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1] 김기영 (金基榮) - 나의 삶을 돌아보며 3. 아버지에 대한 기억 1 친할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이며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많이 드리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하여 자수성가한 자신의 모습을 못 보여 드린 것과 효도를 못해 드린 것을 늘 가슴 아파하셨다.
2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너희들의 근본은 뭐냐. 조상을 모르는 것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평생 동안 머리맡에 할머니 사진을 걸어놓으시고 우리들에게도 절을 하도록 시키셨다.
3 절을 할 때마다 “할머니가 안 계시면 아버지가 어떻게 있고 너희가 어떻게 있느냐. 근본에 대해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절을 해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4 평소에는 과묵하여 말씀이 없으시지만 약주를 하면 취중에는 가족들의 이러저러한 지난 이야기들을 하곤 하셨다. 그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며 늘 눈물을 보이셨다.
5 아버지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셨지만 한글을 홀로 터득하셨고 한문도 배달 일을 할 때 주소 성명을 보고 익혔으며 주산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터득하셨다.
6 대학 출신인 영업사원 직원들이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는 참 신기하다. 주산 놓는 방식은 참 이상한데 답은 우리들보다 정확하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7 충무로의 우리 집은 연립주택처럼 지붕이 연결되어 있는 일본식 가옥(낭아야) 골목의 제일 앞집이었고, 반장집이었다. 우리 집에만 전화와 자전거 등이 있었으며 일본 사람들도 전화를 빌려 쓰러 오곤 했다.
8 8·15해방 후에는 일본 사람들이 다 쫓겨 간 빈집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들어와 살았다.(동회에 신고하면 자기 집에 되었음) 유일한 서울 사람인 우리 집은 계속 반장집이 되어 서로 도우며 지내게 되었다.
9 파출소 소장들도 새로 부임해 올 때마다 조선흑판제작소 사장이며 동네 유지인 우리 아버지께 인사하러 왔다. 아버지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계셨지만 늘 정직과 신뢰를 강조하셨으며 딸인 내가 생각해도 참 멋진 분이셨다. 10 나는 생모와 안팎으로 너무 닮아서 아버지는 “자기하고 똑 닮은 거 하나 놓고 갔다.”라고 가족들에게 가끔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각별한 것 같았다.
11 고등학교 상급 학년이었을 때는 일제 우데나 구리무(당시 매우 귀했던 영양크림)를 가지고 오셔서 넌지시 나에게 주시며 “거래처 사장 사모님을 만났는데 내가 딸 자랑을 했더니 그 사모님이 고등학교 여학생이면 크림 하나 정도는 써야 한다고 하며 자기가 우데나 구리무를 구하려 한다고 하길래 나도 하나 사다 달라고 했다.”라고 말씀하셨다.
12 대학교 입학하던 해의 내 생일날에는 늦게 귀가하는 나를 대문 앞에서 기다리시다가 생일 선물로 샀다며 당시에도 귀했던 일제 시티즌 손목시계를 손목에 채워 주시기도 했다. |