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이란 무엇인가?
夫衆生心之爲心地는 離相離性이어서 如海如空이니라.
如空之故로 無相不融이니 何有東西之處인가.
如海之故로 無性是守이니 豈無動靜之時인가.
爾乃或因染業하여 隨五濁而長流하고 或承淨緣하여 絶四流而永寂하니라.
若斯動靜은 皆是大夢이라서 以覺望之하면 無流無寂이니라.
穢土淨國은 本來一心이요 生死涅槃도 終無二際이니라. <아미타경소>
중생의 마음
그 바탕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
허공과 같기 때문에 모양이라 하여도 통하지 않은 데가 없으니
어찌 동쪽이다 서쪽이다 할 곳이 있겠는가!
바다와 같기 때문에 성품이라 하여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없으니
어찌 움직이고 고요할 때가 없겠는가!
그리하여 때로는
번뇌의 업으로 인하여 오탁을 따라 오랫동안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청정한 연에 힘입어서 사류(四流)를 끊고 영원히 고요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과 고요함도 모두 커다란 꿈과 같아서
깨달음으로 바라보면 흐름도 없고 고요함도 없을 것이다.
예토와 정토는 본래 일심이요
생사와 열반도 궁극에는 둘이 아니다.
고뇌하는 중생의 마음
그 근본 바탕은 본래 허공처럼 크고 바다와 같이 깊고도 맑다.
허공과 같아서 일정한 크기와 모양이 없으니
사방으로 끝없는 곳에서 어찌 가리킬 방향이 있겠는가?
바다와 같이 평등하게 맑아서 특정한 성질이 없는데
어찌 더럽다 깨끗하다 할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바다와 같이
본성이 평등하여 일정한 성품이 없지만 맑고 부드럽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더렵혀지기도 하고 깨끗해지기도 하며
번뇌의 업풍에 의하여 움직이기도 한다.
이러한 때문에
겁탁, 견탁, 번뇌탁, 중생탁, 명탁 다섯의 혼탁한 물결을 따라
오랫동안 흐르며 고통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청정한 수행문을 만나
욕계에서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받아드리는 오경에 대한 번뇌(욕루)
색계와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유무에 대한 번뇌(유루)
삼계에서 공통으로 일어나는 무명번뇌(무명루)
삼계에서 공통으로 일어나는 삿된 견해와 미혹(견루)인
사류(四流)의 번뇌를 끊고 영원히 고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깨닫고 나면
업풍으로 인한 요동과 번뇌를 끊은 고요함도
모두 꿈처럼 실체가 없음을 알것이다.
우리는 본래 나가 없는 줄을 모르는 까닭에
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원한 생명을 구한다.
결국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으로 인하여
예토와 정토가 벌어진 것이니
만약 깨달음을 성취하면
온갖 상대적 개념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리고
일체 경계가 한마음인 세계가 눈 앞에 전개될 것이다.
원효는 《기신론소》 에서
성취해야 할 법이 왜 일심(一心)인가를 이렇게 밝혔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승의 법에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만 무명(無明)이
자신의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키고 육도(六道)에 유전한다.
그러나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짓기 때문에
널리 제도하려는 원을 일으킬 수 있다.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 큰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이유에 대해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거짓과 참됨의 두 문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일(一)’ 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의 실체이나, 허공과 같지 않아서
본성이 스스로 신령(神靈)하게 이해(理解)하기 때문에
‘심(心)’ 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일체 경계가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일심을 깨달아야
주객이 한몸인 줄 알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일심을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 세웠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뜻은 진여가 일체법의 본질이지만
분별심이 없고 신령한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을 중심으로 말하기 때문에
일심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이다.
《무량수경종요》 에서는
일심(一心)은 번뇌에 물든 중생심이 아니라
중생심의 본체임을 이해하도록 중생심의 본성(衆生心性)이라고 하였다.
《아미타경소》 에서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중생심의 바탕 됨(衆生心之爲心地)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 라고 하였다.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신해(信解)하여 ‘연기즉공(緣起卽空)’ 을 통찰함으로써
일체 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이다.
일심(一心)은 대승의 유일한 법(法)이며
여래의 마음이고
중생심의 본성이다.
무아의 생명이며
나의 생명이고
우주적 생명이다.
일심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일체의 경계를 포함한다.
자신의 마음은 보는 마음이고
일체경계는 보이는 마음이다.
곧 일체 경계는 자신의 마음이 나타낸 모습이다.
일심의 경지에서는 색(色)과 심(心)이 둘이 아니고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상대적 개념도 사라져 버린다.
원효는 ‘일체 경계는 일심’ 이라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한다(仰信)고 하였다.
‘우러러 믿어야 한다’ 는 것은 곧 종교적 신념이다.
원효에게는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 하여도 그것은 일심의 다른 이름이며
정토 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염원해야 할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 깨달아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는 한 문이었다.
이치가 이러한 때문에
허망한 번뇌를 여의고 꿈에서 깨어나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 경계는 일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일심의 근원에 있는 사람이 불보(佛寶)이다.
일심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法寶)이다.
일심으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승보(僧寶)이다.
일심은 곧 삼보이다.
어떤 경전, 어떤 수행문도 궁극에는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
뭇 생명을 이익되게 하도록 인도하는 가르침이라고 믿으면 틀림없다.
이제 모든 경전을 공부하면서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을 염두에 두고
믿음과 이해를 깊이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다 함께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
부처님의 자비광명과 일체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正牧 큰스님 유마경 강의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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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다 함께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 부처님의 자비광명과 일체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감사합니다 일심으로 염불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일심의 바다를 향하여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우리모두 아미타불의 자비광명에 의지하여 일심을 증득 합시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