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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묵상글 들 ( 예수 승천 대축일-희망은 하늘에 사랑은 땅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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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1.05.16 05:29
예수 승천 대축일-희망은 하늘에 사랑은 땅에
계신교 신자가 죽으면 소천召天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승천은 하느님 부르심보다는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심을 더 강조하는 표현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따라붙는 말이 '죽음을 이기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죽음을 이기고' 하늘로 오르는 것이 아니면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신 것은 땅에 있는 우리와의 이별 이상의 의미가 없고,
더 심하게 폄하하면 우리를 땅에 버려두고 당신만 오르신 것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죽음을 이기고 하늘로 오르시고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다면
이 또한 우리는 여전히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한 인생이기에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당신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며
그것은 아버지의 집에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셨지요.
문제는 이것을 우리가 믿느냐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희망하느냐 그것입니다.
우선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인데
한 마디로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위해서라면 한국 사람인 우리가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고 부처를 믿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을 얘기하면서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구원을 다 말씀하셨지요.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기에 행복하다고 하실 때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약속하시고,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웃게 될 것이라고 하실 때는
죽고 난 뒤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었지요.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이것을 믿을 수 없다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 없습니다.
다음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 삶이 전부이고 죽고 난 뒤의 저 세상은 꿈도 꾸지 않는다면
주님도 주님의 믿기 어려운 부활 신앙도 굳이 믿을 필요도 없겠지요.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구원은 이 세상 구원이 아님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서 주님 따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지닌 부와 자기 가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천년만년 사는 것이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가위 때 읽는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곳간을 늘리면서 이 세상에서
평생 살고자 했지만 하느님은 그날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이 세상을 초월하고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오늘 본기도와 감사송과 두 번째 독서는 천국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주님께서 으뜸이며 선구자로 앞서 가심은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러한 것이지만 우리의 사랑은 세상에로 향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천사는 하늘만 쳐다보지 말라고 하고 복음의 주님께선
승천하시며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하늘에 두되 사랑은 땅에 두라는 얘기이고,
마음은 하늘로 향하지만 몸은 세상을 부지런히 다니라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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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고도미니코 신부님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은 부활 시기 마지막 주간이자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날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기까지 당신께서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몸소 보여주시며 하늘에 오르는 결과만을 보지 말고 당신과 같은 과정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을 지내는 참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승천은 하늘을 보면서도 자신이 서 있는 땅을 잊지 않게 하고 밝은 해를 바라보면서도 자신 뒤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도 같이 바라보게 합니다. 위를 바라보기 전에 아래를 바라보고 밝음을 바라보기 전에 어둠을 직시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을 숙고함 없이 자아 인식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또 자신의 내면의 어둠과 대면하지 않은 채 오로지 명상과 신비에만 관심을 두고 위로만 오르려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겸허한 자기 성찰과 진실한 자기 인식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하느님 앞에서 더 낫게 보이려고 높은 것, 위에 있는 것을 보기 이전에 나의 현실 속에 내려와 나의 약함과 무능함을 바라볼 때 비로소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하늘길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넘어진 그곳,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그곳,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체험할 바로 그곳이 하늘에 오르는 발판이 되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진솔한 자기 만남이 곧 참된 하느님 만남의 조건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일상에서 다가오는 괴로움, 근심, 걱정, 불안은 가시밭길이며 고통의 길이지만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이며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바로 참된 자기를 만나고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미천, 초라, 허무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더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장소이자 너나 할 것 없이 벌거벗은 장소입니다. 그래서 거짓 없는 사랑의 빛에 몸을 노출 시키게 됩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지 못하듯 우리의 영혼도 고통과 시련으로 단련 받지 않으면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영혼은 하느님께서 친히 들어 높여 올리십니다. 교만은 자기를 자기 이상형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실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교만을 품고 있을 때 사람은 허상의 세계로 높이 솟아올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겸손은 하느님의 영 안에 사는 삶인지를 인식하게 만드는 기준이며 신앙생활의 바탕을 이루는 기초입니다. 겸손없이는 하느님을 자신을 위한 하느님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뵙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직감력을 발전시키게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겸손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영혼이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 올려질수록 더욱 겸손의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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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키엣대주교님
지금 이곳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2천년전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도 여전히 절실합니다. 선교는 언제부터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온세상에 가서” 선교는 공간적제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곳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도시와 시골, 산과 바다 그 어느 곳도 제외될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순간부터 선교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성공과 실패를 겪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직자와 수도자는 줄고 있지만 여전히 선교의 영혼들은 열정적으로 주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마 최후의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복음화”, 내가 믿고 있는 진리를 전하기에 앞서 기도와 실천을 통해 '복음의 기쁨'을 내 몸에 새기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믿음을 갖고 있지만 아직 내 몸에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악마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증오심과 탐욕의 번뇌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완전한 복음화를 위해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진정한 복음화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임무를 완수하신 후 하늘 나라로 오르시기 전에 하신 말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말씀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곳이 어느 곳이라도 가야하고 그곳에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늘만 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지말아야합니다. 하늘나라를 사랑한다면 지금 이 세상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천국이 되도록 이 세상을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선교를 하겠다는 기약을 하지마십시오. 바로 지금부터 이 곳에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하늘나라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며 하늘나라에 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주님, 하늘 나라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늘 나라를 믿고 있습니까?
2. 하늘나라는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3. 주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 할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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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전례는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답송>은 승리자이신 하느님께서 환호소리 드높은 가운데 성전에 오르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백성 너희는 손뼉을 쳐라. 기쁜 소리 드높이 주님 부르라. ~노래하라, 노래하라, 하느님께 노래하라, 고를 타며 우리 왕께 노래를 불러라.”(시편 46,2-7)
이처럼,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떠나시지만, 영광을 입으시어 왕으로서 성부 곁에 좌정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이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승천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의 승천을 암시해줍니다. 이에 관해 레오 교종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를 위한 고양이요, 앞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자리하신 거기에는 그 지체인 우리를 위한 희망이 있다. ~오늘 우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확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간 것이다.”(예수승천강론)
이에 관해서, <본기도>도 다음과 같이 경탄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우리의 성장이 촉진되며, 또한 머리이시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이 올라가신 그곳으로 지체인 우리 희망도 따르오니,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에 용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게 하소서.”
또한, 이를 <감사송>에서는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이 되신 주 예수, 죄와 죽음의 승리자로 개선하시어~우리의 으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어, 앞서 가시면서 당신 지체들인 우리도 당신이 가신 데로 따라가게 하셨나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광 중에 천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한편, <제1독서>는 베일 속에 가려진 신비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보다 깊은 인식을 요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이지를 알게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에페 18-23)
그리고 <복음>의 <첫째 장면>은 “복음전파”의 사명과 그에 따른 표징을, <둘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셋째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의 복음전파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단지 복음 선포의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따르게 될 표징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이는 새 창조로서의 복음 선포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은 사물들의 질서 전체를 전복시키는 힘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게 되고, 창조의 구조자체를 새로운 관계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심으로써 취하신 왕권과 권능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통치와 권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에페 1,20-22)
<셋째 장면>에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고 말씀하시면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명령에 순명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특별히 승천과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의 참된 목적이 바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능을 복음 선포와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실현시키게 됩니다.
