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4.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15장 11~32절
환대(welcoming)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
■ 공항에 가보면 ‘환영’(welcome)이라는 말이 쓰인 피켓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방문하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이 서로 모르는 경우 이 피켓은 참 유용합니다. 서로를 찾는 데 도움이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서로 아는 사이지만, 이런 피켓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유명 스타들을 맞이하는 팬들이 많이 사용하지요? 이런 경우는 대대적인 환영입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맞이하는 환영입니다. 그렇다고 꼭 유명 스타들만을 상대로 이런 환영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입니다. “대환영~ 둘째 아들~” 둘째 아들은 스타가 아니었습니다. 아, 한때, 스타였기는 하네요. 돈을 물 쓰듯 할 때, 그의 주변에 몰려든 아첨꾼들에게 스타였죠. 뭐, 그건 그때고 “대환영~ 둘째 아들~”이라는 환영 피켓이 등장할 때는 스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천덕꾸러기였습니다. 망가질 대로 다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본인조차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대환영~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이 피켓을 만든 분은 아버지였습니다. 모두가 어리둥절했음에도, 아버지는 이 피켓을 높이 들고 둘째 아들을 맞이했습니다. 첫째 아들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피켓을 온 누리를 향해 보이도록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 뭐래도 둘째 아들도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과거지사를 묻지 않고 “대환영~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유명한 “대환영~ 둘째 아들~” 사건을 통해 만나고 싶은 세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환대(환영)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둘째 아들을 환대함으로 아버지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세상은 우리가 확장해야 할 신앙적 태도입니다.
■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몫을 챙겨 집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삶은 안정적이고 평온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자신의 몫을 다 챙겨 나가는 순간부터, 삶의 질서와 안녕은 무너지고 흔들렸습니다. 24시간의 일상이 달라졌습니다. 밤도 낮처럼 되도록 불을 켜놓았고, 일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는 시간이 날마다 늘어만 갔습니다. 이렇게 삶의 질서는 무너졌고, 안녕은 흔들렸습니다.
둘째 아들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이 녀석을...’ 하는 마음이 들쑥날쑥했습니다. 그러다 문뜩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 녀석을...’ 하는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피켓을 하나 만들어 걸었습니다. “대환영~ 둘째 아들~”
그러자 무너졌던 삶에 질서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흔들렸던 삶에 안녕이 다시 회복됐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 원망하지 않는 ‘기다림’이 시작됐습니다. 참으로 아버지는 희망의 세상에 들어섰습니다. 이후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였고, 가슴은 희망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환대는 희망이 되었고, 이 희망은 드디어 현실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환대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2~24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의 “대환영~ 둘째 아들~”의 환대는 그 결과가 분명했습니다. 문제를 끝냈고 풍악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물론 첫째 아들의 이의 제기가 있었으나, 이 오해는 해결되었고 풍악은 더 커졌습니다. 그리고 분명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고 집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아버지를 포함해 모두에게 새로운 시각이 열렸습니다. 무엇보다도, 희망은 현실이 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렇기에 이 환대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확장되었습니다.
■ 우리는 이 “대환영~ 둘째 아들~”의 환대 사건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환대는 희망이고, 희망은 현실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환대는, 상대를 진심으로 뜨겁게 맞이하는 태도, 그리고 맞이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랑이지만 희망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망에서, 불만에서 환대로 태도를 바꿀 때 일어나는 일은 분명합니다. ‘새로운 세상의 열림’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대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줍니다. 원망은 삶을 어둠에 둘러싸이게 하는 데 반해, 환대는 희망이기에 어둠을 거두고 갇혔던 새 세상을 보게 합니다. 불만은 삶을 안개로 가리게 하는 데 반해, 환대는 사랑이기에 안개를 거두고 희미했던 새 세상을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모든 것을 환대하십시오! 어떤 것이든 원망으로, 불만으로 대하지 마시고, 두 팔 벌려 환대하십시오. 여러분의 불만스러운 삶을 환대하십시오. 자신의 원망스러운 운명을 환대하십시오. 짜증나게 하는 시간을 환대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공간이 주어지든 환대하십시오. 모든 환경을 환대하십시오.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도, 동물도, 생명체 모두를 환대하십시오.
그리고 불안한 미래를 환대하시되, 특히 불안정하게 보이는 현재를 환대하십시오. 둘째 아들이 집 나간 것 같은 현재 상황을 환대하십시오. 원망과 불만으로 현재를 대하지 마시고, 환대하십시오. 사랑으로 희망으로 환대하십시오. 환대는 희망이기에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대는 거룩한 기다림이자 믿음이기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입니다. 환대는 억지로 만들 수도 있는 긍정의 태도가 아니라, 성령님이 개입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 자, 그렇다면, 당장 여러분의 “대환영~ 둘째 아들~”은 누구이고 무엇인가요? 모든 것을 환대하는 것이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대환영~ 둘째 아들~”은 누구이고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불만스러운 삶인가요? 자신의 원망스러운 운명인가요? 지금 처한 짜증나게 하는 형편인가요?
2024년의 마지막 달력을 만나기 직전입니다. 마지막 달력을 만나기 전에 우리 모두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사람’, ‘모든 것을 환대하는 인생’이 되기로 결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달력인 12월 내내 원망과 불만의 태도를 떨쳐내는 작업을 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환대하는 인생으로 2025년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 2025년을 거론하나 싶으실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달, 깁니다만 순식간에 지나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의 형편이니, 환대의 2025년을 맞이하기 위해 원망과 불만의 태도를 떨쳐내는 작업을 하는 데는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사실 설교자의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부터 모든 것을 환대하는 여러분을 보고 싶습니다. 혹시 가능할까요? 아멘?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여러분의 “대환영~ 둘째 아들~”은 누구이고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삶인가요? 자신의 운명인가요? 지금 처한 형편인가요? 믿으십시오. 환대는 새 세상을 열어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