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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四聖諦, 빠알리어 Cattari Ariyasaccani)
부처님이 우루베라의 네란자라강(尼蓮禪江) 기슭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사성제(四聖諦)이다.
그리고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설할까를 생각하신 끝에
베나레스 교외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녹야원(Migadāya)에 가서
옛날 같이 수행하던 다섯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하기로 했다.
그 때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이때 최초로 설한 법이 사성제(四聖諦)이고,
그 수행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설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부처님이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처음으로 설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쿠시나가라(Kuśinagara)에서 반열반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 역시 사성제였다.
따라서 <중아함경>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 중에서 코끼리의 발자국이 가장 커
다른 모든 발자국을 섭수하므로 제일이라고 하듯이
사성제는 모든 불법을 다 섭수하므로 일체법 중에 제일이다.”라고 했다.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인데,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라고도 한다.
사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苦)와 苦의 원인, 그리고 苦의 소멸과,
苦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여기에서 집(集)은 고(苦)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道)는 멸(滅)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ㆍ집ㆍ멸ㆍ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수단은 도(道)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한 교리이다.
그리하여 잡아함 16권 424경 <숙명경(宿命經)>에서
부처님은 전생 문제를 화제 삼는 제자들을 책망하면서
불교의 수행목적은 열반에 있음을 강조하셨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앞으로 전생에 관한 얘기를 화제로 삼지 말라.
왜냐하면 그런 얘기는 진리를 알게 하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행위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지혜나 바른 깨달음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열반으로 향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너희들이 마땅히 화제로 삼아야 할 것은
여래가 가르친 사성제(四聖諦), 즉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원인이 되는 진리,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
괴로움을 소멸하는 여덟 가지 방법에 관한 진리다.
왜냐하면 이런 화제는 진리를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되며,
깨끗한 행위와 참다운 지혜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애써 진리에 관한 얘기를 나눌지언정
열반으로 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얘기를
화제로 삼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고(苦)’라는 것은 빠알리어로 ‘duhkha’로서
보통 괴로움, 고통, 슬픔 등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 무상(無常), 공(空) 등의 더 광범위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사성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1) 고성제(苦聖諦, Duhkha Satya)
빠알리어 ‘두카(duhkha)’란 한마디로 해서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것은 고이다[一切皆苦]’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고성제란, 깨치지 못한 범부중생의 삶이란
바로 괴로움이라는 현실세계의 참모습을 통찰하는 진리이다.
그리고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사고(四苦) 또는 팔고(八苦)를 말한다.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네 가지 신체적인 사고(四苦)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求不得苦],
오온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五取蘊苦] 등의
네 가지 정신적인 고를 합쳐서 팔고(八苦)라 한다.
이 여덟 가지의 고통은 중생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고,
중생의 고통을 대표하는 현실적인 고통이다.
그런데 이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 등 3종으로 나누기도 한다.
• 고고(苦苦)---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추위와 더위나 갈증 혹은
질병 등에서 생기는 육체적인 고통을 말하며,
통상적으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 괴고(壞苦)---문자 그대로 ‘무너지는 고통’인데,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因果)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 해서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고통’을 말한다.
즉, ‘하고자 하나 뜻과 같이 안 되고,
이루어 놓은 것이 무너지는 고통’이 모두 이 경우이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하는
고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외에 현실적으로는 모았던 재산이 파산하고,
생로병사도 일종의 괴고이기도 한 것이다.
• 행고(行苦)---인간은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이 임시로 가합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런 인간이 자신에 대해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고 집착함에 따라 나타나는 고통이다.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 한다.
오음성고란 인간의식의 구성요소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이
치성(熾盛 ; 불길같이 성하게 일어남)해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오온이 치성하다는 것은 바로 번뇌 망상이 치성하다는 말인데,
번뇌 망상이 치성한 삶이야말로 괴로움이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오온이 제각기 괴로움인 이유는,
그것이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은 어느 것 하나
고정되거나 영원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괴로움인 것이다.
즉, 오온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苦聖諦)를 사유하면,
염리심(출리심)이 생겨 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염리심(厭離心)과 출리심(出離心)은 같은 뜻인데,
염리심에는 고를 몹시 싫어한다는 뜻이 내재돼 있고,
출리심엔 고가 싫어서 고로부터 떠난다는 뜻이 내재돼 있다.
염리심의 ‘염(厭)’ 자는 빠알리어 ‘nibbida’를 한역한 것인데,
싫어할 염으로서, 염오(厭惡)라고도 하며,
중생이 윤회의 세계가 고통의 세계임을 깨닫고,
윤회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낀 나머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켜
해탈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염리심이다.
즉, 고통을 구역질 날 정도로 싫어해서
괴로움(고)과 괴로움의 원인(집)으로부터 벗어나고야 말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염리심이다. 그런데 수행에 있어서는
이러한 염리심이 바로 발심(發心)의 원동력이 된다.
