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5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36-38)
"Be merciful,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주님께 저지른 죄를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에 형제들을 용서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가 사는 곳은 휴전선 접경 지역이라서 가까이에 군부대가 많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병사들이 100명가량 미사에 참석하는데 저희 성당 신자 수와 거의 비슷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병사들이 부대에 복귀하는 시간이 부대에서 점심 먹기가 애매한 시간이라, 저희 신자들은 병사들이 성당에서 점심을 먹고 복귀할 수 있도록 주일마다 점심을 마련해 줍니다. 성당 신자들 대부분이 연로하신 분들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손자 같은 병사들을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병사들은 마음속 깊이 느끼는 것이 있나 봅니다. 스스로 찾아와서 세례를 받고 싶으니 교리를 가르쳐 달라는 병사들도 있습니다. 성당에 일손이 부족하면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손을 걷어붙이고 도와줍니다. 전역자들은 제대하기 전에 주방에 들러 할머니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납니다. 할머니들은 그 인사 한마디로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싹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희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많은 분이 저희 성당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금을 보내 주시고, 어떤 분들은 정기적으로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식재료를 사 가지고 와서 점심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군인들 때문에 몰랐던 신앙의 형제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희가 군인들에게 해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하신 예수님 말씀은 저희를 두고 하신 것입니다.
☆☆☆
양포(楊布)가 외출할 때는 흰옷을 입고 나갔다가, 비를 맞아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는데, 양포의 개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짖어 대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개를 때리려 했더니, 형 양주(楊朱)가 “네 개가 나갈 때는 흰옷을 입고 나갔다가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온다면 너 역시 괴상하게 여기지 않겠느냐?” 하고 나무랐습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양포지구(楊布之狗)의 뜻풀이입니다. 곧, 겉모습을 보고 속까지 판단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주로 쓰는 고사성어입니다. 사람이 흰옷을 입었다고 그의 마음도 하얀 것이 아니고, 검은 옷을 입었다고 속까지 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했듯이, 사람이란 그 자체로 이렇게 신비로워서 그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마저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감히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약한 사람은 있어도, 악한 사람은 없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편해질 것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 심지어 범죄자들까지도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악의 세력이 인간의 나약함을 타고 들어와 일을 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 안에 선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악은 힘을 잃고 맙니다.
☆☆☆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주고 베풀어도 모두 ‘돌아올’ 것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실천은 희박합니다. 쉽게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많이 따지고, 틈이 생기면 그 일에서 빠지려 듭니다. 복음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받으려고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고 되받는 체험을 ‘실천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말’이 돌아옵니다. 웃으면 분위기도 밝아집니다. 하지만 거친 말은 ‘거친 분위기’를 만들고, 분노는 분노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아는 데’ 그치지 말고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말씀이지만, 실천이 어려운 것은 예사롭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무관한’ 사람에게도 쉽게 비판의 화살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별생각 없이 말하더라도, 듣는 이의 영혼에는 화살이 꽂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예스맨’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지요. 심판과 단죄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되돌아옵니다. 올바르지 않으면 자신의 운명에 상처를 남깁니다. ‘부메랑’은 목표물에 명중해야만 되돌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
‘빵을 말썽 없이 나누려면 쪼갠 뒤에 먼저 골라잡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보이는 쪽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지요. 어찌 빵뿐이겠습니까? 많은 부분에서 선택권을 양보하면 불만이 적어집니다. 불만이 생기더라도 쉽게 해소됩니다. 그러므로 약자에게 선택권을 배려하는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도 양보하라는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심판을 서둘러 하는지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가 먼저 ‘감정을 섞고’ 언행을 높입니다. 별일도 아닌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분위기를 흐립니다. 때로는 침소봉대하며 떠벌립니다. 모두가 내 삶에 ‘어두운 기운’을 불어넣는 행위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을 만드는 것이지요. 먼저 양보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던 ‘업’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잠든 영혼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실천에 옮긴다면 매일매일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말씀입니다. 늘 부딪치는 관계를 새삼스레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
영국의 어느 빵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인은 신선한 빵을 구우려고 버터를 매일 아침마다 직접 농부에게서 배달받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버터가 정량에 모자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저울에 달아 보니 역시 버터의 양이 부족하였습니다.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자신을 속인 농부를 고소했고, 농부는 결국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뒤집어쓰고 망신을 당한 쪽은 농부가 아닌 빵집 주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농부에게는 젖소 몇 마리는 있었지만 너무 가난하여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는 배달할 버터의 양을 정하는 데 매일 자신이 납품하는 빵집에서 갖다 먹는 빵의 무게를 기준으로 버터를 잘랐던 것입니다. 결국 빵집 주인의 얄팍한 상술과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을 판단한 마음이 오히려 자신을 판단받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거나 단죄하고 싶을 때 먼저 우리 자신의 비판받고 단죄받을 행동들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고 그것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 비로소 이웃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감정은 관용으로 바뀔 것입니다.
결혼 조건은 무엇일까요?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랑만으로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현실이 현실인 만큼 까다로운 결혼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현명한 모습이랍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말하는 남자 결혼조건 순위는 첫째가 경제력, 둘째가 성격, 셋째가 안정된 직장이라고 합니다. 반면 남자가 말하는 여자 결혼조건 순위는 첫째가 외모, 둘째가 성격이랍니다.
이렇게 결혼조건에 만족하면 사랑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까요? 요즘 점점 한국 사회의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그 조건 때문에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조건에 적합해서 선택한 사랑이지만, 이 조건이 헤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내세워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을 골라서 사랑하기가 쉽던가요? 그러한 사랑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조건을 먼저 내세울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할 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조건 실천하는 사랑이 나에게도 똑같이 완전한 사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세속적인 조건을 통해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의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값비싼 장난감을 선물로 받았었습니다. 너무나도 기쁘고 신났지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선물에 행복을 느낄까요? 아닙니다. 당시에 그렇게 기뻐했던 그 선물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떻게 생겼던 장난감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했던 사랑의 추억만이 지속적인 행복을 제게 가져다주더군요.
