연하는 유일한 러시아 배우로 우리말 대사와 노래를 부르는 올가 카보는 177cm 57kg의 조각 같은 몸매로 영화 `백야의 연인' `모스크바에서 온 S여인'등에서 보인 빼어난 연기와 관능미를 이번 무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할 예정. 또 함수연도 164cm 50kg의 아담하고 탄력 있는 몸매와 수준급 노래 실력으로 객석을 단숨에 사로잡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쓰고 있다. 이어서 그 기사는 연출자 문석봉씨의 말을 인용해서 "무대 공간이 조그만 소극 장도 아니고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시립 문화 공간이다 보니 조금은 충격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이 섹스 장면은 원작에 있는 것으로 16세 때 만나 사랑에 빠져 약혼한 남자를 35년간이나 기다리는 한 여자의 순애보적인 사랑을 압축해서 예고하는 대목"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어서 "처음 옷을 벗을 때는 올가 카보가 과감했는데 막상 포스터용 사진을 찍고 리허설에 들어가서는 함수연이 더 적극적이었다. 두 나라 여배우의 자존심이 걸린 듯 몸매 경쟁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분위기"라는게 스태프들의 귀띔."이라는 기사가 주저함없이 나온다. 도대체 그런 내용이 공연 예술 본래의 미학적 내용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양식있는 관객이란 요소와 더불어 우리 연극을 생각해 볼 때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극장 입장료에 관한 것이다. 과연 관객들은 어느 정도 가격의 표를 원할까? 솔직히 말해서 필자에게는 우리 연극의 관람료가 비싼 것처럼 느껴진다. 연극을 보고 나오는 길에 사기 당한 것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극 관람표가 얼마 정도 해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이기는 하지만 결코 해결 못할 것도 아니다. 관객들이 한 편의 연극의 가치를 더 잘 안다. 사람들이 좋은 품질의 제품에는 많은 돈을 지불해도 억울해 하지 않는 것처럼 관객들도 좋은 연극에는 비싼 대가도 기분 좋게 지불한다. 결국 문제는 관람료의 고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극을 얼마나 잘 만들었느냐에 있다. 연극 입장료를 매기기 전에 극단 측은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관객들은 연극에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할인 표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우리 연극의 현실과 그 대안을 자본주의 논리 하에서 대본, 연출가, 연기자, 관객이란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기본적으로 연극도 사회적 산물이며, 이데올로기 -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란 좌파적 계급 투쟁의 개념이 아니다 - 의 투쟁의 장이다. 우리들은 연극을 통해서 그릇된 세계관과 싸워야 하고,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대중 문화의 영역을 상향적 평준화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연극은 일종의 문화 상품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객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최대한 좋은 재료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양식있는 극작가와 비평가가 필요하고, 적절한 보상책이 있어야 한다. 재능있는 연출가와 배우들도 있어야 하며, 심미안을 가진 관객들도 많아야 한다. 또한, 좋은 작품을 공연할 수 있는 품위있는 공간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이 부분은 필자의 능력 밖이어서 본고에서 취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