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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사 측에서 제거하는 반론문을 다시 붙이시고, 마이크를 연결하시며 곳곳마다 거사님들의 손길이 분주히 움직이고 계십니다. 2월 마지막 일요법회일 아침 풍경입니다.
현관에서 법회보를 나누어 드리며 불광형제들을 반갑게 맞이하시고, 사무국을 지키시며 모든 행사 접수를 받고 계신 천진성 부회장님과 도명화 보살님, 밝은 모습으로 안내 데스크를 지키시는 보살님, 엘리베이터 봉사하시는 분들의 여법한 모습들.
법당 안내팀이 보광당 입구 데스크에 자리하시고 떡과 생수를 보시하신 대원 3, 4구 보현 1, 3구에서 법회 오시는 형제들께 직접 나누어드리고 계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유튜브 법회 영상 촬영하시는 도국 거사님, 새 법우 안내팀, 법당안내팀 봉사자 분들.
보광당에서는 법회 전에 인례 보시는 자성거사님의 천수경 독송 및 타종을 하시고, 동봉 거사님의 사회로 법회가 시작되며 부처님 전에 헌향과 헌다를 올립니다.
봄이 머지않은 2월 마지막 주임에도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고 찬바람은 시리게 옷깃을 파고드는데도, 법회를 참석하여 기도하고 법문을 듣기 위해 불광 형제들은 보광당을 가득하게 채웠으니 이토록 훈훈한 자리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금주의 법문 : 붓다의 생활 수업
금주의 법어 : 박경준 교수
이렇게 장엄한 법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인연에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꽂혀 있는 경전에 있는 말씀 중에 하나가 기이한 광경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데, 여러분 지금 법회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요? 30분 됐습니까? 그런데 30분 40분 지났는데 오신 분들이 그대로 다 계세요. 그렇지요? 혹시 119에 실려 간 분 계신가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은 우리 삼법인에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일체개고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영원한 것이 없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그 생각이 달아나 버려요. 이런 말씀이 아함경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립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래? 뭐가 그리 기이한가? 제가 오늘 탁발하러 성문을 들어가는데 성문 앞에 풍악대들이 춤을 추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탁발을 한바퀴 돌고 다 마치고 나오는데 그 풍악대들이 다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난이 부처님께 얘기했습니다. 기이한 광경이 놀라운 광경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참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래? 기이하구나! 그런데 나는 어제 그 보다도 더 기이한 광경을 봤느니라. 나도 탁발하러 성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역시 풍악대들이 성문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놀더구나. 그런데 탁발을 마치고 나오는데 보니까 그때까지도 열심히 놀고 있더구나.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제가 부처님 말씀을 상기하니까 여러분들이 30분 전에 계시던 그분들이 그대로 앉아 계시는 것, 이것이 참으로 기이한 겁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가 생활의 수행이라는 이런 얘기예요. <붓다의 생활 수업>에 관한 얘기입니다. 작년에 조금 여기 저기서 화제가 되었던 책인데, 제가 이제 불교 학문을 마치면서 지나 온 것을 돌아 보면서 느낀 것인데 결국은 생활이 어떤 분들은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철학은 정치의 옷을 입어야 제대로 된 철학이 된다. 종교도 제가 볼 때는 생활의 옷을 입어야 제대로 된 종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결국은 종교가 생활로 와야 되고, 우리 일상으로 와야 되는데, 생활과 일상이라는 것이 어느 한 일순간도 버릴 수 없어요. 찰나 찰나가 사실은 생활이고 일상입니다. 찰나 찰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걸 많이 느끼거든요. 옛날에는 그냥 그냥 지나가 버린 말씀들이 어느 날 보면 그것이 굉장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놀고 있는 풍악대를 보고 있으면 놀고 있구나 하고 그냥 지나갈텐데 부처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거지요. 야 저 친구들이 아직까지도 살아서 놀고 있네. 참으로 기이하도다. 이 정도로 우리가 모든 것을 봐야 무상이라고 하는 것을, 무상의 진리를 조금 깨달았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보면 찰나 찰나가 순간 순간이 금싸라기 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껴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순간 순간을 허비해 버리는 그런 사람은 가장 비불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광덕 큰스님께서 가장 안좋아 하신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은 우리 불광 법당에 우주 쇼가 펼쳐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살아 있는 이 자체가 기적이라고 봅니다. 