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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김윤길 (편집위원) | 2016. 제3호
[편집자 주] |
신대승 e-매거진은 각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걸으며 우리 사회와 불교계에 뜻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강호의 인물들을 찾아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이를 정리하여 게재하는 <강호대담, 선우·선지식을 찾아서>를 진행합니다. 그 첫 번째로 경상대학교 철학과 ‘권오민 교수를 찾아서: 암하실 방담’을 다음과 같이 3회에 나누어서 연재합니다. 이번 제3호에서는 <강호대담> 권오민 교수를 찾아서- 암하실巖下室 방담放談 2편을 연재합니다.
❶ 불교?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타당해야 진리입니다. (지난 호, 보기) ❷ 불교학? 학문도, 대학도 기본이 중요합니다. (이번 호) ❸ 조계종?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다음 호 예정) |
불교학? 학문도, 대학도 기본이 중요합니다.
산청의 농막 <암하실> 마루에서-권오민교수와 김윤길 주간
권오민: 비유는 불교의 중요한 장르입니다. 12분교(十二分敎)라는 불교의 12가지 장르 구분이 있습니다. stura(經), gatha(偈頌), geyya(重頌), avadana(譬喩), jataka(本生) 등등 모두 불교의 중요한 경전 장르입니다. 사실 이런 걸 내가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독교 성경은 한 글자라도 건드리면 큰일 납니다. 불교는 얼마든지 빼도 되고 가미해도 됩니다. 문학성이 중요해요. 우리가 사실 틀에 박혀서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한문 경전을 들여다봐야 제대로 압니까? 한 번도 경전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사실 풀어내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큰일입니다. 이런 것을 일상적으로 읽히고, 이해를 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우리 불교성전은 아예 읽을 생각도 않고, 읽히려고 노력도 않고, 문제가 많아요.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고 전해오더라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칼 같은 대승논사(大乘論師)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행가나 이야기로 만들어 전하고자 했던 비유사(譬喩師)들이 애초에 불전 편찬의 과정에서 서로 소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불전들은 다양성을 가진 콘텐츠의 보고(寶庫)로서 더 큰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광맥의 존재를 알면서도 제대로 원석을 캘 수 있는 사람도, 캐낸 원석을 가공할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우리 불교계의 현실이다. (이상 1편 끝부분입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경전 편찬과정에서 비유경과 같은 12분교의 다양한 장르들이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불교가 진리를 탐구하는 엄밀한 논리철학의 방법으로 이루어낸 학문적 완성의 단계에서 다양한 방법의 대중적인 소통까지도 모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대승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을 비유로 들어야 한다
윤남진: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사회 갈등을 화쟁으로 풀어야 한다, 이런 취지로 만들어져서 활동을 했잖아요. 원효스님의 화쟁론을 가지고 그 동안 여러 교수님들이 발표도 했고요. 그런데 최근에 종단 총무원장 선거제도를 100인 대중공사에서 안건에 붙였는데, 거기에서 다수 의견으로 직선제를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어느 기자가 이에 대해서 총무원장에게 질문하니까, ‘나는 코끼리가 되어본 사람이라 잘 안다. 여러분은 귀만 만지고 다리만 만진다. 코끼리가 되어서 보니 분규가 가장 위험하더라.’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직선제 반대하는 논리로 교묘하게 코끼리 비유를 쓴 것이죠. (관련 보도내용)
▲ 2016년 3월 31일, 서울 불광사에서 열린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 시즌 2. 총무원장 선출제도와 관련해 발언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사진제공: 불교닷컴)
김윤길: 얼마 전에 동국대 총동창회장이 학교문제와 관련해서 모교라는 전체 숲은 보되, 그 부분 부분의 허물에 대해서는 앞으로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다고 한 것과 총무원장의 비유가 느낌상으로 일맥상통하네요.
윤남진: 그런 말을 개발하는 참모들이 있는가 봐요.
권오민: 그런 비유는 인도에서 많이 썼던 것들입니다. 불교에서도 쓰죠. 가장 많이 그런 비유를 쓰는 사람들이 자이나교도들입니다. 자이나교에서도 코끼리 비유를 씁니다. 코끼리라는 전체가 있는데 부분밖에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과연 전체가 있을까 사람들이 의심합니다. 철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큰 과제입니다. 국가가 있고 국민으로서 개인이 있는 것인가, 개인이 있고 개인의 집합으로서 국가가 있는 것인가? 자이나교에서는 비유로써 완전한 것, 즉 전체가 먼저 있다고 봅니다. 결국 중생들은 무지의 양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본다는 것이죠. 상대주의죠.
