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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7월 15일 서울 이동(梨洞)에서 역관(譯官)인 아버지 오경석(吳慶錫)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1남 1녀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 韙傖)이다. 자신을 포함하여 8대가 역관을 지낸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이었다. 오경석은 초기 개화파(開化派)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871년에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부친과 함께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던 유대치(劉大致)를 스승으로 역과(譯科) 응시를 위한 공부를 하였다. 1875년 8월 17일 관례(冠禮)를 치르고, 10월 16일 역관이던 김재신(金載信)의 딸과 혼인하였다. 1879년 5월 29일 역과에 합격하였다.
1880년 사역원(司譯院)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가족을 데리고 유대치와 함께 경기 광주 석촌(石村)으로 도피 중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1885년에 사역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1886년에는 갑신정변 와중에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된 박문국(博文局)이 속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1888년에 박문국이 폐지된 뒤 오위(五衛) 소속의 무관(武官)직인 사과(司果)로 근무하였다.
1890년에는 기선 1척을 받아 황해도를 항해하며 양곡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청나라 사신을 맞는 업무와 군기시(軍器寺)의 차량 관리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갑오경장이 시작된 1894년 6월에는 개혁의 중추기관인 군국기무처의 비서실인 낭청에서 관리생활을 하였다. 7월에는 의정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에는 공무아문 참의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농상공부 통신국장을 겸임하였다.
1896년 1월 1일 자로 단발을 결행하였다. 1897년 8월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외국어학교의 한국어 교사를 지냈다. 1899년에 귀국한 후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하였다.
1902년 개화파인 유길준(兪吉濬)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청년장교들의 비밀결사인 일심회와 함께 모의했던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도쿄(東京)에서 망명객이나 다름없던 동학교주 손병희(孫秉熙)을 만나게 된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직 재건과 교권 장악에 성공한 손병희는 문명개화노선으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하며 신분을 숨긴 채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무관으로 활동하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망명한 후 일본군에 근무하던 권동진(權東鎭)과 관료생활을 사직하고 중국을 주유한 뒤 일본에서 체류 중이던 양한묵(梁漢黙)도 손병희와 가까이 지냈다. 손병희, 권동진, 양한묵 등과는 평생 동지가 되어 동학 내 ‘문명파’를 형성하게 된다.
문명파의 노선은 분명하였다. 제일 먼저 그들은 ‘옛 것을 근본으로 하고 서양문명을 절충한다’는 구본신참식 근대화 노선을 추구하는 대한제국 정부에 맞서 서구적 근대를 모델로 한 문명개화 일변도의 근대화를 촉구하는 반정부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상소운동, 일본이라는 외세의 활용, 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를 통한 민회운동 등의 방식으로 추진된 동학의 합법화와 국정개혁운동은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통해 중앙에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동학의 국정개혁운동에서 진보회의 취지, 강령, 규칙을 제정하고 민회운동을 기획하는데 적극 관여하였다.
1905년 11월 5일 일진회는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전격 발표하였다. 그리고 11월 17일에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의 주구로 전락한 일진회의 행보에 동학교인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컸다. 문명파는 귀국을 서둘렀다. 손병희는 1906년 1월 귀국과 동시에 천도교를 창건하였다.
귀국 후에는 천도교 교기를 제작하는 등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06년 6월에는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발간하는 만세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정치적 위상은 귀국 직후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될 만큼 상당했으나 바로 사직하였다.
문명파는 귀국 직후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의 일진회파를 회유했으나 결국 실패하자 그들을 출교시켰다. 일진회파는 천도교에 맞서 시천교(侍天敎)를 창건하였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1907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계열 및 전직 고위 관료 등과 함께 정당정치를 지향하며 대한협회(大韓協會)를 결성하였다.
대한협회 주요 활동 중 하나가 일진회를 비판 · 공격하는 일이었다. 대한협회에서는 부회장으로서 선봉에 섰다. 또한 1909년에는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간하는 대한민보사 사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기호의 중인 출신 신흥정치인으로서 계몽운동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평의원으로 참가하였다. 재일유학생단체인 대한학회(大韓學會)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한학회찬성회(大韓學會贊成會)에는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천도교 지도자로서 3 · 1운동의 준비와 초기단계에서 각계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하나로 결집하고 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손병희, 권동진, 그리고 1910년 국망 이후 스스로 천도교를 찾아온 40대의 재사(才士) 최린(崔麟) 등과 3 · 1운동을 모의하였다. 당시 도사(道師)의 직책을 갖고 모의와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거사를 모의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던 것은 물론 일단 계획이 수립되자, 이를 지방의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서명과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하였다. 최린에게서 독립선언서 초고를 받아 검토할 때 만일에 대비해 필사한 뒤 원본을 넘겨주고 인쇄가 마무리되자 필사본은 태울 정도로 용의주도하였다.
33인 민족대표의 한사람으로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이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지만, 4월 10일 서울에서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선포된 조선민국 임시정부(정도령 손병희, 부도령 이승만)의 조각에서 장관급인 식산무경(殖産務卿)에 이름이 올랐다.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치안 방해 등의 혐의로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언도받았다.
