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산, 깊은 산, 거기 자리한 통도사.
경봉 스님 법어집을 보다가 ‘통도사’에 한 번 가 보리라 맘먹었는데,
기회는 실로 뜻하지 않았는데 왔다.
춘천에서의 요양 생활 중 알게 된 대학생 한 명이
방학을 맞으면서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소문을 추적해 보니
통도사 어느 암자에 들어갔다고 한다.
학창 시절을 마감하기 전에
중요한 뭔가를 꼭 얻어야 한다는 말을 늘상 중얼거리곤 했었던 그 애였기에
녀석을 거기 가면 찾을 순 있겠다 싶었다.
정보 하나 없이
무작정,
통도사행 버스에 올랐다.
몰랐지.
그 때는 몰랐지.
통도사가 어떤 데인지를 말이야.
언양인가,
통도사 입구라면서 내리라 한다.
영축산이 올려다보이는 사하촌에서
한참을 어리둥절해 서 있었다.
중학생에게 길을 물어 통도사로 향하니
길은 이미 어두워 외관도 식별하기 어려웠다.
“걸으시면 좀 오래 걸릴 겁니다.
택시를 타세요.”
그렇게 해서 통도사로 들어가니
운전사는 어느 암자냐고 묻는다.
암자 이름을 알아야지.
“아무 데나 가 보세요.”
덜컥 내뱉었다.
그런데, 그 게 아니었다.
영축산은 깊었고,
암자는 무지 많았다.
나중에 여유 있게 한 말이지만,
“누님, 3박 4일만 계시면
제가 영축산에 있는 암자들을 하나하나 다 소개해 드릴 텐데 아쉽네요.”
그런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 정도로
영축산은 깊고, 암자는 많다.
후배가 말한 것도, 차를 가지고라는 단서가 있었다.
늦게 도착해, 암자 이름도 모르는 채로
맨 밑의 암자서부터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날은 어두워 길도 제대로 못 찾는데,
처음 들른 옹기 굽는 암자에서는
여긴 외부 손님이 없소 하며 나를 몰아친다.
두 번째 간 백련암인가.
랜턴이 없다면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건물로 들어서니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온다.
20대 초반의 청년들.
고시 공부를 하느라고 절에 들어와 있는 이들이었다.
큰일이다.
남정네들밖에 없으니 묵어 갈 처지도 아니고,
후배가 있는 암자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튼 난 이러다 일내지.
맨날 무작정이야.
그놈의 발길 닿는 대로란 모토가
이렇게 ‘환란’을 초래했군.
그런데, 난 또 믿는 게 있다.
나는 어디서고 보호받는다는 믿음 같은 거다.
실은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히든 카드를, 하늘이 준비한 히든 카드를 믿었던 게지.
고시 준비생 중 하나가 나오더니
찾는 학생의 인상착의를 묻는다.
남학생이 묵을 암자는 가능한 곳이 요기요기,
보살님이 지금 늦었으니 하룻밤 묵어 갈 암자는 요기요기,
그래서 영축산 지도를 펴 놓고는
가장 가까운, 가능성 있는 암자를 찍었다.
마침 그 학생이 차가 있어서
우리는 그 중 한 곳,
보살이 묵을 수 있는 암자로 향했다.
그곳이 동원스님 계시는 사명암이었다.
사명암에는 참 많은 것이 있었다.
달을 볼 수 있는 정자도 있고,
들어서는 입구에서 나를 반긴 것은 달밤의 거문고 소리.
동원 스님은 그 시간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누구십니까?”
하면서 문을 여는 보살의 모습 뒤로
앳된 대학생 하나가 얼굴을 빼꼼 보이는데,
그 녀석이 바로 내가 찾던 후배였던 거다.
그래, 사명암엔 너무 많은 게 있었다.
그것 봐, 내겐 히든 카드에 대한 확신이 있다니까.
녀석은 생각지도 못한 나의 방문에 그 큰 눈이 더 둥그래진다.
그 시간이 9시 30분.
산사의 9시 30분이면 한밤중이다.
말기암 선고를 받고 오신 처사님 내외와 그 녀석,
그리고 탱화를 그린다고 와서 공부중인 보살 하나,
지보다 절이 더 좋다는 보살 한 분.
