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라뎃다 생가
성모 마리아는 1858년 2월부터 7월까지 18회에 걸쳐 벨라뎃다 수비루(14세)에게 발현 하셨다. 연약한 양치기 소녀 벨라뎃다가 친구 및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들로 나가 개울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을 때였다. 아주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 저만치 서 계시는 것이었다. 별 말씀 없이 부인은 아기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결함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을 지닌 채 푸른 띠를 나부끼며 정성스레 합장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리고 계셨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벨라뎃다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의 발현 때 '나는 원죄없는 잉태'라 하심으로써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선포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교의를 확인하신 마리아는 기적의 샘을 솟게 하셨다. 즉 벨라뎃다로 하여금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이 귀한 그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에 샘을 파게하시고, 그 물로 불치의 병자들을 속속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동정 마리아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 공인되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원죄없는 잉태'의 성모상이 1864년 최대의 성황리에 안치되었다.
벨라뎃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하여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양육할 형편도 못되었다. 소유하고 있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방앗간마저 빚 때문에 저당 잡혀서 그야말로 끼니도 잇기 어려울 정도의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서 벨라뎃다는 이웃 마을의 아기를 잃은 집에 얹혀서 15개월이나 살다가 온 적도 있었다. 벨라뎃다는 그런 집의 맏딸이었다.
◆ 벨라뎃다의 생가
1844년 벨라뎃다 성녀는 이 집에서 태어나 10살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물레방앗간 이었는데 벨라뎃다의 가정은 처음에는 제법 잘 살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하나 밖에 없는 방앗간이라 동네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사람이 워낙 무골호인이라 품싻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냥 공짜로 일을 해주고 외상으로 해준 일은 떼이기가 다반사였다한다. 그래서 결국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방앗간은 마침네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날씨는 추운데 식구는 많고 딱한 사정을 가엽게 여겨 마을 이장이 비어있는 마을 감방서 살도록 주선을 해 주었다. 아래의 까쇼가 벨라뎃다와 그 가족들이 살던 감방인데. 원래의 방앗간은 지금 기념품 가게로 변했다. 그러나 옛날의 방앗간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지금도 옛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옛 감방 - 까쇼 (Le Cachot)
프랑스어로 꺄쇼라고 부르는 감방인데 어린 시절 벨라뎃다는 너무나 가난하여 가족들이 이 곳에서 살았으며 벨라뎃다가 성모님을 만난 것은 이곳에서 살 때였다. 원래 죄수들의 감방이었던 이 곳을 사람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감옥을 옮기면서 이 낡은 건물을 벨라뎃다의 친척이 불하 받았다고 한다.
물레방앗간을 하던 벨라뎃다의 아버지가 망해서 갈 곳이 없자 친척이 감방 하나를 빌려주었다. 벨라뎃다 4남매와 부모 등 6식구가 이 단칸 감방에서 생활했다. 4-5평 정도의 작은 방이 북쪽 방이라 어둡고 추우며 공기가 잘 안통해 천식을 앓던 약한 벨라뎃다에게는 더 없이 고통스러운 거처였다.
이곳은 산중이라 몹씨 춥다. 그래도 우리나라 겨울 처럼 매섭지는 않은데 습도가 높아 으스스하게 춥다. 이런 추위가 몸을 더 상하게 한다. 냉방을 덥히고자 2월 11일 벨라뎃다는 동생과 친구와 함께 땔감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던 길에 마사비엘 동굴에서 성모님을 만난 것이다. 지금 이 건물은 수녀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벨라뎃다가 어릴 적 살던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 바트레스(Bartres) 마을
벨라뎃다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루르드에서 오리 정도 떨어진 이웃 마을 유모집에서 잠시 살았다. 마을 어귀 오른 쪽 언덕에 양우리가 있다. 벨라뎃다는 갖난 아기 때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 친구인 양모에게 와서 자랐다. 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릴 때의 신세를 갚으라고 다시 양모 집에 보내어 벨라뎃다는 농사 일을 거들고 양을 치다가 첫 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하여 루르드로 돌아 왔을 때 성모 발현을 보았다. 마을에는 양모의 집과 벨라뎃다가 다니던 성당이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양 우리 앞 언덕배기에 걸터 앉아 마을을 내려다 보면 벨라뎃다가 자연 속에서 누렷을 법한 평화로움을 지금도 맛 볼 수 있다.
아래 사진들은 유모의 집이 있던 조그마한 마을의 평화로운 정경으로. 전형적인 프랑스의 시골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을 한 가운데 성당이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 성당의 자그마한 마당은 이 마을 신자들의 공동묘지이다. 한 집에 무덤이 하나씩이다. 집집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 뚜껑을 열고 순서대로 관을 넣는다. 가족들은 성당에 올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산이와 죽은이가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간다. 성당 앞에는 찻집이 있는데 이 집에서 직접 굽는 쿠키와 향기 좋은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루르드에 좀 여유를 가지고 순례하는 사람들은 이 곳까지 산책을 할 만하다. 유모의 집은 지금 선물가게를 하고 있는데, 벨라뎃다가 살던 방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벨라뎃다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수녀가 되었으며, 35세를 일기로 1879년 선종하였고 1933년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