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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희 도의원 자료임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영암지역의 강제동원이나 독립운동 사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영암읍 망호리에 계시는 이상업 선생님과 관련한 이야기 입니다.
선생님은 당시 만 17세 이상 남자만 동원하게 되어있는 일제 ‘징용령’을 무시하고 16살 나이에 징용 영장을 받아, 일본 후쿠오카 가미야마다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가 굶주림과 강제노동을 당했습니다.
저의 초등학교 1~2학년 담임이셨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2007년 출간 된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 - 일제 강제동원 광주전남 피해자들의 이야기>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역사적 증언을 영암 금정면 출신인 이국언 대표(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전 시민의소리 기자)가 당사자들의 인터뷰와 자료연구 결과를 담아놓았습니다.
블로그에는 이책의 글을 저자와 협의하여 그대로 옮겼습니다. 책속의 그림은 이상업 선생님이 직접 그리셨습니다.
16세 소년에게 날아온 징용장① - 이상업(81·전남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징용) 소화 18년(1943년) 가을. 그것은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6세의 어린 소년이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해 9월 말께였다. 어느 날 아침 동네 이장이 징용 영장을 가지고 왔다. 성전 완수를 위해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영예로운 산업전사로 뽑혔다는 것이다. 청천하늘에 날 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나이 열 여섯에 징용 영장이라니…. 당시 일제가 정한 ‘징용령’에 의하면 만 17세 이상의 남자에 한해서만 노무자로 동원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따졌다. 그러나 이장은 막무가내였다.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집안은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6남매의 장남이었던 이씨는 당시 병약한 체질의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를 혼자 도맡다시피 하고 있었다. 농사라야 겨우 7두락(7마지기)의 소농이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당시 50세)는 자신이 대신 징용을 가겠다고 나섰다. 뼈도 아직 안 굵은 어린 자식을 어떻게 징용에 내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1월 어느 날, 마침내 소집 일이었다. 어머니(당시 45세)는 이른 새벽부터 눈물 밥을 짓고 할머니는 언제 돌아올 줄 모르는 어린 손주를 위해 눈물 바람에 괴나리봇짐을 싸고 있었다. 유난히 잘 차려진 아침 밥상이었지만 밥이 들어갈 리 없었다. 영암군청 마당에는 이미 또래 나이의 50여명이 모여 있었다. 군청 노무계 직원들이 나눠준 국방색의 국민복을 갈아입자 이어 출정식이 시작됐다. “위대한 황국의 청년 여러분, 제군들은 이제 황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동양 평화의 성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영예로운 산업전사로 당당히 뽑혔다. 제군들이 곧 대일본(大日本)이요, 대일본이 곧 제군들인 것이다. 제군들이 이제부터 내지(內地, 일본)로 가 쏟아내는 땀방울이야말로 거룩한 성전을 하루빨리 완수하는 값진 자원이 될 것이다.” 군수의 치사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출정식을 마친 이들은 곧 덕진다리에서 트럭을 타고 영산포역으로 향했다. 영산포역에는 이미 강진, 완도, 진도, 장흥, 나주 등지에서 소집된 수 백명의 소년 징용부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여수까지 이동한 이들은 그날 밤 드디어 시모노세키(下關)행 화물선에 올랐다. 새벽 무렵 이들은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주먹밥 한 덩어리와 단무지 한 쪽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이들은 이어 대기해 있던 열차에 올랐다. 그리고 몇 시간을 달렸을까. 이들이 도착한 곳은 후쿠오카현(福岡縣) 가미야마다 미쓰비시 탄광(上山田 三菱炭坑)이었다. 어스름 녘의 가미야마다 미쓰비시 탄광촌은 온통 검은 색이었다. 사람도 검고, 집도 검고, 거리도 온통 검은 암흑의 산간마을이었다. 합숙소는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이었다. 1층은 사무실과 식당이 있었고 2층은 노무자들의 합숙소였다. 노무자들은 20명씩 분대별로 나눠져 방을 배치받았고, 생활은 영락없는 군대식이었다. 