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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菩薩의 十種境界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境界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示現無邊法界門하야 令衆生得入이 是菩薩境界요 示現一切世界無量妙莊嚴하야 ,令衆生得入이是菩薩境界요 化往一切衆生界하야 悉方便開悟가 是菩薩境界요 於如來身에出菩薩身하고 於菩薩身에出如來身이是菩薩境界요 於虛空界에現世界하고 於世界에現虛空界가是菩薩境界요 於生死界에現涅槃界하고 於涅槃界에現生死界가是菩薩境界요 於一衆生語言中에出生一切佛法語言이是菩薩境界요 以無邊身으로現作一身하고 一身으로 作一切差別身이是菩薩境界요 以一身으로 充滿一切法界가是菩薩境界요 於一念中에 令一切衆生으로 發菩提心하야 各現無量身하야 成等正覺이 是菩薩境界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如來無上大智慧境界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경계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그지없는 법계의 문을 나타내어 중생들이 들어가게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모든 세계의 한량없는 묘한 장엄을 나타내어 중생들이 들어가게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모든 중생의 세계에 변화하여 가서 방편으로 깨우치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여래의 몸에서 보살의 몸을 내고, 보살의 몸에서 여래의 몸을 내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허공계에서 세계를 나타내고 세계에서 허공계를 나타내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생사의 경계에서 열반의 경계를 나타내고, 열반의 경계에서 생사의 경계를 나타내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한 중생의 말 가운데서 일체 불법의 말을 내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그지없는 몸으로 한 몸을 만들고 한 몸으로 모든 차별한 몸을 만드는 것을 나타내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한 몸으로 모든 법계에 가득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잠깐 동안에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어 각각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어 등정각을 이루게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곧 여래의 위없는 큰 지혜의 경계를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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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경계(十種境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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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경계(有十種境界)하니 : 또 열 가지의 경계가 있다.
보살의 열 가지 경계에서 경계라는 것은 ‘마음을 부처님처럼 살면 부처님처럼 보인다’ 라는 뜻이다.
악한 생각을 품으면 악한 경계가 나타나고, 선한 경계를 품으면 선한 경계가 나타난다.
앞에 유희에 대해서 나왔기 때문에 여기는 보살이 마땅히 실천해야 될 경계들, 무애자재한 경계 이런 것들이 나올 것이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경계가 있으니
하등(何等)이 : 하등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가 되는가.
소위시현무변법계문(所謂示現無邊法界門)하야 : 이른바 무변 법계의 문을 나타내어
영중생득입(令衆生得入)이 : 중생으로 하여금 증득하여 득입케 한다.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다.
득입 이전의 단계는 수순이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수순해야 된다고 하잖는가.
수순과 득입이라. 수순은 뭐냐, 바라밀행을 수순이라 하고 쉬운 말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그러면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를 득입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념처에 들기위함이다.
시현일체세계무량묘장엄(示現一切世界無量妙莊嚴)하야 : 일체세계의 한량없는 묘한 장엄을 나타내어서
영중생득입(令衆生得入)이 :중생으로 하여금 득입하게 하는 것이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요
화왕일체중생계(化往一切衆生界)하야 : 모든 중생 세계에 변화해 가서 그 수준에 맞춰서
실방편개오(悉方便開悟)가 : 방편으로 깨우치나니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니라
어여래신(於如來身)에 : 여래의 몸에서
출보살신(出菩薩身)하고 : 보살의 몸을 내고
어보살신(於菩薩身)에 : 보살의 몸에서
출여래신(出如來身)이 : 출여래신이라.
중생이 가지고 있는 부처님을 우리는 여래장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속에서 부처님 같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금강장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이 허공처럼 광대무변하니까 허공장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이 땅처럼 수많은 보석을 보배를 안고 있기 때문에 지장(地藏)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이 저 바다처럼 광대무변하게 모든 중생들을 포용한다고 해서 해장(海藏)이라고도 하고 일장(日藏) 월장(月藏) 소리야장(蘇利耶藏) 연화장(蓮華藏)이라고도 하고 구소마덕장(俱蘇摩德藏)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藏)자를 쓴다.
그 장(藏)자에서 장(藏)자만 떨어져 나가서 바깥으로 장(藏)자가 들어가면 재전법신(在纏法身)이라고 한다. 번뇌에 있지만 여전히 번뇌의 법신이 묶여있기 때문에 장자가 들어가고, 장자가 떨어져 나가면 출전법신(出纏法身)이라고 한다.
그 재전법신이 안쪽에 있는 것을 환하게 아는 것, 번뇌에 법신이 있는 걸 첫번째 아는 사람을 우리는 문수보살이라고 한다. 문수보살의 지혜를 통해서 재전법신, 번뇌에 얽혀 있는 법신을 끄집어 내는 사람을 보현보살이라고 한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보현행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문수와 보현을 동급으로 보는 것이다.
문수의 안목이 없고, 보현의 행족이 없다면 도저히 재전법신에서 출전법신으로 나올 수가 없다.
그런 것은 청량국사가 화엄경 소초에서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놨다.
제가 지남도(指南圖)를 쓰면서 그 대목을 여러분들께 약간 소개해 놨다. 책이 부피가 있기 때문에 다 쓸 수는 없었다.
