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 이후의 문제는 자작농의 몰락으로 인한 실업자의 급증과 로마군의 질적저하였다. 로마 공화정을 지탱하는 핵심인 시민이 대부분 자작농이었다. 자작농이 경제기반을 잃고 실업자로 전락해 가는 사회현상은 로마의 공화정이 공동화 되어 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현상이 로마군단의 질적 저하였다. 포에니 전쟁 종결을 계기로 징병자격을 가진 시민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질과 양에서 모두 약체화 되어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연합도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마연합의 분열 원인은 시민권을 둘러싼 문제였다.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가 실업자 자립을 위하여 농지개혁법을 추진하였지만 원로원은 음으로 양으로 그의 개혁을 방해하였다. 티베리우스의 농지개혁은 원로원 계급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은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 300명은 참살당하고 만다. 기원전 133년 이후 대략 1세기에 걸쳐 이어지는 로마의 내란이 이어진다. 호민관인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는 티베리우스 형이 추진했던 농지개혁은 물론이고 공공사업에 의한 고용대책, 시민권개혁법, 국경자유화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원로원은 가이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매도하였다. 가이우스는 개혁에 실패하고 도주하다가 자살한다. 가이우스의 편에 섰던 사람 3,000명도 사형시킨다. 로마의 혼미는 마침내 원로원 스스로가 동족을 처형하기 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개혁은 그로부터 70년 뒤 카이사르가 실현한 시책속에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개방해 로마의 국경 자유화를 실현했던 것은 나중에 로마제국이 펼쳤던 시책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라쿠스 형제는 카이사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군대가 있었지만 그라쿠스 형제에게는 군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로마군은 각지에서 형편없는 패배를 당한다. 로마 시민들은 원로원에 대한 불신은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가이우스 마리우스였다. 기원전 107년에 집정관으로 취임한 마리우스는 로마의 군제개혁에 앞장선다.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전환을 단행한다. 지원제를 도입한 것은 실업대책이 되기도 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개혁을 해서 실업자를 자작농으로 돌리려고 하다 실패했지만 마리우스는 실업자에게 군에 입대하는 길을 열어주어 그들을 구제하는데 성공한다.
로마군의 연전연패는 로마의 존망과도 관련돼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은 로마 부유층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저항이 컸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 시민 사이에서도 마리우수 개혁은 대호평을 받았다. 원로원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눈을 로마 밖으로 돌리면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마리우스나 원로원 의원들은 예측하지 못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심각한 폐쇄주의로 인해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않은 로마연합의 여러 동맹국에서 보면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로마인만이 이득을 보겠다는 속셈이다'.라는 식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마연합에 속하는 동맹국이나 지방자치제의 시민들에게 병역의 의무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로마 시민들은 직접세를 납부하고도 병역에 종사할 의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로마 시민은 병역이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직업이 되었기 때문에 세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직접세는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불평등 한데도 로마는 전쟁이 일어나면 매번 동맹국이나 지방자치단체에 출병을 요구했다. 결국은 로마 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비로마 시민들에게는 아무 혜텍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 로마연합의 결속에 결정적인 치명타를 준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일어난 것이 기원전 91년의 '동맹자 전쟁'이다. 로마가 동맹국에게 공격을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도 가난한 8개 부족이 일제히 봉기한 이 전쟁에서 로마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동맹자 전쟁에서 이겼지만 로마측이 대폭 양보하면서 완전히 수습된다. 기원전 90년 로마는 '율리우스 시민권법'을 제정해 동맹국에 사는 시민들이 로마 시민권을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로마연합은 발전적인 길을 찾았고 이탈리아 반도 전토가 하나의'국가 로마'가 되었다. 이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성립은 로마 역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민권법을 제출한 집정관의 이름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이 인물은 그 당시 아직 10세이던 어린 카이사르의 백부였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시작된 동맹전쟁은 전화위복이라는 결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원병 제도의 전환은 다른 형태의 또하나의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 그것은 로마군단의 '사병화'라는 현상이었다.
지원병으로 군단을 편성하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전쟁의 승패 여부는 현장 병사의 움지임 여하에 달려있으므로 유능한 지휘관일수록 병사들로부터 신임을 받을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군단 지휘관과 병사의 관계는 개인적인 관계가 되어간다. 그래서 로마군단은 '공화국 군단'이라는 성격이 희석되고 그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사유물'이라는 색깔이 전해진다. 로마 공화정은 개인 플레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시스템으로 군단 사령관이 병사들의 덕망을 한 몸에 모으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로마는 사상 처음 군단간의 충돌사태를 맞게 된다. 그것은 동맹자 전쟁이 끝나고 몇년 지나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립에서 시작된 내전이었다. 술라는 마리우스 군단내에서 회계 검사관을 지낸 부하의 관계였으나 정치적 자세는 전혀 달랐다. 술라는 당시의 혼미의 원인을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이 올바르게 기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리우스가 집정관으로서 힘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는 양자의 대립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동맹자 전쟁 직후에 술라가 집정관으로 취임하자 양자는 격렬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이 대립이 그후 6년에 걸쳐서 계속된 내란으로 확대되었다.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란은 그야말로 유혈에 버금 가는 것이었다. 술라의 군단과 로마 토벌군의 싸움으로 죽은 로마인의 숫자는 수만명에 이르렀다. 술라는 공화정이 올바르게 기능만 하면 로마의 혼미는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술라는 임기 무기한의 독재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나서 개혁정책을 펴나간다. 술라는 원로원 의석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증원시킨다. 새의원은 대부분 기사계급에서 선출되었다. 그리고 원로원내의 연공서열제도를 만든 대신 호민관을 약하게 만들었다.
호민관을 거쳐 원로원 의원, 집정관이 되는 것을 완전 차단하였다. 그리고 집정관이 이끄는 상비군 이외에는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고 못밖았다. 그 이외의 속주에 배치된 군단도 이동할 때는 반드시 원로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어도 루비콘강을 넘어서는 것은 안된다고 정해 놓았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널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 고 외친 이유는 바로 이 규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술라는 군단의 사병화를 막기위해 군단 사령관의 임기를 1년으로 정했고 임지도 원로원이 정하기로 했으며 최고 사령관은 군무가 완료되면 즉시 군을 해산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군에 대한 민간인 통제를 철저히 통제함으로서 쿠테타의 재발을 막으려고 했다. 술라는 공화정 정화를 위한 개혁을 하고 불과 2년만에 독재관에서 물러나고 정계에서도 은퇴한다. 하지만 술라의 개혁은 그의 사후에 바로 붕괴하고 만다. 군사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폼페이우스, 카이사르라는 인물이 자신이 이끄는 군딘의 힘을 배경으로 로마의 정치적 중심에 뛰어든 것이다. 로마의 원로원 체제는 존속의 위기에서 다시 직면하게 된다. 공화정에 있어서는 가장 피해야 할 '개인플레이'의 시대가 개막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가장 먼저 폼페이우스가 등장하고 이어서 카이사르가 나타났다. 그리고 카이사르에 의해 마침내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