합숙소 주위는 빙 둘러 2~3m 높이의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24시간 송아지만한 개들이 지키고 있었다. 잘 훈련된 군경용 셰퍼드였다. 멋모르고 탈출을 시도했다가는 철조망을 넘기도 전에 셰퍼드의 밥이 될 처지였다. 얼마 전에도 황해도 출신 어느 한 노무자가 탈출을 하다 이 셰퍼드 떼에 물려 처참하게 죽어갔다고 했다. 얼마나 덩치가 컸던지 ‘컹-컹’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반장들의 말투는 퍽이나 거칠었다. 말끝마다 욕이고 걸핏하면 쇳소리가 났다. 알고 보니 이들도 강제로 징용돼 온 사람들이었다. 일본인 감독들이 이들 중 덩치도 좋고 주먹깨나 쓰는 사람들을 골라 반장으로 앉힌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독살스러울 수가 없었다. 잠시 한 눈만 팔아도 귀싸대기를 올렸고, 동작이 조금만 굼떠도 목도(木刀)가 날라 왔다. 탄광촌의 아침은 빨랐다. 새벽 6시에 기상한 이들은 서둘러 막사 앞으로 모였다. 매일 아침 이뤄지는 일조점호(一朝點呼)였다. 인원 점검을 마친 이들은 이어 사당으로 옮겨 매일 일본 황신의 조상신을 향해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3일간 교육에 들어갔다. 현장실습 교육이었다. 막장에서 탄맥을 찾는 방법, 굴착기 사용법, 탄차(炭車)를 운반하는 요령 등이었다. 이어 간단한 신체검사와 함께 현장에 배치됐다.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막장에서 탄을 캐는 채탄부(採炭夫)였다. 폐병환자나 병세가 완연한 일부만 석탄을 골라내는 선탄부(選炭夫)로 배치됐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소아마비 환자까지 채탄부로 배치된 것이었다. 함평에서 온 한 소년이 그런 경우였다. 그는 두 살 무렵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 쪽을 절고 있었다. 그러나 체력이 좋다는 이유로 그 친구 역시 채탄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말았다. 4일째 되던 날 드디어 현장 투입이 이뤄졌다. 투입에 앞서 총감독의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제군들의 어깨에 조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 제군들이 캐내는 석탄 한 삽 한 삽이 곧바로 소중한 전쟁자원이 된다는 말이다. 명심해라. 제군들이 쏟는 땀방울이 곧 동양평화의 성전을 승리로 이끄는 값진 자원이 된다는 것을….” 현장 감독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미쓰비시 탄광에는 한국인 노무자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노무자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죄수들이었다. 살인을 하거나 강도, 강간, 상해 등 중범죄를 저지른 일본인들을 강제로 끌어다 일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 감독들은 바로 그 일본인 죄수들 중에서 골라 뽑은 자들이었다. 죄수들 가운데 가장 흉악스러운 살인범들만을 뽑아 감독에 앉힌 것이다. 전조등이 달린 헬멧과 시커먼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딱정벌레였다. 마침내 광부가 된 것이다. 곧이어 삽과 곡괭이 등이 지급됐다. 막장에서 쓸 연장이었다. 갱 입구에 들어서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레일이 깔려 있고, 레일 위에는 수송용 인차(人車)가 놓여 있었다. 하루에 두 번만 운행하는 것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혼자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갱도는 비탈진 경사면으로 돼 있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인차는 땅 속으로 한참이나 달려 갔다. 막장 안은 흡사 개미집 같았다. 미로처럼 사방팔방 복잡하게 뚫린 갱도들인 것이다. 한번 길을 잘 못 들면 다시 제자리로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다. “땅 속으로 지하 수 천 킬로미터는 될 거예요. 그곳에서 각자 맡은 굴을 찾아가는 거예요. 한번 들어가면 낮인지 밤인지 시간 간 줄 모릅니다. 정전이라도 되면 깜깜해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채탄 작업은 2인 1조로 이뤄졌다. 이씨는 영암 구림 출신 소년과 한 조를 이뤘다. 한 사람이 곡괭이질을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삽으로 석탄을 퍼 광차에 싣는 것이었다. 벌써 옷을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땅 밑에서 뜨거운 훈김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곡괭이질 몇 번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열과 분진 때문에 콧구멍과 목구멍이 꽉 막혔고 숨도 그만큼 가파졌다. 남포 튀는 연기로 굴 속은 항상 뿌연 상태였다. 막장의 맨 끝은 사람 한명 지나기도 어려울 만큼 비좁았다. 심지어 허리를 펴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잠시도 허리를 펼 수 없었다. 