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이 졸(卒)하니, 조회와 저자를 2일 동안 정지하였다. 박중손의 자(字)는 경윤(慶胤)이고, 밀양(密陽)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정문(程文)에 전공(專工)하여 나이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선덕(宣德) 을묘년에 과거(科擧)에 올라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에 선발 보직(補職)되고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고 지병조사(知兵曹事)에 승진되었다가 조금 후에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다.
임금이 정난(靖難)하자 마침내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고 정란 공신(靖亂功臣) 2등에 참여하여 응천군(凝川君)으로 봉해지고,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공조(工曹)ㆍ이조(吏曹)ㆍ형조(刑曹)ㆍ예조(禮曹) 4조(曹)의 판서(判書)를 역임(歷任)하고, 품계(品階)가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가(加)해지고,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으며,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제수되었다.
무릇 세번이나 시소(試所)를 관장(管掌)하여 뽑은 사람 중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많았다. 품계(品階)가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승진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卒)하니, 나이 55세였다.
타고난 자질은 온아(溫雅)하고 용의(容疑)는 단정(端正)하며,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무릇 다른 사람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겸손하고, 공손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였지만, 그러나 성질이 간소(簡素)하고 고요함을 좋아했으므로 두드러지게 정사를 건의(建議)하여 밝힌 것은 없었다. 일찍이 〈상주(喪主)가 되어〉 여막(慮幕)에 있을 적에 글을 지어 고금(古今)의 사치와 검소의 득실(得失)을 논하여 아들을 경계하였으며
, 또 계주명(戒酒銘)을 지어서 자신(自身)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시호(諡號)는 공효(恭孝)이니, 공경하고 온순하여 윗사람을 섬기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자애롭고 어질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아들이 3인 있으니, 박전(朴栴)ㆍ박미(朴媚)ㆍ박건(朴楗)인데, 박미와 박건도 또한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