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리별3 원문보기 글쓴이: 동덕
보현스님 천년바위
유튜브발쵀 글 인터넷에서
음악 보현스님 천년바위
1987년 김혜주 출연 드라마 KBS에서 방영했던 사모곡 주제곡을 보현스님 이경미가 노래를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당시 생계를 위해서 야간업소에서 출연하게 되면서 부터 일이 잘못되게 됩니다.
당시 80년대에는 조폭들이 많았는데 각 세력간의 다툼으로 인해서 협박을 당하게 되는데
어느날 하루 흉기를 든 남자에게 끌려간후 안좋은 일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일을 겪은후 연예계 활동을 할수가 없어서 그만두게 되고
우연한 계기로 인해서 불교에 의자하며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와의 다툼이 잦아졌고 강제로 이경미씨를 정신병원까지 입원 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견딜수 없었던 이경미씨는 탈출을해서 인왕산 절에서 비구니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합니다.
비구니란 불교의 구족계인 348계를 받고 수행하는 여자승려를 말합니다.
이때부터 이경미 보현스님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생활 출가 1년쯤에 어떤 남자가 산에서 쓰려져 있었는데
그 사람을 살려내서 사랑에 빠지게 되어서 다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그 당시 대통령의 만찬에도 초대 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명 정치인 귀빈 접대 행사등 기업총수가 있는 자리에 있는 행사에 초대 받았는데
거기서 1억 스폰 제의를 받으며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됐다고 털어놨습니다.
사랑했던 남자는 사실은 암 선고를 받은 상태였는데
이경미씨와의 추억을 남기고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했습니다.
결국엔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시 출가를 해서 지리산절에서 수행후 지금의 보현스님이되었다고 했습니다.
“저의 재능은 부처님이 주신 커다란 선물, 제 노래와 글과 그림을 통해 많은 장애인들을 돕고 싶어요”
80년대 한창 인기를 누리던 가수 이경미는 갑자기 머리를 깎고 산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인기스타에서 승려가 되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그녀는 말없이 엷은 미소만 짓는다.
그런 그녀가 오는 10월 천안 몽각산에 위치한 부처님마을 법당에서 음악회를 연다.
장애인들을 위한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본명 황옥희( 이경미,보현스님) 이야기
몽각산 기슭에 터잡고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
비오는 토요일 오후, 보현스님을 만나러 가는 충남 천안 21번 국도는 한산하다.
목천 톨게이트에서 몽각산 방향으로 15km를 달리자 ‘부처님마을’이란 입간판이 나왔다.
이곳은 그녀가 포교활동을 하며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는 법당. 시동을 끄고 운동장 오른편으로 걸어가니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부처 석상의 자애로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자 차방에서 불자들과 담소하있는 보현스님이 보인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돌배마냥 잘생긴 두상, 얼핏 보더라도 미인형이다.
담소를 마친 그녀가 그제서야 취재진을 맞는다.
급한 마음에 달려온 불자들이 있으니 이해해달라며 손수 뽕잎차를 끓인다. 차 끓이는 손길이 남자답다.
털털한 목소리에 기운이 넘쳐난다.
고소한 차 향기와 먹내음이 무르익을 무렵 그녀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가 실패처럼 풀린다.
“멀고 먼 촌구석까지 와주셔서 고맙긴 한데 제 사적인 얘기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궁금한지는 모르지만 굳이 지난날의 감회를 말해달라고 한다면
제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것과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다는 거예요.
지금 현재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장애아들을 좀더 편안한 거처에서 돌보는 일이에요.”
차가 끓고 있는 사이 벽을 둘러보니 스님이 직접 그린 달마와 동자승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매서운 눈매에 마른 붓으로 그린 달마의 수염은
그녀의 여장부다운 성격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특히 동자승그림은 천진난만한 표정과 모습들이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특별히 그림을 배우진 않았지만 몇 년 동안 틈틈이 그렸어요.
달마도는 제가 편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한점 한점 그리고 있는데 그림을 원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그냥 드리고 있어요. 제가 가진 재능의 일부를 베풀고 나누는 것이지요.
편지에 자신의 사연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원하면 무료로 그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다기를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 그윽한 향기를 음미하며 사선으로 떨어지는 눈매를 볼 때마다
그녀가 걸어온 시간들이 느껴진다.
