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와 더불어 삼성을 일군 윤종용
▲ 윤종용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윤종용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한국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인물이다. 그는 1966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1997년 삼성전자 총괄 대표이사 사장, 2000년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이후 삼성전자를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삼성도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기까지 윤 위원장은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이코노미조선>은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윤 위원장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가 보는 한국 경제위기의 해법은 무엇인지. 윤 위원장은 위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위기는 잘 될 때에 싹트기 시작합니다. 방심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돼 미래 대비에 소홀해지기 때문이죠. 반면 어려울 때는 모든 조직원이 긴장하고 위기를 탈출하려고 노력합니다. 잘 될 때가 더 위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위기는 항상 반복되고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최근 한국 사회는 ‘안일주의’에 빠져 있다. 도전정신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윤 위원장은 “현재 우리 사회는 무기력증에 빠졌다”며 “저성장의 늪에 빠졌고 일자리가 제대로 창출되지 않아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로 “최근 30년 동안 민주화에만 초점을 맞춰 경제성장 동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초기 30년 성장론’을 역설했다. 한국경제가 이제부터 새로운 30년을 써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력은 혁신이다. “급변하는 현 사회에서는 환경변화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돌연변이적인 진화, 혁신 없이는 성장·발전하지 못합니다.”
윤종용(尹鍾龍). 과거 삼성전자의 초고속성장을 이끈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CEO(최고경영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재는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을 맡고 있다. 취재진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4일, 5일, 11일 세 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에 위치한 윤 위원장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어린 시절 성장 밑거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CEO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겪은 수많은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물었다. 나아가 한국경제 위기의 해법을 윤 위원장의 삶에서 찾아봤다.
꼼꼼했다. 윤 위원장의 첫 인상은 그랬다. “먼저 질의서를 보내주면 인터뷰를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가 박용선에게 한 말이다. “인터뷰를 꽤 많이 했어요. 그런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쌍방이 고달픕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못할 때가 제일 아쉽더군요. 기사 쓰는 사람도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을 정리한 후 인터뷰를 하는 편입니다.”
비서실에서 질의서를 만들어줄 거라는 박용선의 생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보통 CEO 또는 고위관료 인터뷰는 비서실 또는 홍보팀에서 질의서를 작성한다. 이후 인터뷰 대상자는 확인하고 수정·보충한다. 윤 위원장은 달랐다. 그가 보낸 질의서 답변을 봐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인터뷰 하루 전인 8월4일 윤 위원장이 “차 한 잔 하자”며 박용선을 불렀다. “질의서 답변은 잘 봤죠?” 그가 물었다. “네. 잘 봤습니다.” 박용선이 답했다. 윤 위원장은 “내일(5일) 인터뷰 방향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싶어 인터뷰 전에 만나자고 했다”고 말했다.
전 삼성전자 부회장, 전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회장, 전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한국공학교육인증원 이사장,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윤 위원장의 경력이다. 화려하다. 하지만 그에게선 권위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소탈했다. “박 기자~ 시원한 음료수 한 잔하면서 천천히 얘기해 보자고. 초면인데 어떻게 한 번 보고 기사를 쓰겠어요.”
8월5일 인터뷰는 편집장이 진행했다. 내가 물었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시죠? 시골 소년이 어떻게 세계적인 경영자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테이블에 놓인 안경을 쓰며 윤 위원장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릴 때부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면 끝장을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안 했어요.
사실 백부께 한학(漢學)을 배운 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백부께서는 평생 공부만 하셨는데, 집안에 젊은 사람들이 있으면 집으로 데려다가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 등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쳤습니다. 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2~3년 동안 매일같이 새벽에 백부께 찾아가 배웠습니다.”
