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감사제목/마26:17-30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묵상한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설교한 부분 이후부터 저는 말씀을 묵상했는데, 마태복음 22:21절에 보니까,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이 추수감사절과 맞물리면서 가이사에게 감사할 것은 가이사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기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들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또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먼저 이곳 진접 땅에 새로이 개척을 하면서 함께 개척멤버가 되어준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저와 함께 이사를 와서 함께 교회 멤버가 되어주신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삶의 터전을 옮겨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큰 결단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이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이 지역에 사시지만 개척교회를 나와 함께 섬겨주고 계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얼마나 교회가 많습니까? 우리교회보다 좋은 조건의 교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를 섬겨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이 몇 갑절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계속해서 성경을 묵상하는데, 부활에 관하여 사두개인들과 논쟁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내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 땅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제사장들이면서도 영적인 것에 관심 갖기 보다는 세상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과연 부활의 영광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망 중에도 소망을 품을 수 있고, 병들었어도 치유될 것을 믿을 수 있고, 가난해도 부유해질 것을 믿을 수 있고, 일이 잘 안 풀려도 잘 풀릴 날이 있을 것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도 부활의 승리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또 계속 묵상하니까, 큰 계명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선뜻 자신 있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하지도 못하고, 목숨을 다하지도 못하고, 뜻을 다하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자, 저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는 계명대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에 비하면 나를 위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감사의 제목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 추수감사절인데, 어떤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우리는 아마도 이런 저런 제목을 가지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를 알고 나면 우리가 감사제목으로 가지고 나온 것보다 더 큰 감사의 제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처음 믿을 때에 비해 너무나 작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우리 은혜교회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배당을 무상으로 쓰고 있습니다. 임대료도 내지 않고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건물주 권사님, 집사님께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지난 주에 성령부흥회를 했지만, 얼마나 놀라운 은혜들을 받았습니까? 강사님은 그렇게 힘드신데도 한 사람 한 사람 온 힘을 다해 기도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도 강사비도 하나도 받지 않고 가셨습니다. 오히려 자비를 털어 섬기고 가셨습니다. 어떤 강사가 이런 강사가 있겠습니까?
또 우리교회 안에 성령께서 일하시기 시작하는 소식이 들여옵니다. 부흥회 때 은혜를 받고 가신 정안옥 집사님이 계신데, 그 분이 고시원을 운영하십니다. 그런데 그 고시원에 조선족 동포가 살고 있는데, 그분을 전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는데, 그분이 방언을 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정안옥 집사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로 모시고 와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성령께서 정집사님의 마음에 ‘네가 방언을 받게 해줘라’라는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이 방언받기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데, 방언이 터졌답니다. 그래서 그 조선족 동포는 너무 기뻐하면서 고시원에서는 크게 기도를 못하니,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 교회로 갔답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기도회 때도 우리가 기름부음에 대한 성경적 근거들에 대해서 말씀을 찾아보고, 기도사역을 하는데, 성령께서 불과 능력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성령께서 앞으로 더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 제목을 생각할 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이 모든 은혜와 감사제목들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신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중요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오늘 우리는 최후의 만찬이라고 불리는 부분을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우리는 그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기도를 하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35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떡을 주셨습니다. 그 참 떡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십니다. 우리가 왜 성만찬을 합니까? 그분의 몸을 상징하는 빵을 나누어 먹으면서, 이 빵이 우리 안에 들어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처럼, 그분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그분이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분이 하늘로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분이 베풀어주신 기적의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예수님이 안타까워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혜나 선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육신의 병을 고치고자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교회 나오면 장사가 잘 되고, 승진 잘 하고, 세상에서 출세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러한 모든 것은 썩을 양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귀한 것이고, 우리가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적들을 베푸시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비록 병을 못고쳐도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부자가 되지 못해도 천국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땅의 것들뿐이라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물론 이 땅의 삶은 영원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 이 땅에서도 내세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병도 고침 받고, 재정의 기름부음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을 고침 받거나 일이 잘 될 때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송명희 시인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이런 사람이 감사할 것이 뭐 있을까, 이런 사람이 행복할 일이 뭐 있을까를 우리는 흔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놀라운 감사의 사람입니다. 그녀는 "산소 호흡기를 달지 않고도숨을 쉬고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 의사가 실수로 뇌를 잘못 건드려서 뇌성마비가 되었습니다. 일곱 살 때까지는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고, 열 살이 되어서야 숟가락을 겨우 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늘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폐결핵 환자로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와 가족들은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희망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과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7살이 된 그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을 꼭 한 번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왜 이런 몰골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작정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한 달쯤 지났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명희야! 네 몸이 온전했더라면 네가 나를 알았겠느냐?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놀랍게도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녀는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그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수많은 감동의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그녀의 대표작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이 노래를 함께 불러보기 원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여러분, 그녀는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몰골이 이렇게 참혹하고, 내 처지가 처절하다고 당신들이 나를 동정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당신들이 갖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감사제목은 무엇입니까? 환경보다 주님이 감사의 제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성령부흥회 때 성령을 체험하신 분들은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보다 더 감사한 체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만큼 귀한 체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당장 병이 낫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나에게는 영생이 있는 것이며, 장래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또 송명희 시인에게 들려준 하나님의 음성처럼 “네 몸이 온전했더라면 네가 나를 알았겠느냐?”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전혀 무관한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불만스러운 우리의 환경과 처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불만스러운 조건 역시 감사의 조건으로 바뀌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나아가서 전도를 하고 돌아와 기뻐하며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18-20)”
우리가 이런 저런 감사의 조건들이 있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크게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마지막 식사 때에 포도주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다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은혜는 바로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죄사함의 은혜가 모든 은혜의 기초요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은혜는 이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때에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 승리와 기쁨의 잔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잔치를 기대하시면서 이 땅에서의 모든 싸움을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그 마지막 식사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함께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