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 격 - 4
그러나 자신의 실수로 위장해야 할 필요가 있어, 어쩔 수 없이 히데코를 도쿄 만에서 살해한 거요.
당신이 신주쿠에서 빠찡꼬를 습격한 것도, 대마도에서 쾌속정을 빌려 잠입한 것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소."
"그, 그렇다면 결국 나를 한국으로 잠입시킨 것은 당신들 이었군요."
"이제 알겠어요? 알았으면 됐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르고 있던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 드리죠.
68년도 당신의 가미카제 수료 때, 당신은 수석이었소. 당신은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심 하나 빼 놓고는
모든 것이 만점이었소. 역시 한국인은 한국인이라는 생각과, 당신을 한국의 지도자로 만들자는 뜻에서
당신의 탈출을 가능케 해 주었던 거요."
백수웅은 이 여인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을 무서워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당, 당신은 누구요?"
"나요? 일본 국수주의 골수 분자요. 동경 제대 정치과 졸업. 가미카제 결사대 64년도 수료.
본명은 그대로 기사키 하쓰요.
캄보디아 내전 때 시아누크를 평양으로 빼돌린 장본인이기도 하죠. 나를 상대로 싸울 생각은 마시오.
만일 나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살려 둘 수가 없소. 두고 보시오. 몇 년만 지나면
시아누크는 다시 캄보디아 주인으로 컴백함니다. 역시 우리의 영향력이 행사될 것이오.
우리가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러나 백수웅은 몇 가지 강력한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이나 소련은 장난감 병정이 아니오. 일본이 세계를 제패하도록 그냥 두겠소?"
"당신은 아직 어리군요. 브라운 대령을 보시오. 그는 매월 10만 달러 지급에 자신의 조국을 등졌소.
그것이 미국이오, 그들에겐 조국에 대한 이념 무장이 되어 있지 않소. 유럽의 찌꺼기들이 어쩌다 비옥한 땅에
모여 경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결국은 게으름과 경제 부패로 쓰러질 나라요. 소련은 그런 면에서 훨씬
정신 무장이 되어 있지만, 그 대신 그들은 경제를 몰라요. 정부는 막대한 투자를 하여 인공 위성을 쏘아 대지만,
국민들은 빵 한 조각 얻기 힘든 시절이 곧 올 겁니다. 진짜 시베리아 추위에 떨게 되죠. 그때를 위해 일본은
그 엄청난 경제 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혁대를 조르며 힘을 축적하고 있는 거요."
백수웅의 고개가 꺾였다.
일본의 근성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여인의 열변이 결코 환상의 무지개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백수웅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좋소. 나를 도와 주시오. 하지만 한국이 통일되고 새 조국이 건설된다 하더라도 당신 나라의 영향은
받지 않을 거요. 함께 공영(共榮)의 길을 가자면 동행은 할 수 있소."
민족, 조국, 애국, 그리고 자긍심에 대해 백수웅은 오랜만에 마음껏 떠들어 댔다. 자신은 반드시 새 조국을
건설할 것이며, 모든 세계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길고 긴 대화 끝에 마침내 날이 밝기 시작했다.
기사키 하쓰요가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당신이 정말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든 연락 하시오. 아스토리아 호텔 405호가
당분간 내 숙소로 사용될 겁니다. 거듭 부탁합니다만, 허열에게 목숨을 빼앗기지 마시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모두 털어 버리시오. 노옥진이나 그녀의 딸 미라를 선택해 없애 버리시오.
그러면 일본은 당신이 피부로 느낄 만큼 엄청난 지원을 해 줄 거요."
백수웅은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카드로 내밀었다.
첫째, 테러가 끝난 뒤 일본 대사관으로의 도피를 도와 줄 것. 둘째, 남북 전면 전쟁이 발생되기 전에 자신의
성명서를 발표할 수 있도록 협조할 것. 샛째, 미국과 소련이 이번 전쟁에 참전하여 세계 대전으로 유도케 한 뒤
일본이 중재에 나설 것. 넷째, 중재 조건은 일본에 있는 백수웅의 임시 정부로 하여금 수습 책임을 맡게 해 줄 것.