제가 지금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는데, 같은 라인에 살고 있는데도 몇십 년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분들이 계세요. 지금 우리 지구 역사가 46억년 정도 되지요. 우주 역사는 136억년 그런다는데, 지구 46억년 역사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이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많은 법우님들이 이렇게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현재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얘기하셨거든요. 살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겁니다. 저도 이런 마음을 늘 담아 가지고 살아 갑니다. 지하철 이용하시는 분들은 <풍경소리>라고 보셨지요. 제가 10년 전 쯤 그 풍경소리에 글을 쓴게 하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뉴스에 보면 혜성을 언급하면서 우주 쇼가 많이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것보다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우주쇼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풍경소리에 글을 썼던 게 있는데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밤하늘에 혜성들이 벌이는 불꽃놀이만 우주쇼는 아닙니다. 우주 속에 작은 별 지구, 그 지구의 차가운 표피를 뚫고 여린 손을 내미는 새싹, 순박한 향기로 피어나는 들꽃, 가을바람에 춤추어 떨어지는 낙엽, 바람과 구름을 노래하는 새들, 그 관중, 모래 한 알, 그리고 여기 이렇게 살아 숨 쉬며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 이 모든 것이 다 우주쇼입니다. 우리가 미망의 어둠을 밀쳐 내고, 욕망의 헛된 꿈에서 깨어나 나무의 푸른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면”
우리가 무명과 탐욕에 가려서 지금 우주쇼가 펼쳐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못느끼고 있다. 제 말이 틀립니까? 틀려요? 사실 생각해 보면 혜성들의 불꽃놀이만이 우주쇼가 아니예요. 다른 행성 어디에선가 외계인들이 산다면 그들이 보기에 우리 지구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주쇼예요. 지구라는 푸른 별도 우주쇼고, 지구 속에 살아 있는 꿈틀거리는 모든 중생들의 삶도 사실은 다 우주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해요. 전도몽상이라는 그런 말씀인데, 좀 얘기가 거창해졌습니다만은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은 이러한 만물이 우리 일상 속에, 생활 속에 투영되어 있다. 우리 생활 가운데 어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지요. 그 얘기를 제가 결론에 가서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여러분들도 다들 잘 알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득생인도난(得生人道難) 불법난득문(佛法難得聞)이라, 사람 몸은 참으로 얻기 어렵고, 부처님 법도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 이런 글을 맹구우목(盲龜遇木)으로 비유하지요. 눈먼 거북이가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나는 인연만큼 부처님 법을 만나기 어렵다. 제가 20여년 전에 침공(針孔)이라는 말을 어느 법어에서 들었는데, 이 말은 임팩트(Impact)가 아주 강해요. 침공이라는 말은 바늘 침(針)자에 구멍 공(孔), 바늘 귀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지에다 바늘을 꽂아 놓고 수미산,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오릅니다. 실오라기 하나를 딱 가지고 올라가요. 그때 마침 회오리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그 높은 수미산 꼭대기에서 던진 실오라기가 아까 평지에 꽂아 놓은 바늘에 꿰일 확률! 그것이 얼마나 되겠어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봐야 되지요. 이런 비유가 저는 아주 절묘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비유를 부처님께서 하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맹구우목(盲龜遇木)은 부처님께서 하신 비유입니다. 맹구우목도 절묘한 비유이기는 하지만은 저 높은 산꼭대기에서 던진 실오라기가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실오라기인데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게 회오리 바람을 뚫고 바늘 귀에 꿴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사람 몸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기이하다는 말씀이예요. 그리고 더구나 우리는 이 자리에서 부처님 법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인연이 우주쇼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겁니다. 그렇죠?