주님께서는 조건이 사랑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특히 우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용서를 이야기하시며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을 이러한 이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무조건 심판하지 말 것이며, 무조건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무조건 용서해야 하며, 무조건 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하는 것들을 통해 내가 온전히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에서는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들이 가지 않은 그 하늘나라에서 몇 배로 되 값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조건 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조건을 내세우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랑이 아닌 아낌없이 내어주는 참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보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윌리엄 블레이크)
내준다는 것
-신헌문 신부-
몇 년 전 소임이동 때문에 짐을 꾸리던 중 우연히 라디오를 듣게 되었습니다. 메조소프라노 김청자 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춘천이 고향인 그녀는 선교사 신부님들로부터 음악을 배워 성악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70년대 말 유행가처럼 많이 불렸던 가곡 ‘비목’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입니다. 대학교수로 활동을 하던 그녀는 해외여행을 하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게 되었고, 그곳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열심히 공연을 하여 그 수익금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년퇴임을 하게 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정리하여 아프리카로 아주 간다고 합니다. 재봉틀과 오르간을 사서 그곳의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기술을 가르쳐서 가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 합니다. 아프리카의 짙은 녹색과 검은 피부, 그리고 하얀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합니다. 하나뿐인 아들도 어머니의 재산에 욕심을 내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 축하합니다!” 하더랍니다. 자신의 노후대책은 펀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바치는 것, 아프리카에 ‘제2의 김청자’를 만들어 그 청아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아프리카에 몽땅 주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는 듯 목소리에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탈렌트는 무엇인가요?
작은 되? 큰 되?
-김태완 신부-
하느님과 같아지라니… 하지만 투정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어봤더니 예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다. 예수님 제자가 된 탓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탓에 손해만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우리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되받을 것이기에 마음 한구석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답니다. 후하게 갚아주신답니다. 우리의 되가 큰 되이면 그 큰 되로 듬뿍듬뿍 퍼주실 것이고, 우리의 되가 작은 되이면 그 작은 되로 우리의 은총 자루가 가득 찰 때까지 몇 번이고 듬뿍듬뿍 퍼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입니다.
하느님의 수고를 덜어드립시다. 후하게 갚아주시기 위해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은 되로 몇 번이고 되질하실 하느님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립시다. ‘이 정도면 됩니다. 그만 주셔도 됩니다.’ 적당히 사양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작은 되를 큰 되로 바꿔 드립시다. 심판과 단죄가 아닌 자비와 용서, 그것도 적당히 자비하고, 적당히 용서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우리의 되를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바꿔 드리는 것입니다.
또 힘이 듭니다. 그래도 노력합니다. 이것이 희생이요 극기의 공로가 됩니다.
용서의 됫박을 만들자
-김찬선신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죄에 대한 망각이 아니다. 용서란 죄에 대한 묵인도 아니다. 용서란 죄에 대한 관대함도 아니다.
용서란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죄에 방종케 하는 게 아니다. 죄로부터 그를 살려내는 것이 그 목적이지 죄 때문에 죽든 말든 내버려두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에 실패함은 거짓 용서를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용서를 용서로 착각하기 때문인데 특히 자기를 거짓 용서하고서는 용서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살다보면 다 죄 짓고 사는 거지 하면서 죄를 묵인하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하고 죄를 눈감아주고는 용서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를 했는데도 뭔가 찜찜합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생명을 살아야 용서가 진정 이루어진 것인데 여전히 죄의 상태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을 보고 뒤처리 하지 않는 것과 같고, 보지 않고 살거나 못 본 체 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를 용서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용서의 체험이 있어야 남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는데 죄에 대한 이런 태도 때문에 나도 남도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됫박이 형성되지 않았으니 되질을 아예 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되질해 줄 수도, 용서를 되질해 받을 수도 없습니다.
어색한 칭찬, 익숙한 비판
- 송동림 신부-
어렸을 때 칭찬 · 인정 · 애정을 충분히 받으면 건강한 자존감, 건전한 자신감, 이상적인 대인관계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나는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공부나 운동, 예능 등에 두각을 드러낸 적도 없고, 부모님이나 선생님들한테 존재 자체로 칭찬을 받은 기억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어렴풋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께 인사를 잘해야 한다.’ 는 어머니의 말씀이 귀에 익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사를 하면서 가끔 칭찬을 받은 기억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 누군가 칭찬을 하면 어색해한다. 상황에 따라 상대방의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편안히 그 기분을 느껴보면 좋으련만 ‘그저 예의상 형식적으로 건네는 말씀일 것이다.’ 하면서 애써 부정한다. 칭찬은 최선을 다하게 하고, 특히 인간을 변화시키는 데 좋은 자극이 된다. 그러기에 칭찬의 필요성과 중요성과 그 위력을 아는 지금은 가능한 어린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칭찬할 만한 모습을 보려 하고 칭찬을 하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는 말씀을 건네신다. 사실 심판과 단죄에는 부정적 시선이 전제되어 있어서 많은 경우 비판이 뒤따른다. 물론 비판에도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개인이 먼저 배우고, 가족 또는 이웃에게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할 부분은 심판이나 비판보다는 칭찬과 칭송이고, 단죄나 정죄보다는 인정과 애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교인이나 교회를 비판하는 법보다는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고 또한 배우게 하는 것이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여러분, 놀부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천국? 지옥? 당연히 지옥으로 떨어졌겠지요. 아무튼 놀부가 지옥에 갔는데, 집행관이 똥물과 깨끗한 물이 담겨 있는 두 개의 그릇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두 그릇 중에서 상대방 얼굴에 바를 그릇을 선택하라.”