이처럼, 승천은 주님께서 멀리 가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심임을 말해줍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때와 시간의 제약 없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행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서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바로 그분의 동행으로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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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
⒈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총정리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강림을 앞두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발현하시며 공생활 3년의
가르침을 복습시켜 주셨고 총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사도로 변신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루카는 예수님의 이러한 교육적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여 복음서와 연결된 사도
행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는 사실상 루카가 유일하게
기록해 놓았고, 마치 시청각 교육을 하듯이, 십자가 죽음-부활-승천-성령 강림의 구도를
짜서 신자들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교회도 이러한 루카의 의도를 반영하여 사도신경과
대신경에서 승천의 신비를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십자가에 달리시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뜻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표현은 하지만 그 의미는 영혼이 높이 들려 올라간 것입니다. 하늘이라는
공간으로 육신이 이동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고귀해 진 상승 작용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단순히 죽음으로 끝난 일이 아니고 삶이 하느님을 닮을 수 있도록 거룩
하게 변화된 일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⒉ 루카의 승천 메시지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독서의 말미에 나와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
다”(사도 1,10). 그렇습니다. 우리가 쳐다보아야 할 하늘은 없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하늘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하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리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는 모습입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비천하고 불편하며 고달픈
십자가일지언정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심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진면목을 증거하셨는데, 바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하늘이 이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낮춤, 십자가의 비움.
⒊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 조상들의 심성과 의식구조
속에는 하느님, 즉 하늘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이 땅의
선각자들과 민중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데 원초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수용된 지 200여년 정도밖에 안 된 그리스도교가 이 민족의 역사를 주도하는 종교로
성장하게 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초월적이고 절대자이신
창조주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기존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던 문화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속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명패를 붙여 놓은 예배소를 실마리로 하여 엉뚱하게도 맨땅에 헤딩하다시피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오로의 경우와 비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종교에 없는
유일신 사상과 삼위일체의 하느님, 강생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 등 그리스도교의
많은 교리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⒋ 그러나 한국의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의 초대 교회와 사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로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지녀온 하늘과 하느님에 대한 심성 덕분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충분한 상황을 조성하고 토착화 작업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 민간신앙에 전해 내려오는 ‘최고신’ 신앙은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과
민간신앙의 하느님 신앙 사이에는 그 내용과 깊이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 땅의 천주교 신자가 된 한국인들은 전통적인 민간신앙의 하느님 관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심오하고 어려운 삼위일체 도리마저도 그러했습니다.
⒌ 조선 후기에 천주교 교리의 특징을 보여 주는 네 가지 기본교리는
천주존재(天主存在)ㆍ강생구속(降生救贖)ㆍ삼위일체(三位一體)ㆍ상선벌악(賞善罰惡)입니다.
이 중 상선벌악이 불가에서도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가르칠 정도로 매우 보편적인
개념이고 보면, 나머지 3개는 천주교 교리의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예비자 시절에 배워도
세월이 흘러야만 깨달음이 올 수 있는 어려운 교리 내용입니다. 하지만 우리 고유 신앙의
원형 속에는 놀랍게도 이것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원초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또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세례와 거듭남, 광명신앙을
통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각 등에서도 상당 부분 서로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천주교가 이 땅에 정착하는 데 중요한 영성적 지반이 되고
매개적 요소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⒍ 이 점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선 후기 유교사회 속에서도 최고의
신앙 대상은 전통적인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적 조선왕조는 철저하게 제천의례
(祭天儀禮)를 금지시켰고, 모든 제사는 오직 조상에게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명나라가 천자국으로서 신하국 조선에 강요한 질서였는데, 중국의 황제만이
천자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릴 수 있으니 중국의 일반 백성이나 조선의 왕과 백성 모두
하늘에는 제사를 드릴 수 없고 오직 조상제사만 드릴 수 있다고 자격을 제한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무려 5백 년 동안이나 그랬습니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조상제사도 양반 계층만 드릴 수 있었고, 중인 이하 계층에서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믿음에 있어서 돼먹지 않은 신분차별이 엄존했던 셈입니다.
⒎ 더욱이 조선의 지식층에 있어서는 무신론적인 성리학이 주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도래한 천주교 사상은 종교적ㆍ윤리적ㆍ사회적으로 지식층과 민중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만민이 하느님의 자손이라 불리는
천손의식(天孫意識)과, 만민이 제천의례에 천손이자 주인공으로 참여했던 종교성의
회복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박해시대는 물론 그 이후 시대에도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거의 한 시간씩 걸리는 조과와 만과를 빠짐없이 바치던 그 열성은 강요에 의해서는
가능할 수 없는 정성입니다. 조정에서는 금했던 하느님 찬미를 천주교는 아침 저녁으로
해야 한다고 의무로 가르치니 차라리 부담이 아니라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후기 종교사상사ㆍ문화사ㆍ사회사 전반에 일으킨 충격과 파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종교적ㆍ윤리적으로 독특하고 고립된 교우촌에서,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박해받는 공동체였던 초기 조선천주교회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전파했던 것은 밝음ㆍ빛ㆍ구원을 향한 열망, 그들 자신이 그 옛날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하느님을 섬기는 신민(神民)이요 천민(天民), 하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자각ㆍ확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와 ‘대부모’(大父母)로 고백하며 흔연히 목숨을 바쳐 치명했던 것입니다.
⒏ 사도 바오로도 필리피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필리 3,20). 하늘의 시민들이 기다리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또한 성령 하느님
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십자가로 부활하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는 에페소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에페 3,17-18).
⒐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권고 말씀은 하느님의 영적 능력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십자가로 부활할 수 있는 내공의 힘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지니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권고입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3,19-20).
그 옆자리가 우리 자리입니다.
⒑ 충만한 승천의식으로 살았던 우리 신앙 선조 중에 이도기 바오로 복자가 있습니다.
충청도 청양 태생인 그는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하느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고향의 천주교인들로부터 입교 권유를 받고 배운 천주교의 가르침을 열심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들여서 가난한 이들을 돕기도 하고 옹기를 구워 팔러
다니는 틈틈이 교리 서적을 구하여 비신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797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를 알던 교우들은
이 소식을 알려주며 피신하기를 권유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권유하여 입교한 교우들이
흔들릴까봐 거절하고 체포하러 온 포졸들을 맞이했습니다. 포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에서 모욕을 주며 조리돌림을 시켰는데, 이도기 바오로는 오히려
희희낙락하며 “천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니 차라리 영광”이라며 관장에게 고맙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약이 오른 관장은 형벌을 가하며 “조선에는 공자의 가르침과 불교가
있거늘 왜 하필 나라에서 금하는 사학을 믿느냐?” 하며 배교하기를 종용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나는 무식하지만 유교는 선비들이 믿는 것이고,
불교는 스님들이 믿는 것이지만, 천주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압니다.” 하고
말하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리고 매질 당한 상처가 곪아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을 감사하며 기도드리는
그를 보고, 함께 갇혀 있던 교우가 그래도 자신은 고문이 두렵다는 말을 하자,
“난들 왜 고문이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떻게 귀한 천당을 헐값으로 살 수 있나?