윤남진: 우리는 아는 것을 가지고 비유를 하잖아요. 코끼리 비유가 가능한 것은 코끼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통하는 건데, 너는 모르는 것이라고 하면서 비유를 들면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죠.
권오민: 극성(極成)이라는 인명(因明)용어가 있습니다. 지극성취(至極成就)의 준말이고, 범어는 prasiddha입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 즉 양측에서 모두 인정하는 것(共許)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주장을 비유로 말할 때,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을 비유로 드는 겁니다. 내 주장이 특별한 것인데 그것을 이해시키는 비유도 특별한 것이어서 알아듣지 못하면 이해시킬 수가 없잖아요.
윤남진: ‘코끼리가 되어봐서 잘 안다.’는 비유는 다른 사람들이 장님이라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에요. ‘너희들은 총무원장 안 해봐서 몰라. 내가 해보니까, 내가 다 봤는데 직선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알지도 못하는 소리 하지들마라. 우리는 적당히 분규만 막고 이렇게 가면 되는 거야. 우리 삼사십 명이 알아서 잘 할 수 있어. 그냥 조용히 있으면 돼.’ 이런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자신이 확연히 본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예 정치적으로 소통을 막는 느낌입니다.
미래운명과 관련해서 너도 나도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모르는 결과에 대해서 서로가 부분 부분만을 보고 자기 주장을 한다는 것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죠. 전체로 봤을 때 어떻게 맞춰질지는 모르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그 중간단계가 있어야죠. 저는 그래서 진리의 영역, 학문의 영역에서는 몰라도 정치제도 중에서는 현실적으로 민주주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윤길: 종단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총무원장 선출제도라는 건 참 특이한 현상이죠. 공부와 수행을 함께 한다는 승가공동체의 전통이 사라지고 교단의 행정책임자를 뽑는 제도를 바꾸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화쟁이란 건 하나 됨이 절대로 아니다.
윤남진: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가 화제가 된 것은 작년 가을에 화쟁에 대한 토론회(토론내용 전문, 불교닷컴)에서 화쟁을 가장 잘 표현한 예화로 도법스님, 우희종, 조성택, 이도흠 교수 등이 철학적 논쟁을 한 것 때문이에요. 그런데 총무원장이 그걸 그렇게 써먹더라고요. 원효가 경전에 대한 해석방법론으로 제시한 화쟁이 우리 사회 갈등에 적용되면서 개시개비(皆是皆非)라는 말을, 이것도 저것도 다 맞고 다 틀리다는 애매한 관점이 마치 불교적 해법인 것처럼 왜곡하면 안 되죠. 도법스님 논리가 어떤 부당한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왜 자꾸 싸워 싸’하는 식으로 점점 이상해져요.
“화쟁을 화쟁하다” 좌담회, 2015년 9월 22일, 화쟁문화아카데미 중앙홀 (사진제공: 불교닷컴)
권오민: 나는 불교원전을 다루는 사람이지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대학에 와서 철학개론을 가르쳤습니다. 다 독학해서 가르쳤어요. 몇 년 전부터 전공분야별로 교양강좌를 하게 돼서 ‘인도철학과 불교’라는 과목을 만들고, 민족사에서 간략하게 요약한 《인도철학과 불교》라는 책을 교재로 썼습니다.
그 책의 장점은, <화엄>을 먼저 정리하고 의상에 대해 씁니다. 원효에 대해서도 <여래장>이라는 분야를 쓰고 원효를 썼어요. 원측도 <유식>을 전체적으로 1,2,3,4항으로 쓰고 4항에서 원측을 다뤘어요. 예전에 역경원에 계시던 최철환 선생이 그 책을 보고 “와, 특이하네.” 하더라고요. 유식사상 속에서 원측의 입장이 뭐냐, 그렇게 다뤄야 분명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식이 다 원측스님 겁니다. 물론 불교가 한국사상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유식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원측 하면 한국사상가, 유식 그러면 그냥 원측입니다.