놀부는 당연히 똥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상대방의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것도 시키는 이 지옥도 괜찮구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똥물을 상대방의 얼굴에 다 바르자, 집행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부터 상대방의 얼굴을 핥아라.”
준대로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의 것을 받고자 한다면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하고, 최악의 것을 받고자 한다면 최악의 것을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나는 다른 이웃들에게 어떤 것을 주고 있나요? 스스로는 최고의 것을 받으려고 하면서도, 최악의 것을 이웃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라고 하면, 사랑, 용서, 자비, 평화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중한 가치가 당연히 내 안에 간직되어야 하는 가치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내가 그러한 가치들을 내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면, 내 것이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웃에게 최고의 가치를 선물하기 위해서는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장미꽃이 어느 날 호박꽃에게 “호박꽃도 꽃이냐?”하면서 빈정댑니다. 그러자 호박꽃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너는 호박이라도 열리냐?”
이렇게 비교한다는 것은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가치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쁨과 함께 소중한 가치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들은 김연아 선수의 멋진 피겨스케이팅 장면을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장면을 보면서, “왜 나는 저렇게 타지 못할까? 왜 내 자녀는 저렇지 못할까?”하면서 비교한다면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연기 그 자체만을 바라볼 때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교를 통해서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모습 안에서만 우리들은 기쁨 속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으로 다가온다(라 브뤼에르).
그대로 따라 하다
-김효준신부-
운전면허학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운전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면허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운전공식’도 가르쳐줍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르쳐준 공식대로 똑같이 따라 하면, 어렵지 않게 시험에 합격할 수 있습니다. 수학에는 수학공식이 있고, 과학에는 과학공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공식에 대입해서 문제를 풀면 쉽게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인들의 삶을 본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기는데, 하느님처럼 되라니요? 절대 풀 수 없는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문제를 풀 수 있는 쉬운 공식을 알려주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이 공식에 따라 살면,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성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라는 물음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공식에 따라서 그대로 살다 보면, 그런 물음의 답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자비로운 사랑
-김찬선신부-
지난 토요일, 마태오복음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비로운 사람이란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용서하고 주는 사람이란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우리가 정말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되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노력을 좀 하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되려고는 해야겠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곧 주님께서 초대하셨으니 되려는 의지는 가져야겠지만 나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의 자비를 주십사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비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가져야 가능한 것인데 애초 우리는 하느님 같은 사랑이 없습니다. 기껏 사랑이라고 가진 것이 자비로울 수 있는 사랑은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바라고 가지려는 사랑 정도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정도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랑이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사랑은 이런 풋내기 사랑보다 월등할 뿐 아니라 사랑 중에서 가장 압도적이고 가장 월등한 것입니다. 본래 자비롭다는 것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가 아니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가져야 용서도 하고 필요로 하는 무엇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가 무슨 짓을 해도,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끄당겨도 “허허 그놈 참!”하고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려면 한없이 낮추어야 합니다. 판단과 단죄는 윗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실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니 만약 누가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자신이 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고 자기는 죄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음은 자신을 낮게 여기고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 자비로운 사랑은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사랑인 것입니다.
주는 대로 받는다
-전삼용신부-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가면 브라만테가 설계한 팔각정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칼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잘라 손으로 들고 있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머리가 잘려진 여자는 메두사입니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정작 포세이돈을 좋아하던 처녀신 아테나가 있었습니다. 포세이돈은 메두사와 아테나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아테나는 그것을 목격하고 크게 화가 나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녀의 눈을 보는 누구든 돌이 되게 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웅 페르세우스를 보내어 메두사를 죽이게 합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로 메두사의 얼굴을 반사시켜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목을 벤 것입니다.
저는 이 동상을 볼 때마다 결국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보이는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재차 느낍니다. 메두사는 결국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이웃에게 화가 나는 것은 결국 나의 모습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삶에 적용시키며 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랑 하여라. 그러면 사랑 받을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하여라. 용서받을 것이다.’
용서는 받고 싶지만 용서하기 싫은 경우도 있습니다.
‘판단하지 마라.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에게 판단 받는 것을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만 살아가면서 많은 판단을 하고 삽니다.
사람에게 있는 가장 큰 착각 중의 하나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란 착각입니다.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을 자주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판단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하고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자유스럽게 됩니다. 자기가 판단하며 사는 것 때문에 그대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판단하며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미워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가족처럼 느껴져서 말이나 행동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면 얻게 되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사랑만 받으셨습니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사랑하면 사랑으로 보답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는 사람들은 너무 육체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육체적인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는 기대가 실망으로 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믿고 의탁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다 잘 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다면 그 믿음은 온전히 삶의 편안함으로 보상받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고 믿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의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께 잘못하고 있는 것이 많다면 하느님께서도 내 믿음대로 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내리기 때문에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차원이기 때문에 이성으로는 바꿀 수 없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주님은 정의 자체이시기 때문에 받는 대로 돌려주십니다.
항상 내가 주는 대로 돌아온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주며 살도록 합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양승국신부-
<따님 장례식 날>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손님이 계시길래 어떤 분인가 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할머님은 망연자실, 자포자기한 모습, 기력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셨기에 제가 여쭈었습니다. "할머님, 댁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목 메인 할머님의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룬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노라고,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님의 고통을 앞에서 "힘내시라" "기도하겠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님은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가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본 할머님은 힘겹게 밥을 좀 드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님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할머니 시중을 들어드렸습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요.
