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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교회
출 25: 1-22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이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이 의미가 있고, 여러분의 생활을 복되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교회생활을 무거운 짐이나 부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여러분들과 만나고 교제하는 가운데 그 힘과 능력과 위로를 경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실재로 그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면 교회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 여러분의 생활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여러분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이며 선택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교회생활은 항상 뒤로 밀쳐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교회생활은 우리의 생명선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약시대의 교회의 의미를 그대로 함축하고 또한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막을 통하여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본문을 선택한 것은 지금 우리 교회 QT교재인 「복 있는 사람」의 본문이 출애굽기의 두 번째 주제인 성막과 제사를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할 때 우리와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교회생활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성막의 의미
성막을 짓는 일과 관련된 중요한 기사는 출애굽기 25-4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The Tabernacle or Sanctuary)을 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문맥구조에서 볼 때 성막을 짓게 한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막을 짓게 한 일이 출애굽기 19-24장에서 시내산 언약을 맺은 이후에 그 언약에 약속된 대로 보석같이 귀한 존재(ࠄठࡱ॔)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경험하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 여러 차례 반복하여 말씀드린 바가 있는데, 성막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교제하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상입니다.
(1)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
하나님은 성막 건축에 대하여 출애굽기 25-31장에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과 언약관계 속에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성막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임재(the presence of God)의 장소이지만, 언약백성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교제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8에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성소를 가리켜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할 성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은 "그들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라. 그러면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막의 핵심적인 사상 가운데 첫 번째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소에 임재하셔서 어떻게 자기 백성과 만나시고 교제하실까요? 하나님이 법궤를 만드시게 하시고, 제사장을 세우시고, 제자제도를 통하여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 출애굽기 25:22에 보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시는 장소는 법궤 뚜껑 위에 있는 속죄소 사이에서 만나시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교제하시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막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40:33-35을 보십시오. "그가 또 성막과 단 사면 뜰에 포장을 치고 뜰문의 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필하였더라.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이것은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거기에서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성막을 가리켜 다른 이름으로 회막이라고 부른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회막'(ࠃॡࢫࠍ ࠌࡓ, the tent of meeting)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래서 옮기면 '만남의 장막'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만나 교제한다고 하는 사상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막과 관련된 하나님의 임재는 타락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남자와 여자가 함께 경험하며 즐겼던 친밀한 교제가 부분적으로 회복된 것입니다(창3:3).
(2) 하나님의 통치
성막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가운데 속죄소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인 모양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5:17-21을 보십시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속죄소 위에 두 그룹, 곧 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양을 볼 때 성경에서 생각나는 장면이 없습니까?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늘보좌의 모습을 보여주신 바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늘보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이 이사야 6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하늘보좌에 천사들이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또 두 날개는 날며, 또 두 날개는 발을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하늘보좌 주위에 천사들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법궤 위에 있는 속죄소 위에 있는 그룹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수종들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는 천사들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반게메렌은 성막을 가리켜 "성막은 하나님의 지상 '궁전'의 심볼로서, 그 분의 하늘 궁전의 축도모델이다"(The Tabernacle was a symbol of his earthly 'palace,' a miniature model of his heavenly 'palace')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막이 보여주는 두 번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는데, 성막은 하나님의 통치사상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장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막의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구약시대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자기 백성과 만나시고 교제하시며, 동시에 그의 무한한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든지 성막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 그의 은혜를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성막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진을 칠 때나 이동할 때 항상 백성들 가운데 두게 하였습니다.
2. 성막과 그리스도
그러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며 그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성막이 오늘날에도 중요할까요?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성막은 솔로몬 시대까지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었습니다만 이 성전도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 완전히 무너졌고, 그 후에 스룹바벨이 지었지만 또 무너졌고, 또한 그 후에 헤롯에 의해 지어져 예수님 당시에 있었지만 이 역시 로마의 침공으로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막이나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구약시대에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교제하시던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만나시며 교제하실까요?
