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悔恨)의 장충단공원
대중가요 「안개 낀 장충단공원」 가사는 남녀 사랑이나 이별 내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 노래 가사 마지막 연(連) ‘ 지난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렸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작사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리 표현했을까? 장충단은 공원이 아니다. 현충원과 같은 곳이다.
조선말기 전라도 정읍 고부에서 동학농민항쟁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 국난의 시작점이 되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까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는 대 사건의 원인이 된다.
고종은 명성왕후 시해 사건 시 일본인들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순사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장졸들의 영혼을 달래고 전란에 희생당한 군인들의 추모 시설을 추진한다.
장충단터의 남산 서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 주둔지 왜장대 倭獎臺, 일본공사관이 있다. 그 옆 회현동에는 일본인 마을이 있다. 남산에 제단을 세워 일제의 침탈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장춘단은 현재 신라호텔 자유총연맹 타워호텔 국립극장 등 남산 동측의 넓은 지역에 자리했다.
고종의 의도를 눈치 챈 일제는 장충단에 벚나무를 심고 공원화하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한 사당을 짓는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 사용하였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23주기인 1932년 박문사搏文寺 준공식에는 을사오적인 송병준 이완용 등의 감사위령제까지 지내면서 일제는 장충獎忠을 지워버렸다.
일제가 도로를 건설하는데 한양성과 성문은 장해물이었으며 조선 왕조를 격하시키면서 유적들도 철거하였는데 남대문과 동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인 중에는 양심가도 있었다.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 나가이 기타로(中井喜太郞)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비록 식민지가 된 조선의 것이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며 찬란한 역사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철거 주체인 하세가와 요미치 사령관과 하야시 곤스케 공사에게 무슨 논리로 설득해야할까 모색 중 그는 묘안을 생각한다. ‘임진년 조선정벌 때 숭례문은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 나갔고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는 흥인지문을 통해 한양성으로 진격했습니다. 일본 승전의 관문! 이것만으로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남아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 문을 없애면 조선 정벌의 이야기가 사라지겠어요’ 그의 요청이 반영되어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일제와 인연이 없었던 돈의문과 소의문 혜화문은 철거되고 만다.
일본 장군이 지나갔다는 이유로 보존된 숭례문과 흥인지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상해를 지배한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과 딸 현생을 찾아내어 이토의 사당인 박문사를 찾아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장춘단비는 일제가 통째로 뽑아내 방치하였으나 광복 후 발견되어 영빈관(현 신라호텔)에 보관된 후 수표교 서쪽 현 위치에 자리한다.
배호의 노랫말에 ‘지난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이 글씨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새긴다는 것은 종이에 쓰는 것은 아닐 것이며 돌이라면 비석이다. 장충단비 전면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 시절 쓴 글씨다. 후면은 충정공 민영익의 작품이다.
장춘단비 옆 수표교는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눌러 앉는다. 장충단과 자유센타가 위치한 남산 일대의 개천물이 성 밖으로 흘러가는 수문이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발굴 중 메인스타디움 아래에서 이간수문이 발견된다. 지하에 묻혀 있었기에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근현대사의 애환도 많다 TV연속극 『야인시대』에서 명동을 지배하던 일본 야쿠자와 종로 주먹패가 맞붙어 야쿠자를 굴복시킨 사건도 장충단 공원에서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 백만 관중이 장충단에 모였고 집권 군부 세력의 집요한 방해공작을 받기도 한곳이다. 유신독재 시절에는 장충 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자 한명의 찬반 투표를 했다. 장충체육관은 1963년 체육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필리핀으로부터 원조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돔식 체육관을 지을 만한 기술이 부족해서 필리핀회사가 맡아 지었고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 87달러, 필리핀은 220달러였다.
무역국가로 성장하면서 수출입이 늘고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호텔 객실 부족과 우리 고유문화를 보여주는 한식 호텔이 필요해진다. 장충단 공원 인접 신라호텔 경내에 한식호텔을 세우려는 시도가 수차례 좌절 되다가 곡절 끝에 여러 조건을 달고 건축 허가가 나왔다. 허가가 나오지 않았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문화재 보호였다. 광복 후 한일합방의 주역 이토 사당 박문각은 민족적 감정에서 용납할 수 없어 철거했는데 박문사 터가 문화재라는 것이었다.
근현대사 격동의 현장 장춘단이 공원으로 변해버린 슬픈 역사를 아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동아시아 질서가 중국 중심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청일전쟁 빌미가 된 동학농민전쟁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민씨 일가와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폐해가 극심해지고 그 울분이 고부에서 동학농민 전쟁을 촉발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외세 배격과 부패 관리들을 척결하고 신분 차별을 철폐하라는 주장이었다. 동학은 인간평등사상과 사회개혁사상이 바탕이었다. 희생자가 30~40만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항쟁이 성공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우리의 현재는 탄핵, 탄핵반대 재벌과 권력의 정경유착, 청문회는 답답하고 특검수사는 어찌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의 혼란이 어찌 마무리될지 걱정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북한의 핵위협과 고고도 미사일방어체제(THAAD)문제로 국제정세가 요동치는데 국가 안위문제를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고 있다.
첫댓글 유용한 정보 제공 감사합니다.
삽질하여 모종을 좀 하겠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호의 노래가사에 그런 의미가 있을수 있음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