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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행로난 삼수지일(行路難 三首之一)-이백(李白;701-762) 20140424
金樽淸酒斗十千(금준청주두십천) 금항아리 맑은 술, 한 말 값이 만량이요
玉盤珍羞直萬錢(옥반진수치만전) 옥쟁반 좋은 안주 일만 냥의 값이어라
停杯投筯不能食(정배투저부능식) 술잔을 멈추고 젓가락 내던져 먹지 못하고
拔劍四顧心茫然(발검사고심망연) 칼 뽑아 사방을 둘러보니 마음이 답답하다
欲渡黃河冰塞川(욕도황하빙새천)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물길 막고
將登太行雪暗天(장등태항설암천) 태행산에 오르려니 눈이 내리니 하늘이 어둡네
閒來垂釣座溪上(한내수조좌계상) 돌아와 틈을 내어 개울에 앉자 낚싯대 드리운다
忽復乘舟夢日邊(홀복승주몽일변) 홀연히 다시 배에 올라 황제 옆에 가는 꿈꾼다
行路難,行路難!(행로난,항노난)! 세상살이 어려워, 세상살이 어렵구나
多歧路,今安在?(다기노,금안재)? 갈림길 많은데, 난 지금 어디 있는가
長風破浪會有時(장풍파낭회유시) 장풍파랑의 큰 뜻, 때맞춰 나타나리니
直挂雲帆濟滄海(직괘운범제창해) 그러면 바로 구름 같이 높은 돛 달고 창해를 건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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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는 이백이 장안에서 쫒겨나 2년후인 742년에 지은 것이다. 747년에 지었다는 설도 있다.
* 斗十千: 술의 값어치가 만금에 달하다는 의미
* 珍羞(진수):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 羞(받칠수, 드릴수) = 饈(드릴수 반찬)
* 筯=箸
* 拔劍四顧心茫然(발검사고심망연) 欲渡黃河冰塞川(욕도황하빙새천) 이구절은 鮑照의 <擬行路難>에 “상을 마주하고 먹을 수 없어, 검을 빼들고 기둥을 치며 길게 탄식한다.(對案不能食 發劍擊柱長歎息)라는 시구에서 차용한 것
* 太行(태항): 산이름, 주봉은 산서성 진성현 동남부에 있으며, 河北과 河南의 경계가 된다. 또한 분하의 동쪽 碣石山(갈석산)의 서쪽으로 만리장성과 황하 사이에 있는 모든 산이 태항산맥을 이룬다.
* 暗天=滿山이라고 된 책도있다.
* 수조벽계상(垂釣座溪上) 강태공이 渭水의 磻溪(반계)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주나라 문왕을 만나 등용됨
* 日變(일변): 당나라 장안. <宋書> 부서지(符瑞志)에 “伊擊(윤격:伊尹)가 탕임금에게 부름을 받을 때 배를 타고 해와 달 근처를 지나가는 꿈을 꾸었다.[伊擊將應湯命 夢乘船過 日月之傍]. 이후로 日邊(일변)은 황제가 있는 서울을 가르친다.