구약시대의 성막과 성전이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경에서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성전에 들어가셔서 당시에 부패한 성전을 책망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21-22)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막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요 자기 백성과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모든 의미가 성취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의 사건이 기록된 마가복음 15:37-38에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 사건을 기록한 마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의미를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사건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나 제사장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롭게 어떤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바로 구약의 성전이 의미하는 바대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교제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성막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의 통치를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더 이상 성막이나 성전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에서 예표요 그림자로 보여주시던 것에 대한 실체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약시대에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의 고린도전서 3:16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6:16에서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한 지역에 제한하여 말씀하시고 교제하시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임재하시며 교제하시며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한 장소와 시간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제는 시공간에 제약이 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그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받은 은혜입니다.
3. 성막과 교회
그러면 구약시대의 성막과 교회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약의 성전의 의미를 성취하고 난 후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며 교제하고, 주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교회공동체들이 형성되어 조직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이 조직 교회들이 오늘날의 지역 교회입니다.
그러면 이 지역교회, 여러분이 섬기는 한샘교회에도 구약시대에 성막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교제하시고 그의 무한한 능력으로 통치권을 행사하실까요? 이 점은 예수님께서 지역교회에도 구약시대에 성막에서와 동일하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교제하시고 그의 통치권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교회 가운데 하나님이 구약시대와 동일하게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죄는 신자로서 신분과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범하는 것을 본 한 성도가 그렇게 하지 말도록 권하였습니다. 만약에 그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권하여도 듣지 않을 경우에 교회에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를 치리하여 교회에서 내어쫓으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오늘날 이러한 방식으로 치리하면 "이 교회가 없으면 다닐 교회가 없나 주변에 크고 화려한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갈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때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19-20을 보십시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계시며 여전히 그 통치권을 행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교회는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며 그의 통치를 시행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구약시대에 임재하시고 교제하셨던 것처럼 동일하게 임재하신다면 오늘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면서 그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일이 아닐까요? 교회의 모임이 세상의 모임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어떤 요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르게 만들까요?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여서 하나님과 만나 그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임은 일반 세상사람들의 모임과 비슷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다는 믿음으로 참여할 때 온 세상의 창조자요 전능하시며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독특하고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도하고, 때로는 오랜 질병으로 고통받았던 자들이 치료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고통스럽게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성막이나 신약에서 교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에 대하여 아주 의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20:24을 함께 봅시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 곧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곳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여 복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무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은혜를 누릴 수가 있을까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죄를 지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방법인 제물을 드리고 제사장의 중보적인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친히 자신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은혜의 보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나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인데 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고, 은사에 따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때로는 금식하고 때로는 밤을 새면서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하다면 시간을 드리거나 몸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있을 때 기꺼이 헌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간다는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은혜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만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입니다.
그랜트 시걸이 지은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라는 책에 이 부분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적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와 타임지의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한 저자가 "록펠러 회장님, 지금까지 회장님은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부자로 살고 계시는데, 그렇게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에 록펠러는 "나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 신앙유산을 받은 것이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고 하면서 그 세 가지 신앙유산을 설명하였습니다. 첫 번째의 신앙유산은 십일조 생활이고, 두 번째로는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야 목사님의 설교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세 번째 신앙유산은 교회를 다닐 때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제발 자기 생각과 계산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마십시오.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성경의 교훈을 실천하여 경험적으로 배운 것들을 순종해 보십시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어린아이들은 무엇이든 듣는 대로 믿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믿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잘 속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잘 속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진리를 의심하지 말고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18:17). 이 방법이 남들이 생각할 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발생할 때 지성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논리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언제든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은 신비한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구약의 성막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셨습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교제하시고, 그의 통치를 시행하시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교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지역교회 역시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교제하시며 그의 통치를 시행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의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없고, 교회의 봉사에 참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며 교회에 활동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 내가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이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꼭 보기를 바랍니다.
비전과 성취
출 25: 1-22
세계적인 신앙 잡지「Pulpit을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은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 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등 공간이 늘 모자라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이 많아 일꾼이 부족하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일이 없기에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얼굴의 사람이 많아 이름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 있는 교회는 드리는 자(giver)로 가득 차 있고,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tipper)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으로 운영되지만 죽어 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에 의해 운행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지만 죽어 가는 교회는 지내기가 편안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활발하게 전도하는 사도행전 적인 움직임이 있지만 죽어 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 석화 되어 간다.