그때마다 감독의 곡괭이 자루가 등짝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줌이 마려워도 오줌을 쌀 수가 없었다. 감독의 곡괭이 자루가 무서워 오줌 마려운 것조차 잊어버린 탓이다. 탄부들은 되도록 용변을 삼갔다. 소변을 자주 보면 그만큼 금방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그 수천 미터 지하에 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분(人糞)을 먹고 크는 쥐떼들이었다.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쥐떼들을 보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막장 생활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아침을 먹고 현장에 투입되면 점심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석탄을 캐야 했다. 오후에는 밤 9시까지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이었다. 유일한 휴식시간인 점심시간은 고작 30분이었다. 그러나 이 30분이 이들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도시락은 꺼내기가 바쁘게 바닥을 보였다.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한 쪽이 전부였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어느새 잠에 곯아 떨어졌다. 채 5분도 안 돼 여기 저기 코고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너무 지친 탓이다. 불과 20여분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막장에서는 두들겨 맞는 것은 다반사였다. 오줌 때문에 두들겨 맞고, 곡괭이질 때문에 두들겨 맞고, 광차 때문에 두들겨 맞고…. 감독들은 구실을 찾고 있었고, 곡괭이는 그때마다 표적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탄부들은 감독들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언어문제로도 구타가 잦았다. 한번은 무안 출신 어떤 소년이 일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초죽음이 되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 주인집 아들 대신 억지로 끌려온 아이였다. 가슴에 급소를 얻어 차인 그는 며칠 후 끝내 죽고 말았다. 탄광에서의 죽음은 모두 병사(病死) 처리됐다. 구타에 맞아 죽든, 사고에 의한 것이 건 상관하지 않고 서류에는 모두 병사였다. 날이 갈수록 일본인 감독의 폭압은 그 강도를 더해 갔다. 석탄 생산량이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태평양 전쟁은 한참 막바지에 있었다. 미군의 엄청난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막대한 군수물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만큼 공장을 돌릴 수 있는 에너지원인 석탄 생산량을 다그쳤던 것이다. 구타보다 무서운 것은 발파사고와 낙반 사고였다. 갱내에는 천장이 무너진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곳곳에 마치 구들장 같은 ‘보다’라는 바윗돌을 받쳐 놓았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람 잡는 귀신이었다. 언제 어디서 떨어져 머리통을 부술지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발파 후에는 진동의 여파 때문에 더 더욱 위험했다. 발파 후에는 반드시 점검을 한다지만 어느 틈에 빠진 구석이 있게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보다는 어느 누군가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불과 50m 옆에 있던 친구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천정의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내리 찍은 것이다. 헬멧 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아직 숨이 멎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쓰지 못했다. 감독의 곡괭이 자루가 그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주 출신인 그 소년 역시 병사 처리됐다. 가장 잊지 못할 사람은 원(元)씨라는 성을 가진 강원도 출신의 형님이었다. 삼척이 고향인 그는 이씨에게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당시 서른 두 살의 원씨는 이씨 보다 두해 전 미쓰비시 탄광에 징용 와 있었다. 늘씬한 키의 얼굴도 갸름한 그는 기운도 세고 성품도 좋아 주변 노무자들로부터 늘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 원씨도 가끔은 신세타령을 하곤 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군청 노무과 직원의 말에 속아 왔던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이었다. 