이 네 가지만 지원해 주면 한국에서 정권을 잡은 후 일본과 함께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보조를 맞추겠다는 약속을 했다.
기사키 하쓰요는, 일본의 요네조오 의원으로부터 확답을 받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이며,
백수웅은 틀림없이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담장 테러 성공 때까지는, 당신과 나는 외형적으로 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건투를 빕니다"
기사키 하쓰요가 백수웅의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결코 허황된 얘기가 아니오. 당신이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떠나던 날부터 우리는 이 작전을 검토해 왔소. 그럼"
쥐었던 손을 놓고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갔다.
백수웅은 침대에 벌렁 누웠다. 밤을 꼬박 지새웠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새 조국 건설을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지. 맞아, 혁명에는 지지자가 필요해.
일본 정부가 후원해 준다면 해 볼 만하지.'
노옥진을 만났던 충격이 기사키 하쓰요의 출현과 그녀의 새로운 협조 제의로 다소 가셔졌다. 그렇다.
노옥진은 추억의 일부일 뿐 이다. 노옥진, 아무리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조국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제물로 삼아 테러를 성공시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백수웅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갑자기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고 뒤틀렸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이 갑작스러운 발작과 투쟁하기 시작했다. 30여 분 간 그는 발작과 경련을 이기기 위해
필사의 싸움을 벌였고, 시간이 지나자 스르르 가라앉기 시작했다. 온몸의 기운이 모두 탈진되었고,
온통 땀으로 홍건히 젖었다. 그 동안, 발작과 경련으로 고통의 비명을 지르던 순간에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노옥진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 대고 있었다.
몸이 진정된 후, 그는 이를 악물며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길고도 놀라웠던 하루가 지나가고 4월의 마직막 날인 30일 월요일 아침이 밝아 왔다.
노옥진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허열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의혹에 휩싸인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2층 미라의 방으로 올라갔다. 아내는 그 곳에 누워 있었다.
허열은 아내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내내 그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언젠가 백수웅이 그린파크에 나타났을 때도 아내는 어둠을 헤집고 나타났었다.
'왜일까? 미라 엄마는 그 날 밤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린파크에 나타났으며, 백수웅은 왜 자동차라는
좁은 공간 속에 아내와 아버지를 잡아 놓고도 그냥 도주해 버렸을까? 그가 과연 장인 어른의 권총에
겁을 먹고 도망쳤을까? 또 아내는 병원에서 잠적한 이후 어디에서 밤을 보냈으며,
왜 초췌한 모습으로 아침에야 나타났을까?'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녀석의 포악한 손아귀에서 무사히 살아 남은 것은 천행이었지만,
한번 일기 시작한 의혹은 이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아내의 행동으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아내는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지난 밤 당신 어디 있었는지 말해 주지 않겠어?"
그러나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을 파묻은 채 쥐죽은듯 조용했다. 허열이 덮고 있는 이불을 획 젖혀 버렸다.
이 때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두 주먹을 움켜쥐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악---악 아악---."
머리는 산발을 한 채 악을 쓰며 고함을 질러 대는 모습이 마치 미쳐 가는 사람 같아 보였다.
허열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지만, 온몸을 쥐어뜯으며 발광하는 몸짓은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전화로 연락하여 주치의를 부르고, 의사가 진정제 주사를 놓아 겨우겨우 잠재울 수 있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백수웅 출현 이후 몹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표정을 분명히 읽고 있었지만,
오늘 보여 준 의외의 태도는 정말 예상 밖이었다.
아내에 대한 의혹이 갈수록 증폭되었다. 때로는 바보 같기도 하고, 때로는 미친 년 같기도 한 변화를
허열은 감당하기도 어려웠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내가 주사약 기운으로 잠에 떨어진 후에야 서둘리 수사 본부로 갔다.