이 세상에는 한없이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할머님의 주체 못할 큰 슬픔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속마음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그가 안고 살아가는 남모르는 슬픔이나 고통, 짙은 상처를 알게 된다면 섣불리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비판하지 말. 남을 단죄하지 마라. 남을 용서하여라. 남에게 주어라."
결국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평생 동안 지고 온 무거운 십자가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작년 이맘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납골당엘 갔습니다. 아버지의 유골 앞에서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습니다. 아이의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세인데, 엄마는 어디 계신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이나 허전함, 상처나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해왔는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 원한다면 이웃의 상처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의 말 못할 고통, 깊은 슬픔, 남모르는 사연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만 용서가 시작됩니다.
결국 용서는 한 인간 존재를 연민의 눈, 측은지심의 눈,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어느 마을에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늘 천당 가기를 빌었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받아주기로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어요. 이제 절대로 남을 비판하지 않겠다는 조건, 한 번이라도 다른 이를 비판하면 천당에서 내쫓겠다는 조건을 걸었지요. 그는 무엇을 보더라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렇게 천당에 가게 되어 식당에 들어가니 한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숟가락을 놔두고 포크로 국물을 떠먹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겨우겨우 참았답니다.
그 다음날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을 보니 밑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한소리 해주려다가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았습니다.
그렇게 입에서 말이 나오는 것을 참고 참아 다시 길을 가고 있는데 마차가 개울에 빠져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은 이쪽에서 꺼낸다고 잡아당기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당긴다고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참다 참다 도저히 답답해 참을 수가 없어 급기야 비판을 했지요.
“어이구, 이 바보들아! 수레를 빼내려면 한 명은 잡아당기고, 한 명은 밀어주어야지…….”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약속을 어겼으니 쫓겨나야 한다면서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 장면들을 본 그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장면에 나와서 행동하고 있는 사람, 즉 포크로 국물을 떠먹고 있는 사람, 밑 빠진 독에 물을 긷고 있는 사람, 수레를 꺼내려는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보라고 비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비판의 대상은 바로 자기라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 비판의 내용들을 잘 보면 결국은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잘못된 모습을 똑같이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듯 한 착각 속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를 이렇게 정리해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나 역시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베푸는 길, 나눔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고 차디찬 마음이 차디차게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진정한 나눔이 가득한 사순시기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잔소리하는 대로가 아니라 격려해주는 대로 된다.(영국 속담)
반사
-전삼용신부-
어릴 적 놀이 중에 ‘반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놀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남이 자신에게 안 좋은 말을 하면 ‘반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친구에게 바보라고 했다면 그 친구는 재빠르게 ‘반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반사’라고 외치면 상대는 ‘또 반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보라는 말은 서로 자신이 바보임을 인정하지 않는 둘 사이를 왔다갔다 거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복음에서 이 반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삶에 적용시키며 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랑 하여라. 그러면 사랑 받을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하여라.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판단하지 마라.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많은 판단을 하고 삽니다. 그러면서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 ‘반사’의 원리는 이웃이 바로 나의 거울이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즉, 내가 이웃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이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놓은 안 좋은 점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저는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둘은 참 닮은 데가 많아.”
그 친구는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를 챈 것 같았습니다. 내가 비록 행동하면서 살지는 않아도 내 안에 숨겨진, 혹은 억눌려진 안 좋은 면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타날 때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판단하는 꼴입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다를 비롯해 사도들, 그 분께 은총을 받은 사람들까지 그 분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마음 안엔 배신의 마음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을 슬픈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로마에서 자칭 ‘바티칸 베테랑 가이드’라고 자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이드와는 달리 신학적인 면까지 첨가하여 가이드를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가면 브라만테가 설계한 팔각정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칼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잘라 손으로 들고 있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머리가 잘려진 여자는 메두사입니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정작 포세이돈을 좋아하던 처녀신 아테나가 있었습니다. 포세이돈은 메두사와 아테나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고 아테나는 그것을 목격함으로써 크게 화가 나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녀의 눈을 보는 누구든 돌이 되게 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웅 페르세우스를 보내어 메두사를 죽이게 합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로 메두사의 얼굴을 반사시켜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목을 벤 것입니다.
저는 이 동상을 볼 때마다 결국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보이는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재차 느낍니다. 메두사는 결국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이웃에게 화가 나는 것은 결국 나의 모습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합시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자비와 용서의 됫박을 키워라!
김찬선신부-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에게 존댓말 하는 분에게 막말할 수 없더라고요. 어떻게 해서든 잘해 줄려는 분에게는 무심할 수 없고요.
대부분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인복이 많다고 하는 분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자기는 별로 해준 것이 없는데 운이 좋아 주위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으로 겸손하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주위에 많은 것이 사실은 그분이 모두에게 잘 해주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별로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옆에 있는 제가 볼 때 뭔가 있기만 하면 그저 줄려고 하고 그것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저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것을 줬는데도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계속 줄 수 있지요. 많이 줬다고 생각하면 더 주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많이 주고 받지는 못했다고 생각하면 더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섭섭한 마음까지 들 테니까요.
생각해보면 이치가 그렇습니다. 조금 주었는데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됫박, 그 사람의 통은 그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많이 주었는데도 적게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됫박, 그 사람의 통은 그 정도로 큰 것입니다. 한 되가 큰 사람이 있고 한 되는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되가 큰 사람은 통이 작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은 통이 그 정도니 받는 것도 최고로 많이 받아야 한 되밖에 못 받겠지요! 한 되가 작은 사람은 통이 큰 사람이니 받는 것도 그만큼 많이 받겠지요.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이 관계가 혹간 깨질 수도 있습니다. 많이 주었는데도 그만큼 되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짠돌이기에 그럴 수도 있고 상대가 그럴 능력이 못되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북한을 위해서 일을 하다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퍼주기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고 좋은 뜻 가지고 하다가도 너무하다 싶어 그만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주었다고도 생각지 않고 되받을 기대도 하지 않고 계속 돕는 통 큰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관계에서는 되질 해준 대로 받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는 그의 되가 나보다 작기에 그대로 되받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되가 우리의 되보다 훨씬 크시기에 큰 되로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의 되가 작아서 더 이상 못 받지 하느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는 말씀대로 넘치게 되돌려주십니다.