고향에는 아내 혼자서 자식들을 데리고 살고 있을 테인데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큰 아들은 아마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이었다. 옆 막장에서 갑자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죽었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달려가 보니 원씨였다. 통상 발파소식은 1시간 전에 예고되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갑작스럽게 발파 사실이 전달됐다. “막장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일본 놈이 남포를 눌러버린 거예요. 가서 보니까 얼굴이 볼 수없이 돼 버렸더라고요. 사람도 좋고, 기운도 세고, 나한테는 더 없이 잘 해 줬는데…. 탄차를 밀고 가다 힘이 부족해 물하고 같이 엎어지면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와서 일으켜 주고 했던 사람인데….” 원씨는 숙소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이씨는 며칠 뒤 일본인 감독 네 명과 함께 야마다(山田) 경찰서에 출두했다. 명백한 인재(人災)라고 열변을 토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원씨는 결국 사고사(事故死) 처리됐고, 그 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사람이나 감독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조사를 마치고 30리 길을 걸어 올 때였다. 감독 한 명이 근처에 자기 친척 집이 있다고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바깥 구경을 한 셈이었다. “아주머니가 흰 쌀밥을 가득 내 왔어요. 정신없이 한 그릇을 없앴더니 주인이 불쌍해 보였는가 한 그릇을 더 줍디다. 그것까지 순식간에 먹어 치웠지요.” 이씨는 이날 징용 후 처음으로 배불리 밥 한 끼를 먹어 보았다. 그것도 쌀밥으로. 이것이 원씨의 덕분인가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울컥했다. “세상에 징한 놈들. 고향에서는 일본 놈들한테 쌀 죄다 빼앗겨 쑥이라도 뜯으려고 산으로 들로 줄지어 가는 판인데 자기들은 순 쌀밥을 먹고 있더라고.” 숙소에 돌아 온 이씨는 그날 밤 처음으로 탈출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의 미쓰비시 탄광을 넘어② 구타사고, 발파사고, 낙반사고는 열흘이 멀다하고 일어났다. 그때마다 동료들은 불구가 되거나 몇 몇은 송장으로 죽어나갔다.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자들은 자꾸만 불어난다는 것이었다. 그 많은 노무자들을 어디서 끌어오는지, 탄광촌은 항상 새로 잡혀 온 노무자들로 넘쳐났다. 신참 노무자들이 오면 습관처럼 고향을 물었다. 혹시라도 내 고향에서 온 사람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1944년 2월경이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석탄을 캔 뒤 시커먼 몰골로 합숙소로 들어섰다. 한 무리의 신참 징용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고향을 물었더니 전라도에서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함평, 영광, 해남, 무안, 장흥, 영암 등지에서 온 같은 또래의 소년들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고향 안부를 물었다. 죽만 먹은 채 하루 열 여섯 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린 노무자들은 거의 가죽과 뼈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앙상한 어깨뼈에 두 눈만 말갛게 떠 있는, 살아있는 해골이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구타와 하루도 그치지 않는 비명소리, 그때마다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송장들…. 결국 여기를 빠져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설사 도망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현재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어보였다.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결심은 점점 확고해 졌다. 그러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복도를 지키는 내무반장과 철조망을 지키는 셰퍼드가 문제였다. 얼마 전에도 경기도에서 온 노무자 한 명이 도망치다 개에 물려 피투성이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막장에서 돌아온 동료들은 금새 잠에 곯아 떨어졌다. 새벽 1시께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내무반장은 복도 중앙에서 졸고 있었다. 내무반장을 지나면 바로 창문이었다. 