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에는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한 사울이 예수님을 따르는 형제와 자매들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갑자기 하늘로부터 나오는 밝은 빛을 본 후 쓰러져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면서 사울에게 아나니야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하셨지요. 아나니야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올 때 길에서 네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사 네가 시력을 받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셨느니라. 하매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해지니라. 그 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 있던 제자들과 며칠을 지내며 즉시 회당들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거늘... (사도행전 9장 5절~17절)
사도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가까운 곳에서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천사와 같은 모습과 성경 지식에 대한 해박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말씀을 듣고 바울은 주님의 몸, 교회에 대해서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예수님의 몸임을 알게 되었고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교회의 신비를 단숨에 깨닫고,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던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성경의 구약과 예수님과 교회가 연결되고 해석되면서 교회와 복음의 모든 신비가 풀려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예수께서 가라사대.....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14:3,6,9)
우리는 모두 마리아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의 상세한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그 가정이 특별히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매 중 한 사람인 마리아는 그의 귀중한 재산 중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에 해당하는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모두를 주님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것이 정말로 과분한 것이었고 주님을 과분하게 대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마리아의 처사가 낭비였다고 일반적인 불만을 표시하는 데 유다가 주동이 되었고 다른 제자들은 그를 지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막14:4,5)
"허비"란 무엇입니까? "허비"란 무엇보다도 필요 이상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당신이 100원이면 될 것을 1000원을 준다면 그것은 허비입니다. "허비"란 너무나 적은 것에 너무나 많은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복음과 함께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신 그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사람들은 주님께 와서 주님께 자신을 허비해야만 합니다. 열두 제자들은 모두 그것이 허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한번도 불러 본 일이 없었던 유다에게는 당연히 주님께 부어진 모든 것이 허비였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세상을 대표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주님께 대한 봉사, 그리고 그러한 봉사를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순전한 허비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으시고 세상의 마음을 차지해 본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주님께 어떤 것을 드린다는 것은 허비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유용성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발 밑에 있고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옥합"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우리는 가장 고귀한 것,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모두 주님께 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허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께서 가장 먼저 찾으시는 것입니다. 종종 주님에 대한 헌신은 끊임없는 봉사로 표현되기 쉽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막14:9)
이것이 복음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죄인의 유익에만 지나치게 강조점을 두고 주님께서 그의 목적으로 여기시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만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족하실 때에만 우리가 만족을 얻고 죄인이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일 먼저 만족시켜 드릴 때 우리의 만족은 틀림없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허비"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만족을 얻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워치만 니) 중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내 몸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거하는 곳입니다.
내 몸은 땅에 있는 나의 장막집입니다.(고후5ᆞ1)
내 인격은 내 몸이 아니며, 내 몸도 내 인격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의 몸은 진정한 당신이 그 안에 살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생일입니다. 그날에 사도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도 새로운 몸을 얻으셨습니다.
새로운 영적 탄생은 성령에 의한 세례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이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그분의 몸과 연합됨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에게 목적이 생깁니다. 몸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계획을 실현하게 되는 도구로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힘의 원천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에게 책임이 부여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은 역동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무언가 할일이 있으시면 그 일을 이루는 도구로서 우리를 사용하실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ㅡ '예수님 위해 살려고 하지 말라'(찰스 프라이스) 중에서
마태복음 25장에는 염소들 중에서 양을 분리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의 창건 이후로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는 사람들은 주님의 몸을 섬기던 양들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작은 지체를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라 심판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두려운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교회의 이상에 대해 완전히 깨달은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행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