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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주는 의미 2015.04,05.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7)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크리스마스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신 사건이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었음을 알고 큰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말씀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위에 부으셨고, 예수님의 모든 선하심을 우리 위에 부으사 십자가 위에서 거룩한 교환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흠도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점도 없다는 말은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흠이란 있어야 할 무언가가 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가져가셨다는 것은 더 이상 내게 죄가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와서 제 물건을 가져간다면 나에게 더 이상 그 물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덮기만 한 것입니다. 속죄일에 짐승의 피를 뿌려 죄를 덮고 그 다음 해에도 또 덮고, 그 다음 해에 또 덮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염소와 송아지의 피는 죄를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오직 어린양 되신 예수의 피만이 세상 죄를 가져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주님은 우리 죄를 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여기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그 분이 죄를 가져가셨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우리에게 확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죄를 가져가셨다는 하늘의 영수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너희 믿음은 살아 있고, 너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옆 사람에게 말하세요. “나는 죄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기에 우리는 죄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주어진 모든 저주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다 처리 된 것입니다. 질병과 가난과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과 염려와 걱정 등 모든 것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위에 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어졌습니다. 제 3일에 그 몸을 하나님이 일으키셨습니다. 같은 몸이지만 부활하신 그 몸은 영화롭게 된 몸입니다. 영화롭게 되었다는 말은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생명은 죽음을 이긴 생명입니다.
사흘 전에 우리의 죄를 지셨던 몸이 사흘 만에 우리의 죄가 없는 상태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은 완벽하게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완전히 제거 하셨습니다. 영원히 제거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맨 처음 만나주신 막달라 마리아와의 만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겠습니다.
1절에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이란 유대인들의 한 주간의 시작은 일요일입니다. 그리고 “아직 어두울 때”라고 한다면 새벽 3‐4시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주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도 예수님 곁에 있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보입니다.
잠언8장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는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굴려진 것을 보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돌이 굴려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영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분명 뼈와 살을 만질 수 있는 몸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든지 문이 닫힌 곳에도 나타나실 수 있으셨지만 주님은 자신의 부활이 유령이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몸은 영화롭게 되신 몸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의 몸도 주님처럼 변화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무덤에 있든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몸의 분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그 날에 우리의 몸을 영화롭게 바꿔놓으실 것입니다. 그 몸은 늙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목적지는 죽음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을 찾으러 갔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납니다.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서 무덤 안에 예수님이 누워 계시던 자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은 빈 무덤만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만, 마리아는 홀로 남아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을 때, 마리아는 천사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러나 마리아는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하나는 예수님의 머리 쪽에서 또 하나는 발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기록해 둔 것은 주님이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되기를 바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지식적으로만 부활에 대해 알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향해 불타는 마음을 가지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소 지식이 부족해도 예수님을 향해 불타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훨씬 낫다고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혼자 남아서 울다가 무덤 안을 들여다 봅니다. 11-12절을 보시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렇게 역사상 위대한 사건에는 항상 가장 높은 천사들이 개입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마도 가브리엘과 미가엘 천사가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들이 앉아 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일이 다 마쳐졌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구지 이 장면을 마리아에게 보여준 것입니까? 이 장면은 구약의 지성소에 놓은 언약궤를 연상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그림을 보십시오.