어떻습니까? 공감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덕일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분명 살아 있는 교회, 비전이 있는 교회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사람을 세우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세워주신 목적은 사람을 얻고 그를 양육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서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양육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가지 않으면 교회는 병들고, 힘을 잃고,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어버립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복음으로 섬길 때 교회는 희망이 있고 안식이 있고,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교회가 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 교회는 친밀감이 깊어졌고 서로를 책임지고 돌보려는 마음이 강한 교회였습니다
.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 교회는 배타적인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매우 이기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회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처음부터 교회 밖의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갖고 성령의 명령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소아시아와 유럽이 복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덕일의 가족 여러분!
우리 교회가 세상을 복음으로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영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저절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급속도로 악화되고, 세속화되고, 물질화되고, 개인화되고, 비인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켜야 되는 교회들이 점점 그 세상에 포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힘을 잃고, 생명력을 잃고, 비전과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겉모습은 교회이나 내용을 보면 전혀 교회가 아닌 무슨 사교클럽이나 동아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포로가 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몇 가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령한 예배를 통해서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뛰어난 전술 중에 하나는 성도로 하여금 계속해서 예배 없는 사역을 하게 하고, 예배 없이 성경공부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없이 중요한 일만 하다보면 은혜가 다 떨어져 버립니다. 사랑과 덕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믿음도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적인 생각만 남습니다. 불평하게 되고 계산하게 되고 따지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예배 가운데 임재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을 결박해주십니다. 그래서 예배는 모든 질고와 가난과 어둠의 영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축복된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밖의 영혼들에 대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신앙의 불필요한 악세사리들이 다 떨어집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사치스러움이 없습니다. 내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내가 가진 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가 분명합니다. 그분들은 고민할 사치스런 시간이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분명한 삶의 명제 때문에 단순하면서 가치 있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도로 들끓는 교회는 분쟁이 없습니다.
셋째는 풍성한 양육과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단번에 받습니다. 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양육과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들을 보면 우연히 금메달을 얻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훈련에 훈련을 반복한 결과로 얻어졌다는 것입니다. 네비게이토를 창시한 도슨 도로트슨이라는 분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되는 것이다. "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를 양육하는데 3년이 걸렸고,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같은 제자를 양육하여 그를 목사로 세우는데 어쩌면 평생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덕일의 가족들이 믿음과 인격이 자라기 위해서 권면을 드린다면 양육을 받는 사람이 되든지, 양육을 하는 사람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덕일 교회는 어떤 양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교회의 양육의 시스템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순이라는 작은 공동체와 교회 학교 안에 작은 순을 통해서 관계중심으로 양육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말씀을 배웁니다. 거기에서 말씀을 적용합니다. 거기에서 적용한 말씀을 나눕니다. 상호 돌보고 기도합니다. 서로를 세워주고 담당해줍니다
. 거기에서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고자하는 긍휼의 사역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성령께서 그 공동체에게 동일하게 주신 비전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고 함께 대가를 지불합니다. 내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나눔을 통해서 다른 지체들에게도 전달이 됨으로 모든 순원들이 함께 예수님을 경험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 안에는 성경학교도 있고, 여전도회도 있습니다. 제직회 산하 여러 부서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조직과 부서들은 교회의 핵심이고 본질인 순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순으로 하여금 더 풍성한 나눔과 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순을 통한 사도행전적 번식과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순이 건강하고 부흥하고 번식하면 순이 또 다른 순을 낳습니다. 순이 자꾸 순을 낳으면 교회는 저절로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을 통한 부흥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피터 와그너라는 유명한 교회성장학자는 " 목표가 없으면 회개도 없다 " 고 하였습니다. 목표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교회의 목표와 비전이 없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 교회는 한 교회도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 목적이 이끌어가는 교회 ' 라는 목회철학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해서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주님 오실 때까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사람을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올해 안에 이루어야 할 가시적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목표가 있어야 하고, 순 공동체별로도 부흥에 대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를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는 이런 명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 헨리 포드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 만일 헨리가 말이 끌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사륜차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자동차는 훨씬 늦게 발명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분이 일년에 정말 한 가정을 온전히 전도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보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사랑의 대가를 지불해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그 목표는 달성됩니다. 여러분의 순이 일년에 한 순을 분순 할 목표를 정하고 전략을 세우고,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전략을 실천하고 점검해보십시오. 