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촌서 야학 운영하다 1910년대 말부터 울산에 정착 지역유지 협조 얻어 북정동 울산청년회관 둥지 틀어 차용규 도움으로 해방 무렵까지 학생 3천여 명 배출 일제강점기 수많은 야학 생겼지만 재정난에 폐교 잇따라 사립학원 명성 높던 해영학원 휴원에 재개원 촉구 성명도
정갑윤 국회의원이 지난 10일 ‘전국야학협의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이 보도를 보는 울산사람들은 두 가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나라에 아직 야학이 있나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 의원이 야학과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나 하는 것이다.
|
|
|
▲ 일제강점기 중구 북정동에 있었던 울산청년회관은 울산야학의 중심지로 안태노 선생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일해 당시 언론으로부터 ‘울산야학의 선구자’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현재 울산향토문화연구회 사무실로 사용되는 이 건물은 그동안 일부 개축 되었지만 건물 형태는 옛 모습 그대로다. |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야학이 있고 정 의원은 야학과 관계가 깊다. 울산만 해도 반구 2동에는 지금도 1990년대 강현필씨가 이끌었던 야학인 대안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배움의 기회를 잃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데 요즘도 강의가 계속되고 있다.
정 의원이 야학에 관여한 것은 70년대다. 좀처럼 다선을 허락하지 않는 울산에서 4선의 위업을 달성한 정 의원은 학창시절에는 지독히 가난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무렵 농소 가대마을에 살았던 그는 집이 워낙 어려워 입학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때 다운동 척과에 살았던 당숙이 정 의원을 초등학교에 보내어 주겠다고 해 척과로 갔으나 당숙도 정 의원을 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되어 1~2년 정도 척과에 있다가 가대로 돌아왔다.
가대에서 풀 베고 소먹이고 있을 때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마을 이장이 서당에 입학시켜주어 서당 생활을 했다. 서당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그가 욕심을 내어 간 학교가 농서초등학교였다. 입학이 늦어지다 보니 급우들 보다 연령도 3~4세가 많았다.
농서초등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 월반을 해 6년 과정을 5년에 마치고 울산제일중학교로 진학했다. 중학교 때는 3년 내내 신문배달로 학비를 충당했다. 그가 신문배달을 했던 동아일보 보급소는 동헌 아래 현 농협 맞은편에 있었다.
부산 경남고등학교에 합격은 했으나 7350원의 입학금을 못 내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화조회’에서 입학금을 내줬었다. 화조회는 당시 울산 유지들이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구성한 단체로 박진년 신화상회 주인, 이종수 인제치과 원장, 이상숙 명 다방 주인, 현 동아약국 김규형씨가 회원으로 있었다.
입학은 했지만 하숙비가 없어 걱정할 때 당시 최영근 국회의원과 친숙했던 이상숙씨가 부산 서면에 있었던 최 의원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천거해 고교 1학년은 최 의원의 아들을 가르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서면과 학교가 있었던 토성동이 너무 멀어 2학년 때부터는 학교에서 가까운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의 말대로 정신없이 남의 집을 8~9군데 돌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야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70년대 울산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되면서다. 이때는 형이 운영했던 목재회사가 잘 되어 그의 생활도 안정되었다. 당시 울산에는 BBS가 운영하는 야학이 중구 북정동 동헌 뒤에 있었는데 이 학교에서 7년간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학생 수는 450여명으로 요즘 농촌 초등학교 보다 많았는데 이민규씨(78·전 경남도의회 부의장)가 이 학교 교장이었다. 이씨는 1963년부터 무려 24년간 이 학교 교장으로 일해 요즘도 울산에서는 ‘울산 야학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고 있다.
이씨는 “당시만 해도 울산에 대학 졸업자들이 많지 않아 교사를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정 의원이 헌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면서 “그때 도움이 고마워 요즘도 선거 때마다 앞장서 그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70년대 들어 울산사회에 들불처럼 번졌던 재건학교도 도왔다. 당시 울산에서 재건학교 일을 많이 했던 인물이 범서읍 출신 서진기씨였다. 서씨는 울산에서 군 장교로 근무할 때부터 재건학교 교사로 활동했는데 지금도 범서읍에는 당시 재건학교 건물이 있다.
정 의원은 이 무렵 울산 각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버려진 헌 책·걸상들을 가져와 형이 운영하는 목재소에서 고친 후 이를 재건학교에 가져다 주었다. 정 의원이 야학 고문직을 수락한 것은 이런 그의 활동과 무관치 않다.
울산지역에 처음 야학이 문을 연 것이 1917년 9월이다. 울주군 중남면 신화리에서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마을 초당을 빌려 수업을 한 것이 처음인데 이때는 책·걸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교실도 협소해 제대로 학습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21년 5월에는 김좌근씨와 김인수씨 등 마을 사람 20여명이 교실 1동을 신축하고 공부를 시킨 것이 울산 야학의 시작이었다.