고통은 천당을 사는 돈이라네!”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귀한 천당을 헐값으로 살 수 있나, 내 고통이 천당가는 노자일세!” 하며
치명한 이도기 바오로를 생각하시면서, 일상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 승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이미 하늘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분 옆자리가 우리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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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캐리어’(Carrier) 하면 생각나는 전자제품이 있나요? 어떤 사람은 여행용 가방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더 유명한 것은 ‘에어컨’으로 유명한 상표입니다. ‘캐리어’는 1902년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라는 엔지니어가 현대적인 에어컨을 발명하면서 세운 회사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에어컨을 만들었을까요?
사실 그의 직업은 인쇄소 엔지니어였습니다. 인쇄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그가 달려가 고쳤습니다. 그런데 종이가 출력되면서 구겨지는 현상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기계 자체에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래서 그 이유를 살피다가 인쇄소의 높은 습도 때문에 종이가 구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그는 습도와 온도를 낮추는 기계를 만들었지요. 이것이 바로 지금의 에어컨 탄생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딱 한 가지 그 문제만을 해결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더 많은 가치를 문제 해결의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좌절하고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한 단계, 아니 그 이상의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고통과 시련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 옆에 어떤 선물이 놓여질 지를 살펴보십시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큰 기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 삶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까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생긴 부재로 인해 갈팡질팡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다시 주님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의 반대를 예수님 없이 모두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재는 그들에게 정말로 커다란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선물도 주십니다.
바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치유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통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완성해가면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더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피하고 싶은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그때 좌절과 포기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발견할 기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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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푸블리우스 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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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신학생 때의 제 모습은 지금과 아주 달랐습니다. 우선, 당시에는 늘 완벽함만을 추구했습니다. 조금의 실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래서일까요? 다른 신부님들이나 선배님들께는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후배들은 힘들었나 봅니다.
몇 년 전에, 한 후배 신부로부터 신학생 때 제가 정말 무서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하더군요. 너무 완벽함만을 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나 자신도 힘들거든요. 그래서 완벽의 삶을 내려놓으려고 힘을 쏟았습니다. 실수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때로는 일부러 실수하기도 하는 약간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실수도 하고 남의 실수도 받아주다 보니 점점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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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곁을 떠나 당신이 취하신 인성이 함께 하느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다. 이제 우리는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다. 교회는 이 성령 안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승천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바로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왕권과 권능을 가지신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즉 구원의 충만성은 이제 교회의 선교사명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되고 교회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실현한다.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선교사명”을 주신다. 이로써 교회는 선교활동을 통해 구원의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교회는 삶으로 증거가 돼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심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20절). 예수님 부활의 참된 목적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통치권이 드러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승리자이심을 실제로 드러내야 한다(2코린 2,14).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시어 아버지 오른편에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상에 오를 수 있는, 즉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내는 축제는 기쁨과 기다림의 축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우리들의 고양(高揚)을 당신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닮음으로써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요한 16,7)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따를 수 있는 온갖 악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 선포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용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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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승천’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은, ‘제자들이 직접 본 일’을 증언한 말이고,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1)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은 어디일까? 어디에 있을까?
그 ‘하늘’이 우리가 늘 바라보는 그 ‘하늘’은 아니라는 것, 또 예수님께서 대기권을
지나서 지구 밖의 우주 공간 어딘가로 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어떤 특정 공간이나 장소로 가신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영적인 체험일까, 환시일까?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보았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실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하는 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2)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은 ‘모든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곳’으로 가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을 통하여 모든 곳에 계시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고 말합니다(사도 1,11).
이 말은,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을 보아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또는 만나려면 하늘이 아니라 땅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승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하고, 만나야 합니다.
사람이 있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3)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모든 곳에 계시는 것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이 승천이기 때문에,
승천은 ‘떠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심’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것을 믿었고,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본 뒤에,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루카 24,52).
만일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떠나심’으로만 생각했다면,
그들은 크게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떠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믿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이 약속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라고
표현했습니다(마르 16,20).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생활입니다.
4)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부활도 믿고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승천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 모두 이루어지고 나면’으로 해석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승천은 우리만 바라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5) 승천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지상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 4,9-13).”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에페 4,15).”
실제로 어떤 직책을 맡았든지 안 맡았든지 간에,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 일치를 통해서 예수님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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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주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떠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 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 위 몇 미터까지 올라가셨을 때 승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0미터? 아니면 1,000미터인가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면 될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수치로 측정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이라는 장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눈앞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부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부활과 승천 또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떠나심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주님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분을 믿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승천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에게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땅의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고,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삶에만 집중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홍보 주일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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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사도 1,1-11)는 예수님의 승천을 체험한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승천까지 다 다룬(복음) 뒤에 루카는 “테오필로”에게 또 다시 전해 받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자료들을 엮어서 보냅니다. 빈무덤이 발견되던 날 저녁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타니아 근처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강복하시고 사명을 수여하신 뒤 승천하셨다(루카 24,50-53)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당신이 파견된 이유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루카 4,43)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으며, 제자들을 “사도”(파견된 사람)로 부르시면서 목격증인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루카 24,47-48) 것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며칠 뒤에 사도들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루카 24,49; 사도 2,1-13) 성령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구세주가 오시면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루카 24,21)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을 위해 나라를 재건하시는 것입니까?’라는 정치적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께서만 그 나라가 올 때를 아신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당신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사도 1,1)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 선포하고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맞아들여지셨는데(루카 9,51; 24,51), 하늘로 오르시면서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고(9절),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데(10절), 천사들(“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11절)이라고 합니다. 루카는 다섯 번의 시각적 동사(묵시문학적인 표현)를 끌어들이면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임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루카가 묘사하는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에서 본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이며 동시에 종말에 재림하시는 모습으로 정착되고, 이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고, 본격적으로 사도들과 교회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복음(마르 16,15-20ㄴ)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신 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고 합니다.
후대에 첨부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처음으로 예수님께 “주님”이라는 칭호를 붙입니다(마르 16,20).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사도”라고 부르시지도 않고,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 속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권능과 더불어 창조의 전권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이들에게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 이미 사라졌을 때인 듯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뎌내면서 자기들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콜로 1,23) 선포하고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해 사람들은 믿음이나 불신이냐, 이 두 가지로 반응할 것입니다. 믿음은 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믿음 때문에 받게 된 세례는 부활하신 분께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의 표징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한 3,18)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 3,5)
열한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된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표징들이 따를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미 제자들에게 주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이 발휘될 것이며(마르 6,7), 선포되는 하느님의 위업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게 될 것이고(사도 2,11),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이 드러날 것이며(루카 10,19; 사도 28,3-6), 열한 제자들의 손이 얹어진 이들의 병이 고쳐질 것입니다(사도 3,1-9).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사도 3,6) 행동할 때 표징들이 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열한 제자들의 공동체는 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믿는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표징들이 열거된 결정적인 이유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서 계속해서 일하심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마르코가 전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사건은 예수님의 승천이며, 이 사건을 부활하신 분의 마지막 발현으로 소개합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 세상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표현하면서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당신 오른쪽에 앉히신 것은 세상의 원수들을 예수님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들어 올리신 것이며(시편 110장), 승천이야말로 피조물에 대한 전권을 가진 자리에 부활하신 분께서 앉으셨다는 그리스도중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열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면서 자기들은 물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보았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뜻에 따라 표징과 이적과 갖가지 기적을 통하여, 또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 주시어 제자들의 증언을 보태어 주셨습니다(히브 2,3-4).