그 대목은 읽다 보면 몇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게끔 가만히 멈춰서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 내가 정말 모르는구나’‘이거 정말 이렇게 해놨구나’ 싶다.
청량국사가 그 대목을 이렇게 해놓는다.
‘내 마음속에 여래장이라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비보살야라’ 그런 사람은 보살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된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업연에 의해서, 그것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인연을 다른 말로는 안립(安立)이라고 한다. 왜 인연을 ‘편안히 서있는다’ 고 하느냐?
그 인연만큼 키가 자라고, 인연만큼 꽃이 피고, 인연만큼 색깔이 되고, 인연만큼 향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은 인연법인데 인연은 모든 주변 환경이라든지 자기가 가진 조건에서 이루어진다.
타조알이 큰 것은 타조가 큰 놈이 될 것이기 때문에 큰 것이고, 메추리알은 딱 메추리알 만큼 크게 안립이 되어 있다.
못된 말을 하는 사람은 못되게 살아온 것이고, 고운 말을 하는 사람은 고운 말을 하면서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쓴 것은 확실히 쓰고 단 것은 확실히 달 뿐이다.
금방 얼굴 찰색에서 드러나고 걸음걸이에서 뽀롱난다.
“왜 저래 살이 쪘습니까?”
“많이 묵었다 아이가.”
“저 사람은 왜 삐쩍 말랐습니까?”
“안 묵는다 아이가.”
독과 약이 명쾌한 것이다.
그런 것, 독과 약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인연이고, 독도 약도 본래 없다, 환과 같은 약으로 환과 같은 병을 치료한다, 다 떨궈져 버린 것을 진공이라 한다.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 18불공법 중에 삼념주(三念住)가 있잖은가.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공부 안 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나라(摩拏羅) 존자의 게송에 이렇게 해놨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나 마음이 천 경계, 만 경계로 가지만 처처(處處)에 실능유(實能幽)라.
가는 곳마다 마음이 심오하지 않는 데가 어디 있더냐.
눈코입귀로 가면서 전부 다 환하게 보고 듣고 환하게 느끼는 심수만경전이나 처처에 실능유라.
그 어디에도 보고 듣는 데 마음이 찌부러진 데가 하나도 없고 전부 당당하고 거룩하고 보배스럽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직지(直指)라는 책에 보면 신라 대령선사는 ‘가는 길마다 전부 황금길이요, 가지마다 전부 다 편편이 보배가지다’라고 해놨다.
염념보리심이면 처처가 안락국이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나 전처실능유(轉處悉能留)라.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마음을 찾아가야 되느냐? 소발자국을 찾아가듯이, 이 생각의 잡념을 따라서 무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켜서 그 생각을 앞잡이로 세워서 염불하고, 염불하고 생각이 자라서 염불이, 염(念)이 끊어질 때까지 무념이 될 때까지 염을 하는 것이다.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 계속 수류인득성(水流認得性)이라.
수류, 마음이 찔찔 새는 제6식이를 잡아서 앞잡이로 세워놓고 ‘앞장서라’고 해서 마음의 본심을 찾아간다.
수류인득성이라. 법성의 근본자리를 찾고 나면 소도 놓아버리고 찾는 마음도 사람도 놓아 버리고 인우구망(人牛俱 忘)이라고 하잖는가. 소도 없고 사람도 함께 잊어버린다
인우구망, 동그라미 하나 딱 치고, 심우도 할 때 마지막에는 기우멱우(騎牛覓牛)라.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하다가 나중에 집에 돌아오면 소고 나발이고 그냥 다 놓아버린다.
제가 어릴 때 서장을 배우면서 수류인득성이라, 그 구절이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됐다. 지금도 이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 흐름을 따라서 나중에 종착역에 도착하면 흐름이 없어질 것이다. 무안이비설신의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안이비설신의를 따라서 무안이비설신의까지 간다. 수류인득성하면 무희역무우라.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 ‘아, 그게 부처님의 18불공법 3념주 중에 하나구나’ 더이상 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그건 마음의 입장이다. 생각은 늘 희노애락을 따라가는 인연의 입장이고 마음을 증득한 입장에서는 기쁨이나 슬픔이 다 없다. ‘아, 그래서 윤회가 다 끊어졌구나’ 이렇게 피상적으로 해석은 할 수가 있다.
보살의 몸에서 여래의 몸을 나타내나니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다.
어허공계(於虛空界)에 : 허공계에서
현세계(現世界)하고 : 세계를 나투고, 허공계는 꺼져버리는 것이고 세계는 법계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어세계(於世界)에 : 세계에서
현허공계(現虛空界)가 : 허공계를 나타내는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이것이 보살의 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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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생사계(於生死界)에 : 생사계에서
현열반계(現涅槃界)하고 : 열반계를 나타내고
어열반계(於涅槃界)에 : 열반계에서
현생사계(現生死界)가 :현생사계를 나타내니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단편적으로 이 구조는 해인사 법보단 수다라장 앞에 가면 양쪽 대련으로 되어 있다.
뭐라고 되어 있는가?
원각도량(圓覺道場)이 하처(何處)냐? 원각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경계 아닌가. 열반이 그 어디 있느냐?
현금생사즉신(現今生死卽是)이라.