오늘은 제가 여러분께서 잘 모르거나 또는 곡해하고 있거나 이런 것들이 있어서 거기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우리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는 연기법(緣起法)과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저는 한마디로 연기법과 사성제는 ‘괴로움의 자각을 통한 괴로움의 극복’이다라고 봅니다. 연기법에는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6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의 12요소로 된 것은 유전연기입니다. 어떻게 괴로움이 형성되었는가, 괴로움이 성립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유전연기입니다. 대부분의 중생들, 생사 윤회하는 중생들은 유전연기해서 삽니다. 그런데 성인들은 환멸연기,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것이 환멸입니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게 되는’ 방식으로 죽 가가지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한다’ 이렇게 돌이켜 끊는 것을 환멸연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괴로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연기법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연멸문(緣滅門)이라고 합니다. 연멸법이라는 말은 잘 안 들어 보셨겠지만 연멸법, 연기법 이것이 사실은 같이 가요. 연기법, 연멸법을 함께 아울러서 우리는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깨달으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났노라.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노라”. 불사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연멸법을 깨달으신 겁니다. 연기, 연멸이 같이 가는 겁니다.
우리는 대개 화엄연기, 법계연기를 가지고, 모든 것이 상호의존, 상의상관(相依相關), 모든 것이 서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연기법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의 연기설, 특히 12연기의 경우에는 물론 상호의존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식(識)과 명색(名色) 사이, 여기에서는 상호의존성이 존재해요. 그런데 다른 경우에는 그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만은 행이 있으므로 무명이 있다? 이것은 못 보셨지요. 성립이 안 돼요. 초기불교의 연기설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의 조건 발생 원인이다. 또는 괴로움의 조건 소멸 원인이다, 이렇게 보아야 됩니다.
화엄연기는 매우 철학적이지만은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매우 종교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조건과 원인으로 인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그 원인과 조건을 없애면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이것입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안락을 얻는 겁니다. 그런데 연기법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불교는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희망의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 부처님이 45년간 전법도 하고 정진을 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12 연기(緣起)의 핵심이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조건 발생 원인을 제거하게 되면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로서 출발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대승불교가 되면서 불교 이론이 매우 심화가 됩니다. 화엄연기는 정말 놀랍습니다. 인드라망의 비유라든가 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인드라망의 그물 코마다 보석이 있는데 그 영롱한 보석들이 전부 다를 비추고, 그 비친 것이 다른 보석들에 되비치고, 이것이 중중(重重) 무진연기(無盡緣起)한다고 하지요. 화엄연기(華嚴緣起)에서는 그것을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해요. 모든 만물은 상호원융(相互圓融)하고 상호침투(相互浸透)한다는 겁니다. 겨자씨 하나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이 바로 화엄연기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이러한 심오한 철학성 보다도 종교성,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연기설을 얘기할 때 이 부분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기법은 약견연기(若見緣起)하면 편견법(便見法)이라,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서 보듯이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연기를 알면 우리가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연기법을 공부하려면 몇 년을 공부해도 부족합니다만, 그 다음에 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이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입니다. 열반이라는 개념이 죽음이라는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옛날 어느 종교학회에서 죽음을 주제로 하는 학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면 열반의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의미인데, 많은 분들이 열반이라고 하면 죽음이라고 생각을 해서 이것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날 제가 불교문화는 기본적으로 열반 문화를 지향한다 이런 얘기를 했더랬습니다. 열반에 대한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10분 남짓 열반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했음에도, 그날 종교학회 회장님이 나중에 질문을 하시는데 죽음이 열반 문화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질문을 해요. 이처럼 한번 가진 고정관념이 오래 갑니다. 열반이 죽음입니까? 열반이 죽음이라면 불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살아서 우리가 열반을 누리는 것, 그것이 종교적 생명이 있는 거예요.
