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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바이칼포럼 바이칼, 야쿠치야 답사 인상기
- 봉우사상연구소 편집위원 정재겸
올해 2004년 8월 3일 - 8월 10일(7박8일)간 <한민족의 기원과 마지막 빙하기의 오아시스 바이칼호>라는 주제로 바이칼 호수와 야쿠치야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번 답사단은 이홍규 서울대 의대교수와 주채혁 강원대 몽골사학과 교수가 공동의장으로, 그리고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 소장이 총무로 있는 바이칼포럼을 중심으로 박경숙 성신여대 교수(유전학), 김주용 한국지질자원연구소 제 4 기 팀장(지질학), 이헌종 목포대 교수(고고학), 시미즈 키요시 전 비엔나대 교수(언어학) 등 각계 전문가들과 시베리아에 많은 관심을 갖고있는 일반 여행객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답사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야쿠치야 지역을 민간차원에서 대규모로 처음 방문했다는데 있다고 하겠다. 북극해와 캄챠카 반도에 가까이 있는 동토지대인 야쿠치야는 그동안 우리 한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오지였다. 일부 몇몇 전문학자들이나 기업인들만이 업무차 왕래해왔던 이 오지에 민간차원에서 대규모로 여행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막상 현지에 도착해보니 이곳은 오지가 아니라 상당히 세련된 문화를 갖춘 민족이 살고있는 풍부한 자원보고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이번 답사의 소득이었다.
우리는 이들 사하족(러시아어로 야쿠트족) 사람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지난 1992년부터 경희대 김태곤 교수가 수차 방문하여 야쿠츠크에 한국문화센터를 만들려다 김교수가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중단된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한국과 야쿠치야간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를 우리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우리 또한 여러 가지 우리와 동질적인 문화현상들을 현지에서 체험하였고, 또 석유, 천연가스와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막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한반도 12배 크기의 야쿠치야와의 교류가 국익에 결코 해롭지않을 것임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양국 간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인식이 대체로 일치했다는 것 또한 하나의 소득이었다.
8월 3일(화) 우리는 인천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직항하는 시베리아 항공기를 타고 약 4시간을 날아 밤늦은 시간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매번 겪는 러시아의 비능률적인 입출국 시스템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작동하여 우리는 약 2시간 후에야 공항을 빠져나와 호텔로 직행할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오전에 향토박물관을 관람하고 오후에는 지화학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지화학연구소에서는 바이칼호의 퇴적층을 시추하여 2500만년동안의 바이칼호의 신비를 벗기는 작업을 미국, 일본 등과 함께 추진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나타난 연구결과에 의하면 500만년전까지 바이칼호는 빙하의 침식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대빙하기에 주위가 다 얼어붙어 있었어도 바이칼 호 지역만은 온천같은 열수가 나와 인류가 생활하기에 적합한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1만 3천년전 대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이 오아시스 지역을 떠나 사방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며, 이때 우리의 조상들도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8월 5일(목) 우리는 바이칼 서남부 사얀산맥에 있는 온천휴양지 아르샨을 향해 떠났다. 버스를 타고 이르쿠츠크에서 평균해발 1500 m 높이의 산길을 따라 약 2시간을 달려가자 바이칼호수 서남단이 내려다 보이는 꿀뚝이란 마을에 닿았다. 전망이 좋아 많은 관광객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현지주민들이 바이칼호에서 잡은 물고기 오물을 훈제해 내다팔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오물을 사서 맛보는 등 휴식을 즐긴 다음 우리는 다시 갈길을 재촉하였다. 