반야심경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되어 있듯이, 그러한 이야기들, 화엄경에 나오는 이러한 구절구절들, 마음의 이치를 우리 도량에 질펀하게 흩어놓았는데도 눈에 안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촉목개법(觸目皆法)이라고 온 청산이 내 눈을 찌르고 내 귀를 찌르는 것처럼 팔만사천 법문이 들린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맹구가 아닌가? 맹구다.
어일중생어언중(於一衆生語言中)에 :한 중생의 말 가운데
출생일체불법어언(出生一切佛法語言)이 : 모든 일체 제불법의 말을 내나니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다.
백의관음(白衣觀音)은 무설설(無說說)이요 남순동자(南巡童子)는 불문문(不聞聞)이라.
이무변신(以無邊身)으로 : 무변신으로써
현작일신(現作一身)하고 : 한 몸을 만들고
일신(一身)으로 : 한 몸으로써
작일체차별신(作一切差別身)이 : 일체 차별 있는 몸을 짓는다. 아금일신중(我今一身中) 즉현무진신(卽現無盡身) 변재삼보전(遍在三寶前) 일일무수례(一一無數禮)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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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신(以一身)으로 : 또 일신으로서
충만일체법계(充滿一切法界)가 : 모든 법계에 가득하나니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요 : 이것이 보살의 경계니라.
어일념중(於一念中)에 : 한 생각 가운데에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발보리심(發菩提心)하야 : 발보리심하야 보리심을 내게 하며
각현무량신(各現無量身)하야 : 각각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어
성등정각(成等正覺)이 : 등정각을 이루게 하나니
시보살경계(是菩薩境界)라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니라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인데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 보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여래무상대지혜경계(則得如來無上大智慧境界)니라 :즉시여래의 위없는 큰 지혜의 경계를 얻느니라
다. 菩薩의 十種力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力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深心力이니 不雜一切世情故며增上深心力이니 不捨一切佛法故며 方便力이니 諸有所作究竟故며 智力이니 了知一切心行故며願力이니 一切所求令滿故며行力이니 盡未來際不斷故며乘力이니 能出生一切乘호대 而不捨大乘故며神變力이니 於一一毛孔中에各各示現一切淸淨世界하야 一切如來가出興世故며 菩提力이니 令一切衆生으로 發心成佛하야 無斷絶故며 轉法輪力이니 說一句法하야 悉稱一切衆生諸根性欲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諸佛無上一切智十力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힘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깊은 마음의 힘이니 모든 세상의 정(情)에 섞이지 않은 연고이니라. 더 올라가는 깊은 마음의 힘이니 모든 불법을 버리지 않는 연고이니라. 방편의 힘이니 모든 짓는 일을 성취[究竟]하는 연고이니라. 지혜의 힘이니 일체 마음의 행을 아는 연고이니라. 원하는 힘이니, 모든 구하는 바를 만족케 하는 연고이니라. 실천하는[行] 힘이니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끊어지지 않는 연고이니라. 올라타는 힘[乘力]이니 모든 탈 것을 내지마는 대승을 버리지 않는 연고이니라. 신통변화의 힘이니 낱낱 모공 속에서 모든 청정한 세계와 일체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을 각각 나타내는 연고이니라. 보리의 힘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하고 성불하여 끊어짐이 없게 하는 연고이니라. 법륜을 굴리는 힘이니 한 구절의 법을 말하여도 일체 중생의 모든 근성과 욕망에 맞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일체 지혜의 열 가지 힘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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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력(十種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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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열 가지 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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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불자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력(有十種力)하니 : 열 가지 힘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소위심심력(所謂深心力)이니 :소위 깊은 마음의 힘이다. 깊은 마음의 힘에 들어가면 한결같이 잡되지 않게 아주 깊은 마음으로 심오하게 들어가면
부잡일체세정고(不雜一切世情故)며 : 일체 세상의 인정머리에
인정사정에 섞이지 않는 연고이니라. 일곱 단락이 스스로 힘을 기르는 이야기다. 다음에는
증상심심력(增上深心力)이니 : 증상을 이야기한다. 증상, 증폭된다. 향상된다는 말이다. 증상심심력이라. 그 심심력에서 조금 더 발전이 되면 증상이 된다.
절에서 항상 많이 쓰는 말이다. 더 올라가는 깊은 마음의 힘이니
불사일체불법고(不捨一切佛法故)며 : 일체 불법을 버리지 않는 연고이니라. 불법이 증폭되는 것이다.
방편력(方便力)이니 : 방편력이라.
구족신통력(具足神通力) 광수지방편(廣修智方便) 시방제국토(十方諸國土) 무찰불현신(無刹不現身) 방편의 힘이니
제유소작구경고(諸有所作究竟故)며: 모든 짓는 일이 완벽한 까닭이다. 소작이 구경이라.
짓는 바가 완벽하다. 음식을 하든 뭘 하든지 잡념이 없다, 솜씨가 무르익었다는 말이다. 일이 어설픈 사람들은 한번 일해 놓아도 두 번 일, 세 번 일이 되어서 돈이 더 든다.
제가 화장실을 짓는데 보니까 어떻게나 훌륭한 스님한테 맡겨 놨더니, 노가다 십장하던 스님한테 맡겼는데, 한 이삼천만 원이면 지을 것을 오천삼백만 원인가 육백만 원이 들었다.