울산에 여자야학이 설립된 것은 이보다 불과 4개월 뒤인 1921년 9월이었다. 이 무렵 울산기독교 청년회 초청으로 강연 차 대구에서 울산으로 왔던 이선애 여사가 여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에 공감한 지역유지들이 130원을 내어놓아 울산여자야학이 이해 10월 1일 문을 열었다. 초기 여자야학에서는 전필란과 서시성 여사가 교사로 일했다.
1920년대 울산 사립학원으로 가장 명성을 떨친 학원이 해영학원이었다. 이 학원은 당시 울산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했는데 박병호와 양봉근 등 청년회 지도자들이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학원이 1927년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잠시 문을 닫게 된다. 이렇게 되자 울산사회 지도자들이 해영학원의 재개원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었다.
|
|
|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당시 청년운동가였던 차덕출은 울산군민을 상대로 “지역 유지들이 해영학원이 문을 닫는 것을 외면한 채 교육사업에 돈을 쓰지 않고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나무랐다.
그는 또 “우리나라에서 제법 큰 도시인 울산이 이런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개탄하면서 “우선 금력이 있는 자들이 성금을 내어야 할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1930년대에 들어서면 야학이 곳곳에서 세워진다. 일제는 이때가 되면 각 면마다 초등학교를 세워 매년 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된다. 그러나 이들이 진학할 상급학교가 없다보니 각 면마다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중학 과정의 많은 야학이 건립된다.
이때만 해도 야학이 따로 시설을 갖지 못해 초가였고 학생들 역시 학습시기를 놓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통학교에도 다니지 못한 학생들이 입학을 하다 보니 연령층이 다양했다.
그러나 초기 의욕적으로 시작한 야학들 중 나중에 재정난을 못이겨 문을 닫는 학교도 늘어났다.
1932년 4월 동아일보는 “지방유지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가운데도 수업을 계속해 왔던 울산야학들이 최근 매월 10전의 월사금도 못 내어 수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운 학생들이 많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야학에 헌신했던 울산의 대표적인 인물로 울산청년회관의 안태노 선생과 병영야학의 박영하 선생을 들 수 있다.
이중 안태노 선생은 일생을 야학에 바쳤다. ‘울산야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그는 웅상 출신으로 1907년 30세 나이로 울산의 빈곤 아동 교육에 헌신키로 하고 웅촌 야학을 시작했다. 이후 10년간 웅촌에서 야학을 운영하다가 울산으로 온 때가 1910년대 말이다.
울산에 온 그는 처음 지역 유지들을 상대로 초등학교는 졸업했으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진학을 못하는 아동들의 교육문제를 협의했으나 이에 응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혼자 성남동과 옥교동 사무실을 빌려 학생들에게 국어와 산수 등 기본 학습을 가르쳤다.
이처럼 열심히 야학을 이끈 안 선생을 지역 유지들이 인정하고 북정동 울산청년회관을 내어 준 것이 1921년이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개교 당시만 해도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이 많아 학생 수가 200여명이나 되었고 교사들 역시 계몽운동을 펼친다는 사명감으로 모여들어 울산청년회관 야학은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야학 역시 시간이 가면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수업을 멈출 때가 많았는데 이때마다 안 선생은 유지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거둬 학교를 이끌어갔다.
이 때 그가 자주 만나 야학운영 문제를 협의했던 사람이 당시 울산의 최고부자 차용규씨였다. 차씨는 울산양조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안 선생은 차씨로부터 결국 야학에 소요되는 비용 일체를 울산양조장에서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었다.
학원명칭이 정식으로 울산학습강습소로 개칭되고 수업도 과거 야간에서 주야간 학부로 확장되었던 것이 이 무렵이다. 이후 울산학습강습소는 해방이 될 때까지 무려 30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을 배출하게 된다.
당시 울산 언론은 안 선생에 대해 “반생을 빈곤 아동교육에 바친 교육가로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울산의 빈곤 아동을 위한 교육을 계속해 오고 있다”면서 “안태노 하면 울산교육계에 너무나 뚜렷한 족적을 남겨 우리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고 말하고 있다.
아쉬움은 이처럼 한 평생을 울산 야학에 바쳤던 그의 해방 후 행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에 울산야학을 취재하면서 고향 웅촌은 물론이고 울산에서 해방 후 야학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의 행적을 수소문 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첫댓글 한 지역 교육사-야학의 뿌리를 이렇게 정리된것을 보지 못햇는데 대단합니다 .장성운 이사님 노고와 사료밝힘에 고마운 인사를 드림니다. 전국야학이 본받고 이 자료 전야협교육연구원이 울산에(울산시민학교내)있으므로 정리보존 할것을 건의하며 관계된 고마운분의 자취를 찾아 예를 갖추도록 함께 노력할것을 다짐합니다 -전야협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