자비도, 용서도. 그러니 우리도 자비의 됫박, 용서의 됫박을 크게 키워야 하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1923년 시카고의 에지워터비치 호텔에서 호화로운 사교모임이 열렸습니다. 당시의 미국 경제를 주름잡던 젊은 갑부 아홉 명이 사교클럽을 만들어서 서로의 성공을 축하하는 모임이었지요. 이들은 서로의 후견인이 되어 서로를 보장하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남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돕는다면, 이들의 경제력은 무너질 수 없는 철옹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자신들의 부를 누리기 위한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방탕한 인생을 즐겼습니다.
이 첫 모임이 있은 후 25년 뒤, 이들의 성공과 부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해진 한 작가가 이들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당시 증권사 사장이었던 리처드 위트니는 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던 중 사망하였고, 철강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슈워드는 파산한 후 화병으로 사망하였으며, 가스회사 사랑이었던 하워드 홉슨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가 우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밀 도매상이었던 아서 카터는 거리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장관 출신인 엘보트 월과 사업가 사무엘 인쉘은 범죄자로 지목되어 도망 다니다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자살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불과 25년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물질적인 것으로는 행복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밖에 없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사랑하지 않을 이유만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일이 많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말로 사랑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피곤한 것이 남에게 화를 낼 이유가 되지 않겠지요. 그리고 바쁘다는 것 역시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보상을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 그 이유가 합당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이유도 합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해야 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은 세상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빠다킹신부
후덕한 인생
-허찬란 신부-
MBTI 성격 유형 검사에서 ESFP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애니어그램을 했더니 1번 유형이 나왔습니다. 종합해보면 제 성격은 일을 무지 벌이는데다 완벽을 추구하는 유형인데 그래도 사람을 대할 때는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후덕을 가르치십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사목을 잘 한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을 많이 합니다. 우리 농촌 살리기 일을 해보았고 성전 신축도 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영성의 부족과 내면의 양심성찰에 대한 갈망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참 사목을 잘 몰라서가 아닐까 자문해봅니다. 사제란 어떤 사람일까요? 가르치는 자, 설교하는 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 면담과 치유기도 그리고 고해성사를 주는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영적인 친교가 잘 다져진 사제는 이웃에게도 따뜻한 사목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후한 은총을 선물로 받으며 위로와 보람을 느껴야 하는 이가 바로 사제입니다. 바쁘다는 말의 남발이 아닌 조용하지만, 사제란 직분과 사제 영성 속에서 참 사목의 의미를 실천하며 후덕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성숙한 비판 -이동훈 신부-
요즘 인터넷에 뜬 지나친 악성 댓글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인기 연예인뿐 아니라 학생들한테까지 그 피해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익명성을 무기로 온갖 험담과 악담을 퍼붓는 이들 때문에 피해자는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글에는 진실을 알려는 열정도, 상대방이 잘못을 반성하고 좀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염려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무조건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함으로써 일방적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할 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단순히 남에 대한 비판,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위선적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태 7,4-5). 부조리를 없애고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비판은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비판보다는 비방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터넷의 악성 댓글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방은 적대적 언어다. 상대방이 없는 곳에서 욕하는 것이다. 비방은 험담이 되고 중상모략으로 발전한다. 정직하게 비판하지 않고 뒤에서 하는 비방은 발전이 없다. 비방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도 비방이라고 볼 수 있다. 비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침묵을 자기 의견에 대한 동조라고 생각하고는 ‘다들 그렇더라’며 확대한다. 이렇게 뒤에서 비방하는 것을 막아주고 끊어주는 것이 용기며 인격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판하는 용기와 비방하지 않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직접 만나 타일러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다(마태 18,15-17 참조). 이는 심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면서 지적하는 것이다(야고 5,20 참조). 우리는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에페 4,15 참조).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해야 하며 끈기를 다해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해야 한다. 그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다(2티모 4,2 참조).
용서의 삶
-김훈일 신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선처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알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찾아와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큰 상처를 받고 복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우리가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이 있는 상대방을 용서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처와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것이 밤낮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게 할 뿐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지 않게 합니다. 결국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진 분노와 증오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죄를 더 크게 확대할 뿐입니다. 죄 없고 흠 없는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고통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승리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선악의 판단이나 심판의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용서하기도 힘든 법입니다. 그러니 애써 마음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용서를 하려 애쓰지 말고 우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배워 가면서 작은 일에서부터 이해와 용서를 키워 가야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하느님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웃을 나와 같은 처지로 사랑하게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을 배우는 길입니다. 우리는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열매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주제에 꿈도 크네>
언젠가 한 아이를 저희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법정에 직접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의 재판을 맡았던 담당 판사님은 다른 판사님과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아이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요!"하고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짜식, 주제에 꿈도 크네. 사고나 더 이상 치지 마라"고 비웃었는데, 판사님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판사님께서는 "그래 너는 아주 좋은 꿈을 가지고 있구나. 네 꿈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좋은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데 자꾸 오면 되겠니? 그리고 뒤에 서 계신 어머님이나 신부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생이시냐? 어머님은 혼자서 너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네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래서 되겠니?"
그 순간 제 옆에 서 계시던 아이의 어머니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들은 아이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다시 한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아무리 막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비참해 보이고 가능성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떠나간 한 마리 어린양을 찾아 길을 나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우리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는 노력입니다. 결국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가를 알려는 노력입니다.