집을 희한하게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지은 게 아니고 마름모꼴로 지어서 지붕을 못 덮었다. 밑에 한 번 삐뚤어져 놓으면 지붕도 같이 삐뚤게 해야 되는데 난감하였다.
평행사변형도 아니고 사다리꼴 사변형 비슷하게 되어서 희한하게 되었다. 그때 느낀 게 ‘이런 사람이 63빌딩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번에 중국에서 집을 짓다가 지진이 한 번 일어나서 쾅 넘어진 빌딩있잖은가?
보나 안 보나 그 현장 소장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제일 조심해야 될 분이 ‘멍부’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아주 조심해야 된다.
멍청한 데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때부터는 여러 사람을 죽인다. 특히 지도자가, 사단장이 갈 데가 아닌데 ‘돌격 앞으로’ 하면 쫄병들을 다 죽인다. 스님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나온 세 가지는 자리(自利)였다.
다음은 이타행(利他行)이 나온다.
불교는 이렇게 아주 순리대로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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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智力)이니 :지력이다. 지혜의 힘이 왜 이타냐
요지일체심행고(了知一切心行故)며 : 일체심행을 잘 요지하며, 일체 마음이 가는 결을 잘 아는 연고니라. 원행, 원력이라. 원력이라든지 지혜력이라든지 지혜가 나중에 자비로 치환되잖는가.
원력(願力)이니 : 원력도 마찬가지다.
일체소구영만고(一切所求令滿故)며 : 모든 구하는 것을 남에게 만족하게 하려면, 이타행이 되려면, 멍부는 이타행도 안된다.
초발심에는 그렇게 해놓았다.
‘자죄(自罪)를 미탈(未脫)하면 타죄(他罪)를 불속(不贖)이라’
자기 앞가름도 못 하는데 남의 앞가름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똑부,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상사로 두면 거기에 또 볶여서 죽는다. 멍부보다 더 골치 아픈 게 똑부다.
차라리 멍부가 낫다.
제가 본 멍부의 대표적인 행동은 밤나무 밑에 소각장을 만들어서 밤나무를 죽이는 일이었다. 하도 기가 차서 “이래놓으면 우얍니까?” 하니까 “연기가 안 올라가면 밤이 안 죽습니다.”
그런데 그 밤나무는 두 그루가 다 죽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랬다.
“아이고 내년에는 군밤이 열리겠습니다.”
육조스님은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가 똑똑한 것도 아니지만 저는 계속 잔소리가 심하다. 학인들에게라든지 강사에게 제 마음에 안 들면 계속 습관적으로 잔소리가 나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만약 화엄경이라도 안 읽었다면 여러 사람 죽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자리이타는 어떠냐?
행력(行力)이니 : 행력이다. 행하는 힘 실천의 힘이 어느 정도냐?
진미래제부단고(盡未來際不斷故)며 : 진미래제부단고니라. 앤드리스 러브(Endless Love)라고 옛날에 브룩 쉴즈가 나온 영화가 있었다. 끝없는 자비, 앤드리스 끝없는, 세월이 끝나면 끝났지 내 원력은 끝나지 않는다. 행력 다음에
승력(乘力)이니 : 승력, 참대승력이다.
능출생일체승(能出生一切乘)호대 : 모든 탈 것을 다 수준에 맞춰서 자전거도 내주고 오토바이도 내주고 기차도 내주고 하지만
이불사대승고(而不捨大乘故)며 : 결코 대승을 버리지 않는 연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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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력(神變力)이니 : 그다음에 신변력이라. 여기서부터는 점점 발전되어서 다음 단계로 뛰어넘을 수 있는 추진력 있는 힘들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 중에 신변력이라
어일일모공중(於一一毛孔中)에 :일일 모공 가운데에
각각시현일체청정세계(各各示現一切淸淨世界)하야 : 각각 시현한다, 일체의 청정세계를, 빈틈없이 하나하나 매시간마다 찰라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일체청정세계를 나타내서
일체여래(一切如來)가 : 모든 부처님께서
출흥세고(出興世故)며 : 세상에 나심을 각각 나타내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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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력(菩提力)이니: 보리력이라. 보리의 힘은 뭔가? 제가 만든 말 중에 제일 아름다운 말이 ‘보빼시’라는 말이다. ‘보리심 빼면 시체다’ 그 말은 어디에 나오는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이세간품에 나온다.
여기서 ‘보리심 빼면 시체다’ 보리심을 빼면 이 세상에 어떤 선근이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보리심을 빼면 그것은 마의 업이다라고 해 놓았다.
보빼시 보빼시 보리심 빼면 시체다.
보리의 힘은 어떠냐?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성불(發心成佛)하야 : 발심하게 해서 성불, 부처를 이루게 하여
무단절고(無斷絶故)며 :무단절고니라. 끊어짐이 없게 하는 연고이니라 그다음에
전법륜력(轉法輪力)이니: 전법륜력이라. 마지막 열 번째는 향상일로하는 전법륜력이라. 법륜을 굴리는 힘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8시 통근길에 우리 어른 스님 있잖은가.
전법륜력이라.
설일구법(說一句法)하야 : 한 개의 법을 말하더라도, 한 구절의 법, 설법을 하더라도
실칭일체중생제근성욕고(悉稱一切衆生諸根性欲故)라 : 칭(稱)이라고 하는 것은 ‘딱 맞아떨어진다’는 말이다. 칭(稱) ‘칭찬한다’는 말은 ‘딱 부합된다’ 이 말이다.