윤종용의 인생철학 '격물치지'
성장 밑거름은 호기심과 책임감
그는 “어린 나이에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그렇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백부께서 전날 배운 것을 다음 날 외우도록 하고, 뜻까지 설명하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뜻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놀면서도 배운 것을 계속해서 되새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면서 ‘책임감’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학문의 기초를 만들어 주신 백부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성장 밑거름은 ‘호기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면 항상 궁금해 했습니다. 직접 만져보고 체험하지 못하면 참질 못했어요.” 그러면서 어렸을 때 별명이 ‘5마력 발동기’가 된 에피소드를 설명했다.
“동네에 큰 정미소가 있었습니다. 발동기도 엄청 컸습니다. 발동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람 힘을 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어린 나이에 신기했나 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정미소에 가서 발동기를 관찰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 발동기를 사달라고 했는데 돈을 주셨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발동기를 사기에는 적은 돈이었습니다. 바로 정미소로 달려가 ‘발동기를 사려고 한다’고 하자 주인이 웃으며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동네에서 ‘5마력 발동기’라고 불렸습니다.”
동네 사람들 눈에는 우스워 보였을 수도 있지만 ‘꼬마 윤종용’은 진지했다. 사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대다수가 호기심이 강했다.
호기심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의 집무실 한쪽 벽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쓴 휘호가 걸려 있다. 어렸을 때 호기심에서 시작해 ‘본질을 꿰뚫어 보고 지식을 얻으려고(격물치지)’ 노력한 윤 위원장의 인생철학이 단번에 느껴졌다.
삼성에 입사한 후에도 ‘사회 초년생 윤종용’의 호기심과 책임감은 빛났다. 일을 맡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책임감도 강해 일을 마무리하기 전까지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능력을 인정받았다. “사실 입사 동기와 비교해 승진이 그리 빠르지 않았습니다. 중하 정도였어요.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 초년생에게 “어떤 일이든 맡겨지면 최선을 다하고 도전하라”며 “그러면 능력을 키우게 될 것이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에 취업한 이들에게 “기죽지 말고 능력을 키우는 데 힘쓰라”고 강조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구멍가게에서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삼성전자도 30여명 직원으로 시작했어요. 중소기업에 입사해 여러분이 그 회사를 대기업으로 키우면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중소기업이 일하는 환경은 어렵지만 대기업보다 다방면의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하세요.”
그는 취업을 준비하는 청소년에게는 “스펙(Spec)보다는 실질적인 능력 계발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했다. “스펙은 무시하세요. 스펙은 기계나 제품에 붙여지는 기능과 성능의 표시입니다. 인간에게는 본인도 알 수 없는 스펙을 넘어서는 무한한 잠재적 능력이 있습니다. 이 잠재적인 능력을 개발하도록 노력하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의 통사(通史)뿐만 아니라 산업사, 과학사, 경제사, 문화사 등 다방면의 역사책을 많이 읽어 시야를 넓히고 선견력과 통찰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는 “입사 초기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 공장 건설현장에서 일한 것도 값진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한국비료 공장을 건설하고 시운전을 하는 2년 동안 공장 기본구조는 물론 시스템, 운영 방법을 배웠습니다. 신입사원일 때였지만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업종은 달라졌지만 그 때 배운 것이 CEO로서 삼성전자를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롯데 분쟁은 있을 수 없는 일…믿음과 신뢰의 문제
▲ 1. 2007년 10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2007 남북정상회담’ 경제분야 간담회에 참석한 윤종용 위원장(오른쪽 두 번째).
2. 1970년대 삼성전자의 흑백TV 생산라인.
문제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
윤 위원장에게 기업 경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기업 경영이란 자원을 (경영)프로세스에 투입,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판매해 이익을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위원장은 “특히 ‘사람’과 ‘생산 현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일의 성패는 사람에 의해 결정됩니다. 경영의 성공과 실패도 경영을 책임지는 관리자와 구성원에 의해 좌우됩니다. 때문에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경영 자원을 보강하는 것입니다. 또 생산·판매·서비스 등 기업의 모든 일은 사무실과 책상 위가 아닌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문제도, 답도 현장의 현물과 현상에 존재합니다.”