내부반장을 제치고 막 복도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내무반장이었다.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화장실은 반대편 쪽이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날 밤 거의 초주검이 됐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다음날 오전이었다. 참담한 실패였다. 후과도 적지 않았다. 그는 이제 요주의(要注意)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감시가 더 심해졌고, 조금만 자기들 눈에 거슬린다 싶어도 주먹이 날아왔다. 당장 매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고분고분해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어느새 가장 충성스러운 충견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자 차차 의심의 눈길도 걷히고 있었다. 다시 1944년 11월 하순쯤이었다. 징용 온 지도 꼬박 1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시 찾아왔다. 그날은 보름달이 환하게 밝은 날이었다. 이씨는 그동안 나름의 준비를 해 오고 있었다. 합숙소의 구조, 탈출로를 면밀히 파악해 두는 한편 약간의 비상금까지 준비해 뒀던 것이다. 그날은 저녁에 작업에 투입될 차례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막장일도 하루 24시간씩 2교대로 투입되고 있었다. 이씨는 이미 석양 근무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점심직후 한차례 난리가 벌어졌다. 일부러 복통을 호소하며 입에 흰 거품을 문 것이다. 반장도 처음에는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침상을 데굴데굴 구르며 죽을상을 하는 이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지 결국 그날 근무에서 제외해 준 것이다. 새벽녘 이씨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무반장은 졸고 있었다. 복도 반대편 미닫이 창문을 살짝 열고 몸을 빼냈다. 빗물 홈통을 붙잡고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온 그는 납작 엎드려 살그머니 철조망으로 다가갔다. 일부러 셰퍼드 떼의 반대편으로 길을 잡았고, 다행히 개들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상태였다. 정신없이 철조망을 타 넘은 그는 잠시 몸을 낮춰 동정을 살핀 뒤 동쪽 산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한 달음에 산 하나를 넘어섰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언제 발각돼 추적해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매섭게 눈발이 몰아쳤다. 춥고 배가 고파왔지만 탄광촌에서 한 치라도 더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빨을 더욱 세차게 물어야 했다. “방공호에서 잘까 했더니 추워서 그러다가는 딱 얼어 죽게 생겼어. 저녁내 산을 달리는데 동틀 무렵에야 동네 하나가 나오더라고. 남자들은 다 군인으로 끌려가고 없는지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고, 보이는 사람들은 아주머니들과 여자들뿐이었어.” 눈보라를 맞고 몇 시간쯤 걸었을까. 점심때쯤 되자 가까이서 기적소리가 들여왔다. 작은 마을과 함께 판자로 지은 한 간이역이 나타났다. 이도다역(絲田驛)이었다. 비상금과 함께 매형의 주소를 건넸다. 사가현 나가사키 가와나미조선소(九州 佐賀縣 川南浦崎造船所)였다. “일본에 오기 전 장흥 사는 매형이 일본에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디인 줄은 모르고 주소만 알고 있었지요. 무작정 매형을 만나면 살 길이 있겠거니 싶었지요.” 우라사키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쯤이었다. 우라사키조선소는 어마어마했다. 골리앗 같은 군함들이 바다를 꽉 메우고 있었고,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사방에서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군함을 만들어내는 1급 군수공장이었기 때문이다. “경비병에게 매형을 찾으러 왔다고 하니까 잠시 후 누군가가 나와 어떻게 왔느냐고 꼬치꼬치 이것저것 묻더라고. 사감이었어. 사실대로 다 얘기했지.” 이씨의 매형은 ‘네가 어쩐 일이냐’며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매형도 이씨보다 8개월여 일찍 더 징용을 온 것이었다. 매형은 다음 날 당분간 몸조심하라며 조선소 근처의 한 함바집을 안내 해 줬다. 주인의 이름이 스에다(末田)씨로 그는 노무자를 상대로 밥장사를 하는 한국인 출신이었다. 매형의 부탁에 주인은 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미쓰비시탄광에서 사람이 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숙소로 들이닥친 그들은 이씨를 보자 득의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첫날 만난 사감이 곧바로 밀고한 것이었다. 