염리심이 아니고는 이욕(離慾)도 이탐(離貪)도 되지 않으므로
염리심은 도(道)의 시작이요, 수행자의 머리라 칭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싫어하고 염오만 해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근본을 이해해야한다. 근본자리를 이해하는 것,
그래서 결국 좋고 싫어함을 다 떠나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일체가 다 환상임을 아는 것이
진정한 떠남이요(出離), 환상을 떠남이 곧 깨달음이다.
이러함에 4성제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사성제의 첫 번 째인 고성제(苦聖諦)의 고(苦)는
우리가 보통 고통으로 번역하는데,
사실 이 번역이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다.
전술했다시피 원래 이 말은 빠알리어 두카(dukkha)에서 왔는데,
이 뜻은 고통, 슬픔, 괴로움이라는 뜻도 있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이보다 더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두카는 불완전함, 영원하지 않음, 공함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두카에 해당되지만 윤회도 두카요,
어리석음도 두카이고, 즐거움, 행복함도 두카라는 것이다.
두카는 집착ㆍ갈애에서 나온다는 것을 사성제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이 완전히 사라진 삼매의 경지,
즉 깨달음의 경지에서만이 두카가 사라지고,
오직 완전함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행복한 것도 고(두카)라고 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하는 상태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한 것이 아니므로 언젠간 사라지게 되니
그것도 고(두카)라고 하는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Samudaya Satya)
집성제(集聖諦)에서 ‘집(集)’이란 초집생기(招集生起)의 뜻을 줄인 말이고,
빠알리어 사무다야(samudaya)를 번역한 말로서
‘불러 모아 생기게 한다’는 뜻이다.
어떤 결과를 발생케 하는 원인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현실이 결과적으로 괴로움이라고 정의된다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집성제(集聖諦)이다.
즉, 집성제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히는데,
고가 발생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갈애(渴愛, tanhā),
즉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것에다 비견할 정도로
불타는 욕망(탐욕)의 작용이다.
그리고 욕망이 바로 괴로움의 뿌리인 것이고,
인생의 모든 불행, 다툼과 분쟁, 괴로움은 모두 이 욕망에서 비롯된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眼耳鼻舌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집착,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모두 욕망이다.
따라서 깨치지 못한 중생이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갈애, 즉 주로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욕망이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고,
사회발전의 힘이 되기도 한다.
근⋅현대 자본주의시장경제에 있어서
사회발전의 근본동력이 개인의 욕망에 있었고,
그 욕망을 동력으로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최소한의 욕망, 즉 사회발전의 동력이 되고
개인생존의 기본조건이 되는 욕망까지 탓하는 것은 아니다.
집성제에서 다루는 욕망이란 갈애 수준의 것이다.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듯이 사납게 타오르는 욕망,
즉 탐욕에 해당하는 끝없는 욕망을 탓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아무리 욕망이 개인 혹은 사회발전의 동력이 되고,
개인의 생존력이 되기도 한다지만 그 욕망이 결코
그 개인에게 닥치는 고통의 뿌리를 극복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개인이 성장해도
욕망 그 자체는 역시 고통의 뿌리임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욕망은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 욕애(欲愛)---식욕, 성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 등의
오욕(五欲)처럼 원초적, 감각적인 욕망을 가리킨다.
• 유애(有愛)---개체 생존의 욕망.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등의 욕망이다.
• 무유애(無有愛)---유애란 악착 같이 생존하고 존재하려는
욕망인데 비해 무유애란 유애와는 반대 개념으로
삶을 포기하려는 욕망이다.
‘죽고 싶다’라든지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말과 같이
삶을 포기하려는 허무주의가 바로 무유애이다.
그래서 불교에선 자살을 무유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정신적인 고통 세 가지가 정말 고통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는다면 정신적인 고통에서
거의 다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고통의 정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 Nirodha Satya)
고통의 소멸에 관한 진리로서 여기서 ‘멸(滅)’이란
적멸(寂滅), 곧 열반(涅槃)과 같은 말이다.
열반은 ‘nirvana’를 음역한 것이며,
‘소멸(消滅)’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苦)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히 해방’된 해탈(解脫)의 상태로서
집성제에 반대되는 경지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멸성제는 갈애(愛)를 제거해 괴로움이 사라진 경지,
즉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있음을 알려주는 가르침이다.
멸성제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고, 이상이며,
현대적인 의미로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와 실천은
오로지 열반을 얻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멸성제는 열반 ‧ 해탈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면서
우리들에게 괴로움이 그친 이상적인 세계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를 스스로 실현해 머물겠노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이처럼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이므로
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열반에는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두 가지가 있다.
•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현재의 생에서 성취하는 열반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열반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유여의열반이라 한다.
‘유여(有餘)’란 의존해야 할 것, 즉 육신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여의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에 비해 무여의열반이란
완전한 열반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을 말한다.
이는 수행을 완성함으로써 할 일을 다 하고 생을 마감한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法身)의 상태로
돌아간 그 열반이 무여의열반을 의미한다.
이를 반열반(般涅槃)이라고도 한다.
(4) 도성제(道聖諦, Mārga Satya)
도성제(道聖諦)란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란 열반을 의미하며,
깨달음의 완성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도성제는 바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성제의 최종 위치에 놓인다.