* 장풍파랑(長風波浪): 송서 <宗慤傳> 愨(성실할 각)에 의하면 종각이 어릴 적에 숙부인 宗炳이 그 소원을 묻자 종각이 대답하길 “원컨대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깨트리고 싶습니다. ”[願乘長風 破萬里浪]”라 하였다. 후대에 원대한 포부를 비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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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행로난 삼수지이(行路難 三首之二)-이백(李白;701-762)
大道如靑天(대도여청천) 큰 길은 푸른 하늘과 같건만
我獨不得出(아독부득출) 나만 홀로 그 길로 나서지 못한다
羞逐長安社中兒(수축장안사중아) 부끄러워라, 장안의 귀족 자제들 쫓아
赤雞白狗賭梨栗(적계백구도리률) 닭싸움과 흰 개 경주에 배와 밤을 걸까보냐
彈劍作歌奏苦聲(탄검작가주고성) 칼을 휘두르며 노래 불러 괴로운 소리 내고
曳裾王門不稱情(예거왕문부칭정) 왕후 문하에서 옷자락 끄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라네
淮陰市井笑韓信(회음시정소한신) 회음의 시정배들 한신 장군을 비웃었고
漢朝公卿忌賈生(한조공경기가생) 한나라 공경들 가생을 꺼렸지
君不見(군부견)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昔時燕家重郭隗(석시연가중곽외) 그 옛날 연나라 왕이 곽외를 존중하여
擁篲折節無嫌猜(옹수절절무혐시) 비 들고 허리 굽혀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을
劇辛樂毅感恩分(극신낙의감은분) 극신과 낙의가 은혜에 감복하여
輸肝剖膽效英才(수간부담효영재) 간 내고 쓸개 쪼개 충성을 다하여 재주를 다 받쳤네
昭王白骨縈蔓草(소왕백골영만초) 소왕의 백골도 덩굴과 잡초에 묻혔거니
誰人更掃黃金臺?(수인갱소황금태)? 어떤 사람이 다시 소왕의 부름 받아 황금대를 쓸 것인가
行路難,(항노난) 세상살이 어려워라
歸去來!(귀거래)! 차라리 돌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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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社中兒: 부귀가의 자제. 社는동아리나 단체
* 赤鷄白狗: 鬪鷄走狗와 같은 뜻으로 써였다. 당 현종이 닭싸움을 좋아하여 닭싸움꾼들이 황제의 총애를 받었다고도 함.
*走狗: ① 수렵용개, ② 개를 풀어 사냥함, ③ 앞 잡이(현대중국어) ④ 제자, 보잘것없는 문화생, <鄭板橋는 서청등의 시를 좋아했는데 이들 시에 봉인을 찍어 <徐靑藤門下 走狗 鄭燮>
* 彈劍作歌: 칼을 두두리며 노래를 부른다는 뜻, 마음의 불평을 토로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史記>의 孟嘗君列傳에 馮驩(풍환)이라는 식객이 맹상군의 대우에 대한 불만을 품고 칼을 치며 노래하길“ 긴 칼아, 돌아갈까 보다, 밥을 먹는데 물고기 반찬이 없구나 [長鋏歸來乎 食無魚], 긴 칼아 돌아갈까 보다, 출타하는네 수레가 없구나 [長鋏歸來乎 出無輿]라고 불평을 노래하였고 이로하여 풍환이 점점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 曳裾王門(예거왕문): 王侯權貴家의 식객이 됨을 뜻함. <漢書> <鄒陽傳>에 추양이 오왕에게 보낸 글 가운데 “고루한 마음을 꾸미고자 하였다면 어느 왕의 문하에서인들 긴 옷자락을 끌지 못하겠습니까.[飾固陋之心 則何王之門不可曳長裾乎]라고 하였는데 후대에 권세가의 식객이 되는 것을 ”曳裾“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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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稱情: 稱은 저울을 뜻하며 여기서는 相當 또는 부합의 뜻으로 쓰였다.
* 淮陰市井笑韓信(회음시정소한신): 한신이 회음에 살 때 시정배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나와 조롱을 당한 고사를 인용
* 漢朝公卿忌賈生(한조공경기가생): 賈誼가 한 文帝의 신임을 얻어 博士로 등용 되었으나 다른 신하들이 질시하여 長沙太傳으로 좌천된 고사를 인용한. 가의는 20세에 박사를 받아 요직에 등용되어 모든 정사를 개혁적으로 추진해나갔으나 신하들의 권력을 당하지 못하고 물러나 장사에서(굴원이 유배된 곳) 33세살에 죽었다.
*昔時燕家重郭隗(석시연가중곽외): 연나라 소왕은 즉위 한 뒤 현사들을 많이 초빙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는데 곽외를 스승으로 초빙한 것을 계기로 많은 현인들이 모여 들었다는 고사를 인용함.