반드시 분 순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저에게 주신 올해 교회의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는 올해 안에 20개의 순이 30개의 순으로 번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300명 출석교회에서 400명 출석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10개 이상의 기능 순들이 삶의 현장 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직장 속에서, 지역 속에서, 학교 안에서 중고등학생들과 청년들, 어른들이 내가 처한 그 현장에서 말씀을 나누고 그 지역과 직장과 학교 그리고 가정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영적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30명의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고,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고 꿈이고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여러분의 절대적인 협력과 기도와 동역이 있다면 저는 이 비전들이 충분히 성취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우리 교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차 공간이 있는 땅과 교육하고 양육하고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새로운 성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 참 부흥하는 남가주 사랑의 교회의 오정현 목사님이 쓴 " 열정의 비전 메이커 " 라는 책 속에 그분이 체험한 교회부흥의 원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 교회가 얼마나 사랑의 공동체 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섬기고 축복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갖고 함께 책임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님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병실에는 꽃다발이 즐비하다면 그 교회는 공동체성이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교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양육되어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성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가름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동체성을 지향하고,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을 해도 세 번째로 교회의 재생산성이 없으면 교회는 그 선에서 정지되고, 정체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3년 전에 그 책을 읽고 너무 그 말씀에 공감을 했습니다. ' 아 그렇구나. 그렇지 어쩌면 이 말씀은 우리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지 몰라. ' 그 때부터 제가 기도하여 온 것은 교회의 장막터와 공간이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바로 재생산성의 확보였습니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순 예배를 위해서 공을 들여도 교회의 재생산성이 있어야 우리의 공동체성은 더욱더 깊어지고, 성도들은 안심하고 양육과 훈련을 받고, 더 나아가 교회가 이 지역을 섬기고, 지 전주지역의 영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필요는 여러분 모두가 공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4년 전에 주신 성전의 비전을 놓고 기도해 왔고, 준비해 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땅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우리 교회보고 땅을 사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우리의 것이 되고 그 위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그 땅을 믿음으로 차지하는 거룩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꿈을 주십니다. 비전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비전의 성취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과 거룩한 대가를 지불함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후에 그들과 언약을 약속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섬기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나는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친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만나고 교제하고자하는 그 언약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막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 그들 중에 거할 성소라고 하였습니다. 또 22절에 보시면
"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
성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그의 백성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시험이 들고,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고, 신용을 잃고, 존귀함과 거룩함을 잃습니까? 해답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이 여러분을 붙들어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악이 성치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편에서 우리의 그늘이 되셔서 낮의 해를 막아주시고, 밤의 달이 상치 못하게 하십니다. 원수 앞에서도 상을 받게 하시고, 죄악도 이기게 하시고, 악한 영도 이기게 하시고, 절망도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아니 그것을 재앙으로 여기십시오. 언제 추락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증해 주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하나님이 보증하는 것만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진정한 축복의 의미를 알았기에 광야 생활이 어려운데도 성막을 건립하는데 신나는 마음으로 총력을 기울여서 자원하는 헌신을 하면서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전의 비전을 주신 하나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도 여전히 광야길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지치고 피곤합니다. 어느 하루 사건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현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광야 한 복판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우리를 만나주시려고, 또 우리에게 하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고, 신령한 능력을 주시려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성막을 짓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은혜를 받고, 어디에서 하늘의 복을 받고, 어디에서 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계신 이 곳입니다.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예배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며,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성전을 짓도록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랑하고 양육하여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여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 되게 하시려고 성전에 대한 비전을 주셨으며, 세상을 섬기고, 열방과 족속을 구원하는 교회 되게 하시려고 성전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성취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비전을 성취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꿈을 주십니다. 비전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비전을 성취해야 하는 것은 그의 백성들의 순종과 사랑과 땀과 눈물의 고귀한 대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성막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성막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통해서 그 성막을 만들라고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내는 예물을 가지고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 오라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 찌니라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만나는 그들의 노력 없이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소를 만들 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재료를 준비함에 있어서 첫째는 하나님이 정한 예물을 드려야 했고, 드리되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예물을 가지고 나오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한 번들어 보십시오.
