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백) 성녀 마르타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요한 사도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며 서로 사랑하자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오빠가 살아날 것이라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라며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신다(복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누이이며 마리아의 자매입니다. 베타니아에 있던 그들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와서 쉴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마르타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편안히 모시려고 지극정성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사랑했던 오빠 라자로의 급작스런 죽음은 마리타, 마리아 자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빠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도 슬픔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실망감은 더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오빠의 위중함을 미리 알렸건만, 제발 좀 오셔서 도와주시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예수님은 오시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 때문에 마리아와 마르타는 몹시도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성격이 불같았던 마르타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어떻게 그러실 수 있냐며 따지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라자로 가족과 예수님의 관계는 가족관계 이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그들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수시로 드나드는 예수님과 그 일행들 식사며 숙소 문제로 허리가 휠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오빠의 죽음이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예수님 생각만 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겠지요. 별 친분관계도 없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다 치유해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식사 한 끼 같이 한 적도 없는 다른 사람들은 다 살리시고 고쳐주셨던 예수님이셨는데, 가족 이상이었던 오빠에게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마르타는 은근히 본전생각까지 났을 것입니다. 그 동안 내가 예수님과 일행 때문에 끓여댄 삼계탕만 해도 수백 마리가 넘을 텐데, 들르실 때 마다 뒤치다꺼리하느라 허리디스크까지 다 생겼는데... 이런 그간의 배경, 이런 섭섭함과 속상함이 오늘 마르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표징, 더 큰 은총을 베푸시려는 예수님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했던 마르타의 외침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과 마르타의 관계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 아주 절친한 관계 안에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어려운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말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정 오빠 같은 분으로 여겼습니다. 보통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아주 높은 분들, 중요인사들을 두려워합니다. 어려워서 감히 다가서지도 못해 슬슬 피합니다. 다들 멀리서 환호하고 박수를 치지만 정작 다가서지 못합니다. 그와의 1대 1의 인간적 만남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격의 없습니다. 편히 대합니다. 속상하면 속상한다고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외칩니다. 왜 그러셨냐고 따집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그분 앞에서 하소연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보다 친밀한 관계, 인격적인 관계, 1대 1의 내밀한 관계, 절친한 친구 관계로 설정되길 바랍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사람 찔끔, 저 사람에게 찔끔 털어놓지 마십시오. 결국 남는 것은 또 다른 상처요, 허탈함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분께 외치십시오. 그분께 털어놓으십시오.
우리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사이십니다. 지금 당장, 오늘 이 순간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시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한 여자 청년이 몸에 혹이 자라나고 있어서 대학도 잠시 접고 어머니와 함께 상담을 하겠다고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해 본 결과, 어머니는 딸을 너무나 사랑하여 딸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딸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느끼며 모든 일에서 자기의 뜻은 버리고 어머니의 뜻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되니 자기로 살지 못한 분노가 몸 밖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계기가 딸이 남자를 사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딸을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그렇게 갈등이 더 커졌던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보니 전에 우리나라에서 천재라 불리던 어느 명문대학 교수 아버지가 학교에서 들어와서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깨워놓고 세미나를 시키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자신이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니 자녀들도 그 명성에 합당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켰겠지만, 그리고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겠지만 그 모든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괴롭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믿으며 사람을 만나지만 자기를 들어내던가, 높이던가 아니면 상대를 이용해 자기 외로움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속고 있지만 실상은 상대를 이용하는 이기주의의 산물입니다. 사랑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그 포장 속에 이기주의만 가득한 것을 우리는 참 많이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은 신부들입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순종하고 신랑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당신 피를 내어주셔서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에 앉혀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그 모습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오늘 독서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파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분 덕택으로 받는 구원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밖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밖에 머문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마지막 순간이 오면 누구는 노아의 방주 안에 있고 누구는 노아의 방주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만 마지막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노아의 방주 안에 머무는지 아닌지는 바로 ‘두려움’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방주 밖에 머무는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 안에 머뭅니다. 주님은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주십니다. 모세가 주님의 뜻을 어기고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 친 실수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이 주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고 사랑을 실천해야만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잘 알기는 하지만 사랑하려 해도 잘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하고 하루를 살다가도 어느 순간 누군가를 험담하고 있고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고 누군가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왜 안 되는 것일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데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을 하려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하지도 않고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은 차에 기름도 채우지 않고 운전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기도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주인으로 오시려고 하는데 이미 주인이 떡 버티고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싶으셔도 머무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자아는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다면 내 안에서 주님의 뜻은 돌아가시게 됩니다. 자아는 그래서 교만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사랑이 내 안에 머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 즉 성령을 받고 당신의 사랑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온유하고 겸손해지려는 우리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합니다. 내 안에 내가 주인으로 있는 한, 그래서 교만하고 고집만 가득한 사람으로 머무는 한 사랑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뿐더러 나오지도 못하게 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질 수 있는 덕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의지입니다. 하루 종일 이 덕을 시험하고 갈고 닦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바로 계명이기 때문에 온유와 겸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7월29일(금) 음6/26 聖女 마 르 타 님
|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
|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님의 처지와 너무나 흡사한 평신도로서 저희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면서 미리아님의 아름다운 몫을 함께 소망하겠습니다.
성녀 마르타 님이시여 현실의 어떤 유혹 속에서도 주님을 망각하는 어리석음만은 피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