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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가 넘어 우린 버스를 타고 현지 한식당인 아리랑 하우스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철길이 나타났다. 그 철길을 배경으로 아취형 석조문위에 옛날 로마의 수로(水路)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길목마다 옛 로마의 유적지를 발굴하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중단되어 새끼줄로 출입을 금지한 현장도 산견되었다. 이 로마의 중심지는 어디를 파도 고대 유적이 발굴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린 아리랑 하우스에 들러 닭볶음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로마 시내에서 한식당으로 제일 오래된 곳이고, 맛도 괜찮다는 이 곳의 음식맛도 나에겐 No good 이었다. 첫째 4인당 닭볶음이 한 접시 나왔는데 그 양이 너무 적었다. 그리고 맛도 한국적인 매운 맛도 아니고, 닭국은 따로 끓여 조그만 접시에 담아주었는데 그 국물맛 또한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시내 한식당 중에서 이 집을 제일로 친다니 할 말이 없었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이 집은 빈 좌석이 거의 없었지만,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영업을 한다면 글쎄 이처럼 수십년씩 영업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진정한 한식 세계화는 일본의 스시처럼 현지인들이 선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식사를 끝내고 우린 호텔로 되돌아 갔다. 로마시 중심을 벗어나 시외곽 지대에 이르니 아파트촌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아파트촌은 10층을 넘지않는 규모의 저층 아파트였다. 우리처럼 고층아파트는 하나도 없었다.
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지구인 만큼, 도시의 스카이 라인을 고려한 주택정책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로마의 아파트는 우리와 달리 베란다가 앞뒤로 넓게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파트촌을 감싼 로마의 소나무들이 가로수로 식재되어,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난 오늘이 이태리의 마지막 밤이니, 우리 원우회장인 황봉춘 사장에게 저녁에 가능한 모든 원우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한 잔 하자고 했다. 원우회장님이 좋다고 응했다. 당연히 그리하겠다고....
호텔로 돌아가는 귀가길에 우리의 호프 이병훈 가이드로부터 들은 해외여행의 한 에피소드를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잘 협조해주어 아무런 사고도 없이 잘 진행된 이 번 여행길을 보람으로 생각하며, 특히 이태리 요리학교인 ICIF는 여러분의 덕으로 자기도 처음 구경하였다는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해 겨울 그는 밀라노에서 60대 중반의 한국인 부부 3쌍을 모셨다고 한다. 그들은 여행 일정상 스위스 융프라우(아리따운 젊은 처녀)에서 밀라노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 날 여장을 푼 한국의 아버님들은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같이 소주병을 기울이기로 약속하였는데, 한 아버님이 목욕을 하신다고 근 1시간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성질 급한 한국인 아버님들이 1시간여 호텔방에서 소주를 마셨다면, 사실상 술좌석의 여흥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아닌가? 두 한국인 아버님들이 친구를 생각한답시고, 남은 소주 1병을 들고 친구의 방에 들러 노크를 하니, 그 아버님은 그제사 목욕을 끝내고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단다.
한국의 두 아버님들은 그 친구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여자도 아닌 무슨 남자가 샤워를 하는데, 그리 시간을 오래 잡아먹느냐고 불평을 하며, 우린 술 다 마셨 으나 너를 생각해서 네 몫으로 남긴 소주 한 병을 호텔 방문앞에 놓고 가니 알아서 하라고 말하며 자기들 방으로 돌아갔다.
느긋하게 목욕을 마치고 기분이 릴렉스해진 방안의 아버님은 친구들로부터 꾸중을 들었지만, 방문앞에 놓인 소주 한 병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알몸으로 호텔 방문을 열었는데, 그만 방문이 열리는 반동으로 소주병이 데굴데굴 굴렀다. 아버님은 아무 생각없이 튀쳐나가셔서 그 소주병을 집어들었지만, 아뿔사! 그 사이에 호텔 방문이 "꽝"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단다.
타올도 두르지 않은 알몸인 이 한국인 아버님은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고 방문을 두둘겼지만, 피곤하여 깊이 잠이 든 사모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원우들은 배를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저기서 키득거렸다.