제2독서(에페 1,17-23)는 에페소인들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기도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 계시며”(2코린 13,4),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음”(콜로 2,12)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으니” 그리스도를 믿게 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갈라져서 싸우지 말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에페 2,11-22). 그런데 이런 구원의 신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깊은 비밀을 통찰하시는 성령께서 계시해 주실 때에만(1코린 2,10),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달을 수 있을 때에만(요한 14,26)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게 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성도들과 함께 받게 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신 것도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스도께서 머무르시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구원의 공동체의 머리로 세워주시어 한 몸을 이루면서 우리를 지체가 되게 해주셨으니(로마 12,5) 복음 말씀대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에페 2,1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시러 이제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요한 14,2). 예수님의 승천은 인간을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셨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께서 이미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요한 7,39; 20,22).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께서 직접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지 않아도 될 만큼 제자들이 예수님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만큼 많은 증거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교회는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신 모습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오른편에 오르신 다음 약속하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쏟아부어주시겠다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에 오르셔서 온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실 때, 세상 곳곳에 있는 이들이 빛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에 가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합니다(루카 24,47). 그렇게 되기 위해서 먼저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인 지혜와 계시의 영을 입을 때까지 우리는 교회(예루살렘) 안에 머무르면서(루카 24,49)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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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장례미사를 할 때입니다. 자녀들이 홀로되신 어머니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남아계신 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몫까지 다해서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자녀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예비자 교리를 받았고, 성당에서 봉사하면서 어머니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하였습니다. 그 뒤로 저는 장례미사를 할 때면 당부의 말을 하였습니다. 홀로되신 어머니와 아버지께 효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신앙 안에서 사셨으니, 가족들도 신앙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10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작년에 어머니도 아버지가 계신 하느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남아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먼저 자녀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생 신앙 안에서 사셨으니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인 자녀들이 맡겨진 소임에 충실하기를 바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예수 승천 대축일’입니다. 비록 삶의 길이는 짧았지만 달릴 길을 다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이어 달리기 선수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부활 그리고 승천은 제자들에게는 추억 만들기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문하는 추억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서 참된 기쁨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참된 기쁨과 평화를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기쁨을 추억으로 만들어 가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마귀는 집요하게 우리들의 영혼을 찾아옵니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마귀가 자주 사용하는 미끼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게으름으로 유혹하기도 하며, 탐욕과 욕정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합니다. 육신의 병을 치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교만의 병에 걸린 사람, 분노의 병에 걸린 사람, 시기의 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영혼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이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념과 희망은 우리를 미래라는 항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교회는 예수 승천 대축일을 ‘홍보주일’로 정하였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미주지역을 다니면서 신문을 홍보하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작년에는 코로나19로 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백신을 맞고 있지만 올해도 신문홍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5년 전입니다. 은경축을 지내면서 글을 모아 ‘사제생활 할 만하십니까?’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원하시는 분에게 신청을 받았고, 신청하신 분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예전에도 읽었던 책을 인터넷을 통해서 신청을 받아 나누어 드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청해 주셨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인터넷을 통해서 신문구독 신청을 받고 싶습니다. 미주지역에서 신청하시는 분들에게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 주소, 이름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도움을 주시면 제게는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는 큰 힘이 될 겁니다. 저와 직원들은 매주 후원회원과 독자를 위해서 미사 중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 E mail : peacetimes9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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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승천의 순례 여정
- 희망, 깨달음, 복음선포 -
오늘은 부활 제7주일이자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매일이 주님 승천 대축일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사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매일이 부활 대축일이자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런 축제를 지낼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전례 축제없이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팍팍한 사막같은 현실 너머 천국을 내다 볼 수 있게 하는 전례 축제는 그대로 영혼의 샘터가, 쉼터가, 배움터가 됩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때만 되면 떠오르는 모두가 흥겹게 승천의 희망과 기쁨중에 노래했던 “환호소리 나는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화답송 시편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노래 못한지도 벌써 두 해째입니다.
어제는 성 빠코미오 아빠스 기념일이자 스승의 날이었고, 저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앞서 스승의 날에 참 좋은 분들을 통해 감동적인 선물을 받았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을 일컬어 ‘팔불출八不出’이라 한다는데 이를 무릅쓰고 약간 길다 싶지만 우선 자랑부터 한 후 본격적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매일 일찍 일어나기에 끝기도가 끝나면 기진맥진 상태인데 마침 낯익은 착하고 열심한 아름다운 자매님들 네분이 미사신청겸 집무실에 잠시 들렸다 ‘스승의 은혜’를 참 고운 목소리로 정성껏 불러 주어 감동했습니다. 두둥실 하늘에 떠오르는 승천의 기쁨 가득한 분위기 였습니다. 즉시 사진에 담아 잠자기 전 메시지와 함께 전송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들! 스승의 은혜! 노래 선물 너무 너무 감사, 감동입니다! 예수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스승의 은혜, 3절까지 불러 주었고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제 1절은 ‘스승’을 ‘주님’으로 바꿔 산책중 여러번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스승은 주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주님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주님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주님의 은혜”
이어 40여년전 그러니까 지금은 50대 중반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 셋으로부터의 친필 편지와 더불어 메시지에도 감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 올립니다.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를 써본지가 6학년때 써보고 41년 만에 처음이네요. 선생님 제자임이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셔서 함께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 멀리서 킥서비스로 보낸 축하선물 떡상자 안에 있던 편지글 일부입니다. 이어지는 두편의 메시지 편지글도 소개합니다.
“선생임, 저 은경이예요. 스승의 날에 못 뵈어서 죄송합니다. 마음은 굴뚝 같으나 여의치 않아 못 가 뵈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선생님을 만났고 저도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지만, 진정 선생님으로 생각나는 분은 이수철 선생님밖에 없네요. 그만큼 철없고 어린 저에게 따뜻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신, 참으로 소중하게 기억되는 분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하는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큰 관심과 칭찬이 제 삶을 얼마나 변화시켜 주셨는지 모르실 거예요. 자존감 약한 저에게 ‘나도 잘 하는 것이 있구나’ 희망을 주신 선생님의 차별없는 사랑에 힘든 시절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건강하세요. 가까운 날 찾아 뵙겠습니다. 근거없는 비방 기사들도 넘쳐 나지만 코로나 백신도 꼭 맞으시고요.”