일체중생의 모든 근기와 성품과, 제근성욕 해놨는데, 우리가 치문을 배울 때는 ‘개중생지근욕성(盖衆生之根欲性)이 수(殊)라. 약일이론지(若一以論之)인댄 공비득지야(恐非得旨也)로다’ 하는 대목이 있었다. ‘근욕성이 수’라는 말이 이것이다.
근기와 성품과 욕망이 중생들은 각각이 다 다른데 거기에 낱낱이 다 칭합한다. 딱딱 맞춰주는 까닭이니라.
그러니까 전법륜의 힘이라고 하는 것, 설법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그 수준에 맞춰서 해준다는 뜻이다.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모든 보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안주하면
즉득제불무상일체지십력(則得諸佛無上一切智十力)이니라 : 그 자리에서 모든 부처님의 무상일체지혜 십력 열 가지 힘을 얻나니라.
(10)等法界無量廻向
가. 菩薩의 十種無畏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無畏하니 何等이 爲十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悉能聞持一切言說하야 作如是念호대 設有衆生이 無量無邊하야 從十方來하야 以百千大法으로 而問於我라도 我於彼問에不見微少難可答相이니 以不見故로心得無畏하야 究竟到彼大無畏岸하며 隨其所問하야 悉能酬對호대 斷其疑惑하야 無有怯弱이是爲菩薩第一無畏요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得如來灌頂無礙辯才하야 到於一切文字言音으로 開示秘密究竟彼岸하야 作如是念호대 設有衆生이 無量無邊하야 從十方來하야 以無量法으로 而問於我라도 我於彼問에不見微少難可答相이니 以不見故로心得無畏하야 究竟到彼大無畏岸하야 隨其所問하야 悉能酬對호대 斷其疑惑하야 無有恐懼가是爲菩薩第二無畏요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知一切法空하야 離我離我所하며 無作無作者하며 無知者하며 無命者하며 無養育者하며 無補伽羅하며 離蘊界處하야 永出諸見하야 心如虛空하야 作如是念호대不見衆生이有微少相도能損惱我身語意業이니 何以故오菩薩이 遠離我我所故로不見諸法에有少性相이니 以不見故로心得無畏하야 究竟到彼大無畏岸하며 堅固勇猛하야 不可沮壞가是爲菩薩第三無畏요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佛力所護와 佛力所持로 住佛威儀하야 所行眞實하야 無有變易하야 作如是念호대我不見有少分威儀도令諸衆生으로 生訶責相이니 以不見故로心得無畏하야 於大衆中에安隱說法이 是爲菩薩第四無畏요佛子야 菩薩摩訶薩이 身語意業이 皆悉淸淨하야 鮮白柔和하야 遠離衆惡하고 作如是念호대我不自見身語意業이而有少分도可訶責相이니 以不見故로心得無畏하야 能令衆生으로 住於佛法이是爲菩薩第五無畏요佛子야 菩薩摩訶薩이 金剛力士와 天龍夜叉와 乾闥婆와 阿修羅와 帝釋梵王과 四天王等이 常隨侍衛하며 一切如來가 護念不捨라 菩薩摩訶薩이 作如是念호대我不見有衆魔外道와有見衆生이能來障我行菩薩道를 少分之相이니 以不見故로心得無畏하야 究竟到彼大無畏岸하며 發歡喜心하야 行菩薩行이是爲菩薩第六無畏요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已得成就第一念根하야 心無忘失하야 佛所悅可라 作如是念호대 如來所說成菩提道文字句法을我不於中에見有少分忘失之相이니 以不見故로 心得無畏하야 受持一切如來正法하야行菩薩行이 是爲菩薩第七無畏요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智慧方便을 悉已通達하며 菩薩諸力이 皆得究竟하야 常勤敎化一切衆生하야 恒以願心으로 繫佛菩提하야 而爲悲愍衆生故며 成就衆生故로 於煩惱濁世에 示現受生호대 種族尊貴하며 眷屬圓滿하며 所欲從心하며 歡娛快樂하야 而作是念호대 我雖與此眷屬聚會나 不見少相도 而可貪着하야 廢我修行禪定解脫과 及諸三昧와 總持辯才의 菩薩道法이니 何以故오 菩薩摩訶薩이 於一切法에 已得自在하야 到於彼岸하고 修菩薩行호대 誓不斷絶하야 不見世間에 有一境界도 而能惑亂菩薩道者니 以不見故로 心得無畏하야 究竟到彼大無畏岸하며 以大願力으로 於一切世界에 示現受生이 是爲菩薩第八無畏요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恒不忘失薩婆若心하고 乘於大乘하야 行菩薩行하야 以一切智大心勢力으로 示現一切聲聞獨覺의 寂靜威儀하고 作如是念호대 我不自見當於二乘하고 而取出離少分之相이니 以不見故로心得無畏하야 到彼無上大無畏岸하며 普能示現一切乘道하야 究竟滿足平等大乘이是爲菩薩第九無畏요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成就一切諸白淨法하야 具足善根하며 圓滿神通하야 究竟住於諸佛菩提하며 滿足一切諸菩薩行하야 於諸佛所에 受一切智灌頂之記하고 而常化衆生하야 行菩薩道하야 作如是念호대 我不自見有一衆生도 應可成熟에 而不能現諸佛自在하야 而成熟相이니 以不見故로 心得無畏하야 究竟到彼大無畏岸하며 不斷菩薩行하고 不捨菩薩願하야 隨所應化一切衆生하야 現佛境界하야 而化度之가 是爲菩薩第十無畏니라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十種無畏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諸佛無上大無畏하며 而亦不捨菩薩無畏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두려움 없음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말을 다 들어 지니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설사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들이 있어서 시방으로부터 와서 백천 가지 큰 법으로 내게 묻더라도 나는 그들의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답하기 어려움을 보지 않나니, 보지 않으므로 두려운 마음이 없고 구경에는 저 크게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며, 그들이 묻는 대로 모두 대답하여 의심을 끊고 겁약함이 없게 하리라.’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첫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여래가 정수리에 물 붓는 걸림 없는 변재를 얻고 온갖 글과 말로 비밀을 열어 보이는 구경의 저 언덕에 이르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설사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이 시방으로부터 와서 한량없는 법으로 내게 묻더라도 나는 그들의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답하기 어려움을 보지 않나니, 보지 않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구경에는 저 크게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며, 그들이 묻는 대로 모두 대답하여 의심을 끊고 두려움이 없게 하리라.’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둘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이 공한 줄을 알고 나를 떠나고 나의 것에서 떠났으며, 지음도 없고 짓는 이도 없으며, 아는 이도 없고 생명이란 것도 없으며, 양육하는 이도 없고 보가라(補伽羅)도 없으며, 오온과 십팔계와 십이처도 떠났으며, 모든 소견을 아주 벗어나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중생이 조그만 상도 나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업을 손상할 것이 있음을 보지 않나니, 무슨 까닭인가. 