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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6일(주일) 주일설교 마태복음 23:1~12 '자기를 낮추는 자' 새찬송가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오늘은 마태복음 23:1~12절 말씀을 중심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문안 받고 랍비라 칭함 받기만 좋아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선생과 아버지와 지도자는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자기를 낮추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섬기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잠언 15:3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요 부흥사인 스펄전 목사님 그의 저녁묵상에서 겸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의 겸손은 항상 축복을 갖고 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하나님의 온 보물창고는 그것을 받기에 충분히 겸손한 영혼, 즉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을 영혼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는 충분한 분량까지 우리 모두를 축복하십니다. 만일 그대가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축복을 갖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대의 겸손하지 못한 영혼에게 그의 승리를 얻게 하신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한 왕관을 붙잡을 것입니다. 그때 새로운 적(원수)를 만나면, 그대는 패배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계속 낮은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즉 계속 겸손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실로 겸손하고 감히 한 알갱이의 칭찬조차도 손대지 않을 때(감히 추호의 칭찬도 바라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떤 제한(한도)도 두시지 않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겸손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동료인간들과 효율적으로 교제하게 할 수 있습니다.(즉 겸손하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어떤 정원이나 꾸미는 꽃입니다. 이 겸손은 그대가 모든 삶의 요리에 양념을 하는 향료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겸손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첫째, 자기를 낮추는 자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1~4절).
대한민국의 3대 종교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천주교가 약 40%, 불교가 35%, 기독교가 10% 정도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천주교는 말수가 적고 사랑을 강조하면서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합니다. 또한 불교는 말을 안 한다고 합니다. 묵언 수행입니다. 즉,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몇 가지 현상으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잘못 보여주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말만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세 번째는 말과 행동이 틀리다는 것, 네 번째는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엄격했던 이들은 백성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들은 늘 가르치는 역할을 했고 그러다보니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이 앉은 ‘모세의 자리’ 즉 그들의 권위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채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의 권위만 내세우며,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말로 가르치기만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자리를 그들은 노력해서 차지하고 싶어 했고,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며 세세한 조항까지 엄격히 지키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말과 행동의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 7:21)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 2:17) 신앙의 말과 신앙의 삶이 일치되는 상태, 그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영성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이처럼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직장생활이나 친구들과의 삶, 교회에서의 신앙생활, 심지어 가정생활에서도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옴기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자신의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내가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가르치기만 하고 정작 나 자신은 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자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까?
둘째 자기를 낮추는 자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5~7절).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 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문안 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경문과 옷술’은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이기에 나쁜 것이 아니지만 문제는 ‘넓게 하며, 길게 하고“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경건을 과시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종교적인 과시와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라틴어에 『Coram Deo』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Coram’은 '∼의 면전에, ∼의 앞에, 공개적으로'란 뜻입니다. Deo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즉 『Coram Deo』란 '하나님의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합니다.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고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곳 역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마르틴 루터는 하늘을 쳐다보며 담대히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 앞에 서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당할 때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보좌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원수까지 용서하신 것처럼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돌로 쳐죽이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내 마음도, 생각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용) 내가 듣고 싶은 호칭은 무엇입니까? 저는 늘 목사님이라는 호칭으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1995년 5월부터 교육전도사부터 시작했은지 그렇게 산 지가 벌써 올해까지 하면 28년이 되었네요. 그런데 올해 3월부터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호칭외에 다른 호칭을 들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급식실에서는 ‘이몽용 조리원님’ ‘이몽용주무관님’ 더 기분 나빴던 호칭은 ‘이몽용씨’ 아이들은 가끔씩 ‘아저씨’ 요즘은 ‘이주임님’ 이란 호칭을 매일 듣고 삽니다. 어떤 때는 내가 목사인데, 라고 하면서 살짝 기분 나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때에 되었음에도 내려 놓기 싫어서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서 ‘넓게 하며 길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자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셋째, 자기를 낮추는 자는 권위와 질서를 인정하고 섬기는 자입니다(8~12절). 오늘 본문 1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는 자에 대한 명언을 해주고 계십니다. 12절 “누구든지 자기는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십니다.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라. 거기가 진짜 크고 높고 으뜸이 되는 영광의 자리이다." 11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섬김의 자리'는 끝자리이며 동시에 으뜸의 자리입니다. '섬김'은 으뜸과 끝을 이어주고, 높음과 낮음을 연결해 주는 은혜의 연결 고리입니다. 섬기는 자는 한 손으로는 끝의 자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으뜸 자리를 붙잡아서 그 둘을 하나로 이어, 직선 공동체를 원형 공동체로 바꿉니다. 저는 직사각형의 테이블보다는 원형테이블을 좋아합니다. 직사각테이블은 서로 서로를 다 볼 수 없는 폐쇄적인 자리배치인데, 원형테이블은 서로 서로 다 볼 수 있고, 상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집에 방에서 요리를 먹을 경우가 가끔씩 있는데, 그럴 때는 원형테이블이 있어 음식도 돌려가면서 덜어먹을 수도 있고, 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얘기할수도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도 성도들의 상호 섬김으로 직선공동체가 아니라 원형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나 직장 안에서나 가정안에서나 은혜의 연결 고리가 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기꺼이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진정으로 자기를 낮우는 자는 권위와 질서를 인정하고 섬기는 자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데서 오지 않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섬김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적용) 지금 나의 권세와 명예는 나를 따르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면 형제 의식을 갖고 섬기는 데서부터 온 것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스펄전의 설교내용을 제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스펄전은 ‘교만이라고 하는 파멸자’(합2:4)라고 하는 그의 설교에서 모든 경우에 ‘교만은 가장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설교내용을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누가 그런 부를 그에게 주었습니까? 그리고 그 부를 지금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 그것 중에 얼마를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부가 강상 그 소유자의 인격을 보장합니까? 부는 때때로 가장 비열한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 성실과 근면과 인고와 자기 부인에 대한 보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항상 그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교만 중에서 이 부라는 교만은 가장 비열한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도대체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가 자신의 재능을 창조했습니까? 두 개골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약간, 큰,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발달한 기관들을 가진 어떤 사람을 가정해봅시다. 그가 자신의 두뇌를 만들었습니까? 그가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었습니까? 우리의 혈통과 천부적 재능들 가운데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선물이므로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재능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흠 없는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만약 그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자기 속에 하나님께 반역하는 은밀하고 회개해야 하는 죄악들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도대체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오 나의 형제들이여,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우리의 은혜나 은혜들의 크기를 자랑하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순전히 자비의 행위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거지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거지라는 사실 때문에 자랑할수 있겠습니까? 빚이 많은 사람이 ‘나는 내가 당신보다 열배나 더 빚을 지고 있으므로 당신보다 자랑할 이유가 더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어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행태입니다. 그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받았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가장 많은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가장 많이 빚을 진 사람입니다. 제가 믿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눈을 부시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주님처럼 겸손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그의 배가 고기로 가득차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을 때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외쳤던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긍휼로 가득차면 가득찰수록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겸손히 밑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마땅히 스스로 자만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 우리의 꿈은 그 어떤 타당성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큐티인간증 ‘효자의 자리’ 박성우님
오늘 본문 11절, 12절을 읽음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세상가치관으로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군림하고 내가 지기 싫은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려 했던 거을 회개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보이려고 넓게 하며 길게 하는 것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섬김으로 본을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