열반이라는 개념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저는 열반의 핵심적인 개념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열반을 한마디로 ‘삶의 완전한 연소’다 이렇게 봅니다. 우리 인생도 촛불이 점점 사라져 가듯이 촛불과 같이 연소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봐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라고 하는 프랑스 철학자가 『촛불의 미학』이라고 하는 멋진 책을 썼습니다. 이 철학자가 촛불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이 결국은 촛불과 같다, 이런 생각을 이 철학자가 해요. 식물들도 동물들도,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 결국은 촛불의 빛을 내면서 사라져 간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리 광덕스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불성은 광명이다, 생명이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도 지금 36.5도의 램프가 연소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램프가 뭔가 잘못되게 되면 불완전 연소가 되어 가지고 시커먼 연기 그을림이 납니다. 우리 삶이 연소과정이라고 한다면 불완전 연소가 아니라 완전 연소가 되어야 하겠다. 어떤 분은 완전 연소 하니까 번아웃(Burn-out)으로 이해하시던데, 그것도 될 수 있어요. 탈대로 다 타시라. 그런 말도 있지만, 연소하는 과정이 그을림도 연기도 없이 완전 연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이 순간도 많은 걱정을 합니다. 내가 가스 불을 껐던가?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면 그것은 불완전 연소예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그냥 그대로 편안한 것이 완전 연소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무언가 걱정이 있고, 누가 밉고, 아직도 화가 덜 풀리고 하면 그것은 불완전 연소입니다. 그것을 완전 연소로 바꿔야 되겠는데, 이게 열반 사업이다 이겁니다. 사실은 성현들의 죽음을 미화하는 의미로 열반을 쓰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의미가 있지요. 부처님은 돌아가셨다고 얘기하면 안 되고 반드시 열반에 드셨다고 얘기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생사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인데, 아까 말씀드렸던 연기법을 깨달으시고 ‘불사(不死)를 얻었노라’고 하신 분인데 부처님의 제자 되시는 분들이 부처님 돌아가셨다고 얘기하면 되겠어요? 그래서 성인분들은 열반에 드셨다고 해야 하고, 우리 중생범부들은 생사 윤회의 수레바퀴를 도니까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부처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열반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살아서 가야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공부를 해 보니까 이미 경전, 빨리어로 된 니까야에 ‘디타 담마 니빠나(Nirvana, 열반)’라는 말이 나옵니다. 디타 담마(This Darma)는 현법(現法) 열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담마는 시간개념입니다. 그러니까 현법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열반 또는 현세 열반입니다. 죽어서 내세에 열반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서 현세에 열반을 성취하겠다, 요것이 현법 열반입니다. 좀 좁혀서 말하면 디타 담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현재에 열반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 보실까요? “디타 담마 니빠나”(산스크리스트어로는 니르바나, 빨리어로는 니빠나입니다). 현재 열반이다, 현법 열반이다. 아까 제가 ‘우주쇼’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가 무아의 이치, 무상의 이치를 철저히 알아 가다 보면 그게 결국은 열반의 경지와 맞닿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죽을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의 오역, 정확한 번역은 “오래 살면 이런 일(죽음) 생길 줄 나는 알았노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지요?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불문에 귀의하셨을 것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죽음의 문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예요. 그런데 죽음의 문제라는 것은 티벳의 속담처럼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근 무안공항 참사처럼 참담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만,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을 생각하겠습니까? 제 책을 읽은 어느 친구가 그다음 날 전화를 했어요. “경준이 자네 책 생각나네,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는지 모른다는 얘기가 있던데, 무안공항의 참사를 보니까 그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 얘기를 해요.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지 모른다, 이 얘기를 더 좁히면은 찰나 찰나가 금싸라기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자꾸 미루려고 해요. 당장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지금 내가 죽음의 문제를 신경을 써? 그런데 우리가 막상 죽음 앞에 섰을 때, 아 이게 시급한 문제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버나드 쇼 역시 작가답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러니 여러분들 우물쭈물하지 마십시오. 바로 지금, Here and Now!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Right Now, Right Here! 우리가 지금 바로 정면 승부를 걸고 맞닥뜨려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자꾸 자꾸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쳐야 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깨달음이 이런 정신이 우리 생활 속에서 꽃을 피워야 된다. 저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시간에 쫓겨서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여러분들 설거지하고 청소하면 기분이 좋으세요? 아까 우리가 연기법을 얘기했습니다만은 달라이라마 존자께서는 똑같은 얘기지만 표현을 아주 재미있게 하십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연기법을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나인데 왜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얘기해요? 좀 생뚱맞다고 볼 수도 있지만, 불교의 연기사상이나 중도사상이나 화엄연기나 이런 것들을 잘 살펴보면, 그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여러분 혹시 부모님 없이 태어난 분 계신가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렇게 죽 올라갑니다. 조상 대대로 올라가 봐요. 거기서 그 연결고리가 하나라도 끊어졌다 하면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연기예요. 그러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지만 그 수많은 연결고리를 생각해 봐요. 그러니까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또 우리 몸은 70 몇 %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딛고 서는 땅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있나요? 물과 땅이 없으면 살기 힘들어집니다. 불이 없으면 태양이 없으면 살 수 있을까요? 공기가 없으면.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라고 하지 않아요. 우리 몸도 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진 거예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겁니다. 본래 너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 그 자체로서 실체를 가지고 있는 부처님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 생각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 그 자체(Truth Itself),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자기 몸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허공은 자기 실체가 없어요. 그렇지만 그 허공을 끈으로 비유하면 그 허공이라는 끈은 온 우주 삼라만상을 꿰고 있는 것입니다. 허공은 끈이 되어 가지고 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에서 뱃속까지 보면 공간이 있어요, 없어요? 허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나서 배설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점유하고 있는 자체가 허공을 점유하고 있어요. 허공을 끈이라고 한다면 이 끈이 전부 다를 꿰고 있어요.