물론 우리의 하느님은 불의 앞에 진노도 하시고 때로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때는 가차없이 책벌도 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정의의 배경에조차 우리 인간을 너무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존경하고 그분 앞에 복종할 수는 있지만 그분을 사랑할 수 없을 때,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은 우리 일생일대를 건 과제입니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생활이 한 단계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순간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양승국신부-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형제들과 가끔씩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를 한편씩 보고 있습니다. 물론 수도자답게 수도원 시청각실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봅니다. 교육자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영화, 폭력이나 선정성이 없는 영화, 그래서 다시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주는 좋은 영화를 골라야하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주로 이런 영화를 보지요. ‘여선생 VS 여제자’ ‘선생 김봉두’ ‘내 마음의 풍금’ 등등.
‘12세 관람가’의 영화, ‘야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 ‘단 한명도 죽지 않는 영화’들이기에 밋밋할 수도 있겠지만, 조폭들의 무가치한 일상을 영웅적으로 그린,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을 자기도 모르게 폭력성에로 몰고 가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무가치한 영화들보다는 백배 더 낫습니다.
오늘은 ‘패왕별희’의 감독으로 유명해진 첸 카이커 감독이 제작한 ‘투게더’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정말 제대로 골랐더군요. 시종일관 진한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참부모란, 참스승이란 이런 모습이로구나, 하는 것을 잘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스꽝스런 모습의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색한 구식양복, 어울리지 않는 원색 와이셔츠에, 전혀 아닌 빨간 모자를 쓴 아버지, 아들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창피한 ‘촌뜨기’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아버지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신동이란 말을 듣고 자란 아들 ‘샤오천’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그야말로 ‘전력투구’합니다. 아들이 훌륭한 교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아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바보가 되어도 좋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에게 입히기 위해 직접 뜨개질을 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오디션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봐 공연장에조차 나가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결국 아들의 성공을 위해 아들을 떠나가는 아버지입니다.
중요한 무대를 앞둔 어느 날, 지도교수는 바이올린 연주가 잘 안 된다는 소년에게 “네 연주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 ‘꼭 제자로 삼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밝힌 소년의 출생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추운 겨울, 북경역을 지나던 아버지 리우청은 바이올린과 함께 한쪽 구석에 누워있던 갓난아기 샤오천을 발견합니다. 착해빠진 아버지는 추위와 배고픔에 자지러질듯 울어대는 아기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늘이 준 인연으로 여기고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어가던 아기, 생모로부터 버림받은 아기,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북경 역에 누워있던 아기를 끌어안고, 그 아기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은 완전히 포기하는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 자비의 한 자락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자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인내, 풍요로운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펄쩍 펄쩍 뛸 것입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비를 맛보기 전까지 우리 삶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를 깨닫는 순간 우리 삶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충만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크신 하느님 자비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다들 그저 불쌍한 존재, 측은한 존재,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는 사랑스런 존재일 뿐입니다.
당신 뜻대로
-박 요한 신부-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남을 용서하는 것.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완전한 인간이나 가능한 것이지 나처럼 부족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사순시기 동안 너무나 어려운 것들을 요구하시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게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하긴 나도 나름대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트집잡히는 일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가끔은 완벽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지못해 유혹에 지는 것처럼. “아버지, 당신이 자비로우신 것같이 저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용서해 주신 것같이 저도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같이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를 당신께 내어드리니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살게 하소서.”
† 황금률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이 전하는 황금률이다(38절). 이는 마태오복음이 산상설교(5장-7장)의 결론에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제시하는 황금률(7,12)과 같은 것이다.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가 루가복음에서는 평지설교(6,20-49 참조)에 해당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루가복음의 황금률도 평지설교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피력하시는 산상설교나 평지설교에서 그 가르침을 꿰뚫는 정신은 황금률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므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것이다.
사실은 황금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에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마태오복음: 마음, 목숨, 뜻; 마르코복음: 목숨, 생각, 힘; 루가복음: 마음, 목숨, 힘, 생각)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신명 6,5)는 하느님사랑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아껴라"(레위 19,18)는 이웃사랑, 즉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으로 제시하고 있으나(마태 22,36-40; 마르 12,28-33),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10,25-28) 제시하고 있다.
요한도 하느님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계명'으로(13,34) 제시한다. 물론 모두 다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황금률의 정신을 가지고 첫째가는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한다면 신약의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늘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표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남을 용서하는 것, 남에게 주는 것' 등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황금률의 정신을 지키는 수준에 머물거나 단순한 사랑실천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거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준 만큼 받게 되고, 받은 만큼 주게 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칙은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38절) 우리에게 안겨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한 처사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예수님의 요구가 평지설교의 새로운 핵심으로 부각된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엄청난 요구와도 같은 것이다. 이는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13,34)는 새계명과도 같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 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오늘은 하느님의 후덕(厚德)한 자비로움에 받은 것보다 적게 돌려주려 하고, 준 것보다 은근히 더 받으려는 우리의 간사한 마음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38)
-유광수 신부-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루가 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들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다. 이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이다. 자녀는 부모의 품성을 이어받는다. 즉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 따라서 내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면 나에게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운 아버지의 품성이 있고 그 영이 나에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녀이니까.