"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하나님께 드릴 재료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재료뿐만 아니라 크기와 위치와 역할까지도 하나님은 하나에서 끝까지 계시하여 주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장소인 성막을 짓는 중요한 원칙이 있음을 봅니다.
첫째는 우리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재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막을 짓는데 거기에 사람의 욕심이나 자기 중심적인 의견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에서 끝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설계도에 의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재료들로만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을 지어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비전과 갈망을 순종하는 재물이 되어야 합니다.
땅을 사고, 건축을 할 때 그 때 성령이 가장 크게 역사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땅을 사고 건축을 할 때 교회가 두 배로 부흥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땅을 사고 건축을 할 때 성령이 역사 하는 만큼 사단이 가장 역사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은 교회의 부흥과 축복을 가져올 수 도 있고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커다란 모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건축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축복이 되고, 부흥이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산을 접고 오직 주님의 재물이 되어 드려지는 것입니다. 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라면 무조건 접어두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아중심의 생각이라면 접어두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도록 명한 때는 그들이 호외 호식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여유 있는 삶을 살 때가 아니었습니다. 거친 광야에서 고독하고, 목마르고, 힘들어 할 때였습니다. 왜 성전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고, 축복을 누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인 절대적인 선교명령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현실에 포로가 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돈을 생각하고 계산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돈이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마음이요, 믿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면 그 다음에 몸을 드릴 수 있습니다. 몸을 드려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리빙스턴이 어렸을 때 주일 학교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헌금시간이 돌아왔는데 그는 드릴 헌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쟁반이 자기에게 돌아올 때 리빙스턴은 그 헌금 쟁반 위에 앉아 버렸습니다. '나는 지금 드릴 돈은 없지만 내 몸을 다 재물로 드리겠다' 는 헌신의 표시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바쳐서 선교했던 위대한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을 보면서, 돈을 보면서 자꾸 계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전 건축에 대한 거룩한 부담과 비전을 주셨으면 그것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재물이 되어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몸으로 헌신하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백화점 계의 거성 J . C. Penny라는 사람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소유물을 소유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나를 소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씀하십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드려지는 재물이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성전은 건축되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원하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되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면 그것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억지로 드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 안 냈다가는 큰일나지? 또는 체면으로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출35 : 5절을 보시면 "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 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너희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드리라 ' 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음에 원하는' 이란 표현 속에서 하나님은 자원함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계시한 이 축복의 성전을 지을 때 실재로 그들은 광야가운데서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고, 분에 넘치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출36 : 5-7절을 보시면 "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모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
무슨 말입니까? 건축헌금을 했는데 성도들이 너무 많이 해 가지고 " 여러분 제발 그만하세요. 이제 되었어요 " 하고 말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일이 있을까요?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드릴 때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제발 그만 하세요. 라고 말 할 수 있는 수준 그것이 자원하는 마음의 역사입니다.
천안의 호도과자 할머니 심복순 권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도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만은 이 분은 65년 전에 호도과자를 개발하여 85세가 되는 지금까지도 이 빵을 구워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쓰신 책 하나가 참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 제목이 『나는 다윗 왕보다 행복합니다』라는 책입니다. 내용의 핵심은,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건축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는데, 자기는 이런 조그만 풀 빵 장사를 하면서도 주님의 성전을 일곱 개나 지었기 때문이라는 멋진 간증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건축할 때는 언제나 충만한 감동과 흥분된 마음으로 신나게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우리보고 만들라니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이며, 영광스런 축복인가! 하면서 그들은 흥분과 감격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여 주님에게 드림은 우리 인생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특혜요, 최고로 값진 일입니다. 다윗 왕은 역대상 22장과 29장을 보시면 자기 생전에 성전 건축을 완공하지 못하는 줄 알면서도, 자재를 준비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좋아서 기쁘고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역역히 보여줍니다
성전 건축의 비전을 함께 이루어갑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마치 광야 길처럼 힘들고 어려 워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성전 건축의 비전을 기쁘게 이루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차장이 있는 교회, 대문이 있는 교회, 교육관과 식당이 있어서 지역사회의 주부들과 노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 수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주일 내내 교회 안에서 영적인 훈련을 하고 배울 수 있는 교회, 아름다운 공간 속에서 성경학교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축복함으로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하는 교회, 청춘 남녀들이 결혼시즌이 되면 앞다투어 덕일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기를 소원하는 교회, 우리의 삶의 현장을 구체적으로 변화 시켜나가는 사도 행전적 교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안식을 줄 수 있는 교회, 전주시내에 800개의 교회중의 하나가 아니라 정말 사도행전의 교회, 안디옥 교회와 같은 모델이 되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예수가 소문난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작지만 주님이 기뻐하고 인정하는 교회, 수많은 사역자들을 기르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하는 교회, 이 교회를 통해서 지역이 복을 받고 각 성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복을 받고 자자손손 믿음을 계승 할 수 있는 교회에 대한 꿈을 그리며 믿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재물이 되어서 비전을 이루고 약속한 축복들을 경험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막의 명칭
(출 25:8-9)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오늘은 성막의 명칭입니다. 명칭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에서 이름은 곧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 그러면 곧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어떤 명칭으로 불렀는지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데, 오늘은 거기에 담긴 의미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막의 명칭은 장막입니다.