2시간여를 달리자 망망대해같은 평원에 우뚝 솟아 마치 산성이 늘어선 것처럼 평균해발 3000 m 의 사얀산맥이 나타났다. 산꼭대기에는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쓸려나간 부분들이 완연히 드러나 있었다. 이곳을 시베리아의 알프스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프스와 다른 점은 이곳은 온천지역이라는 점이다. 즉 열수 지역인 바이칼 호와 연장선상에 있는 지역인 것이다. 우리는 아르샨에 도착하여 사간달리라는 휴양소에 짐을 풀었다. 아르샨이란 이름은 부리야트어로 “마법의 샘”이란 뜻이며, 사간달리라는 이름은 이곳에서만 나는 강정제인 약초이름이라고 하였다. 뜨거운 온천물이 노천에서 솟아나오는 노천욕과 진흙마사지를 즐긴 다음, 우리는 침엽수림이 울창한 아르샨 국립공원으로 들어갔다. 마치 우리네 광릉 수목원을 연상시키는 높이 솟은 나무들, 신선한 나무냄새, 맑은 시냇물, 그리고 빼어난 경관 등은 우리를 도취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나무에 걸려있는 색색 헝겊들은 이곳이 범상치않은 곳임을 알려주는 표시였다. 아마 성스러운 장소일 것이다. 현지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 아르샨은 운석이 떨어져서 기가 센 곳이며, 에너지가 충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평일인데도 늦게까지 현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어서 과연 아르샨이 이름높은 관광지임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없어 충분히 트레킹 코스를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여행사에서 등산코스 프로그램으로 잡아도 좋을 듯 싶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딸찌 야외 민속박물관을 관람했다. 이곳에는 처음에 앙가라강에 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된 소수종족인 에웽키 족 및 부리야트 족의 주거지들을 옮겨다 놓았다가 이후에 17세기 시베리아 이주당시의 러시아인 주거지들, 즉 코사크 족 요새와 마을들을 점점 늘려 재현해놓고 있어서 이제는 러시아인 주거지가 더 많아지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없어 주마간산식으로 둘러보고 우리는 리스트비양카의 호소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호소학 박물관에는 이미 일본 관광객 등으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또 폐장시간이 가까워오고 있는 탓인지 매표원이 관람을 허락치 않았다. 우리 버스의 러시아인 운전사를 시켜 교섭해보았으나 역시 허사였다. 결국 발길을 돌려 우리는 리스트비양카 선착장으로 이동해 바이칼호 유람에 나섰다. 배를 타고 1시간쯤 나가자 마치 바다같은 망망대해였다. 최저수심 1600 m 의 바이칼 호는 육지에서 바로 앞이 약 800 m 의 수심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8월에는 사르마, 구르마, 바르구진 같은 태풍이 불어 큰배가 뒤집어져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한다. 그래서 현지 주민들은 바이칼 호의 여신 바이겔 하탄에게 제물을 바치며 선박의 무사귀환을 기원하였다. 바이칼 호는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이곳 주민들의 생활터전이면서 또한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8월 7일(토)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한 우리는 사하(야쿠치야) 자치공화국의 수도 야쿠츠크로 이동하기 위하여 이르쿠츠크 공항에서 야쿠츠크 행 시베리아 국내선 항공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몇 년 전에 비해 많이 개선된 것 같았다. 내장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투폴레프 기종의 새 비행기로 모두 바꾼 것 같았다. 약 4시간 후 야쿠츠크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우리를 초청해주신 교포사업가 이지욱 사장의 홈그라운드이어서 그런지 매사가 순조로웠다. 공항내에 버스가 대기해 있다가 우리 일행을 모두 태우고 그대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버스는 헝가리제 리무진 버스였으나 이 버스에도 마이크는 준비되지 않았다. 사실 여행중에 무슨 설명을 해줄 시간이라곤 오직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밖에는 나지 않는게 사실이다. 그런데 마이크가 없다면 뒷좌석에서는 들리지 않아 나이드신 전문학자들로부터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때에 제대로 안내를 받을 수 없고 안내자는 안내자대로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목은 목대로 쉬고 전달은 제대로 되지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르쿠츠크에서부터 우리는 마이크 없는 어려움을 겪었는데도 말이다.
