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 94년 12월 28일 화요공부방 - 정전 서른일곱째 시간
□ 제3 수행편
□ 제1장 일상 수행의 요법 – 1
반갑습니다.
오늘 눈이 많이 오는데 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으시지. ^^;
12월 마지막 주. 주중인데..
아까 어떤 녀석하고 통화했는데 ‘살이 좀 빠졌냐?’ 고 했더니
‘빠졌다가 다시 쪘어요.’ 라고 해요. 왜 그러냐고 하니
‘망년회 이잖아요’ 그럽니다. 망년회를 여러 개 했더니 살이 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정신 육신 물질로 망년회를 하는 거냐?
술을 먹는 거냐?’ 고 했습니다.
오늘은 수행편인데요. 지난 주까지는 교의편을 마쳤습니다.
월불교 정전은 세편으로 되어 있죠? 첫째는 총서편입니다.
총서편은 총체적인 서설입니다. 거기에는 개교의 동기와 교법의 총설이
나와서 동기와 목적과 방향 그리고 총체적인 기본을 설명한 다음에
그 동기와 목적과 방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 법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교의편입니다. 원불교의 교의. 법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제1장 일원상에 총 6절로 게송까지 나오고 그 다음에 사은
사요가 나오고 그 다음에 삼학 팔조가 설명이 되고 그 다음에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의 설명이 나온 다음에 지난 주에 마친
사대 강령으로써 교단의 실천 목표를 대사회적으로 일반인이 알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정전은 지난 주까지 해서
끝났습니다.
그럼 오늘 수행편은 무엇이냐? 그렇다면 그 법이 이렇다는데 그 법을
어떻게 써 먹을 것이냐? 즉 도면을 쳐서 설계도를 그렸으면 시공을
어떻게 할 것이냐? 많은 사람들이 종교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합니다. 법을 잘 모르고 부처님께서 내놓으신 목적도 잘 모릅니다.
종교에 간 목적이 막연합니다. 그리고 법도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나 경험 했던 것. 또는 자기 주위의 인연이 소개한
하나를 잡고 그것을 막 합니다. ‘누구는 반야심경을 몇 독 했다더라…’
그것만 죽어라 하고 있고, 아니면 ‘누구는 헌배를 몇 배를 했다더라…’
그것만 하고 있고, 아니면 ‘누구는 경전 사경을 얼마를 했다더라…’.
‘누구는 선을 몇 시간 했다더라…’, ‘누구는 염불을 주야로 했다더라…’
그것 하나만 잡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알고 보면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효과가 있지만
원리를 알고 하느냐와 모르고 하느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목포나 부산을 갈 때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염불을 한다면 염불을 왜 하고 어떤 원리 속에서 하는지 좌선을 한다면
어떤 원리에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수행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경전은 왜 공부하는지..?
또 우리는 왜 계문을 지켜야 하는지..? 이런 것의 원리와 체계를
잘 모르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 안에서도 교종은 경전을.. 선종은 선을 위주로 하고, 율종은
계문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원리, 즉, 일원상. 우리 마음의 원리의 속성 중에
한 분야를 강조한 수행법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난 주까지 배웠던 것은 원불교 법의 이론과
원리와 법의 체계를 공부했습니다.
오늘부터는 그 사은 사요, 삼학 팔조, 일원상에 대한 것을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실생활에 써 먹을 것이냐? 예를 들면 염불을 하면
좋다는데 그 염불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며? 그 공덕은
무엇이며? 그 효과는 무엇이며? 있어지는 문제점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인가? 일기를 어떻게 쓰라는 것이냐? 무시선을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냐? 기도는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냐? 사은 사요 삼학 팔조가
있지만 그것을 실생활에 어떻게 응용하라는 이야기냐? 훈련은 언제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냐? 이런 것들을 대종사님께서 수행편에 정리를
해 놓으셨습니다.
오늘부터 할 수행편은 어떻게 보면 실질적인 실행을 위주로 한 실질적인
마음을 대조하고 마음을 공부하고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기초로 한
훈련입니다. 도덕의 훈련인데 사실적 훈련이다. 사실적이라는 것은
이 현실 속에서 내 마음을 어떻게 수행을 하고 어떻게 마음을 챙기느냐?
결국 챙기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챙길 것이냐? 그래서 마음 공부의 적은
방심입니다. 마음 공부 제일 잘한다는 것은 챙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챙길 때 ‘이럴 땐 어떻게 챙겨야 하고, 저럴 땐 어떻게 챙겨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행편의 구조를 보면 일상 수행의 요법 1, 2, 3조는
삼학입니다. 수양, 연구, 취사입니다. 4조는 팔조입니다. 5조는 사은
전체를 묶은 것입니다. 6, 7, 8,9조는 사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렇게 하려는데 됩니까?
‘자성의 정을 세우자’ 고 외우면 됩니까?
일상 수행의 요법은 세우고, 제거하고, 돌리자 세 가지 인데 그것이
결국은 챙기는 마음 공부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외우고 있으면 마음
공부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실지로 훈련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응용이라는 것은 훈련을 말합니다.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응용은 훈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훈련도 2장에 보면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정기 훈련은
법의 훈련이고, 상시 훈련은 수행의 훈련입니다. 정기 훈련은 원불교의
삼학 공부를 11과목으로 나누어서 수양 연구 취사를 그 법을 어떻게
기초를 할 것인가? 그래서 정기 훈련이 아주 중요합니다.