승랑의 위대성, 원측의 위대성, 원효의 위대성, 의상의 위대성, 학자들이 자꾸 이런 얘기합니다. 위대하긴 하지만 불교사상사 전체로 볼 때 과연 그렇게 위대할까? 부처도 있고, 용수도 있고, 유식을 만든 세친도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원효가 위대한 사상가라고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한국불교사 하는 사람들이 말끝마다 원효, 원측 운운하면 전 속으로 솔직히 우습기도 하고 반감이 일어납니다. 과연 그 사상을 만든 사람보다 더 위대할까, 우리가 너무 앞뒤 안 가리고 맹종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윤남진: 원효스님 화쟁론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권오민: 아, 말이 옆으로 빗나갔습니다만, 제가 원효사상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학생들에게 원효를 가르치는데 제가 알아야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원효의 글들을 읽어보니 제가 아는 논리하고 다르지 않습니다. 재작년에 세미나에서 <원효 교학과 아비달마-화쟁론을 중심으로> (관련보도, 주간불교)
우리나라에서 부처님 말씀이라고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걸 써놓고 불교학논문이라며 내는 게 허다한데 솔직히 그건 논문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불교학자들이 한국의 불교 논문들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새로운 지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학은 교조주의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대승사상이 문헌상으로 처음 확인되는 시기는 5세기 이후입니다. 성전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며, 왜 생겼는가, 그런 것을 규명해야 합니다. 서양학문 기준으로 볼 때 해석이 없으면 학문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원효스님이 참 놀라운 건, 그분이 정말 아는 게 많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알기 때문에 화쟁을 말합니다. 화쟁이라는 것이 싸우면 서로 조화시킨다? 조화시키려면 제3의 이론이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제3의 이론을 내세우면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주장이라서 또 다른 화쟁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 일본 교토 고잔지(高山寺)에 모셔져있는 원효스님 진영(15세기 작품)
아비달마 시절부터 이미 화쟁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교리적인 문제, 비유적인 문제로 싸울 때는 이런 얘길 합니다. “물과 젖처럼 화합하라.” 열반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또, 어떤 유식문헌에는 이런 말도 나와요. “함사(hamsa)라고 하는 백조는 물과 젖이 섞인 중에서 젖만 골라먹는다.” 물과 젖은 별체인데, 서로 다른 것인데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서로 섞일 수 있다는 겁니다. 원효도 역시 그렇습니다. 화쟁이라는 것은 하나 됨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건 독선입니다. ‘이 사람은 이 논리가 있고, 저 사람은 저 논리가 있다. 그 논리를 인정해줘라. 내가 허용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논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해줘라.’ 그래야 화쟁이 된다는 겁니다. 원효는 제3의 길을 세워요. 제3의 논리가 아닙니다.
출가자 급감 현상은 불교의 미래가 없다는 반증인가
윤남진: 출가자가 점점 줄어들고, 그 사람들 나이가 대부분 사·오십대인데 뭘 배우고 뭘 이야기 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생계형 출가라고 자조하는 말도 있어요.
출가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출가자의 연령이 고령화되고 있다. 전국 대다수 사찰의 강원과 선방은 텅텅 비어있다. 각종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불교계 현실을 진단하고 분석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는 윤남진 소장(트랜드&리서치센터)이 현실적인 과제로 대화의 물꼬를 바꿨다.
권오민: 지리산에 있는 큰 절 강원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가보니 학인이 딱 3명 앉아있더라고요. 강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불교학개론을 읽자 하기도 그렇고 해서 금강경을 강독하기로 했어요. 나이가 모두 사·오십대인데 난감했습니다. 한사람은 엄청 수업듣기를 싫어하고, 한사람은 그럭저럭, 들어보자 그런 느낌으로 앉아 있고, 한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은 표정으로, 너 해봐라 그런 분위기더라고요. 지금 승가교육 자체가 받는 사람이든 하는 사람이든 별 희망이나 기대를 갖기도 어려운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윤남진: 최근에 중앙승가대학 교수님 이야기 들어보니 심각하더라고요. 특히 비구니 스님 숫자가 줄어들었데요. 가톨릭은 수도자(수사/수녀) 숫자가 대단합니다. 신부는 현상유지고요. 가톨릭 전체 성직자가 스님들보다 많습니다. 출가희망자들 고령화 현상이 심각합니다. 사십 세 이상 되면 수행도 공부도 몇 배 힘들어요.