“제가 살아온 세월을 어떻게 이 짧은 시간 동안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화려한 조명을 뒤로 한 채 무작정 지리산으로 들어가 3년간 행자생활을 하고 비구니가 되기까지
모두가 부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수도생활을 막 시작할 때 보현(普賢)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고
기꺼이 몸을 바쳐 행하라는 뜻이에요.
이미 저의 운명은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서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요.”
길거리 캐스팅으로 연예계 입문
보현스님의 본명은 황옥희다.
어릴 때부터 깜찍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진 상위 성적을 웃도는 모범생이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던 어느 날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1981년 고등학교 2학년때, 서울 남산에 있는 영화진흥공사쪽으로 친구들과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서 ‘오란 C’ 음료수 CF를 찍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광고를 찍던 사람이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광고모델이 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모델로 발탁됐다.
이후 그녀는 피어리스화장품, 오란 C,유한양행, 좥학생중앙좦 표지모델로 틈틈이 에어로빅 강사생활도 했다.
연예계 활동은 탄탄대로로 이어졌다.
당시 오미희·이계진씨가 진행하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에어로빅을 선보인 일이 있었는데
색소폰 연주가 이봉조씨의 눈에 띄었다.
일사천리로 시작된 가수생활. 이후부터 그녀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KBS 드라마주제가 ‘사모곡’ ‘설마’ ‘혼자 사는 여자’ ‘사랑의 첫 단추’ 등의 노래가 히트했다.
데뷔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KBS 신인가수 후보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인기에 힘입어 오전엔 방송국으로 저녁엔 밤업소를 뛰었다.
눈 코 뜰새 없이 바빴다. 처음엔 신이 났다. 여기저기서 알아보는 사람도 생겨나고 돈도 벌만큼 벌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무기력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돈도 좋지만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는 업소에서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또 짜여진 방송 스케줄에 의해 움직이는 자신이 싫었다.
“방송에 나가 노래하고 저녁엔 밤업소에서 노래하고 또 아침되면 방송준비를 해야 하고,
과연 이런 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번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반복적인 일상에 염증을 느낀 거죠.
쉽게 말씀드리면 본연의 나를 찾고 싶었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삶이 너무 비참했어요.
또 연예계에 대한 실망과 회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언젠간 꼭 이곳을 떠나리라고 생각했던 그녀. 그런 생각은 곧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 아끼던 옷가지며 구두며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100분 쇼’ 생방송을 하던 날 펑크를 내고 잠적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그녀를 찾기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당시 언론은 그녀가 실종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몇날 며칠을 방송 관계자들과 매니저가 그녀를 찾고 있을 때 그녀는 산사에 있었다.
방송을 펑크내고 간 곳이 산 속이었다.
차를 거칠게 몰아 무작정 간 곳은 인왕산의 작은 암자. 그녀는 그곳에서 노스님을 만났다.
당시 노스님은 그녀에게 “훌륭한 일을 할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홀린 사람처럼 그곳에서 노스님의 공양주가 됐어요. 공양이란 말 그대로 밥짓고 빨래하는 일이죠.
그때 난생 처음으로 밥을 했는데 태우지도 않고 잘 지었던 것 같아요. 제가 봐도 놀라웠죠(웃음).”
하지만 오래 머물진 못했다. TV에서 몇 번 그녀를 본 젊은 스님들에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결국 가족들에게 알려지고 만 것이다. 딸의 소식을 들은 그녀의 어머니는 단숨에 암자로 달려왔다.
몇 달 만에 상봉한 모녀. 행자 생활을 하는 딸을 만난 어머니는 아연실색했다.
곱게 키운 자식이 절에 들어가 부엌데기로 일하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 길로 집으로 붙잡혀 갔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가출을 감행했다.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부처님의 부름이었다.
그녀는 다시 인왕산의 큰스님을 찾아가 칩거할 만한 곳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지리산에 있는 칠보사. 어머니에겐 미국에 가서 머리를 식히고 돌아올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큰스님의 소개를 받아 간 곳. 그러나 입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를 대한 은사스님은 “여기 올 곳이 못된다. 당장 나가라! 절은 도피장소가 아니다.