초입자 때는 상시 훈련보다 정기 훈련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기 훈련만 계속 중요시 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종사님이 주세불로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주세불이라는 것은 사은의 은혜를 밝혀 주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시 속에서 즉,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어떻게 마음 공부를 하면서
성불할 수 있고 제중할 수 있고 제생의세 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이 생에 내가 사회 생활과 일상 생활 속에서 마음 공부를
확실하게 할 것인가? 를 제시해 준 것이 상시 훈련입니다.
그래서 상시 훈련은 두 가지로 상시 응용 주의 사항과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 즉,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은 자력이요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은 타력입니다. 그리고 두 개의 관계까지
설명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 3장부터는 염불은 어떻게 할 것이냐?
4장은 좌선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렇게 하면서 맨 뒤에 16장 영육
쌍전 법 다음에 법위등급으로써 우리가 삼학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
즉, 마음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 를 우리 스스로 체크 해 보라는 것이
법위등급별로 수양력 연구력 취사력을 체크할 수 있도록 법위등급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불교 공부를 해 보았고, 유학도 공부해 보았고, 그리고 교회도
다니고 성경도 몇 번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원불교 법 같이 이렇게
체계적이고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원불교 교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른 것을 무시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어떤 종교는 신앙에 몰두합니다. 설교를 들어보면 90%가 기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면 다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죠. 그러나 기도만 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실 당처에 불공을 잘 할 것인가? 예를 들면 우리 진성 교우가
전화를 당일 날 해야 하는데 안 했잖아요? 그래 놓고는 기도만 하면
됩니까? 전화를 해야지 기도만 하면 되냐고? 그때는 기도가 아니라
전화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실지 공부입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라 볼 때 ‘나는 못난이다. 나는 잘 났다.
나는 재주가 이런 것이 있다. 나는 뉘 집 아들이요. 나는 학벌이 어떻고,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명예가 있는 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떤 사람은 교만으로 어떤 사람은 자기 학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자기를 존대하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무시하는데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존경했다. 무시했다. 학대했다. 교만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내가 오늘 목소리가 아주 좋네? 왜 그렇지? 엊저녁에 노래를 좀 했더니
목이 터져 버렸나 보네요. 큰일 났네.. 목소리 괜찮지요?
- 네
인위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전생에 독경을
많이 하면 이렇게 목소리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 와 ^^
이렇게 교만하는 사람이 있다.
- ㅎㅎㅎ ^^;
이렇게 교만하면, 사람들이 ‘어.. 어..’ 하면서 상을 갖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스스로 교만해서 점수를 깎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어떤 자기의 능한 부분을 하나를
잡고 자랑하고 그것이 자기인줄 알고 또 그것을 삶의 에너지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죽겠고 성질이 나서 죽겠고 시소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금방 울다가 웃다가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바라 볼 때 어떻게 바라 봅니까?
나는 어린 양이요 죄가 많은 죄인입니다.
유교에서는 어떻게 바라 봅니까?
‘순선무악 純善無惡 이요 무선무악 無善無惡’ 이라고 합니다.
순자는 성악설을 이야기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꽉 쥐고
안 놓습니다. 자기에게만 갖다 놓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아 사람이
불량한가 보다. 그런데 강물에 빠진 어린아이는 다 건져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좋은 마음이 있구나.
맹자가 성선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한 번 보세요.
우리 용환이 참 착하게 생겼어 눈도 똘망해 가지고 그런데 안 좋은 일이
몇 번 겹쳐보세요. 성질 나면 탁 교당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결석
2년 하다가 금년에 못했잖아요? 열 받으니까? 저렇게 착하게 생겼지만
경계에 따라서 그럴 수 있다.
- ㅎㅎㅎ
불교에서는 어떻게 바라 보느냐? 본디 부처다. 본디 부처의 불성이
갊아져 있는 본디 부처다. 그런데 그 자리를 깨치면 된다. 깨침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야장창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럼 원불교는 어떻게 바라 보느냐?
원불교를 떠나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바라 보십니까?
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
제가 원남 교당에서 근무를 할 때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해태 제과
사장까지 하신 분이 게셨는데 이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저 오선생님. 사회생활을 하고 일생을 살아보니까 사람들 성품이
본디 어떤 것 같습니까?’ 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법대를 나오고
사회 생활을 했으니 여기 저기 불량한 사람이 천지잖아요?
‘성악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경험을 많이 하셨나 보죠?’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은 어떤 것 같습니까?
우리 소영이 보면 착하고 예쁘지만 성질 나면 또 아니겠죠?
사형 제도를 주장합니다. 유영철은 사형 시켜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럽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열 몇 명을 죽이냐? 그것도 아침에
죽이고 저녁에 죽이고.. 하루에도 두 명을 죽이고… 저것이 사람이냐?
저 놈은 사형시켜야 한다.’ 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죠? 종교인이니까 사형을 반대해 볼까? 착한 역할 좀 하게?
낙태를 합니다. 종교인이니까 낙태를 좀 반대해봐?
사회 정화 역할 좀 해보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한 근거와 원리를 알아야지 되는 것입니다.