출처:신대승 e-매거진 2호 <카드뉴스> 중에서
김윤길: 그 나이 들어 습관이 들지 않으면 공부하는 것만큼 힘든 게 없어요. “공부하다 죽어라”는 화두가 전혀 다른 뜻이 돼버려요.
청정승가의 전통은 공부와 수행에 온 몸을 던져서 평생을 용맹정진하며 살아온 스님들의 삶으로부터 확립되었다. 가정을 꾸려 돌보고 경제활동을 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포기하고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은 비범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출가한 궁극의 목표를 이루는 방법은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고 지혜를 체득하는 공부와 수행의 도정에서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하지 않고 걸식 탁발을 하더라도 떳떳할 수 있다.
“가사(袈裟)만 봐도 삼배를 올린다.”는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는 바로 그러한 승가 전통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다. 청정승가는 현대적인 의미로 볼 때도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통적인 학문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불교공부는 쉽지 않다. 홀로 수행하며 연각(緣覺)을 이룬 석가모니께서 제자들을 모아서 함께 공부하라고 승가공동체를 만드신 뜻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만큼 공부가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 옆에는 ‘벼락같은 화두’가 소박하게 새겨져 있다.
윤남진: 오곡도 명상수련원에
청년이나 여성 출가자가 줄어든다는 건 점점 미래 가능성이 없다는 반증 같아요. 가톨릭은 매년 자세하게 교세통계를 공표합니다. 그런데 우리 종단에서는 지관스님 원장 하실 때 2008년까지는 교세통계를 홈페이지 자료실에 발표했는데 다음 해부터 아예 통계자료 공개란이 없어졌어요. 기본이 다 무너지고 있어요. 얼마나 무너진 지도 몰라요. 어디서 무너지고 있는지도 몰라요.
김윤길: 그 안에서 비판하거나 변화를 촉구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라고 봐야 되나요?
윤남진: 누가 거기서 하려고 하나요. 생각 있으면 다 떠나죠. 동국대 총장선출 사태나 용주사 범계문제도 심각하지만 조계종은 지금 발밑이 무너지는 상황이에요.
권오민: 차라리 재가자들이 새로 하나 세우는 게 쉽겠네요.
대학의 현실은?
김윤길: 대학은 좀 다르다는 생각들을 할지 모르지만 종립학교라는 명분으로 종단 영향력이 커지면서 거버넌스가 왜곡되어 버렸어요. 종단 추천 승려이사 숫자가 이사 정수의 3분의 2 이상이 되면서 실질적으로 총무원장이 학교의 최고의사결정권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실정법상 종교계에서 설립한 사립대학이라 하더라도 제도적으로 교단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계통 학교들도 성직자 이사 숫자가 대부분 3분의 1이하이고 많다고 해도 최대한 과반수 정도입니다. 동국대처럼 승려이사가 3분의 2이상이면 총장선출 뿐만 아니라 정관개정은 물론 학교 해산까지도 시킬 수 있는 절대적 비율입니다. 이전에는 그래도 교수사회 여론이나 대학 구성원들이 강하게 주장하면 이사회가 일방적인 결정을 하진 않았어요. 지금은 거버넌스가 완전히 깨졌습니다.
권오민: 인사문제도 그렇습니까?
김윤길: 교원인사는 이사회 의결사항이지만 총장이 인사제청권을 갖고 있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인사권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전임 총장들이 인사문제 때문에 시달리는 정황이 있긴 했지만 이사회가 규정에 정한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작년부터 그게 크게 흔들린 거 같아요. 신규교수 채용하는데 전임 이사장 스님이 복수로 인사 제청하라고 해서 총장과 갈등이 생겼다는 소문이 쫙 돌았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더 심각한 문제는 교원인사 기준을 하향화해서 규정을 개정했다는 겁니다.
권오민: 제가 이 대학(경상대학교)에 지원했을 때 여러 사람이 지원했습니다. 동국대라면 아마 안됐을 겁니다. 누가 배경이 어떻고, 이사장, 이사 빽이 어떻고 그런 얘기들이 들리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김윤길: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는 부처님 가피를 받아야 된다고 돌려 말하죠. 최근에는 불교전문대학원 설립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가장 관심이 집중되는 건 전례 없이 많은 교수 자리가 새로 생긴다는 겁니다.
