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3 4군(郡) 설치
▶ 1416년 태종16 4군 설치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 개척하여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1416년부터 1443년까지 여연ㆍ자성ㆍ무창ㆍ우예 등 사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4대 임금 세종대왕은 김종서로 하여금 6진을 설치케 하여 1434년부터 1449년(세종 31)에 석막의 옛 땅에 부령부를 설치함으로써 6진이 완성 되었다. 군(郡)은 조선시대 지방 행정구역상의 관청으로 도(道)의 아래, 읍(邑) 또는 면(面)의 위로 군청(郡廳)의 준말 진은 중요도에 따라 설치한 한 지역을 지키는 군대 또는 그 군대의 우두머리를 이르던 말로 진영(鎭營)의 준말로 특별행정구획이다.
조선 초기에 개척한 서북면(평안도)의 4군과 동북면(함경도)의 6진을 일컫는 말로서 4군은 압록강 상류인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무창(武昌)ㆍ우예(虞芮), 6진은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종성(鐘城)ㆍ온성(穩城)ㆍ회령(會寧)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ㆍ부령(富寧)이다.
4군은 조선 전기 북서 방면의 여진(女眞)을 경략하기 위해 압록강 상류에 두었던 여연(閭延)ㆍ자성(慈城) ㆍ무창(茂昌) ㆍ우예(虞芮) 등을 말한다. 두만강 방면의 육진(六鎭)과 더불어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압록강 방면에는 고려시대에도 하류지역에 서북면(西北面)을 두어 공민왕 때까지 벽동(碧潼)ㆍ강계(江界) 부근까지 조선 영토로 확보되었고, 상류지역의 동북면(東北面)도 공양왕 때 갑주(甲州:甲山)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여 국경지대를 개척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1403년(태종 3) 강계 만호부와 이웃의 입석(立石) ㆍ고합(古哈) 등을 합하여 강계부(江界府)로 개편하고 1416년 지금의 중강진(中江鎭) 부근에 여연군(지금의 慈城郡 閭延面)을 설치함으로써 4군의 설치가 비롯되었다. 1421년(세종 3)에 최윤덕(崔潤德)이 서북면에 연대적인 방어체제를 마련할 수 있도록 소현(小縣)을 혁파하여 거진(巨鎭)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했는데, 결국 동북면과 서북면의 모든 지역을 몇 개의 도, 즉 군익도에 분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1424년에 평안도는 각 익에 소속하는 군현을 다시 조정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 익(翼)에 분속되지 않았던 지역까지도 망라하여 재편성했다. 이후에 4군은 강계도호부와 함께 5개 도 가운데 강계도(江界道)의 중익에 분속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진족의 침입이 잦고 특히 1432년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이만주(李滿住)의 침입이 있자 이를 계기로 1433년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아 황해도ㆍ평안도의 병사 1만 5,000여 명으로써 이를 정벌했다. 이것이 제1차 야인정벌(野人征伐)이었다.
즉, 1433년 4월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崔閏德)을 총사령관으로 이순몽(李順夢), 최해산(崔海山), 이각(李恪), 이징석(李澄石), 김효성(金孝誠), 상호군 홍사석(洪師錫)이 각각 1대를 거느리고 강계부(江界府)를 출발하여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병력은 평안도 군사 1만 5,000명을 주축으로 했다. 이만주는 군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도피했고, 여진족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소개작전을 써서 대규모 충돌은 없었으나, 이 정벌로 강계와 여연 사이에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하여 이후 4군(四郡) 개척의 바탕이 되었다. 전황보고서에 따르면 조선군의 사상자는 5명이며, 적은 포로가 236명, 참수한 자는 170명이었다.
이 원정 후 여연과 강계 사이에 성을 쌓아 자성군이라 하고 여연의 남촌, 강계의 북촌 일부를 떼어내어 붙이고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1437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李)이 수행한 2차 야인정벌을 단행하였다. 즉,1437년 9월 이천(李), 홍사석(洪師錫), 이진(李震) 등을 시켜 8,000명의 병력으로 파저강을 건너 오미부(吾彌部 : 懷仁)를 소탕했다. 이 결과 1438년 이만주는 다시 북쪽으로 이주하여 흥경(興京)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여진족 내부의 분란으로 회령의 건주좌위가 우위와 좌위로 분리되었는데, 회령을 떠난 좌위는 마침 흥경으로 이주한 본위와 만나 합쳐졌다. 이를 계기로 여진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이만주는 조선에 대해 조공을 바치며 화평을 유지하는 반면 몽골족의 성장에 편승하여 요동지역을 침입했다.

4군과 6진
그리하여 1440년에 여연군 동쪽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을 설치하여 1442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1443년에는 여연ㆍ자성의 중간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을 설치하여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4군이 완성되었다. 1446년 갑산군 소속이던 산수보(山水堡)를 군으로 독립시켜 갑산과 무창을 잇는 중간거점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세종 때의 두만강ㆍ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영토 확정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양계지역에서의 군현제 운영은 적과 인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농업인구의 확보나 농토의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다. 농토를 따라서 흩어져 살다가 적침이 있으면 보로 피신하기도 했고, 거주지를 보로 옮기기도 했다. 북계진출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4군 6진이 설치되어 인구가 늘어난 뒤에도 야인의 침입은 계속되어 군비의 유지에 어려움이 많게 되자, 점차 4군철폐 논의가 활발해져 1445년(단종 3)에 여연ㆍ무창ㆍ우예를 철폐하고 주민을 강계부와 구성부로 각각 옮겼다. 1459년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겼다. 이후 이 지역을 폐4군이라 불렀으며 주민의 거주가 금지되었는데, 한때는 폐4군으로 옮겨 살면 여러 가지 역 부담을 면제해 준다는 낭설이 퍼져 대규모의 인구가 이동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폐4군은 1683년(숙종 9) 복설논의 이후 무창ㆍ자성의 2진이 설치되었으나 곧 혁파되었다. 그 뒤 1788년(정조 12)에 무창진이 복설되었다가 1813년(순조 13) 부(府)로 승격되어 부치를 후주보(厚州堡)로 옮기고 후주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