왜 낙태를 반대하는가? 왜 사형 제도를 반대 하는가? 마음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가? 왜 우리 진성이는 과정만
중요시 하고 결과를 중요시 하지 않는가? 우리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합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것입니까?
열매를 따자는 것 아니에요? 풍작을 하자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화요 공부방을 끝내고 나니 신문사 기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 6명이 모여 있는데 나한테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화요일에
피곤해서 죽겠는데 그 시간에 갔습니다. 어떤 목사가 나한테 마음
공부를 나에게 배우고 싶다고 해서 ‘비싼데..?’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목사가 ‘그러면 홍보가 될 텐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목사가 오니까 원불교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홍보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대신에 내가 그것은 알려줄 수 있다. 하느님과 마음의 관계,
마음의 원리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비싸다고 했습니다.
신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언제
인사동에서 교수들과 교장들하고 기독교 장로들을 앉혀놓고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좋아했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목사님이 원불교 훈련을 났습니다. 그 목사가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훈련 나고서 하는 말이
‘이제는 내가 하느님을 알겠다.’
그저 막연한 하느님, 우리가 쳐다볼 수 없는 하느님, 보이지 않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찬양의 존재이고 유일신이신 하느님을
원불교 훈련을 났더니 이제는 알겠다. 삼십 년간 내가 이 존재를 모르고
여태 그 대상에게 기도를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알아보겠다.
뭘 알았다는 것이에요? 목사가 훈련 한 번 나고 그 정도 알면 빠른
것입니다. 참 우리가 나약한 것 같습니다. 누가 좀 잘 본다고 하면
그 양반 말은 잘 듣습니다. 교무 말은 안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죠?
아니면 막연한 대상에게.. 어떤데 가면 나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하느님은 내 뜻을 안 들어 주는 거야?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되겠지…
여러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학을 해도 공식과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글을 써도 물리가 트여야 합니다. 소리를 해도 득음을 해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원불교 마음 공부를 하려면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 원리가 뭐예요? 원리가 뭐예요? 누가 대답을 안 하네?
그냥 말로 하겠습니다. 제가 허리가 아파서…
대소유무의 원리다. 대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전체다.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대라는 것은 크잖아요. 소라는 것은 모든
것들이 각각 나누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이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대와 소가 어떻게 되느냐? 서로 돌아요.
대가 소로 갔다가 소가 대로 갔다가 또는 소가 대로 갔다가 대가 다시
소로 왔다가… 또는 소가 대를 포함하고 있다가 감추어져 있다가 다시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은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무라고 합니다.
대(大)
소(小)
유무(有無)
이것이 마음의 원리입니다. 일원상은 바로 대소유무가 일원상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뿐 아니라 내 몸도 대소유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내 몸 하나가 뭐에요? 이것이 대입니다. 소는 각각의
장기나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 등등 전부 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되죠? 유무로 변화를 합니다. 내 몸 안에서 순환을 합니다.
세포가 계속 변화하고 있고 털도 계속 빠지고 나옵니다.
모든 것이 대소유무입니다.
특히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 대소유무를 알아야 하는데, 아까 유교에서
말한 무선무악(無善無惡)이다. 대(大)자리는 무선무악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이라고 합니다.
진공(眞空)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대(大) = 무선무악(無善無惡)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진공(眞空)
소(小)자리는 능선능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정신 수양에서는 분별성,
주착심이라고 합니다. 경계에 따라 다 있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잡초가
나듯이 그런데 그것이 계속 그렇지 않고 유무로 변한다. 그렇게 좋았던
사람이 그렇게 밉기도 하고 미웠던 사람이 다시 좋아지기도 합니다.
소(小) = 능선능악(能善能惡) 분별성 주착심
TV를 봤는데 한 사람과 결혼과 이혼을 여섯 번인가 일곱 번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계속 이혼 했다 결혼 했다. 참 대단한 유무입니다.
결혼 할 때는 다시 어떻게 해보자고 하지만 살아보니까 성질 나서
엎어버리고 다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은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원리입니다.
마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머리카락이
났죠? 산에 나무들이 크는 것과 머리카락이 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계곡이 있고 강줄기가 있는데 내 몸에 혈관이 있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크게 놓고 보고 작게 놓고 보고 다 대조를 해 보세요.
(경전을 들면서..) 이것만 경전이 아닙니다. 마음에도 경전이 있고 천지
자연에도 경전이 있습니다. 원불교 경전 공부를 해서 뭐 하자는 것이냐?
바로 마음 경전과 천지 우주 경전을 읽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어디를 가서라도 응용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센스 있는 사람입니다.
기업에서 제일 곤란한 사람은 응용무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응용력이 없는 사람이 회사의 사장이라면 3년 내에 망합니다.
대소유무 전체가 하나입니다. 대소유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설명
방식입니다. 대 안에 소가 있고 소 안에 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안에 유무가 있는 것입니다. 설명 방식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은 대(大)만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 해도
‘다 허망한 것인데 그러냐고..?’ 라고 합니다.
빗자루로 청소를 하라고 하니까
‘금방 떨어질 것인데 뭐 하러 청소하냐.?’ 라고 합니다.
‘그래? 한 번 맞아볼래?’ 내가 빗자루로 한 번 붙여버렸습니다.
‘안 아프지? 맞은 바 없이 맞아서.. 나는 때린 바가 없이 때렸다.’