두 번째의 짧은 탈출도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사감이 나를 잡으러 온 그 사람들한테, 어리니까 때리지 말고 잘 가르치라고 그러더라고요. 갔다가 언제 다시 오라고 하면서….” 밤새 기차를 탄 이씨는 다음날 지긋 지긋한 미쓰비시 탄광에 다시 잡혀왔다. 무표정한 얼굴의 동료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다음 상황은 충분히 예견됐기 때문이다. 그는 독방으로 끌려갔다. 악질 사주(使嗾)들의 몽둥이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코피가 터지고 갈비뼈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혼절을 하면 다시 찬물이 끼얹어졌다. 그런 뒤 교대로 다시 두들겨 팼다. 몽둥이질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3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눈을 떠 보니 어느 새벽이었다. 밖은 진눈깨비 눈이 오고 있었다. 무심코 문을 밀어봤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 문이 열려 있었다. 기진맥진해 있는 그를 놔둔 채 사주들이 미처 문을 잠그지 않고 그냥 간 모양이었다. 눈을 맞으니 온 몸이 시원했다. 그때였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쳐 오른 것은. 사방은 적막했다. 날씨 탓인지 셰퍼드 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진눈깨비에 섞여 발자국 소리도 한결 잦아들었다. 재빨리 철조망을 타고 넘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달렸다. 3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해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몸에 어떻게 그런 힘이 남아 있는지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두 번째의 탈출이었지만 길은 이제 낯설지가 않았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우연찮게 여비도 마련할 수 있었다. 허기에 지쳐 한 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빈 수레를 끌고 달려오던 말이 얼마 못가 그만 개울 도랑으로 수레와 함께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늘을 보고 엎어져있는 말은 심하게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자칫하면 큰 일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어렸을 때부터 고향에서 소를 다뤄본 적이 있던 이씨는 반사적으로 달려가 말을 일으켜 주었다. 말을 놓쳐 뒤늦게 정신없이 달려온 주인은 연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울러 노자에 보태라며 얼마간의 돈을 챙겨주기까지 했다. 천신만고 끝에 우라사키에 다시 돌아온 이씨는 곧바로 스에다씨 집으로 갔다. 얼마 전 소식을 들은 바 있었던 스에다씨는 다시 나타난 이씨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매형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스에다씨의 식당에서 청소나 잔심부름을 하는 동안 해도 바뀌고, 이씨 역시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탄광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일하는 틈틈이 그는 이마리학교에 다니고 있던 스에다씨의 딸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주인집 딸은 이런 이씨를 무척 따랐다. 1945년 3월경 스에다씨가 공사장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스에다씨는 그때 기다큐슈(北九州) 지방의 방공호 공사를 도급 맡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차츰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다, 미군의 공습이 본토에까지 잦아지자 일본은 장기전을 도모할 생각으로 전국 각지에 방공호 공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기다큐슈는 군수지방인 탓에 미군의 공습이 훨씬 잦았다. 일본 정부는 방공호 공사를 빨리 끝내라고 독촉했고, 스에다씨는 한 사람의 노무자라도 더 필요했던 처지였다. 이왕 온 김에 돈이라도 얼마간 모을 수 있다면 좋을 일이었다. 방공호 파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탄광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 얼마간의 돈도 만질 수 있었다. 일하는 틈틈이 노무자들의 편지를 써 줬다. 주로 고향의 부모님이나 처자식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였다. 특히 주방 일을 돕던 경상도 의성에서 온 젊은 아주머니는 그동안 부모형제가 그리웠지만 여태 소식 한번 보내지 못했다며 늘 편지를 부탁해 왔다. “그곳 서기로 있는 사람한테 시집왔는데 편지 쓰면서 같이 많이 울었지. 