*擁篲折節無嫌猜(옹수절절무혐시): 빗자루를 들거나 허리를 굽혀 상대방을 존중하는 행위. <史記> <맹자순경열전>에 “<鄒衍(추연)이 연나라에 오자> 燕 昭王이 빗자루를 들고 앞장섰으며, 제자들이 앉은 자리에 들어가 수업받기를 청하였다.[昭王擁彗先驅 請列弟子之座而受業]”라고 하였다.
* 신현학(전 사회부장관, 경제부원장, 국무총리, 약목사람) 이분의 장관때 대구 고려예식장에서 대구경북지역 유림회의에 참석한후 식당에 가서 식사하는동안 주위에서 술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술을 가져오라고 하자 본인이 직접나서 큰 양은주전자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장관님이 어찌 이런 일을 하자! 신장관 말이 나이가 어린 내가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총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마치 연 소왕과 같이 인재를 모실 때 스스로 빗자루를 들고 예을 다함이 이와 같다고 신총리 생각이 난다고 소개함-> “팸더곰 선생“
* 연나라 소왕 또는 소양왕은 아버지는 연나라 회왕으로 진나라에 초청받아 가서 죽자 장자인 平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때 제나라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망하였다. 이에 소양왕(평의 이복동생)이 각지에서 인재를 모아 나라를 다시 세웠다.
* 연나라는 의로운 나라로 진시왕을 죽이려고 연나라 태자단이 자객으로 나감.(중국의 북쪽사람은 사람들이 강하고 의롭지만 야만성이 강하다고, 중국남쪽은 기질이 완만하지만 소심하다고 말한다.)
* 劇辛樂毅感恩分(극신낙의감은분): 劇辛(극신)과 樂毅(낙의)가 연나라 소왕의 예우에 감복하여 신하가 되었음을 뜻한다. 극신과 낙의는 각각 조나라와 위나라 사람으로 모사와 병법가로서 5개 제후국의 동맹을 주도하여 제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다.
* 輸肝剖膽(수간부담): 간을 빼내고 쓸개를 쪼개는 것으로 충심을 다한다는 뜻. <史記> <淮陰侯列傳>에 “신이 배와 가슴을 열고 간과 쓸개를 꺼내어 저의 계책을 바친다 하여도 그대가 사용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臣願披腹心 輸肝膽 效愚計 恐足下不能用也]”라고 하였다.
* 黃金臺(황금대): 燕나라 昭王이 千金을 놓고 천하의 현인들을 초빙하였다고 전하는 臺의 이름이다. <文選> 李善의 注에 <上谷郡圖經> 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黃金臺는 易水 동남쪽 18里에 있는데 燕나라 昭王이 臺위에 천금을 두고 천하의 선비를 끌여 들였다. [黃金臺 易水東南十八里 燕昭王置千金於臺上 以延天下之士]”라고 하였다. 후에 賢士를 예우하여 초빙하는 전고가 되었다.
83. 행로난삼수지삼(行路難三首之三)-이백(李白;701-762)
세상살이 어려워라-이백(李白;701-762)
有耳莫洗穎川水,(유이막세영천수), 귀가 있어도 영천의 물에 씻지 말고
有口莫食首陽蕨.(유구막식수양궐). 입이 있어도 수양산의 고사리 먹지를 말아라
含光混世貴無名,(함광혼세귀무명), 빛을감추고 세상에 섞이어 이름을 드러내지않음이 귀하거니
何用孤高比雲月?(하용고고비운월)? 어찌 고고한 듯 구름과 달에 비기는가
吾觀自古賢達人,(오관자고현달인), 나는 보았소, 옛날부터 어질고 출세한 사람
功成不退皆殞身.(공성부퇴개운신). 공을 이루고도 물러서지 않아 모두가 죽임을 당한 것을
子胥旣棄吳江上,(자서기기오강상), 오자서는 오강에 내버려지고
屈原終投湘水濱.(굴원종투상수빈). 굴원은 상수물가에 몸을 던졌소
陸機雄才豈自保?(륙기웅재개자보)? 육기의 큰 재주가 어찌 자신 한 몸을 보존하였던가
李斯稅駕苦不早.(리사탈가고부조). 재상 이사의 휴식은 아쉽게도 때가 늦었다네
華亭鶴唳詎可聞,(화정학려거가문), 화정에 학의 울음 어찌 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上蔡蒼鷹何足道!(상채창응하족도)! 상채의 푸른 송골매를 어찌 말하랴
君不見,(군부견),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吳中張翰稱達生,(오중장한칭달생), 오나라 사람 장한은 통달한 사람이라
秋風忽憶江東行.(추풍홀억강동항).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홀연히 강동으로 돌아갈 생각했다네
且樂生前一杯酒,(차낙생전일배주), 살아서 한 잔 술을 즐기려네
何須身后千載名!(하수신후천재명)! 이 한 몸 죽은 뒤에 천년 이름을 어디에 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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潁川水: 영천은 지금의 하남성에 있다. 堯임금 때 高士인 許由가 出仕를 원치 않아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들은 후 이곳에서 귀를 씻었다고 전해진다.