불교를 철저히 알아 가 보면 보살이다, 무아다 이렇게 가거든요. 우리가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저도 옛날에는 선(禪)이라는 것이 너무 어렵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왜 불교가 모두 선으로 볼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선에서 중요한 것이 즉금당처(卽今當處)입니다. 즉금당처라는 말이 Now & Here, Here & Now, 즉금당처가 바로 선(禪)이예요. 선(禪)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국화된 불교라고 얘기하잖아요.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불교 교리적으로 보면초기불교, 아비담마 모두 중요하지요. 그러나 불교의 정신은 결국 선(禪)으로 귀결된다. 그런 것을 요즘 제가 많이 느낍니다. 어찌 되었든 부처님이 완성된 무엇으로 계신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의 진리는.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 행동이 나온다 그게 아니에요. 부처님의 행동이 곧 부처다, 이 말입니다.
불교의 교리에서 보면 “‘선설불설(善說佛說)이지 ‘불설선설(佛說善說)’이 아니다”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잘 설해진 것이 부처님 말씀이지, 부처님 말씀만이 잘 설해진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단지 경전의 말씀만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여기는 불설에 대한 좁은 이해를 벗어나 우리 시대에 ‘유용하고 적절한’ 가르침은 다 불설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고정되어 있는 것, 부처님이 자기 실체를 가지고 있는 그런 분으로 착각을 해 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설해진 것은 부처님 말씀이다(선설불설(善說佛說)),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응용을 하면 성경(Bible) 속에도 부처님 말씀이 있을 수 있고, 이슬람의 코란 속에도 부처님 말씀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잘 설해진 것은 모두 부처님 말씀이니까. 충분히 이해되시죠? 부처님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고정관념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틱낫한 스님이라고 계시는데, 이 분의 종파가 임제종(臨濟宗)계통인데요, 그 분 종단의 이론이 인터비잉(InterBeing)이라고 그래요. 인터비잉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하면 상호즉존(相互卽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요즘은 이론이 달라졌습니다. 인터비잉, 상호즉존에서 인터비커밍(Inter-Becoming), 상호생성으로까지 나아갔어요. 우리 삶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면서 계속해서 나아가잖아요. 우리가 삶에 대해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면 우리 삶이 활활발발(活活發發)하게, 활력있게 생기차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기계적으로 형해화(形骸化)된 삶, 박제화된 삶, 어떤 틀 안에 갇혀 버리게 되어요. 생기발랄한 생명성 이런 것이 사라진다는 얘기인데, 우리 삶은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인간관계가 끝없이 상호작용하면서 가요. 부부관계도 결혼했으니까 거기에 얽매이지 않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 부부관계도 수틀리면 금방 헤어져요. 친구관계도 그렇습니다. 변화무쌍한 겁니다. 세상이. 모든 것이 상호작용이예요. 삶이란 나 혼자만 잘할 수 없고, 저 사람만 혼자서 잘 할 수도 없고, 이것이 끝없이 계속되면서 내 자신이라는 것이 생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박경준이다 홍길동이다, 그 사람이 정해진 것이 없어요. 끝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 삶입니다. 이 삶의 과정.