참 좋으신 주님께서 당신 승천 대축일에 앞서 스승의 날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승천 대축일의 기쁨을 한껏 더하고 있습니다. 팔불출이란 말을 들을 각오한 자랑들입니다. 昇天과 더불어 소천召天이란 말과 귀천歸天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모두 하늘의 본향집으로 돌아간다는 죽음을 뜻하는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늘 들어도 좋고 아름다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귀천의, 승천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음은 누구나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죽어서 승천이 아니라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승천의 여정에, 하늘길 여정旅程에, 하늘길 등정登程에 오르고 있는 우리들 입니다. 죽음은 승천의 여정의 끝으로 하늘문 통과와 더불어 끝날 것입니다. 어떻게 아름답고 행복한 성공적인 승천의 순례 여정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희망입니다.
희망에 저절로 따라오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세상적 희망이 아니라 현실 ‘너머’ 영원하신 분이시자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이신 주님을 향해 주님과 함께 희망의 여정, 승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2독서 에페소서에 밝히는 분,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께 영원한 희망의 닻을 내린 우리들이야말로 천하무적天下無敵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유혹할 수 없고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너머’를 말마디를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제 어렸을 때 좋아했던 60년대 ‘박재란’이 부른 ‘산너머 남촌에는’ 가사를 소개합니다. 가사 내용도 곡도 너무 좋아 제가 요즘 산책중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산너머 남촌이 상징하는 바 바로 우리 주님 계신 곳입니다.
-1.“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
꽃피는 사월이며 진달래 향기, 밀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는 것 한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 때 나는 좋대나”
2.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하늘 저빛깔이 그리 고울까
아---
금잔디 넓은벌에 호랑나비떼, 보리밭 실개천에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가지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제 나는 좋대나.”-
바로 이 거룩한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영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보이는 너머 저 위로부터 오시는 주님 성령의 남풍이 우리를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지혜, 깨달음의 순수, 깨달음의 기쁨, 깨달음의 자유, 끝이 없습니다. 승천의 순례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면서 빛의 자녀로, 하느님의 자녀로, 주님을 닮아 참 나로 살게 하는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 전반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바오로 사도가 간절히 청하는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의 깨달음의 은총을 청하는 참 아름답고 깊은 내용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깨달음의 선물들이 얼마나 좋고 아름답고 풍요합니까! 바로 승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시는 은총의 선물,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셋째, 복음선포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사명이자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내 몸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기후재난을 겪고 있는 작금의 절박한 현실이기에 지구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태적 회개가 포함된 복음 선포의 과제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내 존재 자체가, 내 삶자체가 살아 있는 복음이 될 때, 걸어다니는 복음 성서가 될 때 저절로 이뤄지는 복음 선포입니다.
교황님은 “와서 보시오”(요한1,46)란 주제의 55차 홍보 주일 담화를 통해 사람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소통하기를 당부 하시면서 발로 뛰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복음서로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어제 읽은 기사입니다.
“백척간두! 이 사자성어만큼 인류의 운명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기후변화 연구자들에 의하면,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1.5도로 억제하지 못한다면 사피엔스 문명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2050년까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을 제로(탄소중립)로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장대익 교수).
지구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 형제들을 포함한 복음 선포는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보다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은 없습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실현되기 시작한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맛보며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밖에 멀리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를 역동적 승천의 순례여정으로 이끌어 줍니다. 승천하시는 주님을 넋놓고 멍청히 바라보는 제자들을 향한 두 천사의 말씀은 그대로 ‘영적 갈릴래아 사람들’인 우리를 향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미 오셔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의 제자들의 현실은 다음 복음 묘사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는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모두가, 승천의 순례 여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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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 승천의 의미를 들려 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사도 1,3 참조)신 예수님을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1,20) 그래서 교회는 대대로 성령 강림 대축일 전에 이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승천은 예수님께서 저 위 하늘 나라 대기권 속으로 올라가셨다는 의미보다는, 물리적으로 취하셨던 육신을 벗고 원래 계셨던 당신 신성의 자리로 돌아가셨음을 가리킵니다. 육신을 벗으신 예수님은 이제 더 자유롭게 우리와 함께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그저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사명을 받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마르 16,15)합니다. 그들을 지탱하는 힘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전하는 바를 친히 이루어주심으로써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에 이르시기까지의 일들이 차근히 서술됩니다.
"땅끝에 이르시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선포 내용을 확증해 주시고, 그럼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 땅끝까지 힘차게 뻗어 나가 주님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의 증인들과 함께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실 것입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영원한 동행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에페 1,22)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기에, 우리 모두는 그분 몸의 구성원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한 교회 역시 존재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 주님과 우리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확증하고 증언하며 하나로 나아갑니다. 천상 예루살렘 교회의 완성에 이를 때까지 이 동행은 지속될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는 그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욱 확고한 현존으로 선사받았습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시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시지만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함께 존재하고 일하시지요.
나약한 우리가 주님 때문에 가슴이 뜨겁게 타올라 부활의 증인이 되고, 그런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이루어지며, 죄인인 우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세상에 또 다른 선한 영향력의 고리가 되는 일. 이 모든 놀라운 기적들은 당신 말씀을 확증하시는 예수님 헌신의 자취입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우리는 주님의 '떠남'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그분과 동행하여 걸어 가는 중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시어 지상 순례길에서 맺힌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랑의 심판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서로 격려하며 말씀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빛을 향해 나아갑시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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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의 날-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16,19)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위해 애쓰는 우리 모두와 가톨릭 신문 등 홍보 매체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맡겨주신 사명은 죄인들의 구원이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 주어진 이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십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크실까?
그리고 이것도 부족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십니다.
모든 사명을 이루시고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을 완수하고,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 신자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먼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1테살5,16-18)
내가 먼저 복음이 되고, 말과 행동으로 이 복음을 전하는 멋진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본기도)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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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승천 사건 앞에서 사랑의 눈, 희망의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부활에 이은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 모든 사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했던 특별하고도
기상천외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기이한 사건이었기에 목격자들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 없이, 어린이다운 전폭적인 의탁 없이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각자 앞에 던져진 하나의 큰 과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는 우리 각자의 시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랑의 눈, 희망의 눈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린이다운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앞에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된 우리들, 어리둥절한 표정 짓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이제 하늘이 아니라 땅, 우리 모두가 아등바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르침과 업적을 찬양하며 인간 세상 안에서 그분의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승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별입니다.
지난 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이별인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 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야 드디어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 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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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 승천 대축일]
주님 승천이 말해주는 비밀 :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있다.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날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향해야 할 방향이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이란 상징적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이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탈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은 자아로부터 탈출하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하늘이지,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우리는 악마의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탈출하고 이웃도 탈출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이 세상이 악마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면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여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이 허물어져 가는 세상에서 탈출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들은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세상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환경 단체는 자연을 살리자는 좋은 취지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자칫 이 세상이 전부인 양 활동한다면 그 환경 단체도 악마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고, 어쩌면 세상이 망하게 만드는 선봉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가 우리가 버리는 플라스틱으로 죽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환경 단체가 그렇게 주장하고 대부분 사람이 그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다거북의 코에서 빨대를 제거하는 동영상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고 죽은 고래, 남한 면적 14배의 쓰레기 섬과 같은 동영상을 보며 우리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 빨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바다에 버려져 바다짐승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플라스틱 빨대는 바다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0.03%에 불과합니다.
