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돌봄 수단으로 등장한 로봇이 오히려 어르신의 사회 관계망을 축소하며, 돌봄 과정에서 노인을 대상화하거나 사생활 침해와 같은 문제도 만들 수 있습니다(Amanda Sharkey·Noel Sharkey, 샤키·샤키, 2012). 가족이나 간병인이 로봇에게 돌봄을 전담시키고 방문 횟수를 줄이는 면피성 돌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로봇은 관계의 대체제가 아닙니다. 간병인의 업무 부담을 줄여 사람이 어르신과 더욱 질 높은 대화를 나눌 시간을 벌어주는 관계를 위한 지원장치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이런 도구를 이용한 많은 이가 인형 로봇이 자신을 아이처럼 취급하는 경험을 했다는 겁니다(샤키·샤키, 2012). 몸과 마음이나 정신이 약해졌다고 애 취급한다는 못된 이야기를 사회복지 현장에서 가끔 들었는데, 인형 로봇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로봇을 통해 어르신을 달래는 모습은 마치 아이에게 인형을 쥐여주어 조용히 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샤키 교수는 노인 돌봄 로봇이 당사자를 ‘유아화’할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인형 로봇이 노인을 ‘제2의 유년기’를 겪는 존재로 여기게 하고, 이는 결국 노인을 감정을 가진 주체가 아닌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사물로 대하는 ‘사물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삶의 고통과 외로움을 겪는 어르신의 실존적 슬픔을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는 무례함일 수 있습니다. 로봇을 이용한 노인 돌봄이 노인을 기만하거나 유아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로봇이 실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함에도, 마치 어르신을 사랑하거나 공감하는 것처럼 속여서 인간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행위가 '기만'입니다. 이는 인간 존엄에 어긋날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인지증(치매)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인형 치료가 그들을 아이처럼 취급하는 결핍 중심의 접근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어르신이 겪는 외로움 대부분은 사회적 관계 단절에서 오는 실존적 슬픔인데, 이를 인형을 주며 달래는 방식은 마치 아이가 울 때 장난감으로 입을 막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생존’을 위한 중요한 지원 도구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술은 이처럼 살아있는 한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가게 거드는 노력이 한계를 맞이할 때 쓰이는 ‘보조제’여야 합니다.
이런 위험은 이미 일본 애니메이션 <노인Z>(1991)에서 다뤘습니다. 작품 속 최첨단 돌봄 로봇 침대 ‘Z-001’은 어르신의 생체 신호를 완벽히 관리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인을 거대 복지 비즈니스의 부품이자 관리 대상으로 전락시킵니다. 인공지능이 내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기록하여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가 되어가는 오늘날, 인간은 자칫 ‘복지 서비스’라는 거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숙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에 실린 「황혼의 반란」이나 영화 <플랜 75>는 효율과 효과, 숫자로 표기하는 실적만을 중시여기는 사회복지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70세 혹은 75세라는 특정 연령을 기준으로 사회적 ‘쓸모’가 다했다고 판단한 인간을 세련된 복지 서비스의 이름으로 안락사시킵니다. ‘이상과 철학이 없는 뛰어난 기술’이 어떤 비극을 만드는지 이 소설과 영화에서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국가와 기업이 건네는 친절한 상담과 죽음의 바우처는 샤키 교수가 우려했던 ‘기만적 돌봄’의 극치입니다. 당사자를 스스로 결정할 힘을 잃은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일입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오래 전 『절제의 사회(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이러한 사회를 예견했습니다. 현대 기술 사회가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을 빼앗고, 전문가들이 설계한 서비스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인공지능이 나의 욕구를 미리 결정해 주는 상황은 일리치가 말한 ‘자율성의 상실’과 ‘관리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망치를 든 이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이듯, 스마트폰을 든 이에게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앱’으로만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도구를 막연히 ‘미래’나 ‘발전’으로 여기는 순간, 인간의 온기가 담긴 돌봄이 ‘낡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이 우려스럽습니다. 시인 박노해(2020)는 접촉의 역사로부터 역행하는 것은 ‘사랑의 소멸’이라 했습니다. 자유로워지는 기술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더 깊은 진짜 만남 속에서 새로운 삶의 철학으로 나아가기’입니다. 어울려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 보는 것이 줄어든다(김찬호, 2022)’고 합니다. 인공지능이 답을 미리 보여주는 순간, 내가 보고 깨닫는 능력은 사라집니다. 타인과 관계하는 영역까지 기술에 손쉽게 내어주는 순간, 우리의 삶은 ‘생활’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이 될까 두렵습니다. 시선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마음이 머무는 시간은 짧아집니다. 잡다한 자극만 표면적으로 스칠 뿐, 상대방을 섬세하게 경청하는 능력은 감퇴합니다. 편리한 비대면 뒤에 숨은 '외면'을 경계합니다.
기술 발전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진보한 기술은 우리 사회 다양한 영역에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 사이 관계를 생동하는 사회사업가로서, 특히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다양한 형태의 기술은 고맙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기술은 중립적입니다. 기술이란 마치 칼과 같아서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당사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위협이 되거나 상하게도 합니다. 바늘은 옷을 수선하고 상처를 꿰맬 수 있지만, 뜻밖에 고문 도구로써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상과 의도’를 살피는 일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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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 (이반 일리히 글, 생각의나무, 2010)
『나무』 「황혼의 반란」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13)
『대면 비대면 외면』 ‘뉴노멀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 되는가’ (김찬호, 문학과 지성사, 2022)
<노인Z> (일본 영화, 하야카와 치에 감독, 2024)
<플랜 75> (일본 애니메이션, 키타쿠보 히로유키, 1991)
<Granny and the robots: ethical issues in robot care for the elderly> (Amanda Sharkey·Noel Sharkey, Ethics and Information Technology, 2012)
첫댓글 Sharkey·Sharkey 교수 논문은 강민지 선생님이 소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