실존철학에서는 야스퍼스가 얘기했지요. 인간 존재는 인간 생성이라고 했어요. Human Being is Human Becoming! Being이라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Being은 있다,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존재하는 일은 없어요. Becoming, 생성되어 가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지. 존재론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은 없다는 겁니다. 영어에서 Be 동사가 그런 거 잖아요. InterBeing은 자기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의존하는 존재라는 얘기거든요. InterBecoming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는 겁니다.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삶이지요. 우리가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순간 순간 깨어있는 그런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생명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흐름을 우리가 포착을 하고, 그 흐름과 장단을 맞추어 가지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열반가를 부르고 해탈춤을 추고 가자. 그것이 바로 생명의 춤이고, 생명의 노래입니다. 결국은 종교는 우주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파니샤드에서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잖습니까?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가 된다, 그 사상이 영원히 가는 것 같아요. 브라만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이 문제인데, 우리 불교는 절대적인 실체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저는 불교야말로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예술이다, 이게 진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서암스님이 그것은 내 부처가 아니야 그러지 않습니까? 저는 그 말씀을 좋아합니다. 남의 부처, 나에게 무익한 부처, 나와 무관한 부처, 그것은 나의 부처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남의 부처에 끄달려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일본에 갔는데, 야나기나 세잔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교학자가 아니라 선학자를 만났는데, 교토에서 있었던 세미나를 마치고, 스님하고 몇 분이서 야나기나 세잔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다다미방으로 정갈하게 꾸며진 조그만 집이었는데요. 장식도 없고, 벽에 길게 부처 불(佛)자 족자가 붙어 있고 그 길이 만큼 곧 즉(卽)자가 길게 쓰여 있었어요. 저는 살아오면서 그렇게 감동적인 순간은 드물었던 것 같에요. 부처 불(佛)자도 훌륭하지만, 곧 즉(卽)자가 주는 메시지는 진짜 강렬했습니다. 아까 즉금당처(卽今當處)라고 했지 않습니까? 임제록에 보면, 바로 지금이니 다른 시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법정스님이 좋아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임제선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임제선이 아니더라도 다른 선사들이 지향하는 바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지금 여기’에 내 삶의 전부를 걸고 현존할 때, 나는 더 이상 이 우주의 객이 아닌 주인이다. 내 삶의 주인이며, 이 시공의 주인이고, 이 우주 법계의 주인공이다. 이 우주 삼라만상의 중심이 바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된다는 의미로 들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무언가 모든 것이 해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맞아. 부처님도 지금 여기 부처님이지, 극락 정토도 바로 지금 여기서지, 죽고 나서 극락 가는 것도 소중하지만, 지금 이 순간과는 무관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야. 극락도, 열반도, 행복도 바로 지금 순간입니다. 그게 정말 강렬하게 사무쳐 가지고, 서예하는 분이 써 주셔서 제 서재에 가지고 있습니다. 내일을 굼꾸지 마, 과거에 연연하지 마, 후회도 하지 마, 바로 지금이야.