수치상으로는 당장 그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수준입니다.
더 중요한 쓰레기가 있는데 버려지는 양이 모든 쓰레기의 46%를 차지하고, 이것이 바다의 물고기를 죽이는 결정적 요인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어부들의 ‘그물’입니다.
그물에 의해 수많은 물고기가 학살당하고 또 그렇게 버려진 그물 때문에 물고기와 바다 생물이 죽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에서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 생물이 사라지는 진짜 이유는 기후 변화 때문도, 해양 오염 때문도,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업 때문이죠.
하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플라스틱 때문에 죽는 바다거북은 연간 1천 마리로 추산합니다.
그러나 그물에 걸려 죽는 거북은 연간 25만 마리입니다.
그런데 환경 단체는 바다를 살리자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자고만 말합니다.
하루 동안 바다에 새롭게 쳐지는 그물은 지구를 500바퀴 돌릴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 얼마나 많은 그물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을까요?
일본은 고래잡이를 합니다. 그물망에 돌고래를 가둬놓고 무자비하게 학살합니다.
우리가 참치회라고 많이 먹는 참다랑어는 이제 거의 멸종 위기에 놓였습니다.
게다가 상어의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다 버립니다. 대부분은 샥스핀 요리를 위해 중국에 수출됩니다.
1시간에 1만 마리에서 3만 마리의 상어가 죽고 있습니다.
상어가 사람을 죽이는 숫자는 1년에 10명 정도입니다.
이렇게 바다의 포식자들이 사라지면 바다 생물은 멸종하게 됩니다.
상어가 사라지면 그 밑의 물고기들이 급증해 먹이 부족으로 멸종하게 되고 그러면 또 그 밑의 물고기들이 그렇게 되며 그다음에는 물고기들의 배설물로 사는 바다 식물들도 그렇게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1분마다 바다에서 2조7천억 마리의 물고기가 잡히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2048년에는 바다에 어떠한 생물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전기차로 바꿔 타고 탄소를 줄인다고 해봐야 바다의 해조류나 바다 자체가 잡아놓는 탄소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 같습니다.
결국, 바다가 죽으면 세상도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의 30% 정도는 어획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실제로 0.5%만이 보호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환경 단체들이 계속 플라스틱을 줄여야 한다고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해양 환경을 위한 환경 단체는 그 자금을 어업 협의회에서 지원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환경 단체들은 자신들이 받는 돈 때문에 세상이 이런 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당신이 알고 있는 바다 오염에 관한 진실은 모두 틀렸다’, 유튜브 채널, ‘엉준’]
이 세상이 악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환경을 통해 세상을 살리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리며 그 속에서 안위를 누리려는 마음이 있는 이들은 좋은 뜻으로 활동하고 있더라도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이 목적인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 해악을 끼칩니다.
우리 교회도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수백 년 갈 것 같은 커다란 건물을 짓고 영원할 것 같은 단체를 만들고 세상에 오래 머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매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유는 이 세상의 운명을 악의 손에 넘겨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다에 가라앉는 배와도 같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탈출하는 방법은 세상으로부터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배를 탈출하려면 배를 버려야 합니다.
배를 버림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죽는 것이 두렵다고 배만 꽉 붙들고 있다가는 진짜 죽습니다.
주님 승천은 우리 삶이 ‘탈출기’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앞서시어 홍해를 건너신 것이 승천의 의미입니다.
이 세상은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허물어지는 땅에다가 커다란 건물을 지어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주님 승천은 이 세상이 허무하고 악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빨리 탈출해야 하고 그 방법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임을 명확히 보여주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 승천은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의 상징입니다.
악마의 무게로 가라앉는 이 세상에서 오래 머물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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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영원하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길 부탁하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그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명과 죽음입니다. 신명기에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30,19).고 적혀 있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생명,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단죄와 죽음이 놓여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따랐는데 믿는 이들이 대표 격인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았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악한 영들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왔으면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을 흉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를 잡고 험담하는 마음을 빼어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르코복음 8,33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사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19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무슨 말을 듣거든 마음에 묻어라. 어리석은 자는 무슨 말을 들으면 옮기지 못하여 산고를 치르는 여인처럼 고통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말을 옮기지 못하면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은 양 못 견뎌 한다.”하고 말합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말,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눈을 뜬 만큼, 귀가 열리면 열린 만큼 새로운 언어로 듣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인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혹 거리가 많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해를 입히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 다양한 여건들이 상처를 주고받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아무리 우리를 해치는 말을 들어도, 또 유혹하는 말이나 행동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나 독을 마시지 않으려고 외부환경을 고칠 것이 아니라, 그런 독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내 안에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손으로 뱀을 쥐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보면, 야훼께서 뱀에게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뱀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이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그리고 그 후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정복된다는 것을, 예언해 주는 말씀입니다. 레지오마리애 회합 때 사용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성모마리아 상’을 보면 어머니께서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미사 안에서 영성체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은 영적인 병을 앓는 것입니다. 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고, 육적으로는 환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치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치유하는 명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는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보약중의 보약입니다. 이 보약은 어떤 중병도 치유합니다. 이 보약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천상에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계단”의 동의어는 “단계”랍니다.
단계는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쳐 쓰러지지 않게
여러 계단 건너뛰지 않고 하나씩 밟고 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계단”의 반대말은 “다단계”입니다.
다단계는 걸려 넘어질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여러 계단 건너뛰다 결국 바닥을 확인하는 인생이랍니다.
천국을 향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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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주님 승천 대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승천 대축일 제1독서 (사도 1,1-11)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2)
'승천하신 날 까지의'
'승천하다'로 번역된 '아넬렙테'(anelepthe)는 단순히 '들어 올리다' 라는 의미를 갖는 '아날람바노'(analambano)의 과거 수동형이므로, '올려졌다'(he was taken up)이라는 의미이며, 본문은 '그가 올려진 날까지'(until the day in which he was taken up)로 번역되어야 한다.
11절에서는 이 동사의 수동태 분사 '아날렘프테이스'(analemptheis)를 '승천하신'(올라가신)으로 번역했다. 이 동사는 물론 승천을 가리키지만, 승천이란 구체적 사건을 통하여 보여지는 예수님의 높아지심, 즉 현양의 신분도 암시하므로, '올리우신'(올리우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특히 여기서 수동형은 신적(神的) 수동태로서,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승천하셨으며, 이로써 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하는 현양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이미 루카 복음 24장 51-53절에서 마태오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승천 기사를 다루었고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승천 모티프'(ascension motif)를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가교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예수 승천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3)
본문은 십자가 수난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의 예수님의 행적을 요약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수난을 받으신'에 해당하는 '파테인 아우톤'(pathein auton)은 '고통을 당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파스코'(pasko)의 부정(不定;Indefinite) 과거 부정사와 3인칭 단수 대명사가 나란히 쓰인 형태이다.
원문 성경은 수난 받으신 주체가 아무 죄도 없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칭 대명사를 사용했으므로, 이것을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원문의 어순은 예수께서 '수난을 받으신' 것 보다 '드러내셨습니다'(파레스테센;parestesen)을 더 앞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발현하신 일을 더 강조하려는 루카의 의도 때문이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하셨더라도,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1코린15,6),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증거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의 확실한 증거는, 과거 영적으로 우둔하고 다분히 비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열정적이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복음의 전사들로 변모하게 한 원동력이다.