난감해진 아버님이 계속 노크를 해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없는데 마침 에레베타가 아버님이 묵고 계신 층에 도착하면서 인기척이 들리더란다. 당황한 아버님은 다시 몸을 숨기기에 바뻐 황급히 비상도어문을 열고 나가셨는데, 아뿔사! 이 번에도 비상도어문이 "꽝" 하고 닫혀버렸으니 이 일을 우야꼬?
우리 원우들은 다시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밀라노의 겨울은 몹시 춥다. 살을 에위는 듯한 강풍과 눈보라가 치는 겨울밤이었다. 생각해보라. 그 추운 겨울에 이국 땅에서 알몸으로 오돌오돌 떨고 계셨을 아버님의 기분이 어떠했을까를....
이 아버님이 그대로 방치되었더라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것인데, 다행히 호텔 경비팀의 CCTV에 아버님의 모습이 잡혔다. 호텔측은 한 동양인이 알몸으로 비상도어문 밖에서 추위에 떨며 서성대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마침 이 호텔에 투숙한 한국인 젊은이를 대동하고, 모포를 가지고 가서 이 아버님을 구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히 일찍 구조를 받은 이 아버님은 그래도 체면은 있으셨는지, 한국인 젊은이에게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셨고, 늦게사 사태를 알아차린 부인과 대판 부부싸움을 벌렸단다. 부부싸움을 거의 하지 않았던 점잖았던 노부부가.....
" 당신, 내가 이 지경을 당하도록 그토록 노크를 해도 그리 잠만 잘수 있어?." " 여보!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술을 마시라고 했어요."
두 분 모두 맞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간밤의 이 사건은 호텔의 톱뉴스였다. 이튿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한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서로 앞다투어 이 아버님한테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 아버님! 소주 한 잔 하실까요?" 그토록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였건만......
호텔에 돌아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우리는 오후 9시경 로마의 마지막 밤을 위하여 원우들끼리 맥주 한 잔 하려고 길을 나섰다. 물론 이병훈 가이드가 우릴 안내해 주었다.
그렇지만 전남도립대 교수님들의 모습이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상하여 황봉춘회장한테 물었더니 교수님들은 피곤하여 참석치 않으신다고 말했다.
가이드한테 물으니, 이 곳 로마는 한국이나 동남아같은 그런 야시장 문화가 없단다. 피자에 맥주를 파는 펍문화(술과 식사를 함께 파는 레스토랑)의 밤은 있다고 하였다. 우린 두 정거장의 거리를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는데, 이태리도 우리처럼 교통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기가 사용하는 시간별로 시내버스 요금이 매겨진다고 한다.
즉 30분 사용키를 누른다던가, 아니면 1시간짜리 키를 눌러 사용하지만, 우리같이 교통카드가 없는 외국인이 문제였다.
가이드가 그냥 타라고 말했다. 그러나 걸리면 1인당 10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린 겁이나서 주저하고 있는데 버스가 왔다. 우린 그냥 탈수밖에 없었다. 16명의 동양인들이 버스에 오르니 승객들이 의아한 표정이었고, 이 버스에는 버스 차장도 없었고, 또 버스기사도 아무런 시비를 하지 않았다.
마을버스만 타도 버스기사가 요금을 꼼꼼히 챙기는 우리 문화와는 달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태리 버스회사는 무임승차, 시간 초과 사용등을 조사하지만, 대부분 출발지와 도착지에서 조사활동을 벌여 벌금을 매기니, 우리처럼 중간에 잠시 탔다 내리는 것은 괜찮다는 이야기였다. 하여튼 우리 원우들은 아슬아슬하게 1600유로를 벌어가며 무임승차의 묘미를 즐겼다.
가정집과 같은 이태리 맥주집에 들러 이태리 펍문화의 밤을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우린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가며 맥주와 피자, 그리고 야채류들을 주문했다. 제일 처음에 흰 접시가 테블위에 올려졌다.
다음에 포크와 나이프가 나왔다. 그리고 감감 무소식이었다. 기다리기가 하도 무료하여 내가 이 팝 레스토랑 안쪽으로 가보았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시킨 생맥주를 따를 수 있는 코브라가 5개나 있었지만, 종업원은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꾸물 거리고만 있었다.