요즘 저는 밥 먹는 것도 즐겁지만, 설거지하는 것도 아주 즐겁습니다. 왜 그러느냐? 식사라는 생활을 보면 밥 먹는 것도 식사고, 설거지하는 것도 식사예요. 설거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맛있게 밥을 먹고 식탁에서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우습게 보면 안 되지요. 얼마나 덕높으신 설거지입니까? 설거지를 잘 해야 깨끗한 그릇에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요즘 저는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 버리는 것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집사람이 저보고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이게 바로 연기적인 생활입니다. 밥 먹는 것하고, 설거지하는 것을 둘로 보지 않고, 같이 가는 것으로 본다. 유기적이고, 역동적이고 총체적인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적인 생활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인과적 사유, 유기적 사유, 연기적 사유, 총체적 사유, 이렇게 생활하면 청소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청소하는 속뜻, 이것을 천양희 시인께서 발견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천양희)
구두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에서만 빛이 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천양희 시인의 마지막 구절, 청소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이 구절은 만만치 않습니다. 상당히 불교적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하는 청소, 설거지 이것을 짜증내실 일이 아니예요. 나에게 주어진 축복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저기 무덤 속에 있는 분들이 청소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지금 이순간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다는 이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지금 무덤 속에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부럽겠어요. 이 넓은 불광법당에서 맑고 향기로운 사람들과 얼마나 함께 하고 싶겠어요. 우리는 지금 그 축복을, 그 은헤를 잘 모르고 있지 않나요? 살아 있는 것, 이 자체가 기적이다. 틱낫한 스님 말씀입니다.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다려 오던 마법의 순간이 바로 오늘입니다. 마법의 순간이 기적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정국이 매우 시끄럽고 어지럽고 하지만, 우리가 근본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부처님 법을 만났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냐, 순간 순간이 금싸라기처럼 소중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하루 하루 순간 순간 불광형제답게 멋지게 빛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참 좋은 인연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청명거사님 녹취)
♬ 찬탄곡 : 한 송이 연꽃 ( 광덕스님 작사. 정부기 작곡 ,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가없는 님의 진리 가슴에 사무쳐 두 손 모아 연꽃 한 송이
그리다 그리다 꽃잎 하나 그렸을까 향기만 맡으며 세월만 갔네
배통나무 백일홍은 찬서리 가버리고 이끼 낀 돌담위에 세월은 흐르는데
가을 겨울 가고 봄은 또 오는데 오묘한 그 연꽃 언제 피워볼거나
가없는 님의 진리 가슴에 사무쳐 두 손 모아 연꽃 한 송이
그리다 그리다 꽃잎 하나 그렸을까 향기만 맡으며 세월만 갔네
허공나는 저 새는 어디를 가고 있나 저무는 석양도 곱게 물드는데
가을 겨울 가고 봄은 또 오는데 찬란한 그 연꽃 언제 피워볼거나.
발원문 낭독 : 송파 13구 명등 사라수 보살님(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법회를 마치고, 각 구 법등가족들이 모여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아직 사 측에서 개방하지 않아 공양실은 사용하지 못하여도 각각 챙겨오신 먹거리로 즐겁게 법등 모임을 하고 계십니다.
어느새 법회가 끝나 헤어져야 할 시간. 귀가하시는 형제님들께 법당 안내팀 보살님들께서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계신 모습.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가는 금강경 독송. 오늘도 법회 후 대웅전에서 염송팀 집전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 구법회, 법등 임원을 대상으로 법회 후 1시 30분부터 보광당에서 2025년 제 2차 임원연수가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송파 13구 자명화 보살님께서 700여 개의 방석 커버를 세탁해서 가져오시니 거사님들께서 지하 법당으로 이동, 50여 분의 울력으로 순식간에 커버를 장착하여 깨끗한 방석으로 착착 쌓여 보관 장소로 들어가는 모습은 대단한 불광 법회의 위력을 보여주는 바로 그 현장이었습니다. 자명화 보살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토요일 오후에 청정팀에서 법당을 청소하고 의자를 배치하고 청정한 방석을 의자에 장착하여 일요법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노고 뒤의 돈독한 티타임 정말 행복해 보이십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추위가 머물다 간 지난주에도 조계사, 봉은사 시위 수행 정진에 참여하여 수고하시는 형제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 겨울 추위에도 계속했었건만 끝나가는 마지막 겨울 추위는 무척 매섭고 시린 날이었습니다.
동명 주지 스님!
너무도 춥고 발이 시려 하시는 노보살님들을 안타까워하던 수미행 보살님이 춤 동작을 보이며 움직임을 크게 하니, 발을 동동 손을 번쩍번쩍 추위를 이겨보려고 어설프게 춤 동작을 따라 하시며 시위 정진하시는 노보살님들의 모습이 안 보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마음님 온정성 다하여 법회 기록하심을 찬탄합니다. 청명홍보팀장님의 훌륭한 법문 녹취, 원각화보살님의 다양한 사진과 영상, 사진 정리를 찬탄합니다_()()()_
부처님의 행동이 곧 부처다
"즉금당처"
법문을 다시금 깊이 새길 수 있도록 정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