부하들은 훨씬 일찍 출근하여 허열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들이 역력해 보였다.
"앉자! 어제 고생들 많았다. 우리가 녀석의 위장 자살 소동에 휘말려든 것이 실수의 실마리였다."
"죄송합니다."
남성우, 최일우, 그리고 두 명의 다른 부하들이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수사 본부는 장충동으로 이전한 이후 최대의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고, 실패에 대한 부담감으로 요원들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수웅을 놓친 허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부하들을 허열은 격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소한 자신의 심복들인 이들에게만은 기사키 하쓰요의 정채를 밝혀야 할 것 같았다.
"남성우, 최일우, 특히 잘 들어라. 어제 백수웅의 은신처를 찾아 냈을 때,
나는 한 장의 메모지를 주인 여자로부터 받았다.
사실을 말하겠다. 일본에서 기사키 하쓰요란 여인이 입국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백수웅을 뒤쫓던
기관원인 게 분명하다. 그녀가 한 발 앞서 백수웅을 추적했다."
"일본에서요?"
부하들이 합창하듯 소리질렀다. 기어이 일본 경시청에서도 추적을 시작한 모양이다.
"어떻게 그 여자가 우리도 못 찾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녀는 우리 집 가정부로 위장 취업하고 있었고, 지난 밤 아내와 노 회장님을
뒤쫓던 중 백수웅과 부닥치게 된 것뿐이다. 메모는, 그녀가 계속 뒤쫓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부끄럽습니다. 일본에서 온 여자에게 빼앗기다뇨."
"쉽게 볼 여자가 아니다. 언젠가 청계 호텔에서 가짜 기사키 하쓰요를 체포했다가 수원 공장에서 풀어 준
기억들 나지? 그 연극의 주인공이 그 여자니까. 좋다. 오늘 중으로 기사키 하쓰요의 보고가 올라올 것이다.
우리는 안타깝더라도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열은 패배의 모멸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 못난 계집애에게 당하다니. 그 여자는 백수웅의 위장 자살 소동도, 그리고 백수웅이 반드시
아버님이나 아내를 노리리라는 것도 간파한 거야. 하지만 백수웅의 위치를 찾아 내기만 하면,
최후의 처리는 반드시 내 손으로 한다.'
눈에 살기가 돌았고, 이런 마음을 읽었는지 부하들은 고개를 숙인 채 들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알기라도 한 듯, 책상 위의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려 왔다.
남성우가 잽싸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한일 상사입니다."
한일 상사는 수사대의 위장 회사 이름이었다.
"허 검사를 바꿔 주시오."
어딘가 조금은 악센트가 다른, 그러나 확실한 우리말을 구사하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누구시오? 여기 그런 사람"
"시끄러워요. 가정부가 전화했다고 하시오."
'기사키 하쓰요다.'
남성우가 깜짝 놀라 송화기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 여자입니다. 일본"
허열이 수화기를 빼앗듯 낚아챘다.
"나 허 검사요."
"기사키 하쓰요입니다. 가정부 김도경, 잠깐 나오시오. 뒤에 있는 앰배서더 호텔 커피 숍으로 나오시오."
허열은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뛰쳐나갔고, 남성우와 최일우가 영문도 모르고 뒤따라 나섰다.
"너희들은 사무실을 지켜라. 만약 아버님(노범호)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가정부와 만나고 있다고 전하라."
허열은 단숨에 달려갔다. 커피 숍 한쪽 구석에 낯익은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팔뚝에는 흰 붕대를 감고 있었다.
기사키 하쓰요 였다. 그녀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떠올랐다.
기사키 하쓰요는 여전히 초라하고 볼품 없어 보였다. 집에서 아내를 보살펴 주던 가정부의 티를
전혀 벗지 않고 있었다. 만일 그녀의 표정에 변화만 없었다면 호통이라도 쳐서 돌려 보냈을 것이다.