얼굴도 준수하게 생겼으니 절 밖에서도 잘 살 것 아니냐”며 매몰차게 몰아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말에도 기죽지 않았다. “죽어도 여기서 죽을 테니 마음대로 하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지리산에서 시작된 수행생활. 그러나 말이 수행이지 그녀가 처음 시작한 일은 몸으로 때우는(?)
노동일이었다. 고추밭을 한나절 가까이 매고 몇 시간 눈을 붙인 뒤 다시 광목에 풀을 먹이고 세탁도 하고
거친 잔디도 깎았다. 3년간의 행자생활은 말 그대로 몸으로 행한 보시였다.
보현스님은 당시 수행생활이 자신에게 있어 가장 힘들고 고달팠지만 무엇보다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공양 준비하고 예불 드리고 수도 생활하고… 지금 생각하면 눈물날 만큼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일련의 일들이 저를 단련하기 위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너무 세게 훈련을 받은 탓인지 허리병도 나고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졌잖아요. 부처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문학, 그림, 음악에 만능! 올 10월엔 음악회 개최
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는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천안에 오기 전엔 수원 권선구에 위치한 성불원 법당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기거하며 5년 이상 봉사활동을 했다. 그녀에게 있어 ‘포교’란 아이들과 장애인들을 몸소 돌보는 것과 같았다. 이들을 보살피려면 24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염불을 외면 옆에 있던 장애아들이 그대로 따라하는 통에 예불 드리는 일도 쉽지 않았어요. 먹을 것을 주면 던져버리는 일도 많았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장애아들을 돌보면서 제 스스로 깨닫는 점이 많아진다는 거예요. 때를 씻기고 머리 빗겨주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 등 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부처의 마음을 배우게 됐다는 거죠.”
대변 냄새가 된장 냄새처럼 구수하게 느껴질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똥기저귀를 갈아댔을까? 봉사를 하며 눈앞에 보이는 형상뿐만 아니라 내면과 더러움까지도 사랑하고 인내할 줄 아는 혜안이 열린 것이다.
“그렇게 10년 이상 봉사하다 보니 몸이 성한 곳이 없더라고요. 예전엔 팔팔(?) 했는데 이제 다 망가졌나봐요(웃음). 어제도 병원에 들렀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 더 큰 병 나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어디 되야 말이죠.”
그녀는 최근 심사숙고하며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 오는 10월경 부처님 마을에서 장애인들과 주민을 위한 음악회를 여는 일이다. 그녀가 연예계에 복귀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아니다. 몇 년 동안 혼자서 부처님마을을 운영해오다 보니 재정도 많이 부족해져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어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냥 도와달란 건 아니에요. 현재 정부의 보조도 없는 상태인데다가 앞으로 정식 인가와 설립 등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저도 그림, 음반 등 제 작품을 많이 내다 팔 생각이에요. 장애인들에 대한 사랑을 마음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저의 바람이 있다면 음악회에도 많이 와주시고, 장애인들을 위해 작은 정성이라도 후원해주셨으면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의 일일 봉사활동도 환영하구요.”
인기스타에서 승려로 변신한 후 장애인들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살고 있는 보현스님. 봉사활동 외에 그녀가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일까? 기자는 인터뷰 끝머리에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녀의 소망은 소박했다. 자기 주위에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단다.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이 급한 보현스님. 그녀는 오늘도 장애인들을 돕고 헌신할 사람들을 향해 예불을 올린다. 봉사할 사람들의 발길이 부처님마을에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취재를 마치고…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기자는 스님에게 두 가지 결례를 했다고 생각했다. 수도를 하시는 스님에게 속세의 나이를 물어본 일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더욱 부끄러웠다.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부러울 것 없던 한 여성이 승려가 되기까지의 세월을 어떻게 숫자만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다른 하나는 밤이 되면 적적하지 않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보현스님은 난처한 질문에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재치있게 잘 받아넘겼다. 관대함을 베품으로써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 기자가 보현스님에게 배운 작은 깨달음이었다. 혹시 보현스님의 달마 그림을 받고 싶은 사람은 ‘천안시 동면 덕성리 409번지’로 편지를 보내면 된다. 190원짜리 반송 우표를 동봉하면 된다.
글 / 연주흠 기자 사진 / 배동조
첫댓글 공유하고 싶어 퍼 갑니다.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