그 다음 소(小)자리만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중생들은
무엇으로 사는 줄 아세요? 소로 삽니다. 소는 각각 나눔입니다.
이 세게는 상대의 세계입니다. 짝하는 세계입니다. 전부 다 나누어져
있습니다.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고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듯이
부귀빈천으로 다 나뉩니다. 상대의 세계로 모든 것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이 상대의 세계에서 조금 좋은 것, 편한 것,
조금 이익이 되는 것.. 그 상대의 세계에서 막 치고 달려갑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 상대를 뛰어 넘는 것이 절대의 세계입니다. 상대의 세계를 뛰어
넘어서 상대를 포함해 버리는 절대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존재가 그런 상대적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와 나가 있지만 너와 나를 초월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아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작은 나에게만 국한됩니다. 중생은 이기적이면서
주관적입니다. ‘나’라는 것에 국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넘지
못합니다. 소아를 알지만 그 소아를 넘어서 대아를 알고 소아를
활용하면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릅니다.
대를 깨쳐서 소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겨우 목표가 상대의
세계에서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조금 더 큰집
장만하고 조금 더 좋은 것 입고 조금 더 맛있는 것 먹고 조금 더 편한
것을 향해서.. 상대의 세계에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앞선 것 같으면 교만해 하고 조금 뒤쳐진 것 같으면 자기 무시합니다.
그 중에 하나 잘 난 것이 있으면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이것이 중생의
세계입니다. 또 그것이 영원할 것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붓글씨 선생님이 나한테 그럽니다. 그 양반도 괜찮은 학교를 나오고
똑똑했던 양반이라 자기 친구 중에 장관도 있고 군에서 스타로 퇴임한
사람도 있답니다. 그분이 7학년이 넘었습니다. 제일 곤란한 사람이
누구냐?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배울 줄 모르고 앉아서 버티고만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옛날에 뭐였다. 그것은 옛날이죠. 현재가 중요합니다.
유무는 변화라고 합니다. 이 변화를 알아야 합니다.
유무(有無) = 변화
내가 얼마 있으면 죽을 때인가?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나는 퇴임 하려면 딱 20년 남았습니다. 내가 볼 때는 앞으로 10년 밖에
활동을 못합니다. 10년 활동하고 나면 늙어서 얼마나 하겠어요?
그때 되면 조용히 시골에서 살아야죠. 그때 싸돌아 다니면 웃기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10년 죽어라 하고 쉬어야죠. 10년 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 10년에서 먹는 시간 자는 시간 성질 난 시간 다
빼보세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정말 인생 짧아요. 유무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변화 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나는 내생에 어떤 부모를 만나서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생로병사의 변화, 우주의 성주괴공, 흥망성쇠, 진•강급,
음양상승 등 이런 변화의 세계에 대해서 내가 모르면 고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편하게 살자는 것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종교문에 들어갈 것이 뭐냐면? 바로 진리와 법 그리고 생사의
문제가 들어가야 합니다. 생사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종교인은 종교를
자기 편리한 데로 갖다 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생사의 문제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곧 맞이할 문제입니다.
유미가 카페에 글을 썼는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축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그 밑에 댓 글을 달았는데 뭐라고 달았는지 읽어 본 사람?
‘수고했다. 우리도 곧 간다. 그 양반 따라서…’
내가 장례를 지내려 가면 남편이나 부인이 죽으면 막 웁니다.
특히 충청도는 탈관을 합니다. 막 잡고 우는데…
나는 쳐다보면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 당신도 그 옆에 금방 들어가..’
그걸 생각하는 나도 금방 들어갑니다.
이것이 변화의 세계입니다.
로마가 천년 만년 갈 것 같죠? 그렇지 안잖아요? 우리 조선 이조가 오백
년인데 세계 역사에서 드물다고 합니다. 왕조도 오백 년 밖에 못 갑니다.
중국에 가니까 7일 천하를 한 사람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대소유무에 대해서 가늠을 잡아야 합니다. 대는 진공이고,
소와 유무는 묘유(妙有)자리입니다. 진공묘유를 설명할 때 묘유는
대와 소를 진공으로 바라 볼 때도 있고, 소자리에 들어가거나
유무자리에 들어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리도에 보면 수행은
진공묘유의 수행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수행은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하자는 것이고 마음 공부를 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진공묘유의
수행문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한 마디로 하면 유념 공부입니다.
그 유념 공부는 무념 공부를 포함하는 유념입니다. 어떤 때는 유념
공부를 해야 하고 어떤 때는 무념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요란함이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란함이라는 것은 다양합니다. 몰라서 요란 하기도
하고 또는 욕심 때문에 요란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일상 수행의 요법을 대소유무로 풀어준 것은 참 은혜롭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진공자리에 합일하는 것이 수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소자리는 묘유자리입니다. 연구라는 것은 묘유의
세계에 대해서, 각각으로 나누어진 세계, 즉, 과학의 세계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알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이치의 세계까지 알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묘유의 세계.
즉, 유무의 세계. 우리의 마음이 본래 무선무악입니다.
아까 유영철도 자면서 ‘누구 또 죽여야지’ 라면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잡니다. 그러다 눈 뜨면 소자리로 뭘 할까? 하겠죠.