그는 ‘스피드’도 강조했다.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모든 경영 프로세스와 의사결정에는 스피드가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재 조금이라도 스피드가 떨어지고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느 기업이건 바로 경쟁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스피드는 단순히 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 방향 즉, 목표를 지닌 ‘벡터(vector)’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도중 집무실 TV에서 롯데가(家) 경영권 분쟁 뉴스가 흘러 나왔다. 그는 보통 TV(뉴스)를 켜 놓는다. 세상 변화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다. 신문 스크랩도 매일 하고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롯데 경영권 분쟁 사태를 어떻게 보시나요?” 내가 물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 1922년생인데, 현 상황이 닥치기 전에 정리를 깔끔하게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믿음과 신뢰를 강조했다. “이번 롯데 사태는 믿음과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롯데뿐 아니라 다른 기업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 믿음과 신뢰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믿음과 신뢰는 사회를 구성하고 성장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기업과 조직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신뢰가 없으면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게 윤 위원장의 생각이다.
윤 위원장은 이건희 회장과 함께 삼성전자를 이끈 인물로 꼽힌다. 윤 위원장은 1966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1997년 삼성전자 총괄 대표이사 사장, 2000년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이후 삼성전자를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삼성전자 CEO만 12년이다. 그동안 그가 겪은 위기만 해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그는 우선 위기를 정의했다. “위기는 잘 될 때에 싹트기 시작합니다. 방심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돼 미래 대비에 소홀해지기 때문이죠. 반면 어려울 때는 모든 조직원이 긴장하고 위기를 탈출하려고 노력합니다. 잘 될 때가 더 위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위기는 항상 반복되고,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혁신이란 돌연변이적인 진화
윤 위원장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했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할 게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위기는 혁신과 밀접하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현 상황이 위기이고,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이다. “환경이 변화할 때,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보면, 종(생물)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합니다. 지구상에서 살아남은 생물은 강한 자가 아니라 환경변화에 순응한 자입니다. 더 큰 종으로 진화하려면 돌연변이적인 진화를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는 또 “과거 농경 및 산업화 시대에는 환경변화에 따라가면 생존이 가능했지만 지금같이 급변하는 환경에서는 환경변화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퇴보의 길을 가는 것”이라며 “돌연변이적인 진화와 혁신 없이는 성장발전이 없다”고 말했다.
밀려났을 때, 역사 공부하러 다닌 윤종용
▲ 윤종용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그가 삼성에서 겪은 첫 번째 위기는 ‘기술력 부족’이었다. 1970년대 당시 삼성은 반도체, 컴퓨터, VTR 등을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직접 챙길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윤 위원장은 TV 설계를 맡았다. 삼성전자는 당시 TV 설계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흑백 TV 설계 연수를 위해 일본 산요전기를 방문했다. 1971년이었다. 2년 후에는 미쓰비시전기에 가서 컬러 TV 설계 연수를 받았다.
당시 일본은 성숙된 산업시대에 들어간 선진국이었다. 도쿄(東京)올림픽도 개최했고, 시속 250㎞를 자랑하는 세계 최초의 고속전철 신칸센(新幹線)도 달리고 있었다. 한국은 농경사회를 벗어나 산업사회로 진입하려고 박정희 정권이 발버둥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 일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고 말했다. “연구실, 설계실, 생산현장에서 만난 엔지니어의 기술력과 관리방법은 제 상상력을 초월했습니다. 저도 서울대 공대를 나와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한탄스러웠습니다.”
일본 기업의 기술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선 언어가 문제였다. 일본에 가기 전 6개월 동안 아침에 1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했지만 현지에 가보니 의사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의사소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본 사람들이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온갖 현장을 따라다니며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고 배웠다. 관련 기술 서적, 보고서도 엄청 읽었다. 일본 엔지니어와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업무가 끝난 후 술도 같이 많이 마셨다.