이렇게 오붓하게 앉아 저녁 차 시간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나까지 끼어 자리는 좀 어수선해졌다.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하고
찬 공기 배인 마고자를 벗어 한 쪽에 개켜 놓았다.
12월 말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월 1일을 통도사에서 맞았으니.
기억이 나지.
동원스님은 탱화를 그리신다.
스님 방에는 단청과 탱화 그림을 모아 놓은 병풍들이 줄지어 있고
요즘 배우기 시작했다는 악기들이 또한 주루루~
부산 시립국악원인가에서 레슨하러 오신 선생님께서
스님 솜씨를 칭찬하신다.
동원스님은 그 좋은 풍체 외에도
특이한 이력을 가지신 분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신 재원인데
졸업 직후 속세를 벗어나 스님이 되었다.
우리 후배 녀석을 한눈에 알아보시고
학교 졸업하면 내게 보내
신선처럼 살다 가게 해 달라고
녀석의 어머님께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스님과 함께 가덕도에 갔다.
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니
야트막한 산을 낀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에 오를 것이니 운동화를 신고 가라는 처사님 부탁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에도 이 고무신으로 올랐노라면서 스님은 마다하신다.
가덕도 뒷산에 오르니
일전에 갔던 남해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해수욕장 생각이 난다.
산에서 바다를 보는 기쁨.
양지 바른 지역에 잠시 걸터앉아 바다를 감상하려니
절이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위치에 터잡을 수 있던 이유를 설명하신다.
법흥사를 올랐을 때 느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절은 어찌 이리 좋은 명당터를 코옥~ 찍어서 자리했을꼬, 그런 생각.
서울 손님은 무슨 근심이 그리 많아?
누가 근심 덩어리 안겨 주나.
자기가 근심 덩어리 못 놓아서 근심하지.
스님께 삼배 하고 일어서는 아침,
세상의 무슨 명리를 좇아 나는 이리 근심 안고 사는지.
신선 같은 동원 스님 모습 보며 떠나자니
내 모습, 그 작은 모습이 더 초라해 보인다.
요즘 통도사 자장암에는
금개구리, 금와가 나왔다고 난리이다.
자장 율사가 묵었다는 그 굴 앞에
잎 주위가 누런 금개구리가 나와
큰 입을 이리저리 놀려대나 보다.
통도사에 가신다면
저물녘 있는 저녁 예불을 꼭 보고 오십시오.
목어와 북 울리는 소리가 영축산 깊은 골을 둥둥 때리면
내 마음도 같이 차분해질 것입니다.
그리곤 부처님 진신사리 모셔진
통도사 ‘적멸보궁’ 문을 빠꼼 열어 보십시오.
촛불 가득한 법당 안에
머리 파란 납자들이 두 손 모으고 서서
입 모아 반야심경 읊는 소리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통도사, 영축산은 깊었고
경봉 스님, 경허 스님 흔적 만날까 하여 가 본 그곳에서
나는 동원스님을 뵙고 왔네요.
2000년 10월 11일
첫댓글 마실 나왔더니 썰렁하여 글올리다 옥기와 채팅도 하고 좋다^^*
좋은 경험을 하셨군요 조용한 암자에서의 하루는 내 마음의 번뇌를 씻을수 있는 귀한 시간 이지요 근데 글을 읽다가 보니 귀국 하셨군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맨밑에.날짜를.보니.2000년.10월.11일인데.귀국은.아니고.엣날.추억의.애기.같은데....../맞나요.????
2000년에 제 조카가 쓴글 푹~~~~~퍼 왔습니다 . 읽다 보면 근심덩어리가 좀 가벼워지나요???
ㅎㅎ내가.이래도.눈.하나는.빠르다니까요.....네/조카분.휼륭합니다.글감사.연두.
에~~이 난 글 내용에 섬취돼서리 맨끝에 날짜는 못봤네 그려 내 눈이 너무 나쁜가 아니면 마음이 어두운 것인가???
요새는.눈뜨고.있어도.코베먹는세상이라서.정신바짝.ㅎㅎㅎㅎㅎ연두.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