그런데 사형 제도를 왜 반대 해야만 하느냐? 그 사람도 유무자리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참회를 통해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던가 불교의 중흥을 이루었던
용수보살은 아주 못된 놈이었습니다. 아마 자기 부모까지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개심을 해서 한마음 먹어서 조사가 되었습니다.
삽삼조사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조사입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전라도에서 25 먹은 놈이 자기 부모를 다
죽였더군요. 그 뉴스를 들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그랬는지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도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본주의에 치중하고 너무 경쟁 사회에 몰아
붙이면서 그 사람들에게 배움의 기회, 또는 삶의 여유를 채워주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솔직히 어렵게 사는 사람은 확실히 자신감이 없고 삶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 그렇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성자가 된 분은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다 그렇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머니께서 일주일 만에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고모 밑에서 큽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가 없지요. 출생의 비밀이 큰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공자는 어떻게 태어났느냐? 공자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나이 차이가 54살 입니다. 공자 아버지가 70살에 16살의 아가씨를
얻어서 공자가 태어난 지 3살 때 돌아가십니다. 공자가 24살 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십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하마드는 아버지가
자기를 낳기 몇 주 전에 돌아가십니다.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6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갔으나 8살 때에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숙부 집에 갔는데 숙부는 상인이었습니다.
숙부를 따라 험난한 사막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속에서 고통과 번뇌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인간이 고통과 번뇌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통과 번뇌가 문제다. 고통과 번뇌
때문에 자신이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하지만 그 분들은 고통과
번뇌를 다 어떻게 넘긴 것입니까?
그 고통과 번뇌를 뚫고 들어 간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차고 들어간
것입니다. 마치 번뇌의 실타래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 낸 사람들입니다.
고통의 무게를 이고 있거나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속으로 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고집멸도구나. 그 고통은
집착에 있었구나. 그것을 멸하자니 삼학 수행이 필요하구나.
그것을 치고 들어간 것입니다. 전부 공통점이 그렇습니다. 그런 번뇌와
고통을 풀어 헤쳐서 밝혀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된 것입니다.
상대의 세계에서 번뇌와 고통이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감이 없이 항상
자기를 무시하고 학대하고 원망하면서 살아야 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화요 공부방의 일상 수행의 요법은 다음 주에는 출가여행이 있어서
쉽니다만 그 다음 주.. 내년에 계속 할 것인데..
오늘은 제가 기본적인 것만 설명을 합니다.
대소유무가 수양 연구 취사입니다. 이 취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 시킬 것이냐? 즉,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어떻게 돌릴 것이냐?’ 를 말합니다.
그런데 대자리 내에서 다시 대소유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일상 수행의
요법입니다. 대가 일상 수행의 요법 1조, 소가 2조, 유무가 3조인데,
다시 대자리 내에서 대소유무가 나옵니다.
대(大) |
수양 |
일상 수행의 요법 1조 |
소(小) |
연구 |
일상 수행의 요법 2조 |
유무(有無) |
취사 |
일상 수행의 요법 3조 |
그래서 아까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그것이 대(大)입니다.
원래 요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도 없고 그름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무엇에 따라 있어져요?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있어져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계 따라
있어지면 어떻게 생각 하느냐? 공부를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닥치면 팍 올라오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수양을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런데 100% 그렇지 않습니다.
수양을 못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종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죠?
정산 종사님께서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니까 어떤 제자가 묻습니다.
‘정산 종사님은 도인이 아닌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애착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대종사님께서 뭐라고 했어요?
‘너는 목석을 도인으로 알겠다?’
우리는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를 속이는 도인들이 많았습니다. 며칠씩 밥을 안 먹는
도인. 잠을 안 자는 도인. 이런 뿔따구 같은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안 먹고 안 자고 살수 있어요? 그것은 다 속이는 것이고
소설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몇 달간 밥을 안 먹는 도인이 TV에
나왔는데 나중에 카메라가 치고 들어가니까 벽장 안에서
밥 그릇이 다 기어 나왔습니다.
마음의 원리는 경계에 따라 다 있어집니다. 추우면 추위를 느끼는
것이고 배고프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고 성질 나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도인이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만에 말씀. 대종사님께서는 화를 냈습니다. 얼마나 크게 성질을
부렸는지 조실에서 성질을 내면 총부 대문까지 다 들렸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체격도 크고 목소리도 아주 컸습니다.
‘이놈의 새끼 보따리 싸서 나가!’ 그렇게 화를 냈습니다.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언젠가 성질 한 번 냈더니
‘교무님은 어떻게 성질을 낼 수 있습니까?’ 라고 해서
‘내가 도인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웃으면서 그랬는데..
성질 안 낸 사람이 암에 걸려 죽습니다. 내가 암 걸려 죽은 사람
천도재를 여러 번 지냈습니다. 그 중에 우리 청년도 있었습니다.
원남 교당에서 29살 먹은 애였는데 시집 가서 둘째 낳으려고 하다가
위암으로 나와서 1년 만에 죽었습니다. 부잣집 딸이었는데.. 그 애는
법이 없이도 산다는 아이였습니다. 워낙 사람이 좋고 관계형 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서는 삭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병이 난 것입니다.