권오민: 그것 참, 불교학과 110주년 행사 때 그 얘기가 나옵디다.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서 교육을 어떻게 할까라는 문제가 중요한데,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해서 전문대학원 만든다는 얘기가···
김윤길: 승·재가를 불문하고 박사학위를 가진 많은 사람들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죠. 총장뿐만 아니라 이사장, 이사들 주변에 알게 모르게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어요.
권오민: 인사적체가 심각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불교대 교수채용 못한 지 오래됐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전문대학원으로 그걸 해소한다는 건 이상합니다. 교육기관이 하나 생기면 제일 먼저 교육목적과 목표가 제대로 서있어야 됩니다. 철학과도 사학과도 다 인사적체 심각합니다. 인사적체, 그래도 그걸 내세우면 안 됩니다.
지금도 사실 불안합니다. 영남 쪽 지역대학들은 그래도 불교학 전공자들이 좀 있는데 이제는 안 뽑아요. 얼마 전에 창원대 교수초빙공고 난 것도 인도철학 후임으로 중국철학을 뽑습니다. 더 이상 불교학을 뽑는 학교가 없습니다. 동대도 줄어들었잖아요. 이상하게 90년대부터 2천년 초반까지 일시적으로 사학과나 철학과에서 불교학 쪽을 많이 뽑았어요. 서울대도 뽑고, 연대, 고대 모두 뽑았어요. 대단히 일시적이에요. 짐작컨대 그때 교수된 사람들 물러나면 후임으로 과연 불교사, 불교철학을 뽑을까? 안 뽑을 거예요. 일시적으로 반짝한 것이지. 이대로 가면 대학에서 불교학 자체가 사라질 겁니다.
불교전문대학원 만들어서 불교장례, 불교사회복지, 그런 전공에 불교학자 뽑아서 뭘 할 수 있을까요? 사회복지 필요합니다. 열심히 해야죠. 자비심이 필요하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야 한다는데 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불교이론으로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불교학은 사라지고 기본이 다 무너지는데 이런 거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전문대학원 만들어서 졸업시키면 그 졸업생들은 뭐먹고 삽니까? 새로 아이디어 내서 먹고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기독교는 신학교 나오면 개척교회도 세우고, 어쨌든 먹고살 수 있는 수요를 만들잖아요.
김윤길: 저도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동국대에서 출판부장 할 때 불교학술원 행정지원실장 일을 겸직으로 맡게 되었는데, 당시 이사장 정련 스님께서 저를 불러서 동국역경원을 부흥시킬 수 있는 계획을 세우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고심 끝에 기획한 일이 ABC사업입니다. ABC사업은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Archive of Buddhist Culture) 구축사업의 영문 이니셜을 따서 명명했죠.
이 사업은 사실 동국대가 60년대에 종단으로부터 떠맡은 역경사업을 계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동국대출판부가 70년대부터 편찬한 한국불교전서를 번역하는 사업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이죠. 불교학술원에 근무하는 젊은 소장학자들 몇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매년 20억 원씩 정부 지원을 받아서 15년 동안 추진하는 장기사업으로 다소 무모하다싶은 사업계획을 만들어서 문광부 종무실에 제안을 했죠. 처음에는 거의 미친놈 취급하더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2012년부터 정부보조금을 받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불교관련 박사급 전문인력 4,50명이 참여하는 제법 규모가 큰 사업입니다. 박사학위 받았다고 대학 전임이 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불교학전공은 동국대 아니면 자리도 거의 없잖아요. ABC사업이 불교계 전문 인력들 고용창출을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보조금을 지원하는 종무실에서도 그런 측면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더라고요.
권오민: ABC사업이 구체적으로 뭘 하는 사업입니까?
김윤길: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전국에 흩어져있는 불교문헌들, 이것을 불교기록문화유산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자료들을 조사하고 목록을 정리하고 고해상도로 촬영하여 집성하는 사업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이미 번역이 진행되고 있던 대장경이나 한국불교전서 같은 불교찬술문헌들과 새로 찾은 문헌들을 학술적인 바탕에서 체계적으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해제하는 역주사업입니다. 세 번째가 집성, 역주된 자료들을 출판하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기록보존과 활용을 할 수 있도록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활용사업입니다.