물론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모습의 사도로 바뀌게 한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가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40일 동안 보여 주신 확실한 많은 증거 역시,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증거'로 번역된 '테크메리오이스'(tekmeriois)는 '확실한 표적에 의해 보여 주고 입증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테크마이로'(tekmair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의심할 바가 없이 명쾌하고 확실한 표징이나 징표'라는 의미이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셔서 제자들이 보는 눈 앞에서 십자가 처형때 입으신 상흔을 보이시고(요한20,20), 그들과 함께 구운 생선을 잡수시는 등(요한21,9-14)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실을 제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로 보여 주셨으며, 루카는 이 사실을 이처럼 명확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표현했던 것이다.
'사십일 동안'
예수께서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날 수가 40일 이라는 기록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본문에만 있다. 이것은 역사가로서 루카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사십'(텟세라콘다; tesserakonta)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완전수이며 많음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에 머문 기간과(탈출24,18 ;34,28)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기 위하여 걸어간 날수(1열왕19,8) 및 예수께서 공생활 활동 기간 전 광야에서 단식하던 기간이 사십일이었다.(루카4,1.2)
이러한 날수는 물론 실제적인 기간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기간이었음을 상징한다.
본문에 있어서 루카가 사십 일이라는 기간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며 자신을 보이시고 하느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날수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4-5)
'함께 계실 때에'로 번역된 '쉬날리조메노스'(synalizomenos)는 문자적 의미로 '함께 식사할 때에'나 '함께 모였을 때에'라는 표현 모두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의 원형 '쉬날리조'(synalizo)는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쉰'(syn)에 '소금'을 뜻하는 '할스'(hals) 또는 '운집함'을 뜻하는 '할레스'(hales)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원적으로 볼 때, '쉬날리조'가 '쉰'과 '할스'에서 유래했다면, 이 단어는 '어느 누구와 함께 소금을 친 것, 즉 음식을 먹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쉰'과 '할레스'에서 유래하였다면 '함께 모여들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반대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첫째, 제자들이 그들의 지도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언제 자신들까지도 잡아 들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그들의 집이 갈릴래아에 있었으므로 굳이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속사정을 모르실리 없는 예수께서 굳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구약에서 예루살렘이 율법과 야훼의 말씀이 나오는 곳으로(이사 2,3 ; 미카4,2) 예언된 사실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한 구원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구원의 시발점이며,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장소로서 교회의 시발점인 동시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곳에서부터 온 유대아로 또한 세계 각 곳으로 복음이 퍼져 나가게 될 복음의 근원지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8절)
세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성읍인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고 초대 교회가 세워짐은 사탄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사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지닌 예루살렘은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큰 의미를 지닌다.
즉 이곳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의 예표요, 모형이라 할 수 있는 이사악을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번제로 바치려 했던 장소이며(창세22,2.14), 신약 교회의 모형이라고 볼 수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신도들의 영원한 처소가 될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 되기도 한다.(묵시21,1-7)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루살렘을 신약 교회의 출발지로 삼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나자렛에서 시작하여 갈릴래아와 유다를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마무리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는 히브리어 '예루샬라임(jerushaleim)을 음역한 것이다. '예루샬라임'은 '기초를 놓다', '건축하다' 등의 뜻이 있으며, '도시', '도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예루'(jeru)와 '평화'란 뜻이 있는 '샬롬'(shalom)의 변형 '샬라임'(shalaim)이 합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는 '평화의 거주지' 혹은 '평화의 도성'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장소가 이러한 의미를 갖게 된 것 역시, 이곳이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고, 또한 평화의 영이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는 사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이곳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성령 강림이 임박한 시점에 초대 교회의 구심점이 될 사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게 함으로써, 이미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을 가능케 하신 것이다.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본절의 예수님의 말씀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모두 등장한다. 먼저 '나에게서'는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아버지'는 성부 하느님을 가리키며, '약속하신 분'은 성령 하느님을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 즉 성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이다.(요엘2,28.29; 에제 36,26.27)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다.(요한14,16.2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까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한14,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승천한 이후에 이 땅에 남겨질 그의 제자들이 스승없이 복음 전파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이었다.
또한 루카는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의 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행전의 시작을 성령의 강림과 내주에 대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4.5.8절)
본절은 성령 하느님께서 필연적으로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함께 활동하심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성자 그리스도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역사하심을 암시한다.(사도2,3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성령께서 이어서 계속하신다는 것은, 구원사의 전개 과정에서 볼 때, 온 인류를 위한 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계속 남아 계셨다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존재 방식이기는 하지만, 육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거슬러 영적인 몸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심으로 인하여 영적 은혜가 온 세상에 편재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은 물론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본절은 멀게는 요엘서 3장 1-2절의 새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예언과 연결된다. 가깝게는 마르코복음 1장 8절의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한 세례자 요한의 예언 성취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세례'라는 의미의 '밥티스테세스테'(baptisthesesthe)의 원형 '밥티죠'(baptizo)는 '담그다'는 뜻과 함께 '씻다'라는 뜻을 가진다. 세례는 '죄로 오염된 옛사람이 죽고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해 새 사람이 되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사도행전 2장 1-4절과 연관지어 볼 때, 우선 직접적으로 불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될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물 속에 흠뻑 잠기는 것처럼, 성령의 세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권능(특은)을 덧입어(8절)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던 요한 복음 20장 22절의 "성령을 받으라" 라는 말씀은 그 당시 이루어졌고, 만일 이루어졌다면, 여기에서의 성령 강림 예언과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과 어떻게 조화가 되는가?
요한 복음 20장 22절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약속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는 것이 좋고, 죄사함의 은총으로 양심의 평화를 주는 고백성사의 사죄권에 대한 말씀으로 보면 된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다시~일으키실'(회복하심) 이에 해당하는 '아포카티스타네이스'(apokathistaneis)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주다' 라는 의미를 지닌 '아포카티스테미'(apokathistemi)의 직설법 현재 동사이다. 이 동사는 미래적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현재형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루카가 제자들이 정치적 의미의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매우 임박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명백한 미래적 사건을 묘사하는 데도 현재형으로 기록한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시점이, 자신들이 희구하고 있던 로마의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인가를 물은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질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9-11)
9절에서 11절까지는 예수의 승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강생하신 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명하신 구속사업을 완전히 마치신 후 다시 하늘 보좌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 보좌에서 계속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여기서 '보는 앞에서'로 번역된 '블레폰톤'(bleponton)은 현재 능동 분사로서 '보고 있을 때' 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제자들이 보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는 것은, 승천이 꾸며 낸 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준다.
또한 '오르셨는데'에 해당하는 '에페르테'(eperthe ; he was taken up)는 2절의 '승천하신'에 해당하는 '아넬렙테'(anelepthe)처럼 신적(神的) 수동태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예수님의 지상의 모든 활동을 기쁘게 여기신 성부 하느님의 장엄한 역사적 행위였다.