그럼 자비로운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자비로운 아버지"란 부성과 모성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의 품성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완전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전달해주시어 우리와의 부자관계를 맺게 해주신 아버지이시다. 즉 당신 생명의 씨앗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양육시켜 주시고 우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신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를 낳아 주시는 어머니이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귀염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부성과 모성을 겸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것이다. 이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시고 자비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를 낳아주셨고 길러주시는 아버지요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은 자비의 근원이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다." 이라는 뜻이다. 즉 자비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의 근원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고 반드시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와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즉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로부터 자비의 선물을 받아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원칙에서 그 다음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라는 말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주지 못한다." 왜 그런가?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처럼 부성과 모성애가 없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만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며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고자 한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왜 그런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느 자식이라도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고, 어느 자식도 미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고 모두가 서로 화목하게 사랑하며 지내기를 바라고 어떤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용서해주신다. 자신들은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해도 땀흘려 지은 농사를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요, 사랑이다. 이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식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은혜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부모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사람의 마음에선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도 비록 당신을 배반하는 제자일지라도 그리고 당신을 향하여 욕하고 침뱉고 창으로 찔러대는 병사들도 그리고 당신을 사형에 처하는 빌라도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단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가 23,34)라고 끝까지 용서하시고 마침내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의 마음에는 부성과 모성애의 한없는 자비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자비로움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하나의 원칙이 세워졌다면 이 원칙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나와야 한다. 그 다음 말씀은 바로 이런 원칙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과 단죄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남을 제대로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남을 심판할 때 그 심판의 기준은 자비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심판하고 단죄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심판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심판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 단죄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심판에는 한계가 있다. 심판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심판은 완전하신 아버지만이 올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잘못 심판하고 단죄함으로써 내가 받는 고통과 억울함이 많이 있듯이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을 잘못 심판하고 단죄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아야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일이다. 그것이 곧 나의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해주시고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는 것이다.
† 비판과 단죄는 교만과 우월감 † -두올-
우리는 그 동안 마태 5-6장을 통해서 주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들을 묵상해 왔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늘나라 백성들의 특징과 성격(8복), 2) 하늘나라 백성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과 같은 존재이다, 3) 하늘나라 백성의 의(율사와 바리사이보다 더 나은 의: 6가지 예), 4) 위선을 피하고 하느님 앞에서 참된 경건 생활을 할 수 있는 법(보속, 기도, 금식), 5) 주기도문, 6) 하늘나라 백성들이 세상에서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위험(세속주의, 세상에 대한 염려).....으로 크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산상설교의 마지막 장인 7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7장에서 또 다른 주님의 가르침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 7장에는 비판 금지, 기도, 생명의 길, 거짓 선생과 예언자, 그리고 말씀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7장에 나오는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하나씩 자세히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교훈 중에서 루가복음 6,36-38과 연계하여 첫 번째 가르침인 "남을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I.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루가 6,37. 마태 7,1)
인간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비판을 싫어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상대주의가 강조되고 특정 교리를 지지하기 보다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다원화된 사회, 비경계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는 비판보다는 대화와 타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과 동시에 한쪽에서는 자기 주장을 외치는 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회교도는 기독교를 향해 테러도 불사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이에 대해 무력으로 응징하려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자살 테러단을 조직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해 무력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곳곳에서 지역주의를 벗어나서 대화와 타협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자기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현대에는 비난이나 비판보다는 평화와 화합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쪽이나 저쪽에 서 있는 사람보다는,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 인기가 높습니다. 사람들은 적당하게 중간에 서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현대인 중에 일부는 비판을 금지하는 주님의 가르침을 선호합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그리소도인들이 어떤 비판이나 판단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이웃에 대해서도 부드럽고 관대히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판단이나 비판이 아니라, 연합과 친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루가 6장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비판이나 판단을 금해야 한다'는 내용은 과연 무조건적 수용을 의마하는 것일까요?
1. 그리스도인은 모든 비판을 금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복음의 교훈은 결코 '모든 비판과 판단을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서를 조금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 7,6)을 보면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판단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이 "개나 돼지"인줄 분별하고 그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마태 7,1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이 말씀 역시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예언자들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열매를 통해서 그들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교회에서도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타이름과 증언'의 필요성을 인정해 주셨습니다(마태 18,15-20). 이러한 '타이름과 증언'은 교회가 비 진리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또 구약성서를 보아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통해 재판관을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죄와 악을 억제하고 올바름(의)를 실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판관들은 사건을 심리하고 분별력을 사용해서 사건의 시비를 가리고 정의를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신약성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에 대해서도 판단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 1,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복음에 대해서 올바른 분별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바오로가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디도 3,10)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또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 역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오리라는 말을 들어왔는데 벌써 그리스도의 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생과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조심하도록"을 지시했으며(요한1서). 요한 2서에 "만일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교훈과 다른 것을 전하거든 그를 집 안으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고 지시했습니다. 또 주님은 사람을 판단할 때?"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여라!"고 하셨습니다(요한 7,24).
이러한 모든 성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판단을 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눌복음의 가르침을 가기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판단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루가 6,36. 마태 7,1-5)에서 주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판'은 "정당한 판단"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금하신 비판은 "서로를 비판하는 단죄 의식"이었습니다. 복음 중에서 우리말로 "비판"이라고 번역된 말("크리노")은 원래 "재판", "송사", 또는 "심판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금지한 비판이 올바른 비평(critic)이나 감상(appreciation)을 포함하는 내용이 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형제를 심판(judgement)하고 단죄하는 일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II. 단죄 의식과 우월감(루가 6,37)
주님은 제자들에게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주님께선 결코 올바른 비평(critic)이나 감상(appreciation)을 금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금하신 것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서 형제를 심판(judgement)하고 단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 주님은 어느 정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의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위선적 가식적인 신앙생활로 살아오면서,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고 이웃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 이웃을 단죄했습니다.