버스차창 밖으로 보이는 야쿠츠크시 모습은 이르쿠츠크와는 달리 오래된 러시아식 고건물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투르크족인 사하 족(야쿠트 족)이 러시아식 생활상에 덜 동화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레나 호텔에 여장을 풀고 야쿠트 아카데미 사이언스 관계자들이 베푸는 환영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야쿠치야 인문학 연구소 건물옆에 사하족 샤만 전통가옥모습을 본따 만든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야쿠트 대학 부총장인 예고르 마하로프 박사를 비롯하여 야쿠트 과학센터 위원회 회장 알렉산더 사프로노프 박사 등 관계자들이 우리를 맞아주었고, 이어서 백색 머리띠와 백색 옷을 입은 샤만이 나와 우리를 환영하는 간단한 샤만의식을 베풀어 주었다. 가운데 화로에 자작나무를 태워 주위를 정화시키고 전통악기인 쇠로 만든 호무스를 입에 물고 그 현을 오른 손가락으로 튕겨 음악을 연주하면서 샤만은 우리 일행을 축복해 주었다.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른 샤만 의상으로 보아 알타이 지역 샤만과 유사성을 보이며, 이것은 사하족이 알타이 지역의 사카족과 동족이란 사실과 연관된다. 또한 이것은 우리나라 동해안의 별신굿 무당들이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른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알타이족 문화가 시베리아에서 한반도 동해안 산악지대를 따라 이동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환영만찬을 마친 우리는 야쿠치야 인문학 연구소 대강당에서 공식행사를 가졌다. 우리측에서는 서울대 이홍규 박사가 한국인의 기원을 주제로 발제를 하였고, 야쿠치야측에서는 러시아 과학원 고골레바 박사가 발제를 하였으며, 통역은 목포대 이헌종 교수가 맡았다. 고골레바 박사는 사하족이 남부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발원하여 일부는 서부로 이주하여 오늘날 터키를 형성하였고, 또 일부는 북동부로 이주하여 몽골리안의 용모를 갖춘 오늘날의 사하 족, 즉 야쿠트 족이 되었다고 말했다.
공식행사를 마친 우리는 고고인류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여기서 우리는 러시아 고고학계의 거물인 모차노프 교수의 설명을 직접 들으며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까지에 걸쳐 시베리아 고고학의 성과를 관람하게되는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러시아 고고학을 전공한 목포대 이헌종 교수도 모차노프 교수가 직접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하였다. 모차노프 교수는 시베리아에서 가장 연대가 오랜 200-350만년전의 디링 유락 유적을 발굴해낸 장본인이었다. 비열대지역인 시베리아에서도 인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서구학계와 러시아학계 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유적들이 속속 발굴될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바이칼호의 생성연대가 2500만년 전이며, 지금까지의 지질학연구결과에 따르면 500만년 전까지 빙하침식이 없었다고 하므로 인류가 살기 적합한 지역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시베리아에서의 인류유적이 500만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러시아학자들의 연구결과들을 균형적으로 받아들이고 서구학자 중심의 안목에서 벗어나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를 변방이 아닌 문명의 중심지 내지 발상지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8월 8일(일) 오전에 우리는 민속박물관 관람에 나섰다. 사하족의 생활상이 전시돼 있는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샤마니즘과 축제였다. 새가 올라 앉아있는 솟대는 그대로 우리나라의 솟대이기도 했으며, 말을 숭배하고 말젖으로 만든 술 쿠미스로 으후 라고 불리는 제천의식 축제를 벌이는 풍습 역시 같은 유목민인 부리야트 몽골족의 가장 커다란 대보름 제천의식 축제인 사가알간 타일라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말총으로 만든 수공예품과 은으로 만든 마구들은 이들의 세련된 야금기술과 세공기술을 한껏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 지역에는 다이아몬드를 비롯, 철과 은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야금술이 발달해 있었다. 어원적으로 볼 때 야쿠트어로 대장장이를 tarhat 라고 하는데, 이것은 신라 제 3 대 왕인 석탈해가 자신의 조상이 대장장이였다고 말하였고, 또 그 이름인 탈해가 발음상 tarhat 와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 아무튼 시베리아의 동토지대에서 사하 족, 즉 야쿠트족이 이런 세련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며, 우리나라와 문화교류에 나서도 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후에는 시베리아 최대의 강인 레나 강 크루즈에 나섰다. 레나 강은 너비가 한강의 12배라고 하였다. 강안에는 목재나 석탄 등 각종 지하자원을 배에 싣는 대형 크레인이 늘어서 있어서 이곳 야쿠츠크가 지하자원의 보고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람선 안에서는 선상파티가 벌어졌다. 