권오민: 중요한 사업이죠. 그런데 그런 일들을 할 만한 사람들이 과연 지금 동국대나 불교계에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이상적이긴 한데 현실적으로는 어려워 보여요.
김윤길: 기획단계에서 인력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대부분의 자료가 한문으로 된 것들인데 실제로 요즘 불교학으로 학위 받아도 대부분 한문독해를 못하는 박사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불교한문아카데미를 ABC사업에 포함시켜 만들었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과 협약을 체결해서 연구 인력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문교육을 병행하기로 한 거죠. 사실 ABC사업은 기반을 세우는 작업입니다. 15년 동안 기초를 잘 닦아놓으면 그걸 기반으로 향후 100년 이상 100명 정도가 먹고살면서 불교콘텐츠를 활용하는 재생산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거죠. 장밋빛 전망을 세웠는데 현실적으로는 벅찼습니다.
그래도 사업이 시작되는 초기에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의욕적으로 일했습니다. 기획 단계부터 함께 했던 소장학자들이 참 열성적이었죠. ABC사업의 기본구도는 그들의 고민과 아이디어가 녹아든 것입니다. 그때 학술원장을 맡아 ABC사업단장을 당연직으로 겸직한 인환스님께서도 큰 역할을 하셨어요. 직접적인 일을 하시진 않았지만 종단 원로나 총무원 소임자들 만나면 잘 도와주라고 그러시고, 총장과 이사장스님께 우리 학술원에서 이런 좋은 일 하니까 많이 지원해달라고 분위기를 잡아주셨죠.
권오민: 인환스님이 원로이신데 그런 사업을 실제로 끌고 가기에는 무리였겠죠. 구체적인 내용을 알았다기보다 좋은 일이니 노장의 권위로 도와준 것만도 다행입니다. 대체로 스님들이 그런 일 관심조차 없어요. 오히려 잘못 관심을 가지면 일이 이상해집니다.
김윤길: 인환스님 후임으로 최현각 스님이 와서 ABC사업이 위기를 겪었어요. 제가 그때 만해마을 교육원장으로 발령을 받아서 출판부장 일을 그만두고 강원도로 파견을 갔습니다. 불교학술원 일은 겸직이라 매주 월요일마다 학술원에 와서 회의도 하고 결재처리도 하고 그랬는데, 한번 올 때마다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져 있는 겁니다. 학술원 총책임자인 스님이 연구교수나 연구원들 상대로 사소한 시비꺼리를 키워서 분란들이 생긴 거죠.
정말 황당했던 건, 제 기준으로 볼 때는 실력 있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혼내고 쳐내는데, 일부는 떠나버리고, 재임용 탈락시키고, 왕따 당하고··· 그 와중에 그 스님 옆에서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권오민: 재임용 탈락했던 백 선생은 복직됐죠? 보광스님 총장 취임하면서 인터뷰 보니까 그런 학자는 삼고초려해서 데려와야 한다고, 능력 있는 학자를 핍박해서는 안 된다고 하드만.
김윤길: 김희옥 총장 때 교원소청심사에서 이겨서 복직은 됐는데, 그 이 성격이 칼 같은 데가 있어서 사람들하고 잘 섞이지 못해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백 선생이 맡았던 《해심밀경소》 번역본은 7권 중에 3권까지만 출판되고 현재는 학술원에서 중단시킨 것으로 압니다.
권오민: 유식학 공부한 사람 중에 그 이만한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 이를 누가 검증할거냐? 없어요. 그러면 안하무인으로 몰릴 수 있어요. 그 이전에 유식학 했던 선생들 더러 있었지만, 인도불교라는 대단히 철학적인 토대가 있어야 유식을 제대로 하는데 그 이를 검증할 만한 사람도 없고 같이 토론할만한 사람도 없어요. 원체 층이 얕아서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김윤길: 불전 번역이 제대로 되려면 원문교감이나 주석 작업이 치밀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번역자에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특히 논서(論書)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한글대장경이나 한불전 번역이 매년 정부 지원받는 사업이라 시간에 쫒기면 질적인 성과를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1년마다 번역 목표량을 채워야 하니까 번역자들이 부담스러워 합니다. 과거 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 편찬하면서 누적된 문제들도 결국 그런 것들이에요. ABC사업 기획하면서 학문적 바탕에서 연구와 병행되는 경전 번역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풍토를 만들어보자고 했지만 아직 요원한 것 같습니다.