사실 기업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문제다. 윤 위원장은 삼성전자 CEO 때나 지금이나 늘 ‘기술’을 강조한다. “역사는 도구 발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기업도 기술 개발 없이는 성장·발전할 수 없습니다. 기술을 등한시하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죠. 또 기술 개발과 응용은 사람밖에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최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그는 “국내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비용은 국가 전체로 보면 선진국 기업보다 절대금액은 적으나 국내총생산(GDP) 비율로는 최상위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연구개발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연구개발 체제나 평가 방법이 효율적이지 못하고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술 개발은 실패를 반복하면서 성공하는 것”이라며 “끊임없는 도전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삼성 밖에서 삼성을 보다
그의 두 번째 위기는 필립스행(行)이었다. 당시 그가 이끌고 있던 VTR 사업부는 매우 어려웠다. 그는 여러가지 이유로 삼성을 그만두고 1986년 네덜란드 필립스 본사에서 1년을 보냈다.
그는 “필립스로 가면서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꼈고 심적으로 힘들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기회로 전환했다. 그는 “필립스에서의 생활은 삼성 밖에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말을 이었다. “필립스 본사를 모두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계적인 서양기업의 경영 방식을 습득할 수 있었으니 엄청난 경험이었죠. 또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제가 좋아하는 유럽 유적지를 다니며 역사 공부를 했습니다.” 위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세상에는 과거 실수나 실패를 운운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는 국면 전환이 빨랐고 담담했다. 그는 “과거 선택한 일을 후회하면 돌이킬 수 있냐”며 “과거는 빨리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뛰어난 누군가가 있으면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그 장점을 배우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CEO로서 성공한 비결이 아닐까
일본으로 또 밀려난 윤종용, 전화위복으로 삼아
그는 1995년 말 삼성 일본본사 사장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것도 위기이자 기회였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으로 향할 때 회사의 주류에서 멀어진다는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동경지점장 때보다는 더 넓게 일본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의 1년 역시 제 인생에 있어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1996년 한국으로 돌아와 삼성전자를 총괄 지휘했다.
최근 한국 사회를 위기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안일주의’에 빠져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윤 위원장은 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현재 우리 사회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습니다. 저성장에 빠져 있고, 일자리가 제대로 창출되지 않아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를 잘 못 느낍니다. 왜일까요? 민주화로 인해 경제성장 동력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우리는 5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성장을 주도했던 세대가 이제는 없습니다. 굶주리며 밤 낮 구분 없이 일했던 분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세대가 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정신과 문화는 유지돼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과거 고생은 모르고 부(富)를 누리는 사람들만 넘쳐납니다. 또 민주화를 외치던 세대가 사회 주축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경제성장이 아무런 노력 없이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민주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며 “민주화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최근 30년 동안 민주화에만 초점을 맞춰 경제성장 동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잃어버린 30년’을 보낸 것이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초기 30년 성장론’을 역설했다. “나라든 기업이든 설립 후 초기 30년이 중요합니다. 뿌리를 잘 다지며 성장동력을 만들어 놓으면 수백 년 유지되는 것입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기업으로 얘기해 보죠. 창업주가 회사를 설립한 후 30년 동안 잘 다져 놓으면 그 기업은 대기업이 됩니다. 구멍가게나 중소기업에서 시작해 대기업이 되고, 이후 혁신을 하면서 성장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한국경제가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30년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민주화로 인해 경제성장 동력 약화
윤 위원장은 “사회지배구조 개혁, 즉 정치·노동·교육·국민의식 등을 개혁해 경제성장의 밑거름을 다져야 한다”며 “그래야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규제는 과감히 풀고 노동문제 역시 개혁해야 한다”며 “기업은 국내 1등이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세계 시장을 무대로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집단 2세, 3세에게도 한마디 했다. “재계가 2세, 3세 시대로 들어왔습니다. 2세, 3세들은 선대 설립자의 철학과 일하는 방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를 높이 평가한다.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은 순간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이 대단합니다. 오너의 판단과 월급쟁이의 판단은 다릅니다. 오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실패했을 때 모든 것을 잃는 것이죠. 반면 월급쟁이는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런 판단을 거듭하며 기업을 일군 게 두 창업주입니다.”