출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여기 장막이란 성경에 130회 이상 나오는데 ‘오텔’이라 하여 텐트를 의미합니다. 이 명칭은 일반적인 건축 양식에 따라 부른 것으로, 짐승의 가죽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기 거하겠으니 장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귀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고 고후5:1에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그랬듯이 우리 육신이 곧 장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3:16-17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만이 아나라, 몸도 성전입니다. 우리 몸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기쁨과 아울러 우리 몸에도 능력과 은사가 나타납니다. 우리 몸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놀라운 비밀입니다.
2. 성막입니다.
출26:30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 성경에서 “성막”이라는 용어로 약 100회가 나오는데, 원어로 성막이 ‘미쉬칸’인데 거처라는 뜻입니다. 성막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모두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재료 역시 물질적인 것이고 성도들이 헌물하고 헌금하여 드린 것이지만, 드려지는 순간 거룩해졌습니다.
율법에 하나님의 제단에 드린 것은 모두 거룩해졌습니다. 심지어 민16:38에 반역하는 고라당이 드린 향로마저 거룩하게 되어 버리지 못하고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거룩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롬 6:19에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했고, 22절에도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 은사와 능력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죄에서 해방되고 은혜로 넘치고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드린 만큼 변화됩니다. 드린 만큼 누립니다. 그러므로 늘 예배하고 늘 기도하세요. 주를 위해서 사세요. 성도가 거룩한 것은 피로 사셨을 뿐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3. 회막입니다.
출29:43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회막이라 한 것은 이스라엘 12지파가 성막을 중심으로 모였고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생활도 예배도 회개도 재판도 제사도 회막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중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막을 떠나면 우리를 떠난 양과 같습니다.
이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셨듯, 교회생활의 예표입니다. 교회생활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길입니다. 지상 교회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곳입니다. 교회가 필요 없다는 무교회주의는 자멸할 주의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예배가 사라지고, 예배가 사라지면, 목사도 사라지고 성도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집니다.
교회는 복음전파와 성도의 교통 외에도 천국의 훈련소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교회에서의 예배는 천국에서도 계속됩니다. 천국이 천국인 것은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배운 경배의 생활을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천국이 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교회 멀리하지 마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과 겹치지 않아야 합니다.
4. 증거막입니다.
민1:53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왜 증거막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기록해 주신 십계명의 돌비가 있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고 음성이 있었고 임재하심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성령의 증거입니다. 고후13:5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했듯, 예수 안에서 사는지는 성령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5. 성소라고 했습니다.
출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성소란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셨는데, 성막이 그런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줄 알고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회개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6. 법막입니다.
대하24:6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법막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 돌비가 법궤에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성령의 법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타. 하나님의 집(삿18:31), 여호와의 집(삼상1:7), 세상에 속한 성소(히9:1), 하나님의 처소(행7:46), 등으로 불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성막이시고,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셨으니 우리 또한 하나님을 모신 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 맞게 경건함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잘 모셔서 가장 복 있는 우리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