권오민: 저도 예전에 역경원에서 번역을 해봐서 압니다. 그런데 요즘 책을 들여다보면서, 세상에!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이제 와서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해심밀경소》 같은 책들은 정말 작업하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한계라고 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습니다.
김윤길: 기존 번역들은 거의 원전 대조가 불가능했습니다. 한글대장경이 한글로만 나오고 주석이 거의 없으니까 누구 껄 베낀 건지 일본 거 갖다가 이중번역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죠. ABC사업 시작하면서 한불전 역주본을 출간하는 지침을 세울 때 원문을 모두 교감해서 싣는 걸로 어렵게 조율했더니, 훨씬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더군요. 출간되면 책임이 명확해지니까 역자들이 신중해지는 겁니다. 번역본과 원문을 같이 실으면 거기에 대해서 엄밀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인력이 기본적으로 취약한데다 할 수 있는 분들이 선뜻 마음을 내주지 않는 겁니다.
불교경전은 철학적 해석과 논증을 거쳐 지혜의 고전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불교와 불교학은 종교와 학문이라는 각각의 범주에서 상대적 독립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전통적으로 공부와 수행을 일상적인 활동으로 해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부와 수행이 어우러지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나 육바라밀은 인도불교의 전통 속에서 확립된 것이다. 계·정·혜 삼학은 융합적인 것이지만 ‘혜(慧)’를 드러냄으로써 진리를 탐구하고 지혜를 체득하는 공부의 목표가 이루어진다.
현대불교학은 근대 서양학문의 문헌학적 방법론에 의거해서 시작됐다. 이천오백 년이 넘는 불교 역사가 방대하고 심오한 문헌들을 남겼고, 18세기 이후에 그것을 처음 접한 서양학자들이 고대 아시아의 낯선 기록유물에 대한 1차적 접근을 언어학적, 문헌학적으로 시도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그들은 기독교 신학을 근대학문의 정점에 끌어올린 방법론으로 문헌학과 해석학을 진화시켜온 천년 이상의 학문적 경험을 갖고 있었다. (문헌학으로서의 현대불교학이 성립된 과정에 대해서는 드용(J.W. de Jong)의 《현대불교학연구사(동국대출판부)》 참조)
서양에서 불교학이 연구되어온 역사를 보면 식민지 지배의 바탕에 깔린 오리엔탈리즘적인 색채를 아직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서양불교는 짧은 기간에 선불교나 상좌부불교(THeraváda), 또는 티베트불교와 같은 불교전통을 접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불교는 서구에 의한 식민지 경험을 거치면서 발전되어 왔으며, 근대화에 대한 반응인 동시에, 개신교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컬럼비아대학 종교학과 교수인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는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2011, 그린비)》에서 서양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들을 다루고 있다.) 최근 서양의 불교학자들이 불교학이 지향할 방향에 대해서 근대적 시각을 넘어서서 문헌해석학을 거쳐 철학으로서의 불교학에 대한 비판적인 모색을 한다고 하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교는 이미 2천 년 이전부터 융합학문의 성격을 가진 불교학으로서 학문적 체계를 갖췄을 뿐만 아니라 광대한 문명교섭을 통해서 글로벌한 학문전통을 쌓아왔다. 결집시대 이후에 찬술된 불교경전들은 서양학문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훨씬 엄정한 문헌해석학적 탐구와 철학적 논증의 결과이다. 그렇게 축적된 인도불교의 경전들이 중국과 티베트 등지에 전파되어 새로운 언어와 문자로 번역되는 교섭과정을 통해서 더욱 치밀한 탐구와 논증의 과정을 거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인도의 대승경전이나 한문경전들이 너무 방대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혹은 부처님의 원음이 아니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불교의 근본과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서구에서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거나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는 치유의 처방처럼 여기는 경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불교를 일종의 뉴에이지 사조처럼 여기는 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일 뿐이다.
양적으로 방대하고 질적으로 심오한 불교경전들은 그냥 보존만 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그것들은 정교한 문헌학적 방법론에 의거해서 철학적 해석과 논증을 거쳐서 현대인들에게 공유되는 지혜의 고전으로 번역되어야 하며, 문화예술의 콘텐츠로서 인류의 삶속에서 되살아나야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