3 · 1운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정에 서게 되자, 3 · 1 독립선언이 ‘조선민족이 같은 뜻으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일본 정부에 대해 힘을 합쳐 싸울 것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당당히 밝혔다. 당시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과 같은 일본 주요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으므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은 물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논의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으나, 한국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필요가 있기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처음부터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힘으로써 역사에 그것을 남기고 또한 조선민족을 위하여 기염을 토하기 위해 주모하였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2년 8개월의 복역 끝에 서대문감옥에서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하였다.
3 · 1운동 이후 천도교는 손병희의 사위인 정광조(鄭廣朝)를 주축으로 하는 보수파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崔東羲)를 주축으로 하는 혁신파 간에 천도교 민주화를 둘러싼 노선투쟁이 전개되었다. 출옥 후 권동진, 최린과 함께 중재에 나섰다가, 혁신파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해 우려하며 보수파에 가담하였다. 1922년 5월 19일 병석의 손병희가 영면하였다. 교주 박인호는 6월 6일 사퇴하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천도교 보수파 지도자들은 교주제가 아닌 종리사합의제에 입각한 ‘집단지도체제’라는 카드로 위기를 수습하고자 나섰다.
1925년 천도교가 최린의 독점적인 교권 장악 시도를 빌미로 최린, 정광조로 대표되는 신파와 이에 반대하는 구파로 갈릴 때, 권동진, 이종린 등과 함께 구파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천도교인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신파는 서북지방을 세력기반으로 조선문화의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지향적인 신문화 건설을 추구했던 신흥정치세력으로서 일제와 타협하며 자치운동노선을 추구하였다.
반면에 기호 · 호남에 세력기반을 둔 구파는 대한제국에서 관료를 지낸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민족운동진영 내에서 주류로서 나름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천도교 구파는 3 · 1운동 이후 분출된 항일의 민족정서에 충실하고자 했으며 일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좌파와 연대하였다. 특히 구파는 6 · 10만세운동의 모의과정과 신간회의 결성 및 활동과정에서 비타협적 우파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천도교 구파 지도자로 활약하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서화와 골동품이 가득했던 가정환경과 타고난 예술적 취미로 평소 관심이 많았던 서예와 감식(鑑識)에 몰두하였다. 또한 선대부터 갖고 있던 서화작품과 자신이 모은 작품들을 근간으로 한국서화사 연구에 착수하였다.
서화가로서 족적은 1910년대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11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학원인 경성서화미술원의 운영위원회격인 서화미술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서화미술회가 1918년 서화협회의 창립으로 이어지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부터 서화협회전에 줄곧 출품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서(篆書)를 출품하여 서부(書部)에서 2등상을 수상했으나 이후에는 출품을 거절하였다.
한편,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난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을 듣던 서체는 당시 신문인 『중앙일보(中央日報)』, 잡지인 『동광(東光)』 등의 제호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동아일보(東亞日報)』에는 신년마다 휘호를 게재하였다. 서화사 연구도 선생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었다. 1916년부터 역대 서화가의 진필(眞筆)을 수집하였다. 이를 모아 1927년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완성하여 다음해에 출간하였다. 그리고 인장(印章)을 수집 · 정리하여 한국 전각 예술의 역사적 전통과 실제 사용의 행적을 한눈에 보여주는 『근역인수(槿域印藪)』를 발간하였다.
1930년대 초 최린이 이끄는 천도교 신파가 친일로의 전향을 선언하였다. 구파도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이종린의 주도로 친일 대열에 합류하였다. 1940년 4월 신구파 합동으로 천도교의 친일협력의 조직적 기반은 한층 강화되었다.
천도교의 원로이자 고문(顧問)으로 ‘큰 어른’ 의 위상을 갖고 있었으나 친일대오에 합류하지 않았다. 실절(失節)하지 않고 ‘변절과 친일의 시대’를 견디어 내고 마침내 82세의 고령으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국내에서 변절과 친일의 과거를 갖지 않는 민족 지도자는 드물었다. 그러기에 좌우 정치세력 모두에게 최우선 영입대상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해방직후 처음 열린 주주총회에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개제한 후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위원으로, 이어 인민공화국은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우익에 가담하여 김성수, 김구, 이승만과 함께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김성수 등이 주도하는 한국민주당 영수(領袖)의 1인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며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오르기도 하였다. 1946년에 들어와서는 반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구, 이승만과 함께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그리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민족대표로서 일본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새를 되돌려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선생은 각종 국민대회와 시민대회를 누비고 다니며 개회사와 축사를 도맡았고 3 · 1운동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을 추념하는데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의 개회사도 그의 몫이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김구, 이시영과 함께 정부 수립 당시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정부 수립 후에도 김구가 암살당하자, 노구를 이끌고 장의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 등 계속 왕성한 정치 ·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반민특위재판이 열린 법정에 걸린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현판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6 · 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 가 1953년 4월 16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국회에서는 명복을 빌기 위해 1분간 묵념하고 세비의 1할을 갹출하여 조의금으로 전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