水楊蕨: 수양산의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의 남쪽이라고도 하고 하남성 偃師縣(쓰러질 언)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伯夷 叔齊가 굶주리며 은거하든 곳인데 그들은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문왕의 아들 武王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 숙제 만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었다.
含光混世: 함광은 재주와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간직하고 있음을 말한다. 含光混世는 <노자>의 “지혜의 빛을 부드럽게하고 속세의 티끌과 함께 한다. [和其光 同其塵]”와 그 뜻이 같다.
殞身(운신): 몸을 버려 죽다.
子壻旣棄吳江上: 伍子胥가 吳王 夫差에게 충직하게 간언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죽여 시신을 吳江에 던져졌다.
屈原終投湘水濱: 屈原은 楚나라의 大夫로 이름은 平, 자는 靈均이다. 懷王에게 발탁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훗날 革尙, 子蘭 같은 무리에게 참소와 비방을 당하여 쫒겨 났다가 회왕의 아들인 頃襄王때 멀리 내침을 당하자 5월 5일에 汨羅江(명라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굴원은 연행제를 주장하고 진나라 장의는 합종을 주장하였다. 경양왕에게 재임용되지만 다시 쫒겨나서 죽게된다.>
陸機雄才豈自保?: 陸機는 지금의 江西省 吳縣사람이다. 오나라 대사마인 육항의 아들이었는데 온라가 멸망한 후 진나라로 들어가 장화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진나라 해제 태안 2년(303) 성도왕 司馬潁(사마영)과 함께 장사왕 司馬乂(사마예)을 칠 때 대장군이 되어 전쟁에 나갔으나 결국 전쟁에 대패하였다. 宦官(환관) 孟玖가 육기를 참소하여 사마영은 육기를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였다. 사형을 받으면서도 태연자약하게 “화정의 학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있을까?”라고 하였다. 그의 나이 43세.
李斯稅駕苦不早: 李斯는 초나라 上蔡(거북채)(지금의 하남성 汝南縣북쪽)사람이다. 진나라에 들어가 呂不韋의 舍人이 되었다가 훗날 진나라의 승상이 되어 대부분의 법령이 그에게서 나왔다. 그의 아들들은 진나라 공주와 결혼하고 딸들은 진나라 공자들에게 시집갔다. 그런 영광을 받으면서 너무 화려함을 걱정하였다가 나중에 자기 작은 아들과 함께 趙高에게 무고당하여 도둑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허리가 잘려 죽었다. 죽으면서 아들에게 “내 너와 함께 디시 한번 누런 개를 끌고 매를 팔뚝에 얹고서 상채 동문쪽으로 나가 토끼 사냥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제 그렇게 할수 없겠구나!” 라고 하였다. 稅駕(멍에가)는 말의 멍에를 풀고 수레를 멈춘다는 뜻으로 휴식을 말한다. 稅=脫
張翰: 자는 季鷹이고 오나라 사람이다. 제나라에서 대사마동조연을 하였으나 가을 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오나라 땅의 고수나무, 순채국, 농어회가 생각이 나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옴. [使我有身後名 不如卽時一杯酒]. 당시 사람들이 그의 曠達함을 높이 평가했다.
< 역주당시삼백수 I에서 역주를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