마음의 원리를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의 부인의 백일 기도를 내가 한 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 안가는 유명한 재벌 집 부인인데
기도를 하다가 엉엉 울어요. 내가 백일 기도를 하다가 이 부분을 설명할
때였습니다. 내가 ‘왜 우시냐고?’ 했더니.. ‘하이고 속이 시원하다고’
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변호사였는데 자신은 이대
사회학과를 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제일 갑부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서울대를 나왔고 TV에 맨날 나오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시집 갈 때 하여간 눈 감고 3년 귀 닫고 3년 입 다물고 3년을
해서 그 집 귀신이 되라고 했답니다. 3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화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한 것입니다. 화병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화병 걸려서 생각해 보니까 더 억울하더랍니다. ‘내가 이렇게 참고
있으면 풀려야 하는데 결과가 화병이냐?’ 하고 물어서 내가 대소유무의
원리로 설명을 해주니 이제야 알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는
소리가 자기 친구들이 전부 우리나라 그룹의 부인들이랍니다. 남들이
볼 때는 부러워하는데 좋은 차 속에서 전쟁으로 사는 우리 친구들이
불쌍하다고 나한테 그럽니다. ‘이런 마음의 원리를 모르고 체면 때문에
참고 또는 어떤 형식 때문에 참아야 하는데, 즉, 원리를 모르고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니까 화병에 걸리고 체면 때문에 살아가는 그 친구들이
불행하고 불쌍하다.’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 전에는 돈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유가 있는 듯 하지만 어떤 사람도 이 마음의 원리를
모르면 중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지를 원래 요란하고 어리석음 그름이 없지마는 경계 따라 있어진다는
사실. 있어지는데 원래는 어때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없다는 것은
없다는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럽니다. 교무님
저는 원래 강연을 잘 못해요. 그럼 제가 뭐라고 해야겠어요? 원래 못해?
하기 싫은 것이죠.
경계 따라 있어진다는 것은 무엇 따라 있어진다는 것이냐? 공부를
못해서 있어지는 것이죠. 첫째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있어지는 것은
진리의 작용입니다. 있어진다는 것은 분별성 주착심이 있어지는 것을
말하고 감정이 솟아 올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원장은 성질 안 내야 해?
선생은 성질 안 내야 해? 선생도 성질 나고 원장도 성질 나죠. 있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서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 ‘무조건 있어지면 다냐?’
이것입니다. 천만의 말씀. 왜 어떤 사람은 이 경계에 있어지지 않는데
저 사람은 있어지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있어지긴 있어지는데, 진리의 작용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온갖
희로애락애오욕이 나오기는 나오는데, 왜 사람마다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알아가지고 희로애락애오욕을 응용해서 쓰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질을 안 낼 것을 낸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낼 것을 안 낸 사람도 있고 무슨 차이입니까? 습관과 업력의
차이입니다. 유난히 민감한 사람이 있죠. 삐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다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습관과 업력에
의해서 있어지는 것들이 다 각각 다릅니다. 이것이 소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있어질 때 뭐 때문에 있어지는지 자기를
한 번 봐 보세요. 있어질 때 습관과 업력, 특히 주착의 세계에
있어집니다. 주착의 세계는 자기에게 제일 민감한 것입니다.
참 묘합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를 하고 나오면 어떤 교도님이 저에게
‘교무님 나 들으라고 그랬죠?’ 눈알에 힘을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속으로 ‘이럴 땐 어떻게 말해야 하나?’ 사실은 그런 분은 설교를
잘 들은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저건 우리 며느리가 들으면 참 좋겠네..’
설교는 앉아 있는 대상에게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들으라고 했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해서 ‘교무님은 나만 들으라고 했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민감한 것입니다.
‘교무님은 나에게 감정이 있나 봐?’,
‘왜 오늘 키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는 키가 작은데…’,
‘왜 오늘 학벌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 학벌 안 좋은데..’,
‘왜 하필 경제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는 경제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죽겠는데..’,
‘교무님 오늘 왜 몸무게 이야기를 하십니까? 안 빠져서
사람 죽겠는데…’
나는 생각 없이 했습니다. 혼자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민감한 것이 주착입니다. 있어지기는 있어지는데 자기에게
민감한 것에 있어집니다. 그래서 진리의 작용을 아까 목석을 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있어지는 것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그러는데 어쩌냐 배 째라’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뺨을 붙여버리고 싶어요.
이 공부를 하는데 공부의 핵심은 자기가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편하지만 다른 사람도 편하게 하는 같이 편한 것이 공부입니다.
‘나는 경계에 따라서 이런다 뭐.. 그건 네가 알아서 네 공부해라.’
이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겨우 공부한다는 것이 일기를 쓰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것이 공부인줄 압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별 천지가 다
있습니다. 공부에는 경계 이전의 공부가 있고 경계를 대해서 공부가
있고 경계 후의 공부가 있습니다.
경계 이전의 공부는 뭐죠?
예를 들어서 내가 진성교우라면 이렇게 합니다. 경계 이전 공부로 예를
들겠습니다. 마음 속에 오늘도 원장님이 히스테리를 부릴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침에 기도하고 좌선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법신불 사은님 오늘 원장님이 어떤 스트레스를 주던 간에 사실은
나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지 나를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가 오면 나는 무아가 되겠습니다. 경계 이전 자리로
가겠습니다. 요란함이 없는 그 자리를 나는 놓치지 않겠습니다.