여기서는 흔한 일이란다. 우리 한국 같으면 주문 하자 마자 매상고를 위해서라도 생맥주 잔부터 가득 채워 얼른 갖다 주웠을 텐데, 이들은 이렇게 느긋하다. 내가 팝콘이라도 갖다달라고 말했지만, 가이드가 웃으며 여기는 팝콘도 없다고 한다.
Roma를 거꾸로 쓰면 Amor다. 난 이 팝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할 때 이 Amor를 써먹었다. 이는 사랑한다는 뜻이다. 여종원에게 우리같이 16명이나 되는 외국인들이 당신네 가게를 찾아주었으니 야채류를 하나 서비스해 달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당신 참 예쁘다는 이태리 말을 몰라 그 말 대신 띠아모(당신, 사랑해) 라고 말했다.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별로 좋은 말은 아닐 것 같은 짐작은 했지만,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으니 야채류 서비스는 해주겠는데 값은 따블로 받을거고, 내가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말한 " 당신, 사랑해." 라는 말에 대한 반응은 " 왠 할아버지가 주책없이"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원우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내가 젊은 이태리 여인의 눈에 할아버지로 보이다니 참 할말 없었다. 그렇지, 가는 말이 고와야지........
생맥주는 한 10여분 후에, 피자류와 야채 안주류는 근 30분이 걸려 나왔다. 생맥주는 라이트한 맛, 진한 맛, 텁텁한 맛등 4가지였고 피자류는 화덕에 발라붙여 구운 것으로 우리 한국에서 파는 피자와는 그 품격이 완연히 달랐다.
피자가 바삭바삭하고 고소하고, 감칠 맛이 있었다. 난 한국에선 피자를 거의 안먹는데 본토 이태리 피자는 정말 Good 이었다. 우린 마침 시내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를 감상하면서, 원우들과 로마의 마지막 밤의 여흥을 즐겼다.
오후 11시경, 우린 이태리 팝 레스토랑을 떠났다. 그런데 우리가 먹은 계산이 1인당 20유로를 갹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돈으로 근 60만원이다. 나는 생맥주를 세잔 마셨지만, 여자 원우들은 생맥주도 한 잔 정도 마셨고, 피자 몇개에 야채류 몇 접시가 60만원이라니 정말 이 곳 물가는 과히 살인적인 물가라고 생각되었다.
돌아갈 때는 뻐스도 좀 그렇고, 또 다시 범법행위를 하기도 싫었다. 두 정거장밖에 안되니 걷자고 하여 가이드랑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25일 새벽 여섯시에 기상하여 호텔 부근을 산책하였다. 로마시의 외곽인 이 곳은 농장이 많았다. 가로수로 늘어선 그 많은 로마의 소나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국같으면 수도권 외곽의 이런 방대한 농장은 이미 개발되어 뻭뻭한 아파트 빌리지를 형성하고 있었을 텐데, 이 곳의 목가적 풍경은 인간의 마음을 더욱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1시간여 산책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간단한 빵 몇조각으로 아침을 하면서 정규진 교수에게 어제 저녁 술자리에 왜 안오셨는냐고 물었더니 불러주지 않아서 못갔다고, 자기도 이태리 맥주와 피자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무언가 의사소통이 잘못된 모양이다. 내가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황회장이 버스안에서 오늘 밤 한 잔 하시자고 했는데 교수님들이 피곤하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아침 9시경 우리는 로마시 외곽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을 향하여 버스에 올랐다. 지난 일주일간 우리를 위해 안전운행을 하시느라 고생하신 버스 기사 안젤로 아저씨에게 우리 원우들이 소리높여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본조르노, 안젤로." 그가 인사를 받았다. "본조르노."
버스가 조금 달리자 로마시외곽의 푸른 목초지대와 농장이 펼쳐졌다. Italian grass 목초지도 눈에 띄었다.
소를 방목하여 키우는 농장이 계속되었다. 머리 속에 이젤을 펼치고 한 번 그려보시라. 목가적인 풍경을 안고 있는 이천년의 역사가 넘는 고도(古都)인 이 로마를 ....
