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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화해 길(화해의 길)
2021.12.7
자동차 운전석과 조수석 유리문이 잘 닫히지않아
시내에 있는 서비스센터에 9시 반쯤 갔는데
오후나 되어야 고칠 수 있다하여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신축화해길 순례를 하기로 했다.
'신축화해 길'은 제주 근현대사의 아픔인 4.3과
신축교안의 역사적인 상처를 담고 있다.
1901년 신축교안 당시 희생자들 중 연고가 없는 이들이 합장된
황사평을 시작으로, 희생자들이 버려진 별도천,
천주교인들이 희생된 관덕정을 거쳐 제주지역 최초의 본당인
중앙 주교좌 성당이 마침이다.
순례길 여정에서 1801년 신유박해 중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제주에 유배된 정난주 마리아가 도착한 화북포구와
4.3으로 사라진 곤을동 마을 등 역사적인 공간을 지나
별도봉과 사라봉의 해안비격을 걸으면서
고통의 역사를 넘어 화해를 모색케 하는 시간을 느끼게 한다.
신축교안 때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을 모신
황사평성지
1910년 신축교안으로 인해 관덕정에서 처형된 뒤,
별도천에 버려졌던 천주교 신자들의 유해가 안장(1904)된 곳.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1984)을 맞아
제주교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황사평 묘역 성역화가 추진되어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정비되는 등 본격적인 묘역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1993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황사평 묘역의 성역화를 재차 추진하여,
제주교안의 희생자 김 토마스와 라크루 신부의 복사
신재순(아우구스티노)의 묘를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고,
이어서 초창기 제주지목구장으로 활동한 헨리(Henry, 1909~1976) 대주교를 비롯한
성골롬반회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제주출신의 저명한 성지로서의 면모가 한층 정비되었다.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끝이 났지만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박해 사건들이 빈발했다.
더욱이 어떤 사건은 공식 박해를 능가할 정도의 대규모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우를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우리에게 ‘교안(敎案)’이라는 단어는 좀 생소하지만,
종교 문제와 관련되어 벌어진 정치적, 외교적, 행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여러 가지 사안을 표현하는 보편적 역사 용어이다.
신축교안이 일어난 1901년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지 15년이 지난 때였고,
가톨릭 선교사가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한지 채 2년이 못 된 때였다.
1899년 5월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이듬해 초 페네 신부가 본토로 전출되고
그 후임으로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했다.
김원영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해
새 본당을 설립하고 전교에 매진했다.
그 결과 교안 발발 직전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교우 241명, 예비신자 620명으로 늘어났다.
신축교안이 벌어진 직후인 1901년 5월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추가로 파견되었다.
이 무렵 제주에는
봉세관(封稅官)이라는 제도에 대한 도민들의 원성이 높아 가고 있었다.
봉세관이란 1900년에 신설된 세제로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민초들로부터 세금을 더욱 악랄하게 거두어들이기 위한 제도였다.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은 해당 지방의 백성들로부터 온갖 잡세를 거두어들여
지방 토착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지방의 토착 관료들과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던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제주 신축교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렇듯 신축교안은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되어
중앙 정부의 가혹한 조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해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저항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 광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의 신자가 피살된 것으로 보았으나
당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제주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라크루(Lacrouts) 신부는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덕정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었다.
1901년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사진에는
교우들을 때려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함께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다.
공장 밀집지역
화북공업단지
1980년대 들어와 제주 지역은 관광산업의 호황에 따라
관광 토산품 제조업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공업 육성과 환경 보호라는 상충되는 목표를 놓고 갈등을 겪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산재해있던 제조업체를 한 곳에 모아
화북공업단지를 조성(1987)하였다.
화북성당
1997년 9월 11일 동문본당을 모본당으로하여 분리 설립되었다.
같은해 `12월 현재의 부지에 천막성당 완공.
2002년 새 성전이 신축되었다.
화북포구
조선시대 제주 제1의 관문.
소설 배비장전의 무대.
주변에 화북진 성담, 김정 목사 기적비, 해신사 등이 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제주에 유배된 정난주 마리아가
천주교인으로서 제주도에 첫 발을 디딘 역사적인 곳이다.
