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묵상 (220817) (정용진 요셉 신부 청주교구복음화연구소장)
오늘 복음에는 일꾼들의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세상의 통념과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이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며 놀다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가 품값으로 지급되는 일을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주인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을 부르러 광장에 나갑니다. 수확에 매진하였던 그는 일꾼들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하여 적어도 네 번이나 더 집을 나섭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이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포도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낮’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저녁’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고자 줄을 세웁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들이 가장 먼저 불려 나가 품삯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각과 주인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맨 먼저 나와 열두 시간씩 일한 일꾼들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일한 일꾼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맨 처음 나와 일한 이들에게도 나중에 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에는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은 공로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행하시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종교, ‘보상’의 종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선행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 두고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공로에 따라 지불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은 수고하며 땀도 많이 흘렸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먼저 부름을 받고 응답한 이들은 맨 나중에 와서 품삯을 받은 이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간 인생이 최고의 보상이고 감사한 인생이 아닌가?’ 비유 속 포도밭 일꾼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 앞에서 의아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습니까?
* [김도연 칼럼]프라하의 한글, 그리고 공산주의 박물관 동아일보 입력2019-10-10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어제는 한글이 태어난 지 573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국경일 또는 공휴일은 누구나 기다리는 날들이지만 그중에서도 한글날은 각별하다. 현충일, 제헌절, 광복절 등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름 자체에 무거운 느낌이 없다. 문자를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대단히 경이로운 것이다. 게다가 민초(民草)들의 어려움을 헤아린 최고 권력자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추진해 성사시킨 일은 인류사에서 세종대왕뿐이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ㄱ, ㄷ 같은 기본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습을 본뜬 것인데, 여기에 획을 더해 ㅋ, ㄲ 그리고 ㅌ, ㄸ으로 동일 계열 소리를 나타낸 것은 창의성의 극치다. 그리고 ㅏ, ㅑ, ㅒ 등의 모음은 특히 컴퓨터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문자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한글은 인류 문화의 보석 같은 존재다. 실제로 일본의 노마 히데키 교수는 2010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에서 한글을 ‘문자라는 기적’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한글은 갑오개혁 후 독립신문이 나오면서야 일상적인 공용문자로 쓰이게 되었으니, 이는 훈민정음 반포 450년 후의 일이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스스로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종종 소홀히 하는 듯싶다. 외국에서 한글을 만나면 당연히 가슴 뿌듯해진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1970년대 후반, 베르사유 궁전 안내판에 어느 날 추가된 ‘화장실’이란 한글에 감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 40여 년 전 일이다. 그리고 최근 체코 여행에서 같은 감격을 느끼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프라하 국제공항의 입국, 출국, 그리고 수하물 찾는 곳 등 수많은 안내판들은 체코어, 영어, 러시아어, 한글 이렇게 네 나라 언어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이런 안내판이 언제부터 걸렸는지 모르지만, 이는 우리 기업인들이 동유럽 시장 개척에 힘을 쏟으며 흘렸던 수많은 땀방울 덕택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국부(國富)를 쌓고 국격(國格)을 높이는 기업인들을 좀 더 존경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지난 40여 년간 대한민국은 세계무대에서 또 다른 기적을 이루었다. 18세기 중반에 지금의 체코,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영역을 모두 통치했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스스로의 제국에서 산업이 앞서 있고 땅도 비옥한 체코가 없다면 남는 것은 의미 없는 귀족들뿐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프라하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고 그 후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프라하는 동유럽의 색다른 문화와 전통을 찾아온 각국 사람들로 항상 붐비고 있다.
관광객들은 프라하에서 1000여 년 전에 세워진 성(城)이나 중세 기술과 예술의 결정체인 시계탑 등을 찾는다. 그리고 다양한 박물관을 방문하는 일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중에서 필자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곳은 ‘공산주의 박물관’이었다. 이곳은 1948년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가 1990년 붕괴되기까지의 체코 현대사를 보여 주고 있는데, 첫 전시실에는 그 시대를 압축해 표현한 꿈, 현실 그리고 악몽의 세 단어만이 벽에 기록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공산주의의 꿈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 분야가 당연히 강제로 일관했다. 체코의 당시 현실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커뮤니즘’을 지향하면서, 전국적으로 동시에 200만 명이나 동원되어 집단체조를 하곤 했다. 그리고 한 해에 수확할 농산물량만이 아니라 처형해야 할 사형수 수까지 공산당이 정하는 획일적 경제, 사회 정책이 시행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으며, 서방과의 국경에는 3000V 이상의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탈출을 막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자료들은 공산주의 40여 년이 결국 체코 국민 모두에게 더할 수 없는 악몽이었다는 메시지를 웅변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물관을 나서면서 다가온 안타까움은 지금도 우리 한반도의 절반이 공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울러 대한민국에 혹시 아직까지도 이런 꿈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면 프라하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주의는 이미 박제화돼 박물관에 전시된 낡은 이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