괴로움에 대한 인식(苦聖諦)으로부터 출발한 사성제는
마지막으로 그것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도성제라는 실천적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그 막을 내린다.
도성제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성제(滅聖諦)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면에서 도성제는 멸성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의 모든 교의는 사실상 도성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괴로운 중생계에서 열반적정계로 가려면 그곳에 이를 수 있는
정확한 길이 제시돼야 하고 또 일단 열반적정에 이르면
다시는 고통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아야 하는데,
도성제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을 말하며,
양극단을 떠난 실천적 중도행(中道行)으로서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따라서 팔정도는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감각적 쾌락에 빠져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은 천한 짓이고, 하찮은 짓이고,
범속한 짓이고, 거룩하지 못한 짓으로, 유익하지 못하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는 데에 몰두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거룩하지 못한 짓으로, 유익하지 못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가까이 하지 않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거룩한 여덟 가지의 길(팔정도)이다.”라고.
이처럼 중도란 쾌락과 고행이라는
두 갈래의 극단적인 실천방식을 벗어난 팔정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도성제와 중도의 실제 내용은 팔정도임을 알 수 있다.
팔정도(八正道)는 여덟 가지 바른 길로서,
여기에는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 있다.
즉, 도성제는 열반의 이상적인 경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 정견(正見)---바른 견해로서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正道)의 기초이고,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자 팔정도의 기체(基體)라 할 수 있다.
정견으로부터 바른 행위가 흘러나오고, 바른 생활태도가 선택되며,
바른 수행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 정사(正思)---바른 생각, 바른 마음가짐이다.
즉,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 등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 정어(正語)---바른 말을 하는 것으로서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說],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 정업(正業)---바른 행위이다.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 정명(正命)---바른 생활, 올바른 직업을 말한다.
즉,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 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 정정진(正精進)---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며,
이미 생긴 악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 정념(正念)---올바로 알아차리는 것.
사념(邪念)을 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 정정(正定)---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 samadhi)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 dhyana)이기 때문에 이를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실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팔정도야말로
깨달음이나 해탈 ‧ 열반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닦아야할 덕목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순서대로 실천해야 하다.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다.
팔정도의 마지막 목표는 정정(正定)이다.
팔정도의 앞 7항목은 모두 정정을 이루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정정을 닦아야 지혜(prajna)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열반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이상으로 사성제에 관해 알아봤는데,
사성제는 결국 우리 중생이 고통의 현실계에서
열반의 이상계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먼저 고를 확실하게 알고(苦),
그 고가 있게 된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集).
우리가 외부 경계와 접촉하고 느끼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집착과 애욕에 물들고 때가 끼게 되면 고(苦)가 생긴다.
즉,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진리와는 등지고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 고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고가 생겨나게 되는 것은 무명, 애욕, 집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모든 고도 자동적으로 소멸되기 마련이며(滅),
이렇게 되면 인생에 있어 이미 고는 없게 되니,
이것이 바로 열반의 경지이고 해탈의 경지인 것이다.
즉, 모든 고의 근원을 없애면, 고가 없어지면 곧 열반의 경지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열반의 이상계에 이를 수 있는
정확한 길(道) 을 따라야 함을 체계적으로 알려 주고 있는 것이 4성제이다.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또 다른 해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펴신 최초의 설법은
고ㆍ집ㆍ멸ㆍ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였다.
그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최초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해서 불교교단이 성립된다. 불교교단이 성립하려면
불ㆍ법ㆍ승(佛 法 僧)의 3보(三寶)가 있어야 하는데,
사성제를 설한 초전법륜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고 전할 제자들이 생긴 것이다.
먼저 경전의 말씀을 읽어보자.
부처님께서 베나레스의 녹야원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네 가지의 성스럽고 참다운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것은 괴롭다는 진리요[苦聖諦],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쌓임에 있다는 진리요[苦集聖諦],
셋째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요[苦滅聖諦],
넷째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의 진리[苦滅道聖諦]이다.
만약 수행자로서 이미 모든 것이 괴롭다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며[知],
괴로움이 원인이 쌓임에 있음을 알고 끊으며[斷],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를 알고 증득하며[證],
괴로움이 사라지는 방법의 진리를 알고 닦았다면[修],
그런 사람은 빗장과 자물통이 없고, 구덩이를 편편하게 고르고,
모든 험하고 어렵고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리라.
그는 어질고 성스러운 사람[賢聖]이라 부를 것이며
거룩한 깃대를 세웠다고 하리라.” -
<잡아함경 제15권 386경 현성경(賢聖經)>
여기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세계라는 현실과 그 고통의 원인,
괴로움이 멸한 세계, 그리고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깨우쳐 주셨다.
이 사성제의 실천구조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원리와 유사하다.
고, 즉 괴로움은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의 증상에 해당된다.
집, 즉 미혹과 집착의 갈애(渴愛)는 발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멸, 즉 괴로움이 멸해서 평안한 상태는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이다.
도, 즉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현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은 길고 먼 윤회의 길로
추락하는 경로를 나타내고,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하는 방도는
영원한 행복과 자유가 있는 열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보여준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