우리의 이 번 여행은 테마를 갖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당연히 관광회사에 끌려다니는 여행이 아니어서 우리는 쇼핑을 제대로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아울렛에서 근 2시간 쇼핑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가이드와 상의하여 일정을 재조정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아울렛을 향해 달리면서, 이 번 여행의 소회를 가이드의 사회로 원우들이 서로 짤막하게 피력하는 시간도 가졌는데, 놀라운 일은 국교수님은 이 번 이태리 여행이 두 번째 였는데 우리 이병훈 가이드와 다시 만났다는 점이었다. 참 인연이란 이래서 인연인가 보다.
한시간여 주행끝에 우린 아울렛에 도착하였다. 아울렛의 규모가 몹시 컸고, 건물도 그리 아름다울 수 없었다. 이태리의 모든 명품들이 진열된 아울렛에서 우리 원우들은 2시간의 자유시간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일찍 도착하였던지 아직 아울렛은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수 자산어보 횟집 김경수 사장 부부와 함께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Arera 아동복 가게에서 그만 필이 꽂혔다. 엷은 연두색 상의와 짙은 연두색 어린이 바지였는데 몹시 어울린 색상이었고 아름다운 옷이었다.
지지난 해 가을 날 " 엄마! 예쁘고 빨간 산이가 우리집에 왜 왔어?' 라고 말해 울긋불긋 곱게 단풍이 물든 가을산을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와 같은 인격체로 받아들여, 나로 하여금 [ 아하! 동시는 이렇게 써야하는구나] 를 알려주었던 여섯 살배기 조카 은지를 위하여 그 옷을 샀다. 그러다보니 나머지 세명의 조카들도 눈에 밟혔다. 그 얘들의 옷은 흰색 상의 T를 하나씩 샀다. 원우들이 옷이 다 예쁘다고 칭찬해 주었다.
일찍 쇼핑을 마친 나는 여수 자산어보 횟집 김경수 사장과 함께 아울렛내의 커피숖에서 에스프레소 커피의 진한 향기를 만끽했다. 그는 음식점 고수답게 커피잔이 너무 특이하다고 연신 샤타를 눌러댔다. 과연 보아하니 커피 받침잔의 중앙에 홈이 패어있었다.
마침 김수인교수와 그녀의 부모님인 김이사장님과 사모님도 함께 오셔서 우리와 자리를 같이했다. 우린 이 예쁜 커피잔 세트의 모양새와 실용성에 대해 감탄했다. 나도 이 커피잔 세트가 갖고 싶었다. 남자도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이 증가한다는 말이 사실인 듯 하다.
커피를 좋아하는 김사장은 자리에 일어나서, 진한 에스프레소 꽁빠니아 커피를 다시 사왔다.
에스프레소 꽁빠니아 커피잔 세트는 앙증맞게도 우리의 소주잔보다 조금 더 커보였다. 짙은 향기가 일품이었다.
12시경, 우리 원우들은 쇼핑을 끝내고 아울렛 식당에서 피자로 점심을 먹었다. 이 곳 피자도 화덕에서 구운 것이라 맛이 있었지만 어제 밤 팝 레스토랑에서 생맥주와 함께 먹은 그 피자 맛은 따라오질 못했다.
이태리 여행도 그 끝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우린 아울렛을 출발하여 곧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으로의 출국수속을 밟았다.
그동안 고생했던 우리의 가이드 이병훈과 운전기사 안젤로씨와 석별의 악수를 나누고, 가이드 이병훈씨하고는 명함을 교환하고 그들과 헤어져 탑승구에 올랐다.
나는 가이드 이병훈씨에게 잘 부탁하여 북알프스 연봉들을 완상하려고 비행기 좌석을 창문쪽으로 부탁하여 창가에 착석하였는데, 김사장의 부인이 내 옆옆 좌석이었고, 김사장은 비행기내에서 이산가족이 되어 엉뚱한 열의 좌석 티켓을 갖고 있었다.
그가 내게로 와서, 자기 좌석이 훨씬 편한 자리라고 말하며 은근히 좌석을 바꿔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난 속으로 이런 닭살 부부가 있다니 그 두시간도 떨어져 있으면 안되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미련없이 그와 자리를 바꿔주었다.