(PPT로 보여줄 것)
이 그림이 언약궤의 모습입니다. 두 천사가 언약궤 양쪽에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바로 십계명 두 돌 판이 들어 있고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항아리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들고 들어가서 속죄소위에 뿌렸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을 보실 때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마음속을 보시고, 상황 너머의 것도 다 보시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눈앞에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딱 하나만 보십니다. 그것이 바로 속죄소에 뿌려진 피 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시체가 그곳에 눕혀지자 그곳은 바로 속죄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천사가 양쪽에 앉아 언약궤의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참된 언약궤를 보게 된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1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사랑의 마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다고 봅니다. 왜? 그녀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해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당사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와서 그 발에 향수를 붓고, 울며 자신의 머리털로 눈물로 닦은 자입니다. 왜? 이토록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까? 주님은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많은 죄가 사함 받은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는 사실 많은 죄를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 그 여인은 한 때 창기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적으로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생각으로는 창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십니까? 도길 개킬 이 아닐까요? 자신의 죄인 됨을 본 사람은 이 순간 나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천사들이 묻습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 이 질문은 절대 그냥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상황은 결코 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웁니다. 예수님이 3일째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계셨다면, 마리아는 마땅히 울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울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몸이 그곳에 없다면, 그것은 도리어 기쁨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천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어찌 슬퍼하느냐? 어찌 우울해 하느냐?”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으면서도, 뭔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슬퍼하고 답답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지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걸려 넘어지는 돌을 디딤돌이 되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더 넓은 곳으로 더 아름다운 곳으로 들어가기 직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상황은 우리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거인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도 유명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골리앗이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것을 계획하셨는지 보는 눈이 있다면 울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왜? 울었습니까? 아직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눈물은 실제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다시 사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기쁨을 위해 다시 사신 분이 바로 눈앞에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부러워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온 우주를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15절에서 주님이 하신 질문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다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슬픔과 아픔을 몰아내 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을 알고,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를 알려주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어떻게 남자의 시체를 들고 간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논리적으론 맞지 않는 말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의 열정을 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막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저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가는 길을 멈추게 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하신 한 마디의 말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킨 것입니다. 어떤 말입니까?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마리아는 단번에 그가 누구이신 줄을 안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을 보시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 각인의 이름으로 불러내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조차도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그 이름을 불으시면서 그를 은혜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야!”라고 부를 때, 그녀는 뒤돌아보며 말합니다. “랍오니” 선생님! 너무나 기뻐 얼싸 안으려고 할 때, 17절에서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하신 것을 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내 형제”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 전까지는 항상 제자들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형제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형제는 피를 나눈 자들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구주로 받아들인 자들은 주님과 한 형제요 주님과 하나 된 자들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여기에서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16장10-11절을 보면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제자들은 마리아를 통해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믿었던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마리아와 요한입니다. 요한복음20장8절을 보면 요한은 시체를 싼 천을 보고서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 사람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믿지 않는 상황 속에서 20장 19절을 보시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기서도 “이 날”이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안식 후 첫날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이나 장애물도 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를 막지는 못합니다. 주님은 지옥의 정복자 이십니다. 그 분은 뱀의 머리를 밟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그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사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불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불쑥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이놈들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3년 반 동안이나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갈릴리와 예루살렘 여러 곳을 다니며 기적과 기사를 보여주고, 내가 너희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치는 권세를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누차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믿지 않는단 말이야? 이런! 못난 놈들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19절을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의 의식이 불안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평강은 양심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었던 근원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것이 바로 우리의 평강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가 다시 처벌 되지 않으리라는 거룩한 영수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같은 죄를 두 번 벌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손과 옆구리를 저들에게 보이시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음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기쁨은 바로 여기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밝히 볼 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일에 대해 더 큰 계시가 열릴수록 더 큰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2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고 기뻐하는 자들을 보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힘입어 죄책감과 정죄감에서 벗어나서 평강을 경험한 사람에게 주님은 증인의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곧바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하십니다. 이는 사도행전1장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의 삶을 살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23절을 말씀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면, 곧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제하여졌음을 선포해 줄 때, 실제로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미 죄가 다 제하여졌을지라도 죄가 그대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은 모두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로 생애를 마치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들이 된 것을 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대속의 제물이 필요했던 것입니까? 그냥 우리 모두 지옥에 보내셔도 될 테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가치 없게 어길 때에도/ 자신을 더 이상 돌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인의 이름으로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름을 부르시고/ 은혜와 호의를 베푸십니다. 마리아의 울음소리가 아버지께 가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듯이/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주님은 나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고, 장사되셨으며/ 사흘 만에 하나님은 다시 일으키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제하시고, 나는 용서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일어난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는 큰 복을 받았고, 큰 호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기뻐하며 평강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이제 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