우리는 야쿠트 아카데미 사이언스 관계자들과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서로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우리는 러시아어를 못하고 저들은 영어를 못하여 깊은 대화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몰랐던 러시아어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영어가 세계어라는 구호는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공염불처럼 외는 정부에서는 제2외국어 교육정책을 부활하여 인재를 양성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마지막 오지인 시베리아는 어쩌면 상대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 될른지 모른다. 이미 물거품이 됐지만 한보 정태수 회장이 이곳 야쿠치야 가스전에 투자했었던 것이 선견지명이었을지 모른다. 일본이나 인도는 벌써 자국의 문화센터를 야쿠츠크에 설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도 더 늦기 전에 빨리 이들과 문화교류를 확대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8월 9일(월) 오전에 우리는 이미 예정돼있는 야쿠트 아카데미 사이언스 학자들과의 각분과별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유전학, 역사종교학, 고고인류학, 지질학, 언어학 등 5개 분과로 나누었다. 유전학은 서울대 이홍규 교수와 성신여대 박경숙 교수, 역사종교학은 강원대 주채혁 교수와 원광대 조용헌 교수, 고고인류학은 목포대 이헌종 교수, 지질학은 한국지질연구소 김주용 박사와 목포대 김정빈 교수, 언어학은 전 비엔나대 시미즈 교수 등이 주 발제자로 참가하였다. 유전학분야에서는 문외한인 나에게도 야쿠트 학자들이 우리의 뛰어난 유전학수준을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엿보였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학자들이 연구시료들을 요청해와 제공해주면 그 결과를 알려주지도 않는 등 불평등사례들이 많다는 야쿠트 학자들의 불만도 들을 수 있었다. 상호간 호혜교류의 기본정신이 존중되면서 문화교류가 이루어져야할 필요성을 느끼는 대목이었다. 이외에 나머지 4개 분과들을 통합하여 벌어진 토론회에서는 샤마니즘이 주요 주제가 되어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특히 이들의 고구려음악에 관한 연구는 놀라울 정도로 깊이있는 것이어서 우리의 얼굴이 낯뜨거워질 정도였다고 들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벌어지고 있는 이때,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몇몇 안되는 우리의 현실을 이곳 시베리아 야쿠치야에서도 실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구려시대 때 고구려와 투르크족은 함께 북방을 호령하고 있었으며, 또한 함께 협력하여 중국의 수당 정권에 대항했던 역사가 있었다. 투르크족인 사하 족, 즉 야쿠트 족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임하는 우리보다 더 고구려를 잊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고구려사 연구가 얼마나 편협하게 이루어져 왔었는지가 확인된다 할 것이다. 고구려사는 몽골족, 투르크족, 만주퉁구스족을 포함한 북방 및 중앙아시아사 전체와 연관지어 파악돼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워낙 포괄적이고 깊은 주제라서 그런지 짧은 시간동안 각분과별 토의를 충분히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는 토의를 마쳤다. 그러나 양국 간의 기본적인 관심사항등이 대체적으로 노정되었고 앞으로 양국간 교류활성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음은 성과로 여겨진다.
오후 일정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어서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시장이나 시내구경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야쿠츠크시 교외에 자리잡은 영빈관에서 벌어진 저녁만찬장은 우리 일행의 모든 여독을 씻겨줄 만큼 융숭하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특히 처음 들어보는 사하 족 전통음악은 영혼을 정화시켜주면서도 에너지가 충만하여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또한 이 자리에서는 서울대 이홍규 교수가 우리 일행을 대표하여 이번 야쿠치야 답사를 위해 현지섭외를 잘해주신 교포사업가 이지욱 사장에게 공로패를 증정하는 자리도 마련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풍습대로 모두 밖에 나가 세르게(말뚝)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서로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풍습은 바로 우리의 강강수월래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그동안 일부 민속학자들이 남방기원으로 분류했던 것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마지막날 저녁만찬장의 환대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다음날 아침 공항에서 만성적인 기다림없이 출국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봐주신 이지욱 사장과 현지 관계자들의 정성에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