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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묘(의순공주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금림군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몇 년전에 기사로만 접하고 잊고 있었다가 최근에 가 보았습니다. |
금림군 개윤(錦林君 凱胤)은 성묘(成廟)의 왕자인 익양군 이회(益陽君李懷)의 후손이다. 처음에는 영(令)에 봉해졌는데 뒤에 군(君)에 승격하여 품계가 1품에 이르렀다. 효종(孝宗) 경인년에, 역적 식(?)이 신면(申冕)의 꾀를 써서 몰래 북정(北庭)을 사주하기를 김상헌(金尙憲) 등 산인(山人)이 정권을 쥐고 구신(舊臣)들을 모조리 내쫓고는 장차 상국(上國)에 내통하려고 한다. 하자, 청주(淸主)가 크게 의심을 하여 연거푸 여섯 칙사를 보내 힐문을 하고 또 혼구(婚즚)를 청하였다. |
▲ 금림군 묘역 주변 모습. 금림군 묘역 우측에 나무가 많은 곳에 족두리(의순공주) 묘가 있습니다. |
이때 큰 화란이 터지려 하여 나라 안이 흉흉하자, 이에 개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로 봉하여 보냈는바, 구왕(九王)이【 즉 섭정왕(攝政王)이다.】6만의 무리를 데리고 요동 접계(接界)에 나와 아내를 삼았다. 이때부터 개윤이 누차 사명(使命)을 받들어 연경(燕京)에 들어갔고, 구왕이 죽은 뒤 청국(淸國)이 그를 역률(逆律)로 논죄하니, 공주 또한 몰입(沒入)되어 번왕(藩王)에게 재가(再嫁)하였는데, 번왕이 죽자 공주가 본국에 돌아가게 해주기를 간청하였고, 돌아온 뒤 종신토록 녹을 지급하였는데, 이때 와서 개윤이 졸한 것이다. 상이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
▲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 묘 |
비운의 ‘왕족 부녀’ 무덤마저 훼손 위기, 천보산 금림군·족두리묘
[한겨레 2005-01-12 23:00]
코앞서 택시 차고지 공사
병자호란 때 조선인들의 고통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은 족두리묘와 금림군묘가 방치되고 있다. 특히 이 무덤들은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최근 코 앞에 택시 차고지까지 들어서려 해 훼손될 위기에 놓였다. |
▲ 금림군 묘역내 석물 모습. 우측의 망주석은 밑둥까지 부러져 있습니다. |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기슭에 있는 족두리묘와 금림군묘는 병자호란 때 조선 왕실과 백성들의 아픈 상처를 담고 있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조선에 처녀들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효종 원년(1650년)에는 청나라 구왕의 첩으로 조선의 공주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로 조정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종실의 금림군이 나섰고, 조정은 금림군의 딸을 의순공주라 칭하고 청나라로 보냈으며, 의순공주는 나이가 든 뒤 조선으로 돌아왔다. |
▲ 우측에서 바라 본 금림군 묘역 |
▲ 금림군 묘역에서 바라 본 족두리 묘(안내판 보이는 곳) |
그러나 구전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순공주는 청나라로 가지 않았다. 도중에 평안도 정주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강물에 빠진 시신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의 족두리만 묻었다. 그 뒤 나라에서는 천보산에 ‘정주당’이라는 사당을 지어 의순공주를 기렸고, 의정부 지역에는 의순공주의 넋을 달래는 ‘정주당놀이’가 전해내려 왔다. |
▲ 족두리 묘역 좌측에 안내판이 있습니다. |
이런 이야기가 담긴 족두리묘와 금림군묘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훼손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8월에는 한 택시회사가 의정부시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묘 정면에서 10m 가량 떨어진 곳에 택시 차고지를 짓기 위해 땅을 파헤쳤다. 이곳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 등 80여명은 지난해 9월부터 문화재 훼손과 환경오염 등의 이유로 택시 차고지 건설을 반대하고 있다. |
▲ 족두리 묘라고 부르는 의순공주(義順公主) 묘 |
의정부시청은 족두리묘와 금림군묘를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금오동 ‘족두리묘’가 의순공주의 무덤이라는 기록이 전혀 없다”며 “더욱이 실록에는 의순공주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고 돼 있어 이 무덤의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시는 또 “금림군묘도 왕족의 무덤이라는 이유만으로 문화재로 지정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
▲ 봉분에는 떼가 입혀있지 않아서 보기가 조금 그렇네요... |
그러나 문화재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인 김우림 서울역사박물관장은 “금림군과 의순공주의 묘는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문화재로서 교육적 가치가 크다”며 “특히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정주당놀이’라는 민속놀이로 발전한 것은 더욱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
▲ 상석 앞에 있는 묘비는 밑둥까지 부러져 있습니다. |
김 관장은 “금림군묘와 족두리묘가 경기도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며 “의정부시가 서둘러 경기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고 현장이 원래대로 복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정부/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 한겨레 |
▲ 묘역 앞에는 문인석 한 쌍만 묘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
◈ 의순공주와 정주당 터
"의순공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 금오동 천보산에는 일명 족두리 산소와 정주당터가 있다. 정주당은 의순공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
▲ 봉분 앞 좌우에서 바라 본 문인석과 상석 |
의순공주는 조선 효종 원년(1650) 청나라 구왕이 조선에 청혼을 해오자 조정에서는 민간인 여자를 보내려고 하나 훗날이 두려워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청나라는 우리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선린을 굳게 한다는 미명아래 종실의 미녀들을 무수히 요구해 왔다.) |
▲ 문인석 모습 |
이때 종실인 금림군 이개윤이 자기 딸을 보낼 것을 자청하고 나서자, 조정에서는 그녀를 의순공주라 칭하고 사신과 함께 보냈는데 청나라로 가는 도중 평안도 정주에 다다르자 '짐승보다 못한 오랑캐 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가마를 멈추고 볼일이 있다고 속인 다음 가파른 벼랑아래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정조를 지켰다 한다. |
▲ 족두리 묘에서 멀리 금림군 묘역이 보입니다. |
▲ 묘역 앞에는 개를 키우고 있어서 지저분합니다. |
공주의 주검은 구하지 못하고 쓰고 있던 족두리만 건져 올려 천보산에 의관장을 해서 지금도 족두리 산소라 불리운다. 조정에서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큰당, 작은당, 색시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이곳 당에서 식음을 전폐한 채 멀리 북쪽 정주당 땅만 바라보며 애타게 딸을 찾았다고 하여 정주당이라 불려지고 있다. |
▲ 의순공주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이른 봄 화창한 날을 골라 색시의 얼을 추모하는 한편 마을의 풍년과 무병을 빌기 위하여 동네사람 모두가 이날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정주당 놀이'라 하였다. 6·25동란을 전후로 하여 이 놀이가 차츰 열리지 않다가 매년 회룡문화제 때에 공연되면서 다시 보존·계승되고 있다. |
족두리 묘역 위치도 |
시작의 빨간선이 금림군 묘이고, 40미터 거리에 족두리 묘가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 : 경기 의정부시 금오동 265-70 부흥운수 뒷편 |
지도 중앙 상단의 A 부분에 족두리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시외버스 터미널/경기도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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