분별이 없는 그 세계를 나는 한 번 체험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미리 대비 해야 합니다. 그럼 마음만 있으면 되요?
천만의 말씀.. 수양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단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계 이전의 공부입니다.
마치 군인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훈련 안 하고 놀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일심만 하면 됩니까? 다 죽습니다. 미리 경계 전에 공부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미리 연마이고 미리 단련이고 정시 공부입니다.
원불교 공부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요새 어디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경계를 당해서 마음만 챙기면 된답니다.
이런 뿔따구 같은 것이 어디 있어요? 물론 경계에 당해서 잘 챙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리 연마입니다.
예를 들어서 전화를 하면 되지 전화를 안 하고 기도만 하고 있거나
전화를 하지 않고 그 순간 마음만 챙기면 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경계 이전에 즉, 어떤 일을 당하기 이전에 내가 어떻게 미리 준비를
할 것이냐? 훨씬 다릅니다.
아침에 좌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사경을 하고 헌배를 했다고 하면 벌써
다릅니다. 마음이 든든합니다. 딱 가라앉아 있습니다. 출근하면서 내가
기도를 했기 때문에 든든하고 가슴에 일원상을 품고 갑니다. 욕심, 번뇌,
분별심만 가득 품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텅 빈 무아의 진리를
품고 가는 것입니다. 든든하죠. 호흡도 됩니다. 머리 끝이 시원합니다.
그 상태에서 원장님을 마주 할 때 마음에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경계가 세면 힘들잖아요?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 요란함 그 어리석음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여기서 ‘그’라는 것은 저 양반도 ‘그’고 나도 ‘그’입니다.
둘 다 ‘그’입니다. 이때는 저 양반과 나, 둘 다 포함한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공부할 것이냐? 그럼 그때 나는 어떤 마음 상태인가?
무시선 법에 집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경계 이전 공부를
많이 한 것입니다. 그 다음 ‘관심 공부’입니다. 이것이 경계를 당해서
하는 공부법입니다. 즉, 내 마음을 내가 바라보는 공부입니다.
그 전에 무엇을 해야 하나? 자기의 뻗쳐나가는 온갖 마음을 모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모을 줄을 몰라요. 뭔가 컴퓨터를
하던가 음악을 듣던가 게임을 하던가 누구하고 이야기를 하던가 술을
먹던가 뭘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왠지 불안합니다. 집심 공부를 하려고
하면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안 하는 것입니다. 집심 공부를 해서
자기가 경계 이전에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심 정력이라.
딱 추를 잡아 놔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경계가 왔을 때 내 마음을 바라 봐야 합니다.
‘아 경계가 왔네?’ 내 안의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마음의 원리를 알고 바라보는 사람과 원리를 모르고
바라보는 사람…
제가 교무가 되어서 웃기는 소리가 원리를 모르니까
‘제가 공부를 못해서요. 수양을 못해서요.’
맨날 그럽니다. 경계를 당해서 마음이 일어나면?
‘제가 공부를 못해서요. 수양을 못해서요.’
아닙니다 경계에 따라서 있어지기는 있어집니다. 그때 그 순간에 얼마나
내 마음을 일심으로 자기를 바라보느냐? 쉽지 않습니다.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은 경계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죠? 둘이 보듬고 로켓
타고 달려갑니다. 문짝 부서지고 TV 리모콘 날라가고 그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멈추려고 해도
되냐고? 돼요? 여러분들은 됩니까? 참 안됩니다. 안 될 때 안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공부입니다. 그것이 우리 일기법의 유념 공부입니다.
그 일의 성공 유무를 대조하기 전에 경계에 졌더라도 먼저 그 마음을
챙겼냐 안 챙겼냐? 그 일에 실패를 했어도 내가 내 마음을 바라
보았다면 그것은 유념이다. 그것이 유념 공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이냐고 하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까 집심
공부를 해서 무아를 체험한 사람도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관심 공부를
해서 자기와 저기의 대화를 엄청나게 많이 해 봐야 해요. 이렇게 관심
공부를 할 때가 법마상전이나 특신급입니다. 이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희로애락애오욕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정말 묘하구나.
내 마음이 정말 묘하게 있어지는 것을 알아요. 그냥 가다가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발소리만 들어도 팍 올라오고 목소리만 들어도 감정이
올라옵니다. 감정이 있어지는데 묘하잖아요? 내가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자동으로 올라옵니다. 이럴 때 내 마음을 지켜보는 공부. 이것을
많이 해 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 할 수가 있고
그 속에서 법박에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석가모니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그리고 무하마드 같은 분들은 바로 그런 수많은
경계를 겪으면서 자기 안의 자기 마음을 바라 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치를 본 것입니다. 그것이 집심 공부고 관심 공부고 무심 공부입니다.
무시선 공부와 일상 수행의 요법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같이 다 연결됩니다. 원불교 공부는 정시와 상시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정시 공부 상시 공부가 동정간에 자타간에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있어지는 공부입니다.
날로 먹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날로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나한테 원인이니까 내가 좋은 마음만 먹으면
된다. 그러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삼학
공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제가 더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연과’ 라고 제가 썼습니다.
인(因) |
=분별성 주착심 |
연(緣) |
← 경계 |
▼ |
|
과(果) |
|
연이라는 것은 바로 경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인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연으로써 그것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입니다.