부인 정난주(마리아)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신자 가문인 정약현의 맏딸로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조카고,
천주교 103 성인 중의 한분인 정하상의 누이이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66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정 마리아는 두 살 난 아들을 품고 귀양을 가게 되는데,
추자도에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경한이 죽어서 바다에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부탁한다.
사공들은 추자도에 이르자,
해변 언덕배기에 어린 경한을 내려놓는다.
소를 뜯기던 부인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아기가 있어 집으로 데려와 기르는데,
저고리 동정에 부모와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가 바로 뱃사공 오(吳)씨 였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도 생겨났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이곳에 묻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보이는 바다로 튀어나온 바위가 바로
두 살 아기가 버려져 울던 장소이다.
제주교구에서는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한편 제주도에 도착한 정마리아는
관비라는 쓰라린 유배 생활이 시작된다.
대정 관노로 유배된 그녀는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정마리아는 김 씨 자손들에게
‘한양 유모, 한양 할머니’로 불리며, 점차 자유로운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관비인지라 죽을 때까지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1838년에 선종하여 대정성지에 묻혀 있다.
곤을동 별도천
제주 4.3 당시 초토화되어 터만 남아있는 바닷가 마을입니다.
제주의 수많은 피해를 입은 마을중에 유독 이곳 곤을동이 주목받는 이유는
해변가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제주 4.3 당시 강경진압작전은 주로 무장대와 활동이 맞닿아 있던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바다를 낀 마을 자체가 없어진 곳은 이 마을이 유일합니다.
설촌 700년의 역사를 간직했던 곤을동은 안곤을(22가호), 가운뎃곤을(17가호),
밧곤을(28가호)로 구성된 바닷가 마을로
'곤을'이라는 지명은 '물이 항시 고여 있는 땅'을 뜻합니다.
마을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밭농사와 바닷일을 생업으로 평화롭게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밭농산은 주로 보리, 조, 콩, 팥, 메밀, 고구마를 경작했고,
화북 마을 중에서는 유일하게 멸치를 후렸으며, 테우를 이용해
자리, 갈치와 오징어 등을 주로 낚았다고 합니다.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간 비극은 시작됐고
1월 4일 갑자기 군인 40여 명이 곤을동에 들이닥쳐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며 초가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사람 10여 명을 곤을동 앞바다에 세워놓고 총살시키며 나머지 어린아이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은 줄을 묶어 인근 화북초등학교(당시 지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안곤을과 가운뎃곤을은 모두 불길에 휩싸이게 됩니다.
다음날 5일 밧곤을도 역시 모두 불타고 주민 10여 명을 총살하고
화북초등학교에 수용됐던 일부 주민마저 인근에 연대가 있던
바닷가 '모살불'에서 모두 처참하게 학살되었습니다.
그렇게 곤을동은 이틀 사이에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당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음력 12월 6일경 무장대들은 군인 차량이 지나갈 수 없게 돌을 쌓은 뒤
토벌대와 교전을 벌이게 되고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들이 많이 죽게 됩니다.
그 중 살아남은 군인이 곤을동 방면으로 도망가는 무장대 한 명을 목격하였습니다.
무장대에 대한 보복으로 곤을동을 폭도 마을이라 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무차별 학살을 하게 된 것 입니다
.게다가 이 마을이 지형상 화북에서 떨어져 있는 데다가
무장대가 은거할 수 있는 조건마저 갖추었다는 이유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것입니다.
별도봉
영주십경 중 사봉낙조로 유명한 사라봉 동쪽에 위치한 해발 136m의 오름.
해안 산책로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별도봉(別刀峯, 禾北峰)은 화산 쇄설성(碎屑性) 퇴적암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생화산으로 화북1동의 동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정상봉에서 북쪽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절벽으로
속칭 '자살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으며,
벼랑 밑 해안단에는 '고래굴'과 '애기업은돌(負兒石)'이라 불리는 기암이 있다.
별도봉은 해발 136m의 낮은 산이지만 해안 절벽을 끼고 조성해 놓은
총 1.8km의 제주시 최고의 산책로로 평가받을 정도의
경관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장수산책로(長壽散策路)'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높은 봉우리와 제주항 및 마을전경, 드넓은 푸른바다 등
아름다운 해안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연인끼리 혹은 가족끼리
산책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사라봉
사라는 비단을 펼쳐 놓았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지는 해가 제주 앞 바다 수면 위에 비추면서
바다 물결이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이 장관을 연출하여 이르는 말이다.