보살은 나와 나의 것을 멀리 떠난 연고며, 모든 법이 조그만 성품이나 모양이 있음을 보지 않나니, 보지 않으므로 두려운 마음이 없고 구경에 저 크게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며, 견고하고 용맹하여 깨뜨리지 못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셋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부처님 힘으로 보호되고 부처님 힘으로 유지되며, 부처님의 위의에 머물러 행하는 바가 진실하고 변하지 아니하여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조그만 행동도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책망할 것을 보게 하지 않으며, 보지 않으므로 두려운 마음이 없고 대중 가운데서 편안하게 법을 말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넷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몸과 말과 뜻의 업이 모두 청정하고 곱고 깨끗하고 부드러워 모든 나쁜 것을 멀리 여의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스스로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을 조금도 책망받을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보지 않으므로 두려운 마음이 없고 능히 중생들을 부처님 법에 머물게 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다섯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을 금강역사와 천신과 용과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제석천과 범왕과 사천왕들이 항상 시위하고, 모든 여래께서 보호하여 버리지 않거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여러 마(魔)와 외도와 다른 소견 가진 중생이 나의 보살의 도를 행함을 장애할 수 있는 조그만 모양도 보지 않으며, 보지 않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구경에는 저 크게 두려움 없는 언덕에 이르러 환희한 마음을 내어 보살의 행을 행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여섯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미 제일가는 생각하는 근본을 성취하여 마음에 잊어버리는 일이 없어 부처님이 좋아하시거든,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보리도(菩提道)를 이루는 문자와 구절에서 나는 그 가운데에 조금도 잊어버리는 모양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보지 않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모든 여래의 바른 법을 받들어 지니어 보살의 행을 행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일곱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지혜와 방편을 모두 이미 통달하여 보살의 모든 힘을 다 성취[究竟]하였고, 항상 일체 중생을 부지런히 교화하며, 항상 서원하는 마음을 부처님의 보리에 매어두었지마는 그러나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중생을 성취시키려 하는 까닭으로 번뇌가 혼탁한 세상에 태어나되 가문이 존귀하고 권속이 원만하여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되어 기뻐하고 즐기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내가 이 권속들과 모여 있지마는 조금이라도 탐착하여 내가 수행하는 선정과 해탈과 모든 삼매와 총지와 변재와 보살도의 법을 그만두는 것을 보지 않노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에 이미 자유자재하여 저 언덕에 이르렀으며, 보살행을 닦되 서원을 끊지 않아서 세간에서 한 가지 경계도 보살의 도를 의혹케 하거나 어지럽게 함을 보지 않으며, 보지 않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구경에 저 크게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고 큰 서원의 힘으로 모든 세계에 태어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여덟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항상 일체 지혜의 마음을 잃지 않고, 대승에 의지하여 보살의 행을 행하며, 일체 지혜의 큰 마음의 세력으로 모든 성문과 독각의 고요한 위의를 나타내 보이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스스로 마땅히 이승(二乘)에서 벗어날 만한 조그만 모양도 취함을 보지 않으며, 보지 않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저 위없고 크게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러 모든 승(乘)의 길을 널리 나타내되 구경에 평등한 대승을 만족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아홉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일체 모든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을 성취하여 착한 뿌리를 구족하고 신통을 원만히 하였으며, 구경에 모든 부처님의 보리에 머물러 일체 모든 보살의 행을 만족하였고, 모든 부처님 계신 데서 일체 지혜와 정수리에 물 붓는 수기를 받고도 항상 중생을 교화하고,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스스로 한 중생이라도 마땅히 성숙시켜야 하나 모든 부처님의 자재하심을 나타내지 못함으로 해서 성숙시키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보지 않으며, 보지 않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구경에 저 크게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러서 보살의 행을 끊지 않고 보살의 서원을 버리지 않으며, 교화할 만한 모든 중생을 따라서 부처님의 경계를 나타내어 교화하여 제도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열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두려움 없음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곧 모든 부처님의 위없이 크게 두려움 없음을 얻으며 또한 보살의 두려움 없음을 버리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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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법계무량회향(等法界無量廻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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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말로 하면 ‘싹 다 회향’이다.