비행기 창문으로 북알프스의 산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부부애가 그리 아름다울 수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인천행 루프트한자 여객기의 탑승시간이 채 1시간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 원우들이 뿔뿔히 흩어졌다. 출국수속을 밟느라, 또 개인별로 걸음걸이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비행편을 확인하고 탑승구를 찾았다. 그러나 원우들의 모습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불안해졌지만, 조금 있으니 하나 둘 원우들이 보여 안심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우리의 탑승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시간도 별로 없는데 황당한 일이었다.
우리 일행이 많아 프랑크푸르트 공항 여직원이 우리의 탑승구로 와서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직접 방송 안내를 할수 없으니 공항 여직원이 달려와 알려준 모양새였다. 국제공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불평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어 우린 총총 걸음으로 한참을 바뀐 탑승구를 찾아 헤메야 했다. 다행히 새로운 탑승구를 찾아 탑승 수속을 했으나, 비행시간이 촉박하여 우리 원우들이 모두 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 낙오자가 생겨도 할수 없다, 각자영생이다, ]라는 심정으로 트랩에 올랐다.
한국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원우들은 그래도 모두 살아남으려고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6시간이 넘어 밤이 깊었지만, 난 잠들지 못했다. 여승무원에게 위스키를 청해 마셔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비행기는 모스크바 상공을 지나 지명을 알수 없는 시베리아 어느 지방의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끝>
2009.7.26 작성 골드리버
★ 여행기를 끝내며
사실 난 여행기를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었다. 지난 5월 친구 효림이 목포에서 강화까지 홀로 도보여행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허락을 받아 10여일간 부안에서 홍성까지 서해안 길을 함께 걸었었다. 그 때 4편의 여행기를 처음으로 써보았다. 국내 도보여행은 그냥 우리 산하를 보고 느낀 점,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와 인정을 그대로 표현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해외여행기는 국내 도보여행과는 완연히 달랐다. 여행하는 나라의 역사, 문화, 풍물등 모든 것에 대한 사전 예비지식이 필요했는데, 난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이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난 학창시절에도 시험에 틀린 문제를 꼼꼼히 따져 다시 풀어보지 않았다. 틀린 것은 그냥 틀린거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연유인지 몰라도, 난 무슨 일에나 메모를 남겨두지 않는 별로 좋지 못한 습관을 갖고 있다.
사실 하루에도 서 네개씩 외국의 고대 유적을 주마간산 격으로 보면서 곰꼼히 메모를 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6박 7일간의 이 테마를 가진 여행을 끝내고 여행기를 써보자고 마음 먹고 나섰지만, 참 막막하였다.
디카로 남겨둔 여행 사진이 그나마 어는 정도 기억력을 회복시켜 주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여행기를 쓸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토리노의 사보리 왕궁이 기억나지 않았다. 할수 없어 인터넷에 토리노 왕궁을 검색해보니 사보리 왕궁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 유적을 찾아내어 글을 쓸수 있었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산 " 한글판 피렌체 " 책자와 바티칸에서 산 " 한글판 바티칸" 과 " 한글판 미켈란젤로와 라파엘 "의 도움이 컸다.
나머지는 내가 본 이태리의 산하와 고적, 그리고 만난 사람들에 대한 소회를 본대로 느낀대로 썼다. 인터넷 글은 조금만 길어도 사실 나도 읽기 싫다. 그러니 이 재미없고 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어찌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않으리오.
육순이 된 나이에 글을 쓴다는 것이 좀 그렇고 그렇기만 하다. 有名이든 無名이든 글을 쓴다는 것은 배지않은 아기를 낳아야하는 산통을 겪는 매우 어럽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무명인 내가 돈 한푼 안생기는 이 글에 근 한달이 넘도록 매달렸으니, 참 철딱서니없고 한심한 일이다. 도대체 밥건지는 어디서 누가 건진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써놓고 보니 지난 6월의 일주일간의 내 족적을 다시 뒤돌아 볼수 있어 그나마 내가 내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무슨 중요한 일에는 메모를 해두는 습관을 길러볼까 한다.
2009.7.28 여행기를 끝내며 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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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빠 글 너무너무 멋짐!! 하나도 안빼놓고 다읽었어요!ㅎㅎ 하지만 이태리 여자들에게 "아모르" 연발은 그만하시길!!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