허열이 맞은편 의자에 앉자, 그녀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기분 나쁜 미소는 경멸하는 듯한 미소로 바뀌었다.
"내가 기사키 하쓰요요. 그 동안 속여서 미안하오. 나의 신분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마시오.
한국통인 일본 정보계 요원으로만 알고 있으면 되니까."
"팔뚝은 왜 다쳤소?"
"백수웅의 칼 솜씨는 가히 예술적이죠. 녀석에게 당했소. 열 바늘이나 꿰맸죠."
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웅의 칼 솜씨는 이미 한 차례 당 한 바 있다.
"좋소. 백수웅은 어디 있소?"
"우리 곁에!"
"우리 곁에?"
허열은 깜짝 놀라 품 속에 손을 넣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허 검사! 여기 있다는 뜻이 아니오. 그는 언제나 당신, 노범호, 그리고 당신 아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뜻이오."
허열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다. 그 녀석은 서울에 나타난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주위를 떠난 일이 없었다.
"당신이 그런 것까지?"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
"경멸하다뇨. 예의는 지켜 주는 게 좋겠소. 당신이 날 돕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모욕적인 발언은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경멸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의심하고 있소."
허열이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실 지금까지 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크고 작은 모든 상황은 물론 자신의 감정까지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지난 밤 백수웅이 당신의 장인 어른과 아내를 습격하고도 그냥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당신은 혹 당신의 아내와 백수웅 간에 과거가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 거요.
더구나 그가 당신의 집안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고, 틀렸소? 백수웅이 왜 두사람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떠났는지 아시오? 어제 사건은 단지 서막에 불과했던 거요. 영화로 치자면 예고편이란 뜻이오.
이제 머지않아 그는 당신에게 협상을 요청할 거요. 협상내용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아무튼 반드시 그로부터 연락이 올 거요. 나는 어젯밤 계속 노 회장의 뒤를 미행했어요.
백수웅 녀석이 운전기사로 둔갑하는 것도 목격했구요."
"뭐라구요? 그럼 왜 체포를?"
"그렇게 쉽게 내 손에 잡힐 놈 같으면 진작 해치웠죠. 하지만 나는 끝까지 기다렸죠. 어차피 차 속에서
노 회장이나 당신 부인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죠. 겁만 주고 떠나갈 때,
즉 그가 긴장을 푸는 시간에 덮치려 했는데 팔뚝만 다친 거요. 그러니 죄 없는 당신 아내를 의심하지 말아요.
그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니니까."
허열의 고개가 꺾였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이 여인은 심리나 상황 분석력이
놀랄 정도로 탁월했다. 일본의 거물급 정보 요원이 틀림없다.
"당신이 비공식 초청 요원이란 걸 인정하죠. 하지만 이번 사건은 내 손으로 처리할 거요.
당신은 필요 없으니 돌아가시오."
허열은 기사키 하쓰요에게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말했고, 그녀는 여전히 경멸하는 듯한 태도로
그의 제의를 한 마디로 일축했다.
"내가 돌아가면 당신이 더 곤란할 텐데."
"내가 곤란하다니?"
"이 천하의 기사키 하쓰요가 백수웅을 포기하고 돌아가면 당신네 특수대도 해체될 거요.
회담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개수사를 벌여 백수웅을 제거하려 할 것이고, 당신은 영원히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될 거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난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여자요.
그러니 내가 당신을 도와 줄 때가 좋은 때인 줄 아시오."
여인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가정부 김도경은 이미 증발된 지 오래 되었고,
자신만만하게 백수웅을 뒤쫓는 일본 여인 기사키 하쓰요의 당차고 힘있는 목소리가 허열을 압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나는 누구보다도 백수웅을 잘 알고 있소. 내가 누군지 알고나 있소?
도쿄 경시청에서 백수웅만 네 번이나 체포했던 사람이오. 날 여자라고만 생각하면 당신은 크게 다칠 거요."