보현행원품에서는 등법계무량회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보개(普皆) 넓을 보(普)자 모두 개(皆)자 보개회향(普皆廻向)이라고 한다.
등법계, 법계와 동등하게 하는 한량없는 회향이라.
자그마한 컵 하나를 들고 가서 태평양 바닷물을 다 푼다고 달려드는 정도의 마음이다. 아주 대단한 원력이다.
남들이 볼 때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자기는 원력이 있기 때문에 조그만 바가지 하나 가져가서 태평양을 다 푼다고 앉아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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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무외(十種無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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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열 가지 무외라.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전거 처음 배울 때면 넘어질까 싶어서 “단디 잡아라, 단디 잡아라.”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누가 좀 탈 만하면 어떤가?
“놔라, 놔라. 내 혼자 탄다.”
그렇잖는가.
운전 좀 못할 때는 “좀 가르쳐 달라. 가르쳐 달라.” 하다가 지혼자 운전 좀 잘하면 뭐라고 하는가?
“잔소리 고마해라마, 내혼자 알아서 한다.”
그러잖는가.
남한테 싫다고 할 때는 이미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보살의 십종무외라. 보살의 십종무외라고 했지만 여기는 부처님에게 견주어서 한 것이다.
여기서는 보살이 회향하는 바, 선근을 어떻게 해서 회향하는가? 선근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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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무외(有十種無畏)하니 : 열 가지의 무외가 있는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실능문지일체언설(悉能聞持一切言說)하야 : 모든 말씀을 일체언설을 다 들어 지니고는
작여시념(作如是念)호대 : 생각하기를
설유중생(設有衆生)이 : 설사 어떤 중생이 있어서
무량무변(無量無邊)하야 : 한량없고 무량 무변한 중생들이 있어서 그 중생들이
종시방래(從十方來)하야 : 시방에서 오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종시방래라도 미운놈 고운 놈 꼴보기 싫은 것까지 해서 온 데서 떼거리로 친한 사람 안 친한 사람 다 온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에게
이백천대법(以百千大法)으로 : 백 가지 천 가지 대법으로써
이문어아(而問於我)라도 : 나에게 질문을 하더라도 누가 물을까 싶어서 달달달달 떤다고 달달 보살이 아니다. 어떤 걸 묻더라도 무불통지라.
아어피문(我於彼問)에 : 내가 그 물음에 대해서
불견미묘잡가답상(不見微少難可答相)이니: 조금도 답하기 어려움을 보지 않나니
이불견고(以不見故)로 : 이불견고로 무조건 나는 답할 수 있기 때문에
심득무외(心得無畏)하야 : 두려운 마음이 없다.
어떤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확실히 비행기를 몰 수 있는 사람에게 비행기 몰라면 ‘아이고 잘 됐다’ 싶어서 잘 몬다. 그런데 차도 못 모는 초보한테 차 몰아라 해놓으면 그때부터 ‘내 우예 모노’ 싶어서 달달달 떤다.
음식이든지 주방장이나 이런 사람들도 솜씨를 완전히 얻은 사람은 겁이 없다.
여기도 마음에 대해서 완전히 이치가 환하니까, 내가 그런 데 대해서 쫄지 않기 때문에 심득무외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구경도피대무외안(究竟到彼大無畏岸)하며 : 구경에 도피대무외안하야 필경에 크게 대무외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며
수기소문(隨其所問)하야 : 그 사람들이 묻는 바대로 따라서 수기소문하여 그 사람이 묻는 대로
실능수대(悉能酬對)호대 : 모두 다 대답해 줄 수 있다. 이 경전을 한참 보다 보면, 특히 한문을 보다 보면 어릴 때는 한문이 어려워서 두렵다가, 나중에는 이렇게 한참 보다 보면 한문은 내가 모르는 것도 한 열 번 스무 번 읽으면 해결할 수가 있다. 한문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 한 10년쯤 하다 보면 그렇다. 그다음엔 뜻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 한참 또 하다 보면 뜻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다.
뜻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강사쯤 하면 뜻은 알겠는데 그다음에는 실천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실천, 행할 수가 없으니까 그때부터는 경전에 있는 것은 ‘실천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구나’ 이것이 알아진다.
‘아, 말만 알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안 된다.
조금 읽고 문단 분석하고 이래가지고 화엄경 안다 하지만 가만보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아 내가 모르는구나’ 실천 못 하면 모르는 것이다.
모두 대답하여
단기의혹(斷其疑惑)하야 : 그 의심을 다 끊어주고.