예수께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을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인간이 되어 탄생하신 사실 만큼이나 신비한 일이었다.(루카 2,5-7) 이 세상에 신비하게 오신 예수께서는 신비하게 이 세상을 떠나가셨고, 또한 재림 때에도 천군 천사와 함께 심판주로서 신비하게 오실 것이다.
한편, 루카복음 24장 50,5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제자들을 축복하는 대사제의 모습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배하는 모습으로 승천 기사를 다루었다.
본장의 승천 기사가 역사적 측면을 강조했다면, 루카 24장은 예배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직역하면, '구름이 그들의 눈(시야)으로부터 그를 붙잡아 데려갔다' 이다. 성경에서 '구름'은 예수님의 신적 권세를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된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의 변화(마르 9,7 ; 루카 9,34.35), 올리브산에서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말씀(마태26,64 ;마르13,26) 이라는 중요한 사건들에 있어서, 구름과 함께 등장하시는 모습은, 과거 하느님께서 모세의 만남의 천막에 영광으로 임재하셨던 일을 상기시킨다.(탈출40,35)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본문에서 '하늘'은 물론 공중을 의미하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은 반드시 장소적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라논'(uranon)원형 '우라노스'(uranos)는 신약 성경에서 272회나 사용된 단어로서,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다.
천사들과(마태18,10 ; 에페3,15) 하느님의 보좌(묵시11,13)가 있는 곳이며,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이며(마르1,11 ;히브12,25) 성령이 내려오는 곳이며(사도2,2 ; 마태3,16), 진노와 심판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루카17,29)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께서 주권을 행사하시는 곳이다.(히브8,1)
이처럼 성경에서 '하늘'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된 신학적 개념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승천의 의미는, 장소적 이동의 개념을 넘어서 인간이 받는 제약이 없는 세계, 물리적 법칙이나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차원(세계)에로의 이동을 말한다.
'그들이 ~유심히 바라보고' 로 번역된 '아테니존테스'(atenizontes)는 '~에 눈을 고정시키다', '응시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테니조'(atenizo)의 현재 능동태 분사 복수형으로서, '있는데'로 번역된 미완료 동사 '에산'(esan)과 더불어 '그들이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워지고 구름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잠시라도 그들의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보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
'사람'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가리키는 대상은 분명히 천사들이다. 사실 흰 옷 차림은 천사들의 상징히기도 하다.(마태28,3; 요한20,12) '흰'으로 번역된 '류카이스'(leukais)는 성경에서는 빛이 날 만큼 흰 상태나 광채가 나는 상태(마르9,3)를 나타내며, 주로 하느님이나 천사들의 신비스런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마태17,2 ; 묵시1,14)
천사들은 예수님의 승천과 함께 재림에 관한 사실까지 제자들에게 선포했다. 이처럼 루카는 예수님의 사적을 역사적 관점에서 철저히 기록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들되심을 보다 설득력있게 전하기 위하여 천사와 관련된 사건도 매우 자세하게 기록에 남겼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천사들이 제자들을 향해 부른 이 호칭은 그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즉 제자들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망각하면, 갈릴래아의 일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요한 복음 7장 52절을 보면,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날 수 없다고 단정할 정도로 그곳은 영적으로 소외된 지역이고, 보잘것 없는 지방에 불과했다. 천사들은 앞으로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땅끝까지 용감한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별볼일 없는 갈릴래아 촌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복음의 능력자가 될 것인가?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쳐다보며'로 번역된 '엠블레폰테스'(emblepontes)는 현재분사로서 진행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어찌하여 너희는 계속해서 서서 하늘을 향해 쳐다보고만 있느냐?' 이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사라지고 없는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초대 교회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루카가 천사의 말을 소개하고 있는 거이다. 초대 교회 신도들 가운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만 기다리며, 현실적인 이 땅에서의 하느님의 일과 사명을 소홀히 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육체를 입은 몸으로 구름과 함께 영광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듯이 그대로(ho tropon ; 호 트로폰 ; in like manner) 육체를 입은 몸으로 큰 영광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가시적으로 재림하실 것을 가리킨다.
주님 승천 대축일 복음(마태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18ㄴ~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해당하는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pasa eksousia en ourano kai epi tes ges;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에서 '하늘과 땅의'로 번역된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en ourano kai tes ges)는 '하늘 안에 그리고 땅 위에'로 직역되는데,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권한'에 해당하는 '엑수시아'(eksousia)는 신약에서 '권세', '권능', '권리', '힘', '자유함'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보자(중재자)로서의 권한'이 강조된다. 또한 '나는 ~받았다'에 해당하는 '에도테 모이'(edothe moi; was given to me)에서 '에도테'(edothe)는 '주다'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 동사의 직설법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로서 '그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인 것은 성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동사가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받은 권한이 단번에 받은 것임을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화(강생) 이전에도 성자로서 성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셨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자연계와 영계를 제어하는 권한을 나타내보이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권한은 신성(神性)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지니셨던 권한에 비하면 제한적이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상 구속(대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잠시 성부 하느님께 맡겨 드렸던 본래의 권한을 다시 받아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속 사업과 부활 이후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오직 구속 사업을 완수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행사하기로 하셨다(요한5,20~22.30).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그 권한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서 제자들에게 선교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영역인 하느님의 나라는 선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확장되고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희는 가서'로 번역된 '포류텐테스'(poreuthentes; go)는 복수 2인칭 명령 분사이며, '너희'는 직접적으로 승천 직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지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사도1,8참조). 그리고 제자로 삼아야 할 대상은 '모든 민족'이다. 여기서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네'(ethne)는 '에트노스'(ethnos; nations)의 목적격 복수로서 제자를 삼는 대상이다.
또한 '제자로 삼아'에 해당하는 '마테튜사테'(matheteusate; make disciples; teach)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복수 2인칭 명령형 동사이다. 이 동사는 '너희는 가서'에 해당하는 '포류텐테스'(poreuthentes), '세례를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가르쳐'에 해당하는 '디다스콘테스'(didaskontes)의 세 개의 분사에 둘러싸여 있다.
원문의 뜻은 '제자로 삼는 일'이 '가는 것'과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의 궁극적인 핵심을 보여 주는데, '제자로 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이며, 나머지는 이에 수반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baptizing)는 현재 분사인데,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세례가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 세례가 바로 제자로 삼는 수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밥티존테스'(baptizontes)의 기본형인 '밥티조'(baptizo)는 본래 '담그다'는 뜻을 지닌 '밥토'(bapto)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동사가 '세례를 받다'(사도1,5)는 세례 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일 때에는 '담그다'와 '씻다'(루카11,38참조)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가 있다.
먼저 이 동사를 '담그다'는 의미로 볼 때, '세례'는 몸을 물에 담그는 의식을 나타내며, 영적으로 믿는 이들이 세례 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 강조된다(루카12,50; 로마6,3). 또한 이 동사를 '씻다'는 뜻으로 보면, '세례'는 '죄의 씻음', '죄의 용서'라는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사도2,38; 22,16).
실제로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뜻과 더불어 죄사함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한 분이심을 명확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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