자존심이 무자비하게 훼손당했다. 하지만 할 말이 없다. 최고의 권력 기관을 등에 업고도, 한 달이 넘도록
체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허열이지만,
대신 당당하고 솔직한 게 그의 장점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취소하오. 좋소, 도와 주시오. 내가 뭘 하면 좋겠소?"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말하죠. 그걸 먼저 약속해 주시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형편이 아닌가.
"약속하죠. 말하시오."
"당신의 아내 노옥진을 자유롭게 놓아 주시오. 집의 경계를 풀고,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지 마시오.
백수웅은 다시 노옥진을 노릴 것이오. 만일 납치하더라도 놀라지 마시오. 절대 그녀를 살해 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백수웅이 아내를 납치?"
"아직도 내 말을 모르겠소?"
"아내를 납치한 뒤 녀석은 협상을 요구하겠죠? 회담장 장소를 알려 주면 살려 주겠다고. 그 다음에 어떡하죠?"
"역시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시는군요. 그 다음엔 가짜 회담장소를 알려 주는 거요. 그 곳에 병력을 배치하고,
실제 회담장처럼 위장하는 거요.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겠죠. 불나방처럼 불꽃 속으로
녀석의 생명은 거기서 끝나고, 당신은 대통령 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제 될 거요."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결국 아내가 미끼가 되는 것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녀석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허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의 제의를 수락하기로 하죠."
"당신의 아내 뒤에 항상 내가 보살피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그 여자의 생명은 내가 책임지고 지킵니다.
결정 잘 하셨습니다. 이제 약속을 당장 행동으로 옮기시오. 그리고 날 찾지는 마시오."
그뿐,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고,
허열은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열과 헤어져 밖으로 나온 기사키 하쓰요는 자신의 소형 승용차가 파킹되어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오르며 그녀는 팔뚝의 붕대를 풀어 버렸다. 백수웅과 싸운 일이 없으니 다칠 이유가 없고,
다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붕대를 감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앰배서더 호텔을 빠져나와 삼청동 입구 한 허름한 다방으로 자리를 옮겨 청와대의 노범호를 불러 냈다.
그렇지 않아도 기사키 하쓰요의 증발에 울화가 치밀어올랐던 노범호가 정신 없이 달려나왔다.
"그동안 당신은 어디 있었소?"
"지난 밤 무척 놀라셨죠?"
"그럼 기사키 하쓰요는?"
놀란 노범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회장님과 노옥진, 그리고 백수웅을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백수웅이 정말 당신에개 칼질을 하려 했다면,
난 그를 사살해 버렸을 겁니다."
"뭐라구? 그럼 일부러 녀석을 살려 주었단 말인가?"
"그런 셈이죠. 그 녀석은 놀라 자빠져 도망쳐 버릴 놈이었으니까요. 그 녀석은 옛날 자기 애인이 노범호,
바로 회장님의 따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당신이 백수웅을 사살했다면 당신의 임무는 끝나는 것 아니오?"
"아니지요.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를 풀어 준 거죠."
"이유? 말하시오."
"첫째, 녀석은 허열 검사 손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내 손으로 해치우라면 난 당장이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허열 검사의 장래를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만일 워커힐 앞 산에서 녀석을 처치했다면,
내 공로를 허열 검사에게 넘겨 줄 기회를 잃는 것 아닙니까?"
"또 하나 이유는?"
"나는 당신과 계약만 했지, 아직 돈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값은 그 동안 훨씬 높이 올랐습니다. 5
0만 달러입니다. 오늘부터 나는 아스토리아 호텔 406호실에 투숙하며 녀석의 문제를 처리할 겁니다.
내일 아침까지 30만 달러를 현찰로 넘겨 주십시오. 나머지 20만 달러는 내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주십시오.
나는 지난 밤 백수웅과 함께 있었습니다."
"뭐라구? 그 녀석과 함께?"
노범호는 계속되는 충격에 자지러지고 있었다. 이 여인이 지난밤 백수웅과 함께 있었다니.
"그게 사실이오?"