자기가 옆에서 부르면 내가 옆에서 글씨 써주고. 아주머니가 밥이나 누룽지를 감춰 뒀다 많이 주기도 하고 잘해 줬어.” 1945년 5월 중순이었다. 그날도 다른 노무자들과 함께 방공호 공사장에서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오전 10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미군의 폭탄이 떨어졌다. 이날의 공습은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6~7대의 미군 비행기는 하늘을 몇 바퀴 선회하더니 우박처럼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우라사키조선소와 방공호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 폭탄세례에 혼비백산한 이들은 일하던 방공호 공사장에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공습은 20여분간 계속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방이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아직도 공포에 떨고 있었다. 방공호 밖은 완전 쑥대밭이었다. 일본군 신병 시체 몇 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고, 여기저기서는 사람 살리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두 달 가까이 일해 오던 방공호도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 있었다. 그 뒤부터는 일주일에 두 세 번씩 공습이 찾아왔다. 더 이상 방공호 공사도 중단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나가사키에 무서운 폭탄이 떨어졌다고 했다. 사람이 재가 되어 죽고 나무들도 모두 말라비틀어져 죽었다고 했다. 핵폭탄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이 왔다. 꿈만 같았다. 천년만년 이어질 것 같던 일본이 패망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일본 헌병들은 말과 사이카를 타고 거리를 질주해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졌다. 많은 군인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우리사키 조선소와 거리도 온통 한국인 노무자들뿐이었다. “사람들이 온통 미처 날뛰었지. 즉석에서 돈을 추렴해 소 한 마리를 잡았어. 일하던 사람들이라 돈은 얼마씩은 있었거든. 해방이 됐다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시모노세키 항은 귀국선을 타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귀국선을 타려는 사람이 워낙 많아 배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하루 이틀 기다린 것이 벌써 한 달이 다 가고 말았다. 무작정 더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매형과 하역부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1인당 350원이나 되는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지만 고향에 돌아간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가릴 입장이 아니었다. “정식 허가 없이 다니는 배 한척을 구한 것인데 장흥사람들 50여명이랑 같이 왔어. 선장은 태풍이 불어 도저히 못 가겠다는데, 억지로 우기다 시피 해서 배를 띄웠지.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가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집채만 한 파도에 배가 춤을 추는 거야. 비는 오고, 기관 고장으로 선장도 못 가겠다고 하고 이러다가는 다 죽게 생겼어.” 인근 이키시마항으로 긴급하게 피한 이들은 대마도를 거쳐 10여일 후에야 마침내 부산항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조국이었다. “대구를 거쳐 대전에서 호남선을 타고 영산포역에 도착했지. 가는 곳마다 만세를 부르고 난리였어. 노인들도 역에 나와서 고생하고 왔다고 주먹밥 하나씩 나눠 주더라고. 가슴이 울컥했지. 역시 우리나라에 오니까 그렇게 좋드만….” 영산포역에 도착하니 이미 고향집에 온 것만 같았다. 영암까지는 한 달음에 달려오듯 했다. “사립문을 들어서니까 할머니가 맨발로 뛰쳐나와 나를 잡고 우시더라고. 어머니는 집에 안계시더라고. 해방이 돼도 남들은 다 오는데 왜 우리 아들만 안 오는가 하고 어디 점을 보러 갔다고 없더라고….” 그 뒤 33년간 초등학교 교편생활을 한 이씨는 정년퇴직 후 영암에서 지금까지 조그만 농사를 지으며 고향 들녘을 지키고 있다.
그날 밤 이씨는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주마등처럼 월출산, 구림평야, 맑은 실개천, 토담집과 할머니, 부모님 얼굴이 차례로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간 얼마 전 일본인 감독 친척집에서 먹었던 하얀 쌀밥이 생각났다. 고향에서도 못 먹어 본 쌀밥이었다. 갑자기 내선일체(內鮮一體)니 뭐니 떠들던 말들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