(루가 18,9-14)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비유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루가 18,9).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바리사이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였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이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바리사이 사람들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결점을 말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비판과 단죄 의식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죄 의식은 바리사이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비판과 단죄 의식은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역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성서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주님께 데려온 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그 여인에 대해 단죄심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 이 말을 듣고 분노하여 여인을 돌로 치려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 돌아갔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는 행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남을 비판하고,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을 단죄하고 심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 8:7)
1. 단죄는 우월감에서 나온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우월감(교만, 소영웅심)을 가지고 남을 단죄하는 졸렬한 마음(영)입니다. 남을 단죄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올바르다 또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단죄의 배후에는 반드시 자기 우월감과 교만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영을 가진 사람들은 비난을 통해 남의 인격을 해치는 일을 자행하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짓을 밥 먹듯이 합니다. 남을 단죄하는 사람들은 정당한 비평(critic) 대신, 혹평하는(hypercritical) 말을 많이 합니다.
물론 자아도취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웃을 정당하게 비평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필요하며 또 바람직한 일로서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올바른 감상(appreciation)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단죄 의식을 가진 사람은 남을 악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난하기 위해 남을 비평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결점을 잡기 위해 접근하며, 비난 거리를 발견하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차없이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난을 통해서 자신이 의롭다는 대리 만족을 느끼곤 합니다.
작년에 한XX당 전XX 대변인이 법무부장관 강XX과 청와대 민정수석 문XX씨가 호텔에서 1시간을 회동한 일을 가지고...'국민정서를 오염시키는 논평을 하는 것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과연 올바른 비평인가 아니면 비난하기 위한 비평인가? 우리는 이런 몹쓸 사회를 만드는 거짓말쟁이들이 곳곳에 산재하면서 우리의 깨끗한 영을 더럽히려고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단죄의 영을 가진 사람은 이웃의 결점과 흠을 발견하는 일에서 만족을 누립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을 가진 사람은 흠을 발견하지 못하면 낙심합니다. 또 바오로는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먹고 마시는 일(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안에는 먹고 마시는 문제와 날짜에 대한 문제로 인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형제들을 서로 단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이때에 바오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바오로는 이러한 문제는 각자 자기 신앙 양심을 따라 행동하되,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고 인정하라고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신앙 양심을 따라 한 행동은 하느님께서 친히 판단하여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단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중요하게 만들어서 비난하고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여러 가지 단죄 의식들
또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에 시기를 하여 그들을 비난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높이며, 남이 잘될 때에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낮출 수 없기 때문에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파서, 그들의 흠을 찾아내어 그들을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또 우리들은 종종 편견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남을 비평할 때에 객관적인 원리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으로 형제들을 비난합니다. 이러한 비평은 대부분 참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인신 공격으로 끝이 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종종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지도 않고 남을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승급하거나 감정에 치우쳐서 남의 변명을 듣거나 그들의 정상을 참작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대부분 성급하게 이웃을 판단을 내리고 단죄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판이나 성급한 판단은 모두 주님께서 금하신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마무리 : 왜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 바리사이인들은 자신을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이웃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남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일을 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이웃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여 그들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 비난을 위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 정당한 원칙도 없이 편견을 가지고 감정에 치우쳐서 남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듣기도 전에 경솔하게 남을 단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단죄의 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러한 단죄의 영으로부터 벗어나야 할까요?
첫째,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의 표적이 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지만,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중한 비판을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남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나중에 자기의 비리가 발각되어 수치를 당하는 경우를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남을 비판하지 않았었다면 그들도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또 남에게 비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가 형제를 비판한 일에 대해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주님의 비유 중에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후에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큰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형제가 지은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합니다. 이러한 일은 10,000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둔 것처럼 잔인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18,21-35).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 뿐 아니라, 하느님께 심판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형제를 비판하고 단죄하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 남을 비판의 기준이 우리를 비판하는 기준이 된다. 마태 7,2에서는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비판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남을 비판한 그 기준이 우리를 비판하는 기준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경우 다른 사람들 역시 그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우리 역시 그러한 잘못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우리가 비판한 기준에 의해 우리도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로마 2,1)."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단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실수를 행하면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미 남을 비판한 경우에는 우리의 실수도 역시 용서를 받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선생들을 향해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야고 3,1)."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을 향해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남을 심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계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남을 판단할 기회가 많습니다. 선생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학생들의 잘못에 대해서 책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들 역시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도 같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 선생들은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더 큰 심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교사나, 교수, 또는 판사나, 성직자들이 법을 어기면 일반인들보다 더 큰 정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선 사람들은 특히 남을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셋째, 우리는 남을 비판을 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마태 7,3에서는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오늘복음에서는 이 내용은 없음). 너무나 정확하고 합당한 지적이십니다. 솔직히 말해 이 복음만 묵상하면 '나의 부끄러움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남을 판단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티는 톱밥과 같이 작은 것이지만, 들보는 집의 지붕에 올리는 통나무와 같이 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들보와 같이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티끌 만한 죄를 지은 형제를 비판하고 단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100억을 도둑질 한 사람이 100만원 도둑질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자신을 관찰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더럽고 간사하며 교활한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단죄하기 전에 먼저 거울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남을 단죄할 수 있을 만큼 하느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 ?" 아마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참된 예술가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비평하는 이상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게 마련입니다. 참된 비평가는 남의 작품 뿐 아니라 자기의 작품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엄격하게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남을 판단할 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만, 자신을 판단할 때에는 매우 관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판단력은 매우 부정확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전체를 볼 수도 없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부분적인 자료를 가지고 이웃을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력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으며, 편견이나 감정에 의해 그릇된 판단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남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남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판단하는 일을 중지하고 모든 판단을 공정하신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들처럼 편견이나 감정에 치우쳐서 잘못 판단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고 공정하게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권세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형제를 단죄하는 일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 행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형제가 실수하는 것을 보면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고, 자신도 그러한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이 사순시기를 보내야 하겠습니다...................................(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