환자가 왔는데 돌팔이 의사는 하나도 못 낫게 한다.
그런데 자기가 솜씨가 완전히 익어진 사람은 “그거는 요래 하면 낫습니다.” 한다.
제가 습진 같은 것이 생겨서 잘 낫지가 않았다.
약을 발라도 안 되고, 라미실을 발라도 안 되고, 무좀 같은 이상 한 것 있잖은가. 약 먹기는 싫고 그러니까 억수로 굉장히 잘한다면서 누가 약을 가져왔는데 좀 놔두면 또 안 낫고, 자꾸 덧나고 해서 팔뚝 이런 데가 벌게지곤 했다.
그래서 약국에 직접 갔다. 우리 회장스님 옛날에 계시던 천곡사 바로 옆에 포항 그곳까지 갔다.
그 약사가 선비같이 생겨서 삐쩍 말랐는데 “스님 나사드리겠습니다.”이랬다.
“뭘 나사? 내가 한 1년 2년 고생해도 못 나샀는데.”
“나사 드릴게요.”
그러시더라.
그러니까 약도 한 3일 되니까 싹 가라앉아 버렸다.
확실히 나았다.
저는 그렇게 자신감있는 약사를 처음 봤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 3대째 4대째 내려오는 비방을 가지고 있는가 근데 살살 물어보니까 양약도 아니고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 한약인데 싹 말려가지고 과립처럼 만들어서 먹기도 하고 물약으로 먹기도 하였다.
진맥도 하고 나중에 그 병은 다 나았는데 다른 진맥을 해서 꼬여가지고 또 다른 약도 한 재 지어 먹었다.
“아, 나사 드릴게요. 나을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글을 읽고도 누가 수행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윤회에 대해서 어설프게 선무당이 사람 잡는 구석이 많은데 “나사 줄게요. 이래하면 됩니다.” 안 되면 경전대로 그 얘기라도 일러 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상당히 겁나는 이야기다. 모두 대답하여 의심을 끊고
무유겁약(無有怯弱)이 : 겁약을 없게 하리라. 해석된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시위보살제일무외(是爲菩薩第一無畏)요 : 이것이 보살의 첫째 두려움이 없음이니라.
그러면 여기서는 확실히 아는 사람은 남을 의심을 끊어주는데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
대부분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돈은 받아 먹었는데 ‘네가 나을 지 안 나을 지는 모르겠다’ 대충 그러고 말잖는가.
저는 1타강사다. 일타강사. 제가 사미계를 일타스님한테 받았다. 그래서 제가 1타강사다.
그래도 이런 걸 갖다가 좀 같이 웃어주고 이러면 되는데 제가 좀 젊다고 해서 ‘아 꼰대 같은 소리 한다’고 ‘무자비하게’ 스님들이 기분을 안 맞춰 주신다.
그다음에 한 구절 하고 조금 쉬었다 하겠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득여래관정무애변재(得如來灌頂無礙辯才)하야 : 정수리에 관정 이러면 완전 확신이다.
‘정수리에 물을 부었다’ 이런 것은 여래관정무애변재라. 여래의 걸림없는 무애를 얻고
도어일체문자언음(到於一切文字言音)으로 : 온갖 말과 온갖 글과 문자와 글로 말로 언음으로
개시비밀구경피안(開示秘密究竟彼岸)하야 : 비밀을 열어보이는 저 필경에 구경의 열반 언덕에 이르고
작여시념(作如是念)호대 : 생각하기를
설유중생(設有衆生)이 : 설사
무량무변(無量無邊)하야 : 한량없는 중생이 그지없는 중생이
종시방래(從十方來)하야 : 시방으로부터 와서
이무량법(以無量法)으로 : 한량없는 법으로
이문어아(而問於我)라도 : 나에게 묻더라도
아어피문(我於彼問)에 : 나는 저 물음에 대하여
불견미소잡가답상(不見微少難可答相)이니 : 조금도 답하기 어렵다고 여기지 않나니
이불견고(以不見故)로 : 내가 어렵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까닭으로
심득무외(心得無畏)하야 :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어서
구경도피대무외안(究竟到彼大無畏岸)하야: 필경에 구경에 저 크게 두려움이 없는 언덕에 이르러
수기소문(隨其所問)하야 :그들의 묻는 대로
실능수대(悉能酬對)호대 : 다 대답하되
단기의혹(斷其疑惑)하야 : 그 의심을 끊어주고
무유공구(無有恐懼)가 : 공포가 없게 하는 것이
시위보살제이무외(是爲菩薩第二無畏)요 : 이것이 보살의 두 번째 두려움 없음이니라. 조금 쉬었다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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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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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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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스님,
신심을 떠나지 않게 붙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혜명화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아름다운 강의 내용을 저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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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형이신 거죠? 화이팅! 건강하십시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비오는 아침을 다정한 마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번달에도 인우구망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알려 주셨지요. 고맙습니다. 고쳤어요.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소도 잊는 편안한 날 되셔요~
@慧明華
그림의 떡이지만 향기가 쏠쏠 풍기는 人牛俱忘!!!
오래 전에 다운 받아둔 영상법문을 아주 열심히 시청하시는 어느 법우님 덕분에
오늘도 참 행복합니다. 우리 지금 커피나 마십시다.
이차 저차중에 저는 블랙커피가 좋아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