윤 위원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멘토로 알려졌다. 그는 “삼성전자 부회장 시절 국내 회의를 하거나 해외 출장을 갈 때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다녔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현장 경험을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룹 기획실에서 제품 개발, 구매, 생산, 판매 등 모든 경영 프로세스를 읽을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왔다.
현재 이건희 회장은 와병 중이다. 윤 위원장에게 삼성 측에서 찾아와 조언을 구하냐고 물었다. 그는 “현직을 떠난 후 이재용 부회장과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며 “그룹 계열사 사장들과는 만나고 있지만 삼성 내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윤종용이 말하는 이건희
▲ 윤종용 위원장과 이재용(오른쪽 두 번째) 삼성전자 부회장이 2007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 2007’에서 이재용(빨간 넥타이를 맨 사람)씨와 함께 삼성전자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그는 삼성을 어떻게 바라볼까. “현재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 임직원들은 저와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몇 년을 일한 후배입니다. 잘하네, 못하네 하는 것은 제가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삼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있습니다. 기업의 실적은 상대적인 부분이 존재합니다. 시장 속에서 다른 기업과 경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절대적으로만 바라봅니다. 상대적이란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너무 숫자에 매몰돼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는 8월11일로 이어졌다. 윤 위원장은 ‘까칠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삼성이라는 큰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 카리스마는 필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해다”라며 설명했다. “사실 저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까다로워집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일할 때가 많은데 그들은 아직 일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훈련이 안 돼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다소 날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는 삼성 시절 권한위임형 CEO로 통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임과 권한을 확실히 부여하고 독자적인 책임 하에 운영되는 수평형 프로세스 조직은 의사결정이 빠르고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는 “조직은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이양하고 자율적인 관리와 경영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부 관리자는 현장 실무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자율성을 부여할 때 창의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기도 했다. 윤 위원장은 “이건희 회장은 큰 숲을 중시했다”며 “작은 솔방울은 잘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은 오너-전문경영인 체제로 성공한 기업이다. 삼성의 대표 전문경영인이 바로 윤 위원장이다.
그에게 오너-전문경영인 체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謨攻)편의 승리로 가는 길을 보면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가 조종,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오너-전문경영인 체제가 이와 같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되, 그렇지 못하더라도 맡겼으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하 간에 믿음과 신뢰만 있다면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기업을 보면, 오너가 소소한 일까지 간섭하고 결제해 경영자가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너의 지시에만 따르는 수동적인 경영만을 합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다
윤 위원장은 “역사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는 역사를 통해 예측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상에 놓인 미래, 현재의 원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 미래가 있습니다. 사계절을 보세요.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상상하고 꿈을 꾸면서 만들어지는 미래가 있습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대 천재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하늘을 나는 꿈을 꿨습니다. 이후 약 400년이 지난 뒤 인간은 하늘을 날게 됐습니다. 역사는 수천년 동안 인간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지식과 지혜의 보고(寶庫)입니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합니다.”
그는 특히 “기업을 경영하려면 산업사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롭게 등장하는 산업은 기존 산업이 발전하면서 축적한 자본과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기업의 흥망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기업을 경영하는 CEO가 이런 현상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는 농경·산업·디지털 사회를 모두 겪은 인물이다. 그는 농경사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다녔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산업화 초기 시대를 보고 배웠고 삼성전자 CEO가 되면서 디지털 시대를 리드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4년 <초일류로 가는 생각>을 출간했다. 이 책은 대항해 시대, 산업화 시대,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설명하고, 기업 경영은 무엇인지, 그리고 개인·기업·국가가 어떻게 ‘초일류’로 가는지에 대한 윤 위원장의 생각을 담고 있다. “초일류? 별거 없습니다. 통찰력과 선견력을 가지고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혁신에 도전하는 것이죠. 말은 쉽지만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