인과 연이 뭉쳐서 과가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은 무엇이죠?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서 ‘인연과’ 에서 인과만 이야기 하지 막상
현실 속에서 인과를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이냐 설명해 보아라 하면
말을 못합니다.
인은 분별성 주착심 입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이 인입니다.
인이 경계를 통해서, 연을 통해서 인이 과로.. 욕도 하고 싸움도 하고
전쟁도 하는 것입니다.
원불교 공부는 인과 연 공부를 어떻게 잘 해서 과를 맺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연은 무엇이죠? 연을 더 크게 말하면 사은입니다.
만나는 모든 대상이 연이죠. 그렇지만 그 대상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누구죠? 자기 자신의 마음. 이것이 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연을 생략하고 오직 내 마음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미안 하지만 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인과 연의 조합이 과이죠.
인만으로써 과가 어떻게 옵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연이라는 것. 경계란 말은 예를 들어서 38선 경계라고 이야기를 하죠?
남과 북의 사이를 38선 경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연’은 ‘인’과 ‘과’의
경계다. 이렇게 이야기 해도 됩니다. 어떤 것의 사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경계라는 것은 환경도 됩니다. 어떤 대상, 작용 이것이 전부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면 ‘앗 경계다’ 고 딱 알아차리면서 일기를 쓰면서
편안해지면 그것이 마음 공부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또는 경계가 요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내 생각이 근본 원인이기
때문에 밝은 생각을 가지면 된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한 부분을 말한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삼학 병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연(緣)을 무시합니다. ‘오직 내 안에 인만 있을 것이다.’
그것도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이 마음의 원리를 알아서 어떻게 지키며 어떻게 잘 쓸 것인가?
이것이 삼학 공부입니다. 이것이 삼학 공부지 하나만 붙잡고 그것이
다 인양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활용해 쓰세요.
그러나 그것이 대소유무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 마음만 편안하면 된다고 합니다.
내 마음만 편안하면 마음 공부라고 합니다.
마음 공부는 자리 이타가 되어야 합니다. 윈윈winwin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마음 공부하는 사람을 봤더니 옆 사람은 복창이 터져서 죽으려고
하는데 자신은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환장 하겠습니다.
가지가지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한 사람만 받겠습니다.
n 질문과 답변 =========================================
Q_청년 : 연이 없는 인과가 가능한가요?
A_교무님: 그것은 사은이 빠뜨린 상태에서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도 사은이 포함된 것입니다. 인과라는 말은 인연과의
준말입니다. 사실은 생략된 말입니다. 그래서 연이 없는 인만으로써
과가 있기는 어렵다. 그 다음에..
Q_청년 : 두 번째 질문은 대소유무 설명하실 때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
분별이 있는 자리로 나가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이유나 동기나 목적은
무엇이고 작용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인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연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A_교무님: 무에서 유로 또는 대에서 소로 갈 때 어떤 과정으로
그러느냐? 그 이야기죠? 자.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면 기운이 딱 동해요
그러면 바람이 불죠. 그러면서 구름이 끼면서 비가 내립니다. 한 기운이
동하면서 바람이 일어서 구름이 끼어서 비가 내립니다. 그와 똑 같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그런 정에서 동을 할 때 우주의 이치를 따라서
음양상승의 이치를 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대종사님은 뭐라고
표현을 했냐? 능이성 能以成 무위이화 無爲而化 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천도 법문에 이렇게 써있어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자동自動.
자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음양 상승 이치입니다.
이치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그냥 태어났잖아.
봄이 오고 싶어서 왔나? 지가 그냥 왔어요. 그런 것입니다.
그 이치를.. 음양의 원리를 인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치입니다.
자동이다. ‘왜 그렇게 됐냐?’ 가 아니라. 한기운이 동하면서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듯이 똑 같이 자네 없었다가 태어났지? 또 반대로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이치입니다. 능이성입니다. 능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위이화로 되는 것입니다.
Q_청년 : 대종사님께서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좀 전의 인과
보응하는 이치 응양 상승하는 이치는 도가 아니라 이치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A_교무님: 도나 이치나 똑같은 소리다. 그리고 불생 불멸과 인과
보응이다. 또는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 이렇게 설명하는데
그것도 잘 공부를 해보면 인과를 치고 들어가보면 그것이 불생 불멸
입니다. 불생 불멸을 치고 들어가면 그것이 인과입니다. 그래서 일원상
서원문에는 유상으로 보면… 유상의 세계라는 것은 불생 불멸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무상의 세계라는 것은 인과 보응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보면 보면 그럴까? 치고 들어가면 유상이 무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명하는 방식으로써 또 우리가 나누는 방식으로써 유상과 무상.
인과와 영생. 불생 불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신앙이
따로 있고 수행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신앙
없이 열심히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신앙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아까 인과를 신앙한 사람은 그 속에서 하다 보면 영생의 이치가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이치를 따라서 하다 보면.. 일체유심조를
공부해서 쭉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 속에 인과가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김혜민
편 집: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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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228_화공_37_제3수행편_제1장 일상 수행의 요법-1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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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9
09.12.31 19:37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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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항상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설법해주신 교무님, 타이핑/편집해주신 혜민교우님,부교무님 감사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ㅋ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