얼마나 그 모습이 아름다웠으면 사라라는 말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사봉낙조(沙峰落照)를 영주십경(瀛州十景) 중 제2경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파란 바다
남쪽으로는 웅장한 한라산을 볼 수 있고,
발아래로 제주 시내의 모습이 보이며,
일몰뿐 아니라 막힘없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경도 아름답다.
제주오름 사라봉은 제주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오름으로,
서울에 남산, 부산에 용두산이 있다면, 제주에는 사라봉이 있다 할 정도로,
연중 제주도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오름이다
모충사(慕忠祠)와 김만덕 기념관
1977년 제주도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세운 사당이다.
조선 후기 흉년으로 도탄에 빠진 제주도민을 구휼한 의인 김만덕과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열사들의 충성스런 마음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모충사'라고 이름하였다.
김만덕의 옛무덤 옆에 있던 묵은 비석, 동자석, 망주석,상석등 의 석물,
추사 김정희가 유배왔다가 김만덕의 이야기를 듣고 써주었다는
'은광연세'라는 글씨를 새긴 석각, 김만덕기념관 등을 만날 수 있다.
은광연세!(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이 글은 1840년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가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김만덕의 양손 김종주에게 전한 것이다.
1960년경 김만덕의 묘소 위치에 공장시설이 들어서자
1977년 1월 3일 모충사로 이묘한 것이다.
김만덕 기념관
기녀 출신의 김만덕은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기녀에서 거상으로 다시 자선사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김만덕을 기리는 기념관이 2015년에 개관하였다.
극심한 흉년에 전 재산을 내 놓아 백성들을 구한
자선사업가 김만덕의 봉사 정신과 나눔의 삶을 되새겨 본다.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조 때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사재를 털어 구휼한 것으로 유명해진
거상 김만덕은 중개상인의 딸로 태어났는데,
열 살 무렵 고아가 되었고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기생집에 의탁되어 기녀가 되었으나, 철이 들면서 당시 기녀가
천시 받는 계층임을 깨닫고 제주 목사에게 탄원하여 양인으로 환원되었다.
김만덕은 그녀의 이름, 만덕처럼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양인이 된 김만덕은 상업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그는 자기가 잘 되는 것은 모두 하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
래서 풍년에는 흉년을 대비해 절약하며 살았고,
편안할 때는 궁핍함에 고생하는 이웃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며,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었다.
남성 중심의 사회이며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여성과 기녀 그리고 지방의 섬이라는 한계를 이겨내고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다.
산지천(山地川)
산지천(山地川)은 제주시 건입동과 일도1동을 흐르는 하천이다.
제주 시내 번화가를 통과한다
산지천은 삼의악과 관음사 인근에서 발원 산지포구까지 10여 Km에 이르며
상류구간은 전형적인 제주하천의 형태인 건천이나
하류에 이르러 가라쿳물, 산지물, 지장샘 등의 용출수가 풍부하여
식수로도 사용되었으며 멱을 감거나 빨래를 하는 등 이 지역 주민에게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였지만 잦은 홍수로 냇물이 범람하여
많은 피해를 안겨준 하천이기도 하였다.
칠성로
제주 상권의 원조
제주 상권의 원조지로 제주의 명동이라 불리던 곳
예부터 '칠성단'이 있다하여 칠성골로 불렸다.
관덕정 앞에서 시작, 산지천 광제교까지 이어지는 거리는 패션거리(사진)
제주 지방 통치의 중심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제주목관아는 조선시대 제주 지방 통치의 중심지로서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관아시설이다.
동헌과 내아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제주목관아지로 밝혀진 중요한 유적이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화공畫工 김남길金南吉의 손을 빌려
재임 기간 중에 있었던 중요한 순간들을 그린 화첩이다.
제주의 풍경, 지리, 국방, 풍속 등 300여 년 전 제주 사회의 생생한 모습이 담겨 있어
그간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우련당과 연못
이 우련당 앞에 연못이 하나있는데
1526년 이수동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안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하여 연꽃을 심은뒤
그곳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 목사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는데 제주사람들이 남을 미워할 때 빗대어 말하는
"양대수 개구리미워 하듯 한다"라는 제주의 속담이 유래되었다 한다.
