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위를 너무도 단순한 시각으로, 교육권에 대한 십 대의 저항이라 평가 내리는 것에 대해서
한 번은 지적을 하고 싶어서 여러 번 원고를 손본 후 글을 하나 쓴다.
우선 우리는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질문해봐야 한다.
“마지막 왕의 목을 마지막 사제의 창자로 조르기 전까지 인류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가 남긴 이 과격한 아포리즘은, 왕권과 교권을 단두대에
올리고 세속주의인 라이시테를 국시로 삼은 현대 프랑스 공화국의 탄생 설화였다.
그러나 2026년 오늘, 사제의 창자 대신 똘레랑스라는 위선적인 도그마로 스스로의 목을 조른
프랑스는 자신이 길러낸 괴물들에게 물어 뜯기며 거대한 국가적 자살의 제단 위에 올라서 있다.
이번 프랑스 시위의 표면에는 교사가 부족하고 쥐가 나오는 낡은 학교를 고쳐달라는 학생들의 교육권
요구가 내걸려 있다. 물론 학습 의욕조차 없는 아이들 뒤에서 시위를 조직하고 불길을 키운 것은
혼란을 숙주로 삼는 극좌 세력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미 프랑스의 공교육은 평등이라는 미명 아래 대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의 합격률을 90%
이상으로 퍼주며 하향 평준화된 지 오래고, 진짜 엘리트들은 그랑제콜이라는 그들만의 성채로
숨어들었다.
그렇다면 빈민가의 공립학교들에서는 왜 건물이 썩어가고 교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
시계추를 2015년 풍자신문사 샤를리 에브도 총격 테러와 2020년 사뮈엘 파티 교사 참수 사건으로
되돌려보면 그 야만적인 인과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표현의 자유를 가르치기 위해 무슬림 학생들을 배려해 교실 밖으로 잠시 나가 있게 한 뒤 만평을
보여주었던 역사 교사 사뮈엘 파티.
정작 그 수업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한 무슬림 여학생이 자신의 상습 지각과 정학 처분을 감추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은 테러리스트의 칼날이 되어 백주대낮에 교사의 목을 베어냈다
동료 학생들은 고작 300유로를 받고 스승의 인상착의를 살인자에게 팔아넘겼다.
국가의 이성이 살아있다면 마땅히 공화국의 이름으로 가혹한 단죄가 내려졌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법원은 스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여학생과 공범 학생들에게 집행유예라는 솜방망이를
안겨주었다.
국가가 교사의 생명도 지켜주지 않고, 목이 잘려 나간 스승을 위해 복수해 주지도 않는데 대체
어느 제정신인 교사가 무슬림 밀집 지역으로 부임하려 하겠는가. 교권과 법치를 스스로 포기한
국가의 비겁함이 공교육의 붕괴를 불렀고, 가해자의 후예들은 이제 교사를 내놓으라며 도시를
불태우고 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살아가는 작은누님과의 잦은 통화를 통해들은 현지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프랑스가 마주한 모순의 뿌리는 이미 구조적 불치병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부족한 저임금 노동을 메우기 위해 과거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모로코에서 대거 인력을 빨아들였다. 주머니가 두둑할 때나 가능한 파리지앵들의 위선적인 배려
뒤에서, 이민 1세대들은 차별을 견디며 묵묵히 공장을 돌렸다.
비극은 2세대와 3세대에서 폭발했다. 프랑스 주류 사회의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가로막히고,
모국으로 돌아가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경계인들이 도시 외곽의 임대주택 단지인 방리유에
침전물처럼 고이기 시작했다.
거주자의 70%가 무슬림으로 채워진 이 고립된 섬에서, 청년들이 기댈 곳은 모로코산 해시시
마약 카르텔과 이슬람 원리주의뿐이었다. 종교를 혐오해 공적 영역에서 종교 색채를 지우려 한
프랑스의 세속주의는 이들에게 종교 탄압으로 읽혔고, 동화에 실패한 분노는 반국가적 폭동이라는
배설구로 터져 나왔다.
이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은 노동의 가치를 경멸하는 프랑스 특유의 뒤틀린 시민성과 산업의
공동화다. 가혹한 규제와 치솟는 인건비, 주 35시간 근무와 연 두 달의 휴가, 두 시간짜리
점심시간이 상징하는 나태함 속에서 제조업은 일찍이 자취를 감추었다.
머리 묶는 고무줄 하나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해 비싼 값에 사 써야 하는 나라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솟아날 리 만무하다.
세금을 내는 공장은 사라졌는데, 일하기 싫어하는 시민들과 끊임없이 밀려드는 난민들이 나눠
먹어야 할 복지 파이는 줄어들었다.
결국 국가는 기존 대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주던 주거보조금인 알로카시옹을 깎아 난민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자신의 몫을 빼앗긴 시민들의 분노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민자들의 약탈 본능이
거리에서 충돌하고 있다.
왕의 목을 치던 대혁명의 폭력성을 시민의 권리로 착각하면서도, 내면으로는 나폴레옹 황제 시절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보나파르티즘의 정신분열이 일하기 싫은 군중의 합법적 일탈과 결합해 프랑스를
영원한 폭동의 늪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노동 없는 복지, 동화 없는 다문화, 처벌 없는 관용이라는 좌파적 신화가 얼마나 끔찍한 지옥도를
그려내는지 프랑스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교권을 짓밟고, 기업의 팔다리를 묶어 제조업을
추방하며, 상호주의조차 없이 외세에 빗장을 열어젖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과연 파리의 저 잿더미로
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프랑스가 프랑스 했다는 냉소 너머로, 우리의 미래는 과연 프랑스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 박주현 작가 2026-10-21
-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