"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그는 내 조종을 받게 됩니다. 나는 그를 밤새 꼬드겼죠. 테러에 성공하라.
한국에서 전면 전쟁이 터지면 일본이 개입하게 될 것이고, 그 때는 당신이 제3의 한국 정부를 세워라.
협상 때 앞세울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소련을 움직여 남북한 전쟁 당사자들을 밀어내고 당신을 새 지도자로
부각시킬 것이다. 극동의 완충 지대로 한국을 선정하고, 남북한 전쟁의 위협을 영원히 없애겠다.
결국 일본은 폐허의 한국을 다시 일으켜 주게 되는 이 일을 얻게 된다. 그러니 테러에 성공만 하면된다.
앞으로 내 지시를 잘 따르라."
"허허허 허허허 그래, 그가 속아 넘어 가던가요?"
"아직은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게 될 겁니다. 당신이 줄 돈의 전부를 그의 테러 공작 자금으로
지불할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나는 가장 극적인 시간에 허 검사를 동원해 녀석을 칠 겁니다."
기사키 하쓰요는 백수웅 제거 협조 조건으로 50만 달러를 제의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요구에 대해 전혀 의문을
갖지 않았고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만, 허열의 장래나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아까워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보수의 전부를 백수웅에게 테러 자금으로 제공하겠다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상하지 않소? 당신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만 움직이는 직업인으로 아는데,
그 돈을 백수웅에게 선뜻 넘겨 주겠다니"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허 검사처럼 일방적으로 뒤쫓기만 하다가는 아까운 시간만 잡아먹게 됩니다.
백수웅은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한국 당국에서 염려하는 대로 만일 무리하게 뒤쫓다가 녀석이 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면 국내외 언론에 남북 비밀 회담을 폭로한 뒤 자결해 버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결코 회담에 응하지 않을 것이고, 박 정희 대통령의 정치 생명은 치명타를 입고 급격히 단축될 겁니다.
붕어 한 마리 잡는 데도 미끼는 필요합니다. 나의 보수 전부가 미끼가 되어 녀석을 잡게 되면,
나는 한국 정부의 은인이 되겠죠? 특히 회장님에게 진짜 보수는 후에 크게 요구하겠습니다."
노범호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도대체 요네조오 의원과 이후락 정보부장이 추천한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한국 정부의
내밀한 부분까지 꿰뚫어보고 있는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던 노범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내용까지? 혹 이 부장이 정보를 제공한 건 아니오?"
"아닙니다. 나는 일본 내의 엄청난 정보 조직의 요원이오. 미국의 CIA나 소련의 KBG, 이스라엘의 모사드에
못지않게 국제 정세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 얘기 는 그만 합시다.
그보다도 내가 이런 모험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물을 들이켰다.
"백수웅을 만나 본 결과, 그는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하려는, 젊고 지적이며 편집광적인 자기 도취에 빠진
프롤레타리아임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미쳐 버렸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한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가 된다고 믿고있는 녀석입니다. 그런 자에겐 채찍보다 당근이 필요하죠.
적당히 얼르고 적당히 추켜 주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지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 "
"나는 허 검사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의 딸이며 허 검사의 아내인 노옥진을 자유롭게 풀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미끼로 백수웅은 반드시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다치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건 지난 밤 그의 행동이 증명하죠, 자세한건 허 검사에게 말해 두었습니다. 이제 노 회장님은 마음 푹 놓으시고
저와 허 검사에게 맡겨 두십시오. 회담이 개최되는 도중에 극적으로 처리될 겁니다. 무조건 맡기십시오."
노범호가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고맙소.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지원하겠소.
사건이 종료되고 회담이 무사히 끝나면 국가 차원에서 당신에게 보답하겠소."
모든 면에서 이 여자는 허열보다 두세 발은 앞서 가고 있었다.
(제3권에 계속)
첫댓글 어느게 진짜 인가?
기사키 하쓰요...백수웅보다 한수 위인것 같다
이여인은 무슨 꿍꿍이 속인지?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