'배비장전'은 배비장과 애랑의 사랑얘기를 옮긴 판소리로써
당시의 제주 기생 애랑은 인물이 여러 모로 빼어난데비해,
배비장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金卿)을 따라온 평범한 인물로서
애랑이의 미모에 반해 구애를 하는 배비장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이때의 배비장은 아마도 이곳 제주목관아 우련당에서 만나 사랑하지는 안했을까?
낭쉐
나무로 만들 소로 탐라국입춘굿의 상징물이라고 합니다.
과거 탐라국 시대부터 입춘을 맞이하면 나무로 만든 소의 쟁기를 잡고
밭갈이하는 의례를 통해서 한해의 풍년과 도민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유래합니다.
이것을 춘경, 또는 입춘춘경이라고 합니다.
망경루
북두성에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을 기리는 신지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 명종 11년에 김수문 목사가 창건한 뒤 1668년 이인 목사가 개건하였고
1806년 박종주 목사가 중수하였다.
관덕정은 본래 조선 초 세종 때 목사 신숙청이
군사들의 연무장에 세운 정자였고 관덕정 편액은 안평대군의 필치이다.
신축교안 당시 이곳에서 수많은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
향사당
신성여학교터
향사당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처음에는 '留鄕所(유향소)'로서의 기능을 하였으나, 성종6년(1475)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는 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鄕射堂)'이라 개칭하였다.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鄕中의 여러 일들을 의논하고 鄕射讀法을 하며,
鄕案을 보관하고 三鄕任(좌수·좌별감·우별감)이 상시 근무하던 청사이다.
이곳에서 고을의 한량(閑良)들이 춘추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주향(酒饗)을 베풀며
그 동안의 닦은 기량을 겨루고,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였다.
1909년 프랑스 출신의 구마슬(具瑪瑟, 라크루 (Lacrouts, Marcel) 신부가
이곳에 4년제 초등과정 학교인 '제주사립신성여학교'를 세웠다.
초대 교장은 김아나다시아 수녀였으며 교사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초빙한 한국인 수녀 2명이었다.
여학교를 세웠다 하더라도 천주교 선교사들의 여성 교육관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교육의 범위를 기초 교육의 범주에 제한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국문·한문·산술·역사·지리 등의 과목을 제시하면서도
당시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생업에 유용한 청소, 세탁, 유아 교육법,
비단 짜는 일 등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10년 5월 제주 읍내에 약 40명의 학생을 모아 개교하였는데
당시 일본인 여학교의 개교로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확보하였던 인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본인 여학교 학생은 25명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강평국(姜平國)을 들 수 있다.
강평국(초명 姜年國)은 이 학교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서울의 경기여고로 진학하여 그 명석함을 떨쳤으며 이름을 평국(平國)이라 고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었다.
1회 졸업생 5명 중에는 강평국 외에 최정숙(崔貞淑)과 고수선(高守善)도
이 학교에서 꿈 많은 소녀시대를 보냈고 모두 서울로 진학하였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아 있다.
제주의 근대를 이끈 여걸 3인방을 배출한 신성여학교의 존재는
제주여성사에 깊이 각인될 것이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는 비록 서울로 진학은 못했을지라도
제주사회와 가정에서 여성교육의 성과와 중요성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선교사들의 활동에도 제한을 받으면서
라크르 신부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사(校舍)를 넘겨 줄 것을 명령받았다.
이에 따라 제1회 졸업생만을 배출한 신성 여학교는 1916년 7월 15일 폐교되고 말았다.
이 때까지 1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성여학교를 폐쇄한 뒤 일본은 이 건물을 본원사라 하여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유골안치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주교좌성당
중앙성당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페네 배신부이다.
조선 대목구장 뮈텔(G. Mutel)주교가 부임(1898)하여 제주도 본당 설립이 추진되었고
이듬해 제주본당이 설립되었다. 2000년 7월 2일
'천주교 제주선교 100년 및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
과거 제주시민들이 가장 발길이 잦았던 